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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용과 소녀
작가 : 이저녁
작품등록일 : 2018.11.2

우연히 용의 동굴을 발견한 소녀, 용은 소녀를 죽이기 않는 대신 조건을 제시하는데...

 
만남
작성일 : 18-11-02 01:51     조회 : 193     추천 : 0     분량 : 8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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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너희는 누구냐.”

 

 위압적인 용의 목소리가 동굴 전체에 울려 퍼졌다. 거대한 짐승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공기를 타고 소녀가 있는 곳까지 진동을 전했다. 피부가 경련이 일어난 듯 부르르 떨렸다. 소녀는 깜짝 놀라 다시 몸을 숨겼다. 숨을 참으니 입안에서 피 냄새가 감돌았다. 심장은 여전히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넘어져 다친 무릎은 아직도 욱신욱신했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기침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소녀는 입을 틀어막아 억지로 버텼다.

 

 고블린들은 갑자기 등장한 거대한 짐승에게 압도당해 뱀 앞에 선 개구리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무서운 기세로 소녀를 추격하던 놈들은 이제는 오히려 불쌍한 사냥감이 되어버렸다. 용은 고개를 움직여 작은 괴물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놈들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었다. 용이 돌풍 같은 콧바람을 내뿜으며 입을 열었다. 수천 개의 날카로운 이빨이 번뜩였고, 그 사이에서 흘러나온 차가운 입김이 동굴 바닥에서 휘몰아쳤다.

 

 “작고 쭈글쭈글하군. 색깔은 개구리처럼 시퍼런데 시체처럼 창백해, 꼭 곰팡이 같군... 아, 알겠어... 고블린... 고약한 냄새를 맡으니까 알겠군... 너희는 이빨 사이에 낀 썩은 고기찌꺼기를 절대 빼지 않았지... 그런데 여기는 왜 찾아온 것이냐...”

 

 고블린 한 마리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용은 그 모습을 보고 씩 웃으며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혹시 너희 부모들의 부모의 전우였을지 모를 나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해서인가? 만약 그렇다면 잘못 찾아왔다. 나는 고블린들이 역겹거든. 시체에 꼬인 구더기보다도 싫어해... 나와 같이 싸운 고블린들은 모두 죽었다. 적의 손에, 그리고 나의 손에... 모조리 다 죽임을 당했지...”

 

 용이 살짝 손가락을 구부리자, 동굴 안이 조금 어두워졌다. 동굴을 밝힌 빛의 정체는 다름 아닌 용의 검지 손톱이었다. 손톱 끝에서 밝고 하얀빛이 동굴 곳곳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거대하고 시커먼 용의 손톱은 그 크기 못지않게 날카롭고 예리해 보였다. 용은 다시 손가락을 펴 고블린 무리를 환하게 비추었다. 그리고 뱀처럼 길쭉한 몸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바위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땅을 짚은 반대쪽 손이 슬그머니 움직이며 바닥을 긁어대는 소리였다. 꼬리가 뱀처럼 바닥을 기었고, 원통형 몸뚱이가 느리게 구부러지기 시작했다. 용이 놈들을 포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발소리는 지진 같았고, 날개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는 폭풍 같았다. 엄청난 소리에 고블린들이 조금씩 정신을 되찾기 시작했다. 서로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도망칠 구멍을 찾는 듯 뒷걸음질치며 고개를 산만하게 돌려댔다. 어두운 동굴이 다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놈들은 용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그들 눈앞에 있는 존재가 용이라는 사실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용은, 짜증이 났는지 돌연 우레 같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감히, 하찮은 미물 따위가 이리도 시끄러운 것이냐!”

 

 소녀는 귀를 틀어막았다. 용의 일갈은 고막을 찢어버릴 정도로 컸다. 포효의 메아리가 잦아든 후에야 소녀는 귀에서 손을 뗄 수 있었다. 충격으로 날카로운 이명이 귓속을 맴돌았다. 고블린들은 비명을 지르며 벌벌 떨어댔다. 이대로라면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소녀는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했다. 눈동자를 굴리며 필사적으로 탈출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용이 움직일 때마다 물결치는 벽면의 그림자 때문에 뭐가 구멍이고 그림자인지 도저히 분간이 가질 않았다.

 

 “하하하... 알겠군... 오랫동안 이 동굴 안에 처박혀 늙어가는 나를 위해서, 너희가 몸소 희생한 것이구나... 그렇군... 예의가 바른 고블린들이군... 깊은 잠에서 깨면 허기가 지는 법이지...”

 

 용이 사납게 웃으며 손을 들어 바닥을 내리쳤다. 고블린 한 마리가 피할 새도 없이 깔려버렸다. 거대한 몸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였다. 충격 때문에 천장에서 작은 바위조각과 먼지가 쏟아져 내렸고, 고블린들은 뒤로 나자빠졌다. 용이 다시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자, 피 반죽이 되어버린 고블린이 부서진 바닥과 함께 늘어져 있었다. 용은 손가락으로 놈이 입고 있던 옷을 긁어내고, 덜렁거리는 시체를 집어 들었다. 질척질척한 감촉에 용이 인상을 구겼다.

 

 “아... 역겨워... 너희는 피 냄새마저도 역겹구나... 입고 있는 옷은 또 어떻고... 썩은 치즈처럼 고약하군... 벌써 이 동굴 안에 냄새가 배어버렸어... 짜증 나는군...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가릴 처지가 아니지... 시장이 반찬인 법... 고맙게 잘 먹으마...”

 

 용이 놈의 시체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꿀꺽, 시체를 한입에 삼킨 용이 고개를 돌려 다른 고블린들을 내려다보았다. 공포에 사로잡힌 놈들은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용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동굴은 고블린들에게는 운동장처럼 넓었지만, 용에게는 다락방처럼 좁은 곳이었다. 용이 손을 절반도 채 뻗치지 않아도, 고블린들이 헐떡이며 뛰어간 거리를 따라잡고도 남았다. 쿵쿵, 용은 파리 잡듯이 놈들을 때려죽이기 시작했다. 천장에서 떨어진 돌조각들이 소녀의 머리 위에 쏟아졌다.

 

 “이런, 한 놈이 도망가는군.”

 

 간신히 용의 공격을 피한 고블린 한 마리가 소녀가 있는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용의 목소리와 고블린의 발소리에 소녀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도망치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고블린들을 상대론 남은 힘을 짜내면서까지 겨우 도망쳤지만, 저 거대한 맹수에게는 도저히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자신에게 달려오는 고블린 따위는 이제 안중에도 없었다. 겁먹은 소녀는 두 다리를 끌어안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기만 했다.

 

 “끼에에엑!”

 

 고블린이 소녀 바로 옆까지 달려왔을 때, 거대한 꼬리가 채찍처럼 내리쳤다.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피가 사방으로 튀었고, 소녀의 발치에도 끈적끈적한 피가 한 움큼 쏟아졌다.

 

 ‘나도... 들키면 저렇게...’

 

 소녀의 머릿속에 끔찍한 상상이 스쳐 지나갔다. 소녀는 필사적으로 눈동자를 굴리며 탈출구를 찾았으나, 용이 이리저리 날뛰는 바람에 동굴은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대로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 소녀는 용이 고블린의 시체를 하나하나 주워 먹는 동안, 동굴 끝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지친 다리가 감전된 듯 저릿했고, 고깃덩이가 된 고블린들이 쩍쩍 떨어지는 소리에 정신이 아뜩하였으나, 고블린에게 도망쳐 왔을 때처럼 소녀는 간신히 마음을 가다듬으며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갑자기 빛이 사라지고 동굴 전체가 완전히 어둠에 잠겨버렸다. 시체가 쩍하며 떨어지는 소리도, 꿀꺽 용이 먹이를 삼키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소녀는 그와 동시에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흘렀고, 차갑고 축축한 한기에 소름이 돋았다.

 

 “음... 그저 고블린들 이빨에 낀 냄새였다고 생각했건만... 쥐새끼가 한 마리 더 있었군...”

 

 용이 어둠 속에서 코를 킁킁거리며 중얼거렸다. 소녀의 냄새를 맡은 모양이었다. 소녀는 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용이 그냥 착각이었다고 말하기를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소녀의 기도는 하늘에 닿지 않은 듯했다.

 

 “이 냄새... 낯이 익어... 인간이군... 털 없는 원숭이들... 저런, 다쳤구나... 피 냄새가 진동하는군... 고블린들에게 쫓겨 들어온 거니? 나에게 감사하렴... 덕분에 그 보잘것없는 목숨이 조금이나마 길어졌으니... 그런데 이상하구나, 인간의 피 냄새는 비릿하기 마련인데... 넌 달콤한 향기가 나... 살에서도 놈들의 역겨운 쉰내가 나지 않아... 아 그렇군... 인간의 새끼구나... 너는 단내를 풀풀 풍기면서 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무리란다. 어디 있니, 어서 나오렴... 금방 잡아먹지는 않을게... 아가야...”

 

 사방에서 용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 바짝 엎드린 소녀로서는 용의 머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소녀는 이대로 일어나 달려나갈까도 생각했지만, 일어나는 순간 용의 거대한 손바닥이 머리 위로 내리칠 것 같은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래서인지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소녀는 너무 무서워 흐느끼기 시작했고, 결국 자기도 모르게 실금을 하고 말았다. 옷이 축축해졌고, 허벅지 사이가 뜨거워졌다. 용이 그걸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저런... 꼴사납게도... 너무 무서웠구나... 멍청한 고블린들도 그런 꼴은 보이지 않았는데... 불쌍한 것...”

 

 용의 목소리는 소녀 바로 위에서 들리고 있었다. 차가운 숨결이 거칠게 내려와 소녀의 머리를 식혀주었다. 소녀는 더 크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제발....”

 

 그리고 다시 동굴이 밝아졌다. 소녀는 도저히 고개를 돌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있으면, 모든 게 악몽처럼 그저 지나갈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흐려진 시야 옆으로 보이는 용의 손톱과 식어가는 소변의 차가운 감촉은 모두 현실이었다.

 

 “숨바꼭질을 좋아하는 아이구나, 안타깝지만 네가 졌다. 그만 일어나라.”

 

 소녀의 몸보다도 두세 배는 거대한 손톱이 소녀의 배 쪽으로 다가오더니, 휙 그녀의 몸을 뒤집어 버렸다. 소녀는 그제야 황금빛 두 눈을 부라리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용의 머리를 마주할 수 있었지만, 빛나는 손톱과 눈물 때문에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소녀는 벌벌 떨면서도 앉은 채로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멀리 도망가지는 못했다. 곧 힘이 빠져버렸기 때문이었다. 거친 돌바닥에 손바닥이 까이고 다쳤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제발 살려주세요... 용님... 제발 살려주세요...”

 

 용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눈물을 쏟아낸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오히려 눈물은 명을 재촉하는 경우가 많지. 그러나 걱정 마라, 나는 너를 쉽게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용이 손톱으로 바닥을 내려치자 소녀는 비명을 지르며 살려달라고 더 크게 소리쳤다. 그 모습이 재미있는지 용은 더 크게 웃기 시작했다. 쩌렁쩌렁한 용의 웃음소리가 동굴 전체에 울려 퍼졌다.

 

 “크하하하, 저기 널브러진 녹색 요정들과는 다르게 넌 참 재미있는 아이구나... 그래, 어떻게 이 몸이 자고 있는 이 좁고 차가운 동굴에 오게 됐니?”

 

 “도, 도토리를 줍다가...”

 

 “도토리? 귀엽구나, 그런데 그 도토리는 어디 있느냐.”

 

 “그, 그게, 고블린한테 쫓기다가 잃어버렸어요.”

 

 “잃어버려? 지금 내게 장난을 치는군.”

 

 “아, 아니에요! 진짜에요. 지금 보내주시면 당장 찾아올게요...”

 

 “흐하하하... 어린 것이 벌써 잔꾀를 쓰는구나... 비록 어리석은 꾀지만 말이야...” 용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그런데 이 먼 곳까지 도토리를 줍다가 고블린들에게 쫓기다니, 너도 참 어리석구나. 그래, 집을 나온 지 얼마나 되었니?”

 

 “네, 네? 어, 그게... 하, 한, 두 시간 전이요...”

 

 “뭐?”

 

 장난스럽던 용의 말투가 갑자기 달라졌다. 이제 용이 잡아먹을 준비를 하는구나 생각해 소녀는 두 눈을 질끈 감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용은 소녀에게 조용히 질문했다.

 

 “인간의 어린 자식아, 넌 대체 어디서 왔니?”

 

 소녀의 생각과 달리 용은 바로 아가리를 벌리며 달려들지 않았다. 오히려 아까보다 훨씬 차분해진 목소리였다.

 

 “저, 전... 수, 숲 밖에 있는 마을에서...”

 

 “마을? 마을이면, 리메스를 말하는 건가?”

 

 “리, 리메스요...?”

 

 소녀가 의아해하자, 용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소녀는 리메스라는 도시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 현재 영주가 사는 도시 바로 옆에는 거대한 폐허가 하나 있는데, 그 폐허가 예전에는 리메스라는 이름의 도시였던 것이다. 소녀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 최대한 자신이 아는 것을 허겁지겁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 아니요! 리, 리메스는 예, 예전에 큰 도시였는데 지금은 폐허가 됐고요... 지, 지금은 그 옆에 레... 레이워스 공작님의 성이 하나 있어요... 저, 저는 그 성 밖에 있는 작은 마을 출신이고... 그, 그리고 도, 도토리를 줍다가... 고블린들에게...”

 

 “시끄럽다.”

 

 용이 커다란 입을 벌리며 언성을 높였다. 소녀는 깜짝 놀라 울먹이면서도 소리를 내지 않으려 끙끙거렸다.

 

 용은 생각에 잠겼다. 소녀가 눈물을 흘리는지, 다시 도망치기 위해 눈치를 보는지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용은 이 상황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리메스는 용이 이곳에 깃들기 전부터 있었던 작은 도시의 이름이었다. 리메스는 크게 번영하고 다시 쇠락했으며, 결국엔 멸망한 국경 도시였다.

 

 용은 소녀가 단지 길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소녀는 이 근처에서 사는 모양이었다. 소녀 역시 자신이 근처 마을에서 왔다고 말하고 있었다. 자세히 냄새를 맡고서야, 용은 이 어린 인간에게는 모험가처럼 오랫동안 타지를 떠돈 사람이 풍기는 먼지 냄새, 흙냄새와 뒤섞인 풀냄새 따위가 거의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번에는 귀를 기울여 동굴 밖의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솥의 물이 끓는 소리와 빵 써는 칼 소리 등이 지척에서 들리고 있었고, 좀 더 먼 곳, 예전 리메스가 있던 곳 근처에서 인간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마차 소리, 대장장이의 망치 소리 등과 함께 들리고 있었다. 소음은 난잡하고 시끄러웠다. 예전 리메스보다 훨씬 인구가 많은 도시인 것 같았다. 게다가 영향권마저 훨씬 넓었다. 예전의 도시는 고작 마차가 길을 지나다니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아예 도시로 가는 길에 마을이 여러 개 흩어져 있는 모양이었다. 용은 그제야 자신이 정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용은 어린 인간을 보며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인간의 아이야, 하나만 묻자. 넌 가족이 있느냐?”

 

 소녀는 깜짝 놀라 용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막 용의 꼬리 밑에서 자신이 들어온 구멍을 발견한 참이었다. 다행히 용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나 갑자기 호구조사라니, 소녀는 용이 이대로 동굴을 부수고 날아가 자신이 사는 마을을 박살 낼까 봐 두려워졌다. 그러나 용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위협적이어서, 그만 반사적으로 대답하고 말았다.

 

 “어, 어머니가 있어요...”

 

 “흠...”

 

 용은 그 사이에도 계속해서 도시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사슬 갑옷과 철갑 옷이 부딪히며 나는 철컥거리는 소리, 통일된 발소리, 인간 기사와 병사들의 소리였다. 골치 아픈 일이다. 이대로 이 어린 인간을 잡아먹으면 어미가 애타게 찾을 것이고, 곧 인간 병력이 근처를 샅샅이 수색할 것이다. 그렇다고 돌려보내면 곧장 군대가 몰려올 것이 뻔했다. 용은 예전에 고룡에게 배웠던 정신을 지배하는 마법이 생각났다. 묘안이라고 생각해 바로 실행에 옮기려 했으나, 어찌 된 일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용은 다시 한 번 소녀에게 물었다.

 

 “너는 혹시 마그누스라는 인간의 왕을 아는가?”

 

 “마, 마그누스요...? 호, 혹시 전쟁 영웅 마그누스...”

 

 “영웅? 뭐 아무튼, 그자가 죽은 지 몇 년이 지났지?”

 

 “그, 글쎄요... 저는 그냥 동요로만 알고 있어서요... 그, 그래도 수천 년은 된 걸로 알아요...”

 

 용은 큰 한숨을 쉬었다. 너무 오래 자 버린 것이다. 수천 년이면 다른 용들은 벌써 자기들 고향으로 돌아가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용은 당장에라도 기지개를 켜고 이 좁은 동굴을 벗어나 북쪽 설원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자신이 잠든 사이 이곳은 인간의 영역 한가운데가 되고 말았다. 용은 다시는 인간들과 대적하고 싶지 않았다.

 

 소녀는 용의 눈치를 살폈다. 아까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납게 웃으며 소녀를 겁주던 용은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뭔가 깊은 생각에 빠진 것 같았다. 심지어 질문할 때에도 그녀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도망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소녀는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소녀는 조심조심 용의 몸통 쪽을 향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역시나 용은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소녀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다. 중간에 용이 몸을 틀며 손을 되짚었으나, 용은 여전히 천장을 향해 고개를 치켜든 상태였다. 용은 날벌레를 눈으로 좇듯 조금씩 고개를 돌렸지만, 아래쪽은 전혀 보지 않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소녀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지금이 유일한 탈출 기회라는 사실만은 확실했기에, 소녀는 인내심을 발휘해 꾸준히, 쉬지 않고 기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용의 몸통을 지나 구멍이 있는 꼬리 쪽까지 다가가는 데 성공했다.

 

 빛을 발하는 용의 손톱이 뒤편에 있어 구멍은 그림자 속에 감춰져 있었지만, 희미하게 명암이 달라 구멍이 어디에 있는지는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용의 꼬리가 소녀 위에서 휙휙 채찍처럼 꿈틀거렸지만, 바닥에 내려앉지는 않았다. 드디어 탈출구가 가까워졌고, 소녀는 전력 질주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소녀가 일어나는 순간, 용의 꼬리가 번개처럼 내리쳤다. 바위가 부서져 작은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소녀는 엄청난 충격에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고, 돌조각이 목과 뺨을 스치고 날아갔다. 먼지가 가라앉고 동굴이 다시 조용해졌다. 소녀는 얼어붙은 채 거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동그랗게 뜬 두 눈은 무너진 출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감히 미물 주제에 나에게서 도망치려 하다니!”

 

 분노한 용이 소리쳤다. 고블린들을 향해 내질렀던 포효보단 작았지만, 소녀의 가슴을 졸이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소녀는 숨쉬기가 곤란한지 컥컥 거리며 마른기침을 해댔다. 용이 천천히 몸을 틀어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차분하진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곳에서 나가고 싶으냐?”

 

 “...”

 

 “왜 말이 없는 것이냐?”

 

 용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본 소녀는 발작한 사람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경련했다. 그리고 병자처럼 피 냄새나는 기침을 뱉어냈다. 소녀는 한참 뒤에야 겨우 숨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조금 뒤, 소녀는 부르르 떨리는 입술을 천천히 떼기 시작했다.

 

 “저, 저는 잡아먹더라도... 제, 제발 마을로는... 가지 말아 주세요... 부탁이에요...”

 

 “...”

 

 “요, 용님... 제발...”

 

 소녀의 애절한 부탁에도 용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소녀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용은 가만히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마을로는 가지 않으마... 그리고 널 잡아먹지도 않을 것이다.”

 

 소녀는 고개를 들었다.

 

 “대신 조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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