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날 이후로 일주일동안 그녀와 얘기하지 않았다. 아니 얘기할 면목이 없었다. 사실은 어찌 되었든 이런 일이 발생한건 다 내가 원인이니까. 그녀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으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나의 옆자리이다 보니 마주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녀는 화가 단단히 난건지 나에게 일절 아는 채를 하지도 않았고, 눈을 마주치면 바로 피하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만큼 서로의 사이가 진전된 것이 없었다.
이렇게 계속 혼자 내적 갈등을 하며 막 학교에서 나갈 준비를 하는 날 유미가 붙잡고 말을 걸어왔다.
“야”
“응?”
“아직도 화해 안 한거야? 다휜이랑.”
“응, 뭐라 말해야 될지 모르겠어. 그리고 아직 궁금한 것도 있고.”
나는 유미에게 내 마음을 털어놨다. 그러자 유미가 답답하다는 듯 눈을 한참 감은 뒤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 뭐야, 아직도 의심하는 거야? 고작 반장이 한 얼토당토 않는 소리만 듣고?”
“아니 의심 하는 게 아니라 난 단지 궁금했을 뿐이야. 왠지 그 날 다휜이가 알려준 게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
다휜이의 말을 들은 나는 내가 의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구질구질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러다 나는 문뜩 궁금증이 들어 말하던 도중 물어보게 됐다.
“그나저나, 너 반장이 나한테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어떻게 아는 거야?”
“아..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하여튼, 네가 사과하도록 해. 전적으로 네 잘못이 크니까.”
유미는 당황해서 말을 얼버무린 후, 대뜸 나에게 손가락질하며 강요했다.
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유미에게 말대꾸했다.
“뭐?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반장이 다 불었으니까.”
유미의 답변을 들은 나는 머리가 띵 해지며 잠시 멈춰 있다가,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
“뭐, 뭐라고?”
“다 불었다고. 반장이 그러는데 너희 둘 사이가 시샘이 나서 괜히 이간질 한 거래. 10년 전 이야기는 너희 둘이 이야기하는 걸 어쩌다 듣게 돼서 한 소리고.”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인상을 짓고 유미에게 반박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 반장이 직접 한 소리도 아니고.”
“미안하다 준영아, 저번에 했던 말은 다 거짓말이었어.”
내 말이 끝나자마자 유미 뒤에서 반장이 나와 말했다.
“뭐?”
“미안해. 사실 나 다휜이를 좋아했었어. 근데 네가 전학 온 뒤로 너희 둘 사이가 좋아 보여서 그만 시샘이 나서 순간 너희 둘 사이를 갈라놓고 싶더라. 그런 짓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진짜로 미안하다. 나 때문에 둘 사이만 서로 서먹해지고..”
반장은 진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것 같았다. 나는 솔직히 사과를 받아줄 마음이 없었다. 그야 반장 말대로 그 때문에 그녀와 아니, 다휜이와 서먹서먹한 사이가 됐으니까.
“하..”
나는 큰 한숨을 쉬며 반장의 사과를 받아주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를 용서해 주기로 했다. 왠지 지금 반장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무언가 큰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응, 알았어. 솔직히 용서할 수 없지만. 그래도 용서할게. 앞으로 이간질 하지 말아줘. 부탁이야.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땐, 널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반장의 사과를 받아줬다. 그리고 간절히 부탁했다. 그러자 반장은 웃으며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 고마워 용서해줘서. 이제 앞으로, 정말! 너희 둘 사이가 나쁘게 되는 짓 하지 않을게. 내가 ‘하늘’에 대고 맹세할게.”
반장이 사과를 하고 손을 내밀자 나는 손을 잡아줬다. 물론 손을 잡아주긴 싫었지만, 반장 역시 다휜이가 좋아서 그런 거니까.
이렇게 화해를 하던 도중 유미가 문득 나에게 물어봤다.
“그런데 너 이렇게 태평하게 있어도 돼? 아직 할 일이 남았잖아?”
“아!”
유미의 말 덕분에 내 머리에 지금 꼭 해야만 하는 일이 떠오른 나는 급하게 집을 챙기며 유미에게 말했다.
“미안해, 나 먼저 갈게.”
“됐으니까 빨리 가!”
유미는 손으로 등을 밀며 재촉했고 반장 역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나는 긍정하며 학교 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이렇게 내가 밖으로 달려 나가자 반장은 작은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넌 날 절대로 용서하지 못할걸?”
그는 의미심장하면서도 비웃는 듯 한 표정을 지었다.
* * *
나는 학교 정문을 나와 그녀의 통학로로 쭉 달렸다. 나는 얼마 전에 그녀와 같이 하교한 적이 있어 그녀의 하굣길 정도는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었다.
한참을 달려보니 그녀가 혼자 쓸쓸히 긴 가로수 길을 걷고 있었다.
하얀 머리카락이 달빛에 비친 그녀는 마치 하나의 요정을 보는 것과 같았고, 그녀의 아름다움에 잠시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나는 숨을 크게 내쉰 다음 소리쳤다.
“다휜아!”
그녀는 내 목소리를 듣고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갑작스럽게 달려오는 날 보고 놀랐는지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어, 어? 준영이? 무슨 일이야?”
나는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녀에게 다가가면서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나는 내가 해야 될 말을 알고 있었다.
“미안해.”
“응?”
“의심한 거 정말 미안해.”
나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다시 말했다.
“아니야, 벌써 다 잊었어. 괜찮아.”
다휜이는 괜찮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쓴 웃음을 보니 내 마음 한 구석이 쑤시듯 아파왔다. 참기 괴로웠지만 그녀에게 꼭 해야만 하는 말이 있었다.
“내가 네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화를 내기만 해서 미안해.”
“아니야,, 그냥..”
그녀가 눈을 수차례 깜박거리며 말하기 힘든 듯 더듬으며 대답했다. 나는 그녀에게 용서받기 위해 반복하며 용서를 구했다.
“네 말을 끝까지 들어주지 않아서 미안해. 그때 했던 네 사과 헛되지 않았어. 정말 미안해.”
“....”
다휜이가 눈에 눈물이 맺힌 채 한동안 말을 하지 않다가 뒤로 돌며 말했다.
“왜 진작 믿어주지 않은 거야..”
“미안해”
“왜 내 사과를 믿어주지 않은 거야..”
“정말 미안해. 네 사과 제대로 전달됐어.”
“미, 미안하다고 하면 다 풀릴 것 같아? 내 마음은 몰라주고..”
“미안해, 정말 미안해..”
다휜이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다시 나를 돌아보며 팔로 내 배를 툭 치며 말했다.
“치사해.. 미안하다는 말..”
다휜이의 눈가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퍼져있었다. 마치 은은한 달빛의 향기가 퍼지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