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 머리가 깨질거같아."
정신을 차린 그레이스가 지끈거리는 머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은 지금 초원 한복판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대자로 누워있었다.
"나 살아있는건가? "
그레이스는 머리에 얹었던 손을 하늘을 향해 쭉 뻗으며 말했다.
자신을 향해 쏟아질것만 같은 강렬한 태양빛에 눈이 저절로 찡그려졌다.
"어라...?"
그레이스는 하늘을 향해 뻗었던 자신의 손을 쳐다보았다.
무언가 이상했다. 살아오면서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촉
"안 아파...."
누군가 온몸을 짓누르는것 같은 통증
언제나 있었고, 언제나 있을거라고만 생각했던 그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거지? 나 죽은건가...?"
죽고나면 육체의 고통이 사라진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여기가 천국이라고 하면 눈부시게 아름다운 이 햇살도 기분좋은 바람도, 고통없는 육체도 전부 설명이 되었다.
그런 그레이스의 머릿속에 문득 스치고 간 생각이 있었다.
자신이 죽으면 따라 죽을거라는 아빠의 말.
그레이스는 드러누워 있던 들판에서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아!! 나 죽으면 안되는데? 어쩌지? 어떡해?!"
그레이스는 허둥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에는 그레이스 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당황한 그레이스의 눈 앞에 글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 'Epic Tales'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지금부터 간단한 튜토리얼을 시작하겠습니다.
안내를 잘 읽고 행동해주시기 바랍니다. >
"에,,,? 'Epic Tales'이라고? 그럼 여기가 아빠가 만들었다는 세계관 안이야?
그럼 성공한거야? "
분자단위로 분해되고 데이터화된 다음 재조립되었다고는 믿기지 않을만큼 그레이스는 지금 현실감각이 떨어졌다.
그레이스는 자신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오벨리스크를 바라보며 손끝부터 서서히 사라졌던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 이후로 어떻게 되었는지, 시간은 얼마나 흘렀는지, 그런것들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손발을 움직여보였다.
분명 이건 자신의 손발이었다. VR을 사용하면서 느껴졌던 이질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머리 위에 쓴 VR게임기의 무게와 감촉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레이스는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보았다.
역시 통증은 느껴지지 않는다.
"분명 'Epic Tales'는 현실에 있던 내 몸을 그대로 옮겨 온다고..."
아빠한테 듣기로는 분명 그랬었다.
그렇다면 사라진 이 통증은 대체 어떻게 된것인가?
< 가장 먼저 기본적인 인터페이스에 관한 설명입니다. >
그레이스의 눈 앞에 떠다니던 글자가 새로운 문장을 나타냈다.
<기본적인 구성은 기존의 VR 게임과 비슷합니다. 열고 싶은 아이콘을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눈 앞에 공간을 터치하시면 됩니다
그럼, 가장 먼저 '내 정보'창을 열어보겠습니다.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허공을 터치해주세요.>
"음... 그냥 하던대로 하면 되는건가?"
그레이스는 평소 VR게임기를 머리에 쓰고 하던것처럼 손가락으로 허공을 톡 건드렸다.
그러자 반투명한 네모난 창이 눈 앞에 생겨났다.
"음~ 어디보자~"
그레이스에겐 굉장히 익숙한 모습이었다.
바로 어제까지했던 '천애의 날개'소속으로 공대원들과 함께한 VR게임인 'Overmind'와 인터페이스가 거의 동일한 모습
아마도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그 게임의 인터페이스와 유사하게 설계한것이라고 그레이스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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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그레이스 성별 : 여
나이 : 18 직업 : 없음
종족 : ??? 레벨 : 1
체력 : 50 마나 : 50
힘 : 5 지능 : 10
민첩 : 7 정신력 : 6
행운 : 3
물리 공격력 : 10 물리 방어력 : 0
마법 공격력 : 10 마법 방어력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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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무언가 이상하단걸 깨달은 그레이스는 다시 한번 자신의 정보창을 읽어나갔다.
"종족이 물음표야...."
정보창에 종족이 표시되지 않는다. 무슨 버그가 있는걸까?
<잘 하셨습니다! 다음으로 생활에 필요한 기본 의식주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그레이스가 정보창을 확인하자 다음 문구가 출력되었다.
"에... 저기 질문이 있는데..."
그레이스는 자신이 발견한 이상한점을 AI에게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의 : 즉, 입는 장비에 대해 가장 먼저 설명드리겠습니다.>
돌아온 것은 무조건적인 통보 수준의 튜토리얼이었다.
<'Epic Tales' 안에서 기본적으로 장비를 얻은 방법은 크게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몬스터나 던전을 돌아 직접 얻는 방법입니다.
둘째는, 대장장이 스킬을 익혀 재료를 이용해 직접 제작을 하는 방법입니다.
마지막 방법은 거래를 통해 일정량의 화폐를 지불하고 NPC나 개인에게 구매하는 방법입니다. >
기본적으로 MORPG나 MMORPG 를 한번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는 기본적인 시스템이었다.
< 방어구의 종류는 크게 천, 가죽, 경갑, 중갑, 판금 5가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무기는 전직 이후 직업에 따라 자신에게 특화된 무기를 선택하여 사용하면 됩니다.
방어구와 무기는 레어도에 따라 노말, 매직, 레어, 유니크, 에픽의 5가지 등급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게임에 따라 약간씩의 차이가 있지만, 이것 역시 그레이스에겐 익숙한 방식이었다.
<다음으로 식 : 즉 먹는 음식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식사와 관련된 게이지는 현실의 감각을 그대로 공유합니다.
즉, 배고픔 게이지가 떨어지면 배고픔을 느끼고, 수분 게이지 떨어지면 목마름을 느낍니다.
처음 어느정도의 시간동안은 아무런 불편함도 느낄 수 없지만, 정도가 심해지면
체력이 감소하고 병에 걸리기 쉬운 무기력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상황에 따라 적절한 음식과 수분을 섭취하십시오. >
"음... 듣고보니 조금 목마른것 같기도 하네..."
그레이스는 자연스럽게 인벤토리를 열어보았다.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물과 빵이 5개씩 보관되어 있었다.
"이것도 똑같네. 그럼 어디~"
그레이스는 물병아이콘을 꾹 누른 상태로 창 밖으로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아이콘으로 표시되어 있던 물병이 실제로 입체화되며 그레이스의 손앞에 나타났다.
"후....."
물병을 손에 든 그레이스는 한동안 뚜껑도 열지 않은채 뚜껑을 꼭 붙잡고 서 있었다.
무언가 먹고 마실때 식도를 따라서 느껴졌던 타들어갈것 같은 고통
그 감각을 그레이스는 지울 수 없었다.
몸을 짓누르는것 같은 감각이 없어졌다고해서 다른 고통까지 사라졌다고 장담 할 수는 없었다.
세 번 크게 심호흡을 한 그레이스는 물병의 뚜껑을 열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숨에 들이켰다.
꿀꺽...꿀꺽...
"히아~!"
물 한병을 한꺼번에 들이킨 그레이스의 입에서 본인도 놀랄만큼 커다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는 본인도 그 소리에 놀랐는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안아파..."
그레이스의 입을 가렸던 손이 서서히 자신의 목으로 내려갔다.
당연한 것이 당연할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런 고통 없이 물을 마실 수 있다는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그레이스는 지금 잠깐의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잘 하셨습니다. 다음으로........>
그레이스의 눈 앞에 나타나던 글자가 여기서 딱 끊겼다.
"에...?"
그레이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화면은 다시 눌러보았다. 혹시 랙이걸린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여러번 반복해봐도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3번정도 건드린 다음에는 눈 앞에 출력되던 문구 자체가 사라져버렸다.
"역시, 아직 불안정한걸까?"
'Epic Tales'는 다른 게임들로 치면 '클로즈 베타'나 마찬가지인 상태였다.
이런 저런 오류나 버그가 많이 있어도 전혀 이상할건 아니었다.물론 없다면 가장 좋았겠지만 말이다.
어쨋든 사람을 데이터화하는 작업은 성공했으니, 가장 우선적인 목표는 성공한것 아니겠는가?
그레이스는 자연스럽게 메뉴를 불러와 '운영진 연결' 이라고 적힌 버튼을 눌렀다.
그레이스가 버튼을 누르자 "띵~!" 하는 버튼 눌리는 입력음이 출력되었다.
이전에 즐기던 'Overmind'에도 이와 같은 시스템이 있었기에 종종 이용하곤 했던 그레이스였다.
하지만 곧장 이어져야 하는 연결은 한참을 기다려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한번 더 버튼을 눌렀다.
마찬가지로 "띵~!" 하는 연결음만 출력되고는 아무런 연결도 되지 않았다.
"이것도 고장인가?"
그레이스는 메뉴창에 있는 다른 버튼을 살펴보았다.
<로그 아웃>
어떤 게임에도 있는 익숙한 아이콘이 그레이스의 눈에 들어왔다.
"나가서 직접 말해야할까...?"
버튼에 손을 가져가던 그레이스가 손을 멈칫했다.
"나가면.... 또 아프겠지...?"
평생을 함께한 온몸의 고통과 작별한지 불과 10분도 되지 않았다.
현실로 돌아간다면, 또다시 그 고통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게다가 데이터화가 성공적으로 되었다고해서, 그 반대가 언제나 성공적일거라는 확신도 없었다.
무슨 일이 있다면 분명 운영진쪽에서 연락을 취해 올 것이다.
'Overmind'에서도 그랬었으니 말이다.
그레이스는 메뉴창을 닫았다.
기본적인 인터페이스는 기존에 하던 'Overmind'와 똑같거나 비슷하다고 봐도 무방해 보였다.
그렇다면 튜토리얼 따위 없어도 상관 없었다.
자신의 몸이 왜 아프지 않은가. 자신의 종족값은 왜 '?' 인가. 운영진과는 왜 연결이 되지 않는가.
튜토리얼 안내는 왜 갑자기 끊어졌는가와 같은 여러가지의 궁금증이 있긴 했지만, 그레이스는 지금 날아갈것만큼 기분이 좋았다.
세상과 소통하던 유일한 창이었던 게임 속 세상에 직접 들어왔다는것도 물론 그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정말 기쁜것은 그런게 아니었다.
아프지 않다.
아프지 않다..
아프지 않다...
당연한게 당연할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말.
그레이스는 생전 처음으로 그 단어의 뜻을 알 수 있었다.
"그럼 어디..."
그레이스는 머리에 씌워진 VR게임기를 가지런히 정리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기분 좋은 바람에 그레이스의 긴 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넓게 펼쳐진 초원의 끝. 그곳에 보이는 작은 연기들을 바라보며 그레이스는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