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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박쥐
작가 : 사각
작품등록일 : 2018.10.23

"기왕 죽을거면 햇볕이 가장 잘 드는 곳에서."
"타 죽고싶어."

 
4화
작성일 : 18-11-02 03:46     조회 : 209     추천 : 0     분량 : 9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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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꿈을 꾸었다. 엄청나게 커다란 흰 접시에 푸릇푸릇한 새싹들과 야채들과 함께 알몸으로 누워있는 이상한 꿈. 박제라도 당한 것처럼 온 몸이 움직여지질 않아서 나는 식탁 앞으로 다가온 남자가 자리에 앉기 전까진 남자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곧 남자가 콧노래를 부르며 자리에 앉았지만, 남자의 얼굴만 까만 안개에 싸인 듯 뿌옇게 보이지 않았고 남자는 식탁 위에 올려진 고급스런 무늬의 종지를 들어 휙 나의 위에 끼얹었다. 비리고 역한 검은 물에 내가 윽 인상을 찌푸렸고, 남자는 포크를 들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먹겠습니다.」

 

 

 

 "억!"

 

 

 

 

 눈을 뜸과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나의 비명아닌 비명 이후 소리가 죽어버린 공간에서 삐-하는 소리가 났다. 등골이 서늘해지고 그 사이로 땀이 삐질 흘러내렸다.

 

 

 뻣뻣하게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그제야 나는 머리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고개를 푹 수그릴 수 있었다.

 

 

 

 

 악몽은 숱하게 꿔왔지만, 이런 꿈은 또 처음이었다. 알몸으로 누워서 이상한 드레싱이 끼얹어진 채 잡아먹히는 꿈이라니.

 

 

 

 

 나는 뿌얘서 보이지 않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려 했지만, 역시나 떠오르지 않았다. 내 몸에 뿌려졌던 비리고 역했던 드레싱의 냄새가 실제로 내게서 나는 것 같은 느낌에 내가 얼른 팔을 들어 킁킁 냄새를 맡았지만, 다행히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머리를 쓸어올렸다. 아까도 누군가 있을까 하며 둘러보았었지만, 나는 다시 한 번 내가 있는 이곳을 둘러보았다. 방 안이었다. 처음 보지만, 누가 보아도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은 내 방보다 더 사람 사는 곳 같은 방 안.

 

 

 

 방 한켠에 옅은 노란 불이 들어온 스텐드가 보였고, 양말이 벗겨진 한 쪽 발과 두 손으로 바스락거리는 두툼한 이불의 따스한 촉감이 내가 느끼는 공포와 맞물려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난 분명 그 날개달린 남자한테 잡혀왔는데. 기절을 하면서도 나는 눈을 뜬다면 남자의 뱃속이거나 동화 속에 나오는 허름한 백작의 성 같은 곳일 줄로만 알았다.

 

 

 

 그래, 낮에만 활동하고 티브이 없이 책으로만 세상을 보는 나에게 상상의 경계는 아주 제한적이었다.

 

 

 

 여기는 어디일까. 남자의 집은 맞을까. 내가 기절해있는 동안 아빠가 날 구해서 어디론가 데려온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나는 분명 다리에서 뛰어내린 남자의 품에서 붕붕 날고 있었고, 아빠에게도 김도휘에게도 날개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고개를 멍하니 돌렸다. 천장에 나있는 작은 창으로 하얗고 커다란 보름달이 보였다.

 

 

 

 사람이 사는 곳에서는 절대로 달을 볼 수 없으니까.

 

 

 

 달… 달이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었지… 늘 사진으로만 마주한 달은 생각보다 더 하얗고 차가워 보였다.

 

 

 

 달을 이렇게 볼 수 있는 집이라니… 당연히 사람이 사는 곳은 아니겠지. 생각이 많아졌다.

 

 

 

 

 도망가야겠다는 생각과 아침이 되길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 두렵다는 생각과 용기를 내라는 생각이 동시에 맞물려 머릿속에서 강강수월래를 해댔다.

 

 

 

 

 

 ‘그만 움직이는게 좋을 거야.’

 

 ‘…………’

 

 ‘씹어먹어 버리고 싶으니까.’

 

 

 

 

 김지호. 뭘 생각해. 도망가야지.

 

 

 

 

 지금이 몇 시지? 방 안 어디를 둘러보아도 시계가 없어서 지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길이 없었다. 아침이 되기 전에 남자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난다면 난 완벽하게 죽은 목숨일테니, 지금 당장 도망가야 했다.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이 드니 두려움 앞에 벌벌 떨리던 심장이 점점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궁지에 몰릴수록 머릿속이 차분해지는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 엄마는 이렇듯 차분해지는 나를 걱정했었다. 너무 어른스럽고 아이답지 않다고. 조금 더 응석받이에, 조금 더 아이처럼 울어도 좋다면서.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내가 차분해서 다행이었다.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으니까.

 

 

 

 이틀 전만해도 밤새 울면서 뒤척였는데 막상 박쥐에게 잡혀 어딘지도 모를 곳에 오니 그날 충분히 잠이나 자둘걸. 하는 여유 넘치는 생각까지 했다.

 

 

 

 

 심장을 쓸어내리며 다시 고개를 틀어 창문을 바라보았다. 저 작은 창은 너무 높아서 도저히 기어 올라갈 수도 없고, 기어 올라간다 한들 내 체구로는 빠져나갈 수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천천히 다리를 덮은 이불을 걷어냈다. 쉽게 바스락거리는 소재로 된 이불 때문에 이불을 걷는데만 수 초를 소요했다.

 

 

 

 

 한 쪽 발만 양말을 신고 있는 기분이 이상해서 남은 한 쪽 양말도 벗어버렸다. 바지 뒷주머니에 양말을 대충 쑤셔 넣고 침대 밑에 깔려있던 카펫을 벗어나 장판을 딛었다.

 

 

 

 한기가 느껴진다는 느낌은 계속 받았지만, 맨 발로 바닥을 딛으니 쭈뼛 소름이 돋을 정도로 바닥이 차가웠다.

 

 

 

 

 발뒤꿈치를 들고 조용히 갈색의 문 앞에 선 내가 오소소 돋은 팔뚝을 문지르곤 깊게 심호흡했다. 황금색의 손잡이에 손을 올려 이불을 걷었을 때보다 더 조심스럽게, 더 천천히 문고리를 돌렸다.

 

 

 다행히 문고리는 소리 없이 돌아갔고, 아주 조금 문을 연 나는 아무 반응 없는 문 밖을 느끼며 반 뼘 정도 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바깥은 어두웠고, 열자마자 보이던 정면의 현관문이 마치 얼른 내게 달려와! 하고 있는 것같아 보였다.

 

 

 

 오로지 그 현관문에 모양으로 꾸며진 색색의 글라스에서만 달빛이 쏟아져 현관문을 밝히고 있었고, 그 외의 집 안은 온통 어두웠다.

 

 

 

 방안을 밝히는 저 스텐드의 노란 불이 밝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뒤돌아 가서 끄고 오기엔 스텐드가 너무 멀리 있어서, 나는 문을 조금 더 닫은 채로 고개를 틀어 귀를 내밀었다.

 

 

 이상하다. 너무 조용해. 당장에 씹어 먹을 것처럼 말하더니 침대에 눕혀주고 이불까지 덮어준 매너는 또 뭐고, 감시도 없이 이렇게 조용할 건 또 뭐야.

 

 

 

 

 여전히 바깥을 향해 귀를 기울인 채 문 입구에 머리를 기대어 내가 나갈 수 있을까. 그 남자는 진짜 뭘까.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였다.

 

 

 

 

 "으,으아아아!"

 

 

 

 

 귓가에서 느껴진 뜨거우면서도 섬칫한 느낌에 내가 급하게 귀를 감싸쥐곤 문에서 떨어져 뒤로 나동그라졌다. 나에 의해 활짝 열린 문 틈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를 올려다본 나는 그가 나를 데리고 온 그 남자임을 확신했다.

 

 

 

 그의 커다란 키나, 꼿꼿하게 선 몸 그리고 그냥 나의 직감이 그가 나를 납치한 그 사람이라는 것이라고 느끼게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 남자, 너무 사람 같이 생겼는데…?

 

 

 

 

 광장에서 나한테 달려들었던 그 박쥐만 해도 온 몸이 썩고 구더기가 펴서 사람 같은 생각이 조금도 안 들었는데, 이 남자는 옆에 김도휘를 세워놓는다 해도 이질감 없이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책에서 서술하고 삽화로 첨부된 박쥐들은 하나같이 그 광장의 것과 닮은 모습이었다. 근데 이 사람… 아니 이 박쥐는 썩은 내도 나지 않고 오히려 너무나도 멀끔하고 훤칠한 느낌까지 들었다.

 

 

 

 

 이를 내보이며 아-하고 입을 벌리고 있던 남자는 입술을 꾹 다물고 비딱하게 고개를 돌려 바닥에 엎어진 나를 내려다보았다.

 

 

 근데 잠깐, 맞지? 저게 내 귀 물려고 했던 거? 뜨거운 숨과 함께 날카로운 이가 살짝 닿았던 느낌이 아직도 귓바퀴에 생생해 나는 벅벅 귀를 문질렀다.

 

 

 

 남자는 그런 나를 보다 눈 앞머리를 긁적이며 나른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이거 아니야?"

 

 "…!"

 

 

 

 뭐, 뭐가 아니야? 놀란 나는 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말을 하는 모습도 그냥 보통 사람같았다.

 

 

 아니… 아니 사실 조금 어딘가 나사가 빠진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마치… 잠에서 덜 깬 것처럼 보인달까…

 

 

 

 내가 무서워하고, 놀라고, 당황하는 사이 남자는 그런 나를 무신경히 쳐다보며 '아닌가.'하며 그대로 뒤돌았다.

 

 

 

 

 그리고 그 어둠속을 잘도 헤치고 나가 저 쇼파 너머까지 걸어갔다. 그 어둠 속에서 나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가 아니고, 뭐가 아닌가고, 왜 뒤돌아서 그냥 가 버리는 거지? 나는 엉금엉금 기어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내 스스로가 차분하다 생각했지만 기어가는 내내 다리가 후들거리는게 느껴졌다.

 

 

 

 문을 꼭 잡은 채 남자가 무엇을 하나 실눈을 뜨고 가만히 지켜보는데, 어둠 속으로 들어간 남자가 무언가를 잡아당기니 하얀 빛이 그의 주변을 감싸 안았다.

 

 

 

 나는 그가 간 곳이 주방이며, 그가 냉장고를 열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냉장고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든 남자가 그대로 입을 대고 그것을 마셨다.

 

 

 

 물일까? 박쥐도 물을 마시나? 아니면 혹시 핏물을 모아둔 거라던가… 저 안에 선지 같은 건더기들이 가득하다거나… 두려움을 자초하는 생각에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맛있게도 마시는 남자의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나도 목이 말라왔다. 마른 침을 삼키며 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흘긋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주방과 현관문은 꽤 멀리 떨어져있었다.

 

 

 

 물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마시곤 싱크대로 보이는 곳에서 무언가를 뒤적거리는 남자의 등과 현관문을 번갈아보던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등에선 주룩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여기서 도망쳐도 분명 난 잡힐게 분명했다. 날개는 둘째치고 나를 옆구리에 끼고 달리던 이 남자는 아주 빨랐으니까. 차보다 빠른 것 같았고, 비행기보다도 빠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해보지 않고 갈기갈기 찢어져 잡아먹히는 것은 싫었다.

 

 

 

 

 남자가 내 꿈에 나왔던 것처럼 그렇게 우아하게 피어난 채소들과 함께 나를 접시에 내려놓고 우아하게 포크질을 하는 것도 소름이 돋았지만, 내가 책에서 보고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 속의 박쥐들은 절대로 그렇게 우아하게 식인을 하지 않았다.

 

 

 

 

 내가 인상 깊게 보았던 박쥐를 소재로 삼은 한 소설책에선 박쥐가 인간을 잡아들여 살아있는 채로 팔 다리를 마디마디 분질러 뜯어내 커다란 게를 해체해 먹듯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여자들의 젖가슴과 엉덩이, 허벅지 살을 가장 좋아한다고 적혀 있었는데, 여기까지 생각이 드니 어떻게든 도망쳐야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박쥐와 사람을 놔두고 죽고 죽이는 것 외에 다른 경우의 수는 없었다. 내가 여기서 저 박쥐를 이길 방법은 없었고, 또 나는 저 박쥐가 나를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게 설득시킬 수 있는 달변가도 아니었다.

 

 

 산 채로 마디마디 뜯겨 먹느니 차라리 밖으로 나가 돌맹이로 내 머리를 내려쳐서 죽는게 낫겠어.

 

 

 

 그래 어떻게 잡혀 어떻게 잡아 먹히든간에, 나는 일단 그 소설 속에서 끝까지 박쥐에게 도망치려했던 여주인공 앨리처럼 어떠한 노력이라도 하고 죽고 싶었다. 이렇게 무기력하게 죽을 수는 없지.

 

 

 

 

 

 소리 없이 천천히 문을 더 활짝 연 나는 그대로 내달렸다.

 

 

 

 내 발소리가 거실을 쾅쾅 울렸지만 내가 그가 아닌 이상 소리 없이 이곳을 도망칠 수는 없었다. 나의 절박함에 비해 남자는 아주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여러 가지 잠금장치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황급히 손으로 현관문을 더듬었지만 현관문은 아무런 잠금장치도 없었다. 맥이 빠질 정도로.

 

 

 부엌 어딘가에 달칵 무언가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려 소름이 돋은 내가 급하게 현관문을 열어젖히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질끈 감은 눈을 뜨며 막 세 발쯤 달려 나갔을 때, 너무나도 새카만… 너무나도 새카만 밤하늘에 눈이 시리도록 가까이 떠있는 커다랗고 하얀 달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멈출 수 없었다.

 

 

 

 

 한 발 앞이 바로 낭떨어지였는데도.

 

 

 

 

 

 죽었다. 진짜로 정말로 이렇게 죽어버려? 이렇게? 그 느낌을 받으며 맥이 탁 풀렸을 때, 조금 익숙한 데자뷰가 나를 덮쳐왔다.

 

 

 

 

 단단한 팔이 막 완벽한 도움닫기 끝에 낭떨어지로 힘차게 한 발을 뗀 나의 허리를 감아왔고, 나는 그대로 무너지듯 남자의 품에 강제로 안겨졌다.

 

 

 남자의 품에 처박히듯 안겨 이것마저도 너무나도 사람같은 그의 평범한 검은 티셔츠를 멍하니 바라보던 내가 정수리 위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한결같이 나른한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너도 있어? 날개…"

 

 

 여긴 날개 없인 못 가.

 

 

 

 

 

 마치 그 뒤에 ‘어디 가고싶어? 데려다줄까?’하는 말을 할 것 같은 다정한 목소리.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얼른 남자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 바람에 다시 한 번 낭떠러지의 끝에서 휘청였고, 윽!하는 나를 남자가 다시 또 휙 끌어당겼다.

 

 

 끌어당겨지며 제대로 마주본 그는 달빛을 받은 채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나른한 목소리와 함께 한결같은 무심한 표정, 커다란 키, 김도휘가 언젠가 입었던 것 같은 평범한 검은색 티셔츠와 바지… 눈을 덮을 듯 말듯 길고 덥수룩한 검은 머리… 이 모습이 사람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란 말야.

 

 

 

 

 나를 잡아당기는 남자의 힘에 희끗하게 죽은 잔디 위로 쓰러진 나는 뻣뻣하게 굳어 있다가 그대로 잔디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 망했어.

 

 

 

 몸을 잔뜩 움츠렸다. 살을 에는 것 같은 바람 때문에도 그랬고, 몸을 타고 올라오는 바닥의 한기 때문에도 그랬고, 살고자해서 죽고자 했는데 정말 죽는다는 생각에 남자의 손이 닿았을 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버려서… 한심해서 더 그랬다.

 

 

 

 그리고 나를 구해준 이 사람이 정말로 '사람'인 것 같다 느끼면서 '사람'이면 좋겠다 생각한 내 자신이 너무 바보같아서도 있었다…

 

 

 

 

 차라리 아까 그냥 그렇게 떨어져서 머리가 터져 죽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몰라. 하지만 난 방금 일을 통해 느꼈다. 아쉽게도 나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용기란 없었다. 맨날 죽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맨 처음 감자를 주우러 가는 것을 주저했던 것처럼, 나는 의외로 삶에 대한 집착이 꽤 강했다. 아니야.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

 

 

 

 

 

 "바닥이 편해?"

 

 

 

 

 

 그때, 나를 향해 묻는 남자의 말과 함께 지면을 울리는 묵직한 느낌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자마자 나와 똑같이 바닥에 누운 남자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뭐야?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나의 바로 옆에 누워있는 그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달빛을 받으며 멍하니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남자의 고개가 천천히 내게로 돌아섰다.

 

 

 

 

 "괜찮네."

 

 

 

 

 남자는 이상했고, 그런 남자를 보는 내 기분도 덩달아 이상해졌다.

 

 

 

 

 

 

 

 

 

 

 The Bat

 

 

 

 

 

 

 

 

 

 남자, 아니 박쥐는 이상했다.

 

 

 

 

 나와 우리가족이 추측하던 그대로, 남자는 햇빛 아래 행동이 다소 자유로워 햇빛을 무서워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햇빛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잠이 들기 전엔 꼭 모든 집 안에 커튼을 쳤으며, 밤이 되면 걷었다.

 

 

 

 

 냉장고에서 꺼내마시던 것의 정체도 금방 알 수 있었다.

 

 

 도망치다가 우습게 구해져서 다시 이 집으로 돌아온 그날 밤, 싱크대를 뒤적거리던 그가 찾던 것이 컵이였던 듯 컵을 꺼내 다름아니라 내게 우유를 따라주었다. 그날 현관으로 도망가지 않았더라면 아마 싱크대를 뒤져 컵을 꺼내 어기적어기적 내게 다가오는 그를 볼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는 아침이면 일어나서… 냉장고에 산처럼 쌓인 우유를 꺼내마셨는데, 꼭 그것을 한 잔 또 따라 내게도 내밀었다.

 

 

 이틀째까지는 모든 것이 무섭고 두려워서 그게 우유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혹시 몰라 거부했지만, 삼 일째에는 살고자하는 본능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남자의 식사 아닌 식사는 하루에 한 번에서 두 번. 아침에 우유 한 잔을 먹고 두 번 식사를 하는 날에는 밤 늦게 우유 한 잔을 더 마셨다.

 

 

 

 이유식도 안 뗀 아가도 그보다는 더 우유를 맛있게 못 마실 텐데, 남자는 정말 맛있게 우유를 마셨다. 정말로 아가처럼.

 

 

 내가 없는 곳에서 쟁여놓은 사람고기를 우적우적 뜯어먹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내가 관찰한 결과로는 그러했다. 정말로 우유만. 그래서 덩달아 나도 하루를 우유 두 잔으로 떼웠다.

 

 

 

 

 그리고 남자는 나를 잡아먹을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아니 처음에 나를 씹어 먹고 싶다고 한 건 언제고, 애초에 내가 박쥐에게 잡혀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를 잡아먹을 생각이 전혀! 전혀 없어보였다.

 

 

 하지만 그는 내가 박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아냐. 나 박쥐 맞아. 하듯이 가끔 천장에 거꾸로 붙어 잠을 잤고, 어디에 가는 지 알 수 없었지만 외출 할 때 내가 보았던 그 커다란 날개를 펼쳐 날아가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처음에 느낀 것처럼 그는 나를 안고 날아가며 험한 말을 했던 그때의 모습은 어디가고, 잠에서 덜 깨 몽롱해하는 사람처럼 말투가 느리고 멍했다. 또 어떨 땐 그냥 아이 같기도 했다.

 

 

 물론 그가 창밖에 어딘가를 무표정하게 응시하고 있을 때나, 갑자기 몸을 움찔거리며 험악한 표정으로 밖으로 뛰쳐나갈 땐 또 덜컥 겁이 날 정도로 매서워보였다.

 

 

 

 아무튼 정상은 아니었다. 심할 땐 오분만에 분위기가 바뀌어 어느 장단에 맞춰야할지 모를 정도였으니까. 다중인격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것도 저것도 이상한데 정말로 이상했던 것은…어쩐지 그가 내게 잘 보이고 싶어하는 느낌이 든다. 이거였다.

 

 

 

 

 "이거 아니야?“

 

 "아…맞…는것 같아요."

 

 

 

 

 그가 내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이거 아니야?'였는데, 내게 무언가를 내밀거나 내게 무슨 행동을 취하고 내가 깜짝 놀라거나 당황해하면 꼭 그렇게 묻곤 했다. 한결같은 나른한 목소리로. 첫 날 내 귀를 물려고 했던 그때와 같은 표정으로.

 

 

 

 

 

 나는 남자가 외출 뒤 가져온 이상한… 인디언들이 입을 것 같은 망토를 받아들어 난처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입고 있었던 겉옷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았고, 마땅한 외투 없이 보일러라던가 벽난로 같은 것도 쓰지 않는 이 곳에서 겨울 밤을 지새우는 것은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며칠 이불을 뒤집어 쓰고 부들부들 떨었었는데, 그런 나를 빤히 보더니 말도 없이 또 휙 나가버린 남자가 훅 나타나 내게 이것을 내민 것이었다.

 

 

 

 

 

 

 망토를 머리에 끼운 나를 보고 남자가 슬쩍 웃었다. 아니 웃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웃음이라고 치기에도 애매한 입꼬리였다.

 

 

 나는 남자의 시선을 받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박쥐를 앞에 두고 웃을 수 있는 날이 올 줄이야. 잔득하게 따라붙는 남자의 시선에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자리를 피하고 싶었지만, 며칠 전 슬그머니 이젠 내 방이 되어버린 그 방에 들어가려는 나를 향해 '여기에 있어.'하고 명령하듯 말한 남자 때문에, 나는 그 뒤로도 쭉 남자가 먼저 잠이 들거나 남자가 먼저 휙 방으로 사라지기 전까진 이렇게 거실 쇼파에 같이 앉아있어야만 했다.

 

 

 

 

 남자의 심기를 거스르기는 싫었다. 실낱같은 목숨줄이었지만, 어떻게든 잘 비위를 맞춰주면 이 남자가 갑자기 돌아버리지 않는 이상 큰일 없이 꽤 오래 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시선을 받으며 내가 어색하게 땅을 보았다. 어색했지만 먼저 말을 걸 용기는 없었다. 왠지 내가 먼저 말을 걸면, 그게 엄청난 무언가로 뻥 튀겨져 내게 되돌아올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두 다리를 끌어안고 숨소리도 거슬릴까 가만히 숨죽여 있는 나를 바라보던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내게 다가왔다. 이제 나는 처음과 달리 이런 그의 행동에 소스라치게 놀라진 않았다. 그저 움찔 그를 올려다볼뿐.

 

 

 

 

 그가 내 머리로 손을 뻗었고, 내 목은 자연스레 거북이처럼 쭈욱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그리고 곧 내 머리에 무언가가 폭 씌워졌다. 시야가 가리자마자 흠칫 눈 앞에 씌워진 것을 들어올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두려움에 움찔 몸을 떤 나 자신이 우스워질 정도로 그의 입에서 맥빠지는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모자가 있어."

 

 "………"

 

 "따듯해."

 

 

 

 

 

 뭘까, 이 사람. 나는 가만히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나와 잠시 눈을 마주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말없이 그대로 뒤돌아 그의 방으로 사라졌고, 나는 그가 방으로 들어갔음에도 아주 오랜 시간 쇼파를 떠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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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4화 2018 / 11 / 2 210 0 9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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