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탁과 다휘에게 부축을 받으며 라운지로 들어선 기준의 모습에 모두가 경악했다.
그의 복부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의 셔츠를 붉게 물들였고, 두 다리는 바닥에 질질 끌려 들어왔기 때문이다.
상황판단이 빠른 은호는 암살부 간부들 중 막내인 호수를 시켜 들 것을 가져오라 지시하고, 급히 그의 상처를 짓눌렀다.
호수는 마침 재고정리를 하던 부하와 함께 서둘러 이동식 간이침대를 끌고 왔고, 들 것에 실린 기준은 2층의 치료실로 옮겨졌다.
한편, 다휘는 은호의 지시에 따라 수건들을 따뜻한 물에 적시고 있었다.
6개 정도 물이 흐르지 않을 정도로 짜낸 수건들을 바구니에 담고, 다휘는 화장실에서 나와 바로 옆방인 치료실로 이동했다.
“은호야. 여기··.”
“그래. 고마워. 굳이 네가 안 해도 되는 걸··.”
은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모두 침대에서 물러나게 한 후, 마취 주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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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 씨가 왜 이러시는지 아시는 분?”
깊게 잠에 든 기준을 내려다보며, 은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준의 복부는 언제 피가 있었냐는 듯이 은호가 감은 깨끗한 붕대가 둘러져 있었다.
치료실 안을 가득 채운 남자들은 죄다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은호의 시선은 혜혁을 향했다.
“암살부 수장은 아실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은호가 말했다.
그녀는 ‘내가 여기까지 와서 피를 봐야 해?’ 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어제 밤에 급한 일이 들어와서 녀석을 보냈지. 새벽에 복귀해서 바로 방으로 간 것 같아, 무슨 일이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혜혁은 은근슬쩍 은호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자신이 그의 상사이니, 어느 정도 책임은 있었다.
은호는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뒤쪽 소파에 앉아있는 다휘를 힐끗, 하고 등 너머로 본 은호는 팔짱을 끼고 남자들을 향해 말했다.
“칼에 찔린 상처에요. 깊이가 깊진 않지만 칼로 찌르면서 속을 헤집었어요. 그 상처로 잘도 지금까지 버텼네. 아무튼, 기준 님이 회복이 빠른 편이라도 해도 최소 10일은 쉬어야 해요. 혜혁 님. 아셨어요?”
은호의 날카로운 시선이 혜혁을 유독 찔러댔다.
혜혁은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일은 항상 많은데 사람이 부족한 것이 문제였다.
특히 기준이나 형주, 호수 같이 일 처리가 깔끔하고 전문적인 솜씨는 더욱 그랬다.
“어쩔 수 없군. 당분간은 급이 낮은 애들을 쓰는 수밖에.” 혜혁이 짧게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려 형주를 쳐다봤다.
형주는 어깨를 으쓱이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그럼 자리 좀 옮길까?” 상황이 나아진 것으로 판단한 연호가 모두를 둘러봤다.
본인은 눈치 채지 못하는 모양이지만, 사실 모두의 관심은 다휘를 향해 있었다.
특히 그녀를 처음 마주한 암살부 소속들은 더욱.
“그래. 라운지로 돌아가지.” 도담이 벗고 있던 중절모를 머리 위로 덮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검은 중절모는 항상 그와 함께인 듯하다.
도담의 말에 모두가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담은 가장 먼저 치료실을 나섰고, 은호는 다휘의 손을 잡고 함께 나가면서 치료실 당직의 사람에게 기준을 잘 지켜보라며 당부했다.
“다휘야. 진탁 님에게 저기 누워있는 사람이 누군지 들었어?” 은호가 다휘에게 물었다.
다휘는 기준이 쓰러질 때, 진탁이 그의 이름을 불렀던 것을 기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저 사람이 백기준 씨야?”
“맞아! 기준 님은 여기에 입단하기 전에 모델을 했대.”
“우와·· 모델?”
은호의 말에 다휘는 기준이 누워있던 모습을 다시 떠올렸다.
길쭉한 팔과 다리, 그리고 얇아 보이지만 그를 부축할 때 느꼈던 몸의 근육들.
언뜻 보였던 옅은 회색빛의 눈동자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멋있다.” 다휘가 작게 읊조렸다.
그녀의 중얼거림을 들은 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기준 님이 예전에 모델 일 했을 때 사진이 라운지에 몇 개 있을 거야. 가서 보여줄게!”
“응··!”
은호의 제안에 다휘는 고개를 끄덕이며, 위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이어 얼마 지나지 않아, 꼭대기 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다시 열렸다.
가장 마지막에 탄 탓에 가장 먼저 내리게 된 다휘는 은호의 손에 이끌려 라운지로 들어갔다.
기준이 흘렸던 핏자국은 어느새 말끔히 지워져 있었다.
대리석으로 된 바닥 덕분에 청소가 용이했다.
두 사람은 한쪽 벽에 걸린 많은 액자들을 향했다.
“아, 저기 있다. 보여? 저기에 있는 어린 모습의 기준 님.”
은호가 어느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휘의 시선은 은호의 손끝을 따랐다.
사진 속의 소년은 기준의 모습과 똑같았다.
굉장히 화려한 털 망토를 입고 나무 상자 위에 앉아 있는 사진이었다. 어딘가 외로워 보이는 분위기와 독특한 색감이 특징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곧 그 사진의 옆에 있는 커다란 액자로 향했다.
정장을 입은 남자들과 하얀 가운을 입은 한 여자의 단체사진이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여자는 은호였고, 남자들은 bloody ellipse의 간부들이었다. 그 중에는 휘원의 모습도 있었다.
다휘는 무의식적으로 그 액자에 가까이 갔다.
은호는 다휘의 움직임에 아무 말 하지 않고 지켜봤고, 그녀가 모두의 단체사진 앞에 멈추는 것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은호와 다휘의 뒤로 들어온 이들은 갑자기 조용해진 라운지에 함께 침묵을 지키며 들어왔다.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단체 사진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다휘의 모습과 그녀를 지켜보는 은호였다.
민환은 본부에 일이 생겨 함께 오지 못했고, 본부에서 이곳으로 온 사람은 연호, 도담, 진탁, 그리고 로이드였다.
이들 중 어제 다휘를 데려왔던 연호와 도담, 그리고 진탁은 다휘의 행동을 눈치 채고 모두 멈칫했다.
“·· 다휘야.” 연호가 조심스레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다휘에게는 누구의 목소리도 닿지 못했다.
숨기고 있었다. 슬픈 감정을. 힘든 현실에 붕 뜬 마음을. 가족을 잃은 아픔을.
모두가 자신을 걱정해주고 있어서 밝은 모습으로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섬세한 유리 같아서, 휘원이 웃고 있는 표정이 찍힌 사진에 깨져버렸다.
“오빠···.”
다휘는 사진 속 휘원과 마주하고 있었다.
연호와 민환 사이에 서서 어깨동무를 하고 활짝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모습에 다휘는 잠시 멈춰두었던 눈물이 흘러나왔다.
“하···.”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애써 숨기려고 떨려오는 어깨에 힘을 주고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은호는 가슴이 함께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의 죽음은 자신들에게 일상이었지만, 평범한 여자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은호와 연호, 그리고 진탁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감정이 ‘결여’되어 있어서, 죽음에 대해 깊은 생각을 갖지 못했다.
“다휘야··.”
연호는 한 번 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다휘의 뒷모습을 보며 나아갔다.
사진 속 휘원을 손가락 끝으로 어루만지던 다휘는 이내 하늘에 구멍이 난 것처럼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연호는 그런 다휘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다휘의 몸은 시렸지만, 연호의 몸은 따뜻했다.
그의 온기가 다휘를 달래주었다. 그의 숨소리가 다휘를 진정시키려 노력했고, 그의 손이 다휘를 천천히 토닥였다.
하지만 다휘의 울음소리는 점점 라운지를 채워나갔다.
일행에서 떨어져 혼자 다니며 모두를 지켜보던 선우가 라운지의 출입구 근처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휘원에게 항상 말로만 듣던 어여쁜 동생이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그녀는 휘원의 죽음에 오열하고 있었고, 그 울음소리는 굉장히 듣기 괴로웠다.
선우는 이내 눈을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갈 거면 흔적을 남기고 가진 말았어야지. 선우가 휘원을 향한 말을 삼키며 입술을 깨물었다.
암살 전문부의 세 사람은 모두 뚱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그녀의 슬픔에 공감해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휘원이 죽은 것은 안타깝지만, 그게 눈물을 흘릴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도담은 휘원을 생각하며 혼자 눈물을 축였던 자신을 떠올렸다.
누군가를 위해 운적은 처음이었다.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질 때도, 아끼는 부하를 잃었을 때도, 몸에 큰 상처를 입어 고통을 느낄 때도 눈물을 흘린 적은 없었던 그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상하게도 다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모두 저마다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 이 상황을 보내고 있었다.
다휘는 그렇게 모두의 시선 속에서 끝도 없는 눈물을 흘리며, 다리가 저려오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연호의 품에 안겨있었다.
그녀를 압박해오던 ‘죽음’이란 현실에 다휘는 한계를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