폰틴의 이야기를 들은 세루리안의 동공은 갈 곳을 잃고 떨리고 있었다.
'아틀리케의 4 마법사...?
악신 아카네의 첫번째 창....?
그렇다는건 이 사람 설마....'
"폰틴....."
세루리안에 떨리는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세루리안의 눈에서 아까 전의 자신만만함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세루리안을 호위하던 하얀 갑옷의 병사들은 이제 모두다 검게 물들어 세루리안에게 그 날카로운 검을 겨누고 있었다.
"작별 선물이다. 파랑의 마법사여"
폰틴의 말이 떨어지자 검게 물든 세루리안의 병사들의 투구에서 무언가가 뽑혀져 나왔다.
세루리안이 박아넣었던 푸른 구슬들,
거기에 더해 부적같은게 붙어 있는 작은 구슬이 하나씩 더 검은 그림자에 뽑혀져 나왔다.
"드디어...."
폰틴과 세루리안의 목소리 이외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방의 때가 온것 같군요."
세루리안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검을 빼들고 있던 갑옷의 병사가 투구의 뚜껑을 열며 말했다.
투구의 안쪽에 있던 사람의 얼굴이 세루리안의 눈에 들어왔다.
"세루리안... 당신을 믿었었는데...."
"널 저주한다. 세루리안. "
한 명 한 명 차례로 투구의 뚜껑을 올리며 참아 왔던 말을 꺼내놓는 갑옷의 병사들
이들은 그레이스와 마찬가지로 세루리안을 믿고 세루리안을 따라왔던 NPC들이었다.
그리고 그 믿음의 결과는 죽지도 살지도 못한 이 갑옷에 묶여 세루리안의 명령만을 따라야 하는 인형신세였다.
"자 선택해라 미천한 마법사여.
나한테 죽을지. 니놈이 만든 이 가련한 자들에게 죽을지"
검은 병사들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폰틴이 말했다.
"웃기지 마..."
공중에 떠 있는 커다란 구슬 위에 있던 세루리안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아틀리케의 4 마법사? 아카네의 창? 내가 그런 말을 믿을 것 같아?
설령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 오만방자하고 멍청한 악신의 하수인 따위에게 '파랑'의 칭호를 가진 이 몸이...."
거기까지 말한 세루리안은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쿨럭....
말 대신 흘러나오는 붉은 피
그리고 눈 앞에 있던 병사들 대신 보이는 자신의 몸
세루리안의 목이 힘 없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리고 곧이어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세루리안이 타고 있던 구슬과 몸뚱이가 땅으로 떨어졌다.
"더이상 말하지 마라. 미천한 마법사여.
여신님의 이름이 더러워진다. "
병사들 사이에서 순식간에 세루리안의 앞으로 이동해 세루리안의 목을 친 폰틴이 말했다.
땅에 떨어진 세루리안의 머리를 집어 든 폰틴
폰틴이 뒤돌아 섰을때 움직이는 갑옷들은 그 저주에서 풀려나 바닥에 힘 없이 흩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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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랑의 첨탑 지하 3층 ]
철컥...철컥.... 하는 발소리와 함께 폰틴의 붉은 안광이 그레이스의 시야에 보였다.
그리고 그런 폰틴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파랑'의 마법사 세루리안의 머리였다.
"결국 그렇게 됐나요"
저항한다면 죽여도 상관 없다고 한 시점에서 어느정도는 이 상황을 예측한 그레이스였다.
하지만 눈 앞에 있는 세루리안의 죽은 모습을 직접 보고있노라니. 기분이 영 탐탁치만은 않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옛 형벌이 얼마나 허무하고 허망한 일이었는지 그레이스는 세삼 느끼고 있었다.
그게 고작 데이터 덩이리인 'NPC' 에 불구한데도 말이다.
다른 게임을 하면서 이런저런 경로로 수도 없이 NPC를 죽여봤지만, 이런 기분이 드는건 처음인 그레이스였다.
뚜벅...뚜벅..
그레이스는 복도를 지나 폰틴의 옆을 스쳐갔다.
위로 올라가는 나선형의 계단이 어둠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세루리안님의 유해는 조용히 처리해 주세요. 폰틴
가능하다면 다른 희생자들의 유해도... "
"분부대로..."
검은 연기에 휩쌓인 폰틴이 지하에서 모습을 감췄다.
손에 들고 있던 세루리안의 머리와 함께 말이다.
[ 파랑의 첨탑 1층 ]
계단에 끝에 도달한 그레이스의 눈 앞에 처음 자신이 보았던 첨탑의 1층이 펼쳐졌다.
이전과 다른게 있다면 분주하게 바닥을 쓸고 닦던 청소도구들이 힘이 다한듯 바닥에 떨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 외에 달라진 것은 없었다.
갑옷들은 있어야 할 그 위치에 그대로 전시되어 있었다.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던 피의 웅덩이도 지금은 없었다.
그레이스의 명령에 따라 미리 움직인 폰틴이 전투의 흔적을 완전히 지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띠링~!
로비를 둘러보던 그레이스의 귀에 익숙한 디지털 음이 들려왔다.
"무슨 소리지?"
그레이스는 무의식적으로 메뉴창을 열어보았다.
< 메시지 > 창에 읽지 않은 메시지가 전송되어 있었다.
그레이스는 메시지 창을 열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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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sh!d5htwe 나의 딸 tup#qt%k&lvm
hds2f34h 문제... uokj;gh^!#%lsd
개입 $%Hsdfh 진입 gkl43$dvof 불가 #&*C%Vn
전직 hfs634obvc54 강제 로그아웃 hj64cgdf#). >
-----------------------------------------------
"뭐야 이게......"
읽을 수 없는 언어가 섞인 메시지
전송 중에 특정 문제로 글자가 깨진 모양이었다.
그레이스는 그나마 읽을 수 있는 단어들을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다.
"나의 딸... 문제.... 개입... 진입..불가.... 전직... 강제 로그아웃..."
읽을 수 있는 단어는 이게 전부였다.
그레이스는 이 단어들을 이용해 문장의 대략적인 뜻을 유추해보기로 했다.
마치 영어 문법을 모르는 사람이 단어만을 가지고 문장의 퍼즐을 맞춰나가듯이 말이다.
"나의 딸...."
이 문구로 짐작할 수 있는건 이 메시지를 보낸이었다.
그레이스의 아버지 말고는 그레이스에게 이런 단어를 보낼 사람이 없었다.
"그럼 다음 단어는... 문제... 개입, 진입, 불가"
정확한 뜻은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문제', 즉 버그가 있다는 사실을 바깥에서도 인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적힌 '개입' '진입' '불가' 는 바깥에서 손 쓸 방도가 없다는 뜻일것이라고 그레이스는 해석했다.
그리고 이건 그레이스 외에 다른 사람들이 'Epic Tales' 로 들어오지 못했거나, 못한다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는 단어의 나열이었다.
"그리고 남은 단어는 전직, 강제 로그아웃"
'로그아웃' 이라는 단어가 분명히 적혀 있었다. 로그아웃을 할 수 있다는건 현실로 돌아갈 수 있다는 의미
그리고 아마도 그 방법은....
- 전직
이게 그레이스가 내놓을 수 있는 단어들의 가장 현실적인 답안이었다.
중간중간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글자들이 많이 섞여 있었지만 단어의 순서와 배치를 생각하면 이렇게 해석 할 수 밖에 없었다.
"전직하면 강제 로그아웃 되는거야?"
'Epic Tales'는 어디까지나 클로즈 베타 수준의 게임이었다.
그 세계관을 아무리 크고 멋지게 구축해 놓았다고 해도, 모든 지역과 모든 컨텐츠를 클로즈 베타 유저들이 모두 소모해 버리게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는건 클로즈 베타인 'Epic Tales'에서 현재 유저들에게 제공 할 게임 컨텐츠는 '전직' 까지라는 이야기
그 이후로는 게임을 계속 할 수 없도록 강제로 서버에서 퇴출되게 프로그레밍 되어 있다는 추측이 가능했다.
감옥에서 탈출하려고 눌렀던 <로그아웃> 버튼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당황했던 그레이스였기에 방금 받은 메시지가 전쟁터에 나간 아버지의 편지처럼 반가운 그레이스였다.
"좋아~ 그렇단 말이지?"
이 세계에서 탈출 할 방법은 대략 알것 같은 그레이스였다.
그렇다면 지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한가지...
꼬르르륵....
숨을 조르던 긴장감이 물러가자 찾아온 안도감과 손잡고 함께 온 공복감을 해결하는 것
그레이스는 얼굴에 쓴 가면을 벗고 세루리안의 첨탑을 한 번 더 올려다보았다.
아무런 소리도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조용한 파랑의 마법사의 공방
그레이스는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위쪽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짝!
공방의 천장을 올려다보던 그레이스가 양 손으로 자신의 양 볼을 짝! 소리가 나게 때렸다.
"그럼 가볼까?"
양 볼에 손바닥 자국이 빨갛게 난 그레이스는 다시 검은 가면을 얼굴이 착용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어둠이 내려 앉은 스타티니티 거리로 나온 그레이스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첨탑을 올려다보았다.
파랑의 마법사가 살던 첨탑에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