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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THE LAST SIRIO
작가 : 죽군
작품등록일 : 2016.8.24

입시준비생 도승한은 잠자리가 불편하여 오랫동안 사용해 낡은 베개를 바꾸게 되는데, 그 베개를 베고 잘 때마다 항상 같은 꿈을 꾸게 된다.

여러 사람이 모인 넓은 공간에서 한 명의 소녀와 마주보는 꿈. 그 꿈이 너무나 신경 쓰인 승한은 한동안 고민에 시달린다.

그리고 그 고민 속에 공포가 싹트려는 그 순간. 마침내 승한 앞에 나타난 꿈속의 소녀.

꿈이 아닌 현실에서 두 명이 만나는 순간, 이야기의 첫 페이지가 펼쳐진다.

 
LAST SIRIO - 5
작성일 : 16-09-14 02:50     조회 : 418     추천 : 1     분량 : 9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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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간이다. 이제 약속한대로 행동해주기 바란다.”

  형체가 얌전하지 못한 검은 것이 그렇게 말했다. 검은 것은 자기를 ‘혼돈’이라 하였다.

  “드디어….”

  눈을 뜨며 말한 소녀는 누워있지도, 서있지도 않은 채 혼돈과 마주했다. 그 표정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감정이 섞여 있었다.

  “노파심에 다시 묻는데… 약속은 반드시 지키겠지?”

  소녀가 묻자 검은 것의 대답이 그들이 있는 공간을 천천히 잠식했다.

  “크크크… 걱정마라. 나는 사흉(四凶)이다. 이런 것으로 네놈을 속일만큼 속이 좁은 존재가 아니다.”

  “…흥. 말은 잘하네.”

  소녀가 고개를 외면하자 그제야 그 공간에 ‘지면’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처럼, 그녀는 작은 보폭으로 혼돈을 뒤로했다.

  “아. 그렇군. 한 가지 빼먹었군.”

  분명히 멀어졌을 혼돈이 어느덧 소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불온분자(不穩分子)가 하나 섞여 들어왔다. 판단은 네게 맡기겠다.”

  “불온분자…? 그런 것이 있기나 했어?”

  이해가기 힘들다는 표정의 소녀를 혼돈은 비웃었다. 소녀는 조롱당하는 게 뻔했지만 그것에 반박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것의 앞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함구(含垢)뿐이었다.

  “재밌군. 아마 곤륜산을 내려와서는 처음으로 웃어보는 것 같다.”

  그 순간. 검은 것은 담장을 넘어가는 구렁이처럼 형체를 바꿔 그녀를 감싸 돌더니, 순식간에 포승줄처럼 그녀를 꽉 졸라매었다. 당연히 소녀는 괴로워했지만, 그것은 물리적인 힘에 의한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정신적인 압박에 의한 고통이었다.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고통에 소녀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것을 경험을 해봤다 고해서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 부분은 소녀도 알고 있었다. 왜냐면 그것이 혼돈과 자신의 격차였기 때문이다.

  “오호. 나름 이름 있는 것이라 그런지 제법 버티는구나?”

  검은 것이 소녀를 조이던 힘을 풀고 구렁이가 되기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자, 으스러질 것 같았던 소녀의 정신에 신선한 공기가 환기되었다. 그때 소녀의 이마에서 시작한 땀이 그녀의 쇄골에 닿을 만큼,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을 그녀는 눈치 채지 못했다.

  “뼈대 있는 잡것이여. 내 친히 네게 선물을 하나 주마.”

  그렇게 말한 검은 것이 또 다시 형태를 바꾸었다. 이번엔 곰과 같은 웅장한 체격으로 나름 또렷한 형상을 지녔지만, 소녀는 어딘지 모르게 방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이질감을 느꼈다. 그래서 소녀는 그 모습이 혼돈의 본래의 모습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뭐야. 선물이란 게 고작 개새끼 한 마리야?”

  소녀의 그 말은 그야말로 자살행위였다. 어디서 나온 배짱인지 본인도 신기해하며 스스로를 원망했다. 다행히 혼돈은 그런 소녀의 모습이 언짢지는 않았는지 그것을 가볍게 무시하며 발언했다.

  “지난번. 네 놈과 함께 있던 잡것 하나.”

  들어선 안 될 것을 들은 것 마냥, 소녀의 표정이 삽시간에 사색이 되었다.

  “크크크… 알기 쉬워… 너희 잡것들은 말이야… 너무나 알기 쉬워.”

  “닥치고 말해!!”

  손을 뻗어 혼돈을 쥐려했지만, 결코 잡히지 않았다. 애초에 그것을 손으로 잡는 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보채지마라. 말하지 말라고 해도 말할 것이니.”

  혼돈이 소녀에게서 멀어져갔다. 하지만 그것은 멀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불온분자… 그게 네 옆에 있던 그 놈을 쳤다.”

  “무, 뭐!?”

  혼돈의 말소리는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또박또박 또렷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것의 모습은 점점 멀어지다 못해,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멀어지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네가 직접 판단하도록. 허나, 이것 하나는 명심해라.”

  왜냐하면, 소녀는 자신이 서있는 그 공간 자체가 혼돈이란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사흉의 혼돈. 네게 거짓을 토할 만큼 속이 좁은 존재가 아니다.”

  “….”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혼돈이 사라진 뒤였다.

  이번엔 검고 어지러운 것 대신 차가운 겨울바람이 그녀를 감쌌다. 그곳은 어느 한 고층빌딩의 옥상이었다.

  “어둑서니….”

  혼자서 그리운 이름을 입에 담아보는 소녀. 소녀는 잠시나마 소중한 기억에 잠겨봤지만, 그리 길지 못했다.

  억누르지 못한 눈물을 겨울바람에 실어 날려 보냈지만, 그것의 수취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고독히 고고한 모습으로 눈앞의 세상을 바라보았다.

  “금방 끝마치고 반드시 돌아갈게…!”

  옥상의 난간에 선 소녀. 바람을 느끼며 그것에게 자신을 맡겨본다. 그러자 마치 오랜 고우(故友)처럼 바람은 소녀를 배신하지 않고, 안아 올렸다.

 

 ◇

 

  승한은 시계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완전한 심야라는 것을 체감했다. 그만큼 둘의 실랑이는 격했던 모양이다.

  “후우… 너… 여자 맞냐?”

  건장하다고 말하기엔 민망하지만, 그래도 나름 부실한 곳 없이 평균 남자 체력의 이상이라 자부하던 승한인데, 자신보다 연하인데다가 체구도 자기보다 더 왜소한 소녀에게 힘으로 우위를 차지할 수 없었던 것이 내심 마음에 걸렸다. 물론 그 사실을 눈치 못 챌 만큼 인시스의 눈치가 저단(低段)은 아니었지만, 굳이 그것을 분위기 전환의 소재로 삼으려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모종의 비아냥거림처럼 들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난 오히려 네 힘에 놀랐다고?”

  비아냥거림은커녕, 오히려 상대를 치켜세워주는 화법. 그런 인시스의 대답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지만, 그녀의 인품을 완벽하게 대변하고 있었다.

  “이, 이정도로 놀라긴 무슨! 난 적당히 봐주면서 했다!”

  정말로 누가 연장자인지 분간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더 이상 나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나는 이제 전력으로 임하겠어.”

  “헤에… 전력이라… 그건 또 그것대로 보고 싶은걸?”

  턱 바로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푸른 눈동자에는 여유가 섞인 호기심이 가득했다. 침을 삼키는 건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만약 네 전력에 이긴다면, 시리오를 넘기겠어?”

  자기보다 머리 하나만큼 더 작은 그녀를 분명 내려다보고 있는데도, 어딘가 모르게 자신을 짓누르는 압박감을 느끼는 승한. 그치만 그것도 승한의 철부지면모를 죽이진 못했다.

  “아, 안줘! 안준다고!”

  또 다시 원점회귀. 어쩌면 이제는 자존심의 문제가 아닌가도 싶은 둘의 갈등은 좀처럼 타협점이 보이질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어디 내로라할만한 대단한 물건도 아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 검은 베개의 정체를 몰랐을 경우이고, 그것의 정체를 알고 있는 두 사람에겐 논외였다.

  “그·러·니·까! 네가 돈을 주고 샀다고 했으니, 나 역시 돈을 준다니까? 두 배 아니, 세 배까지도 줄게!”

  이러한 패턴의 연속이었다.

  인시스가 승한의 방에 들어오면서 함께 몰고 왔던 한기는 이제 난방에 의해 사라졌지만, 어쩌면 두 사람의 열기가 없앤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둘의 요구는 끈질겼고, 둘 다 거듭되는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인시스는 한 숨을 내뱉었다. 머리가 쥐어짜지는 것처럼 아팠다. 아무래도 승한보다 그녀에게 먼저 한계가 찾아온 모양이다.

  “크게 될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 이 나라 속담이지? 그런데 벌써부터 이렇게 속이 좁아서야, 젠틀맨이 되는 건 다른 세계선에서도 불가능하겠구먼!”

  그녀 딴에는 최대한 정중했던 부탁에서 이제는 인심을 건드리는 도발로 전략을 바꾼 인시스. 승한의 심정을 뒤엎어버린 그 말은 딱히 나무랄 곳이 없어서 반박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그의 확고한 의지를 흔들기엔 화력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이쯤 되면 인시스도 어느 정도 눈치 챘을 지도 모르지만, 승한이 그렇게까지 그것을 고집하는 이유는 단지 유치한 고집 때문만이 아니었다. 사실은 승한도 인시스가 한 이야기에 관심이 있어서 그랬던 것이다.

  평범하지 않은 특별한 힘과 그 힘이 깃든 것. 그 베개만 있다면 자신도 특별해지지 않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망상에 선뜻 베개를 줄 수 없었다.

  “너야 말로 왜 이렇게 이 베개에 집착하는 건데?”

  그러고 보니 승한은 그녀에게 이 베개의 정체에 대해서만 들었지, 그녀가 어째서 이것을 원하는지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다.

  “내가 그걸 왜 말해야 하는데?”

  새침스럽게 대답하는 인시스.

  “싫으면 말고.”

  두 사람이 모두 갑(甲)인 거래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으아아! 이 고집붙통 새끼야!”

  가녀린 손이 승한의 멱을 잡아챘다. 그리고 그것을 당겨 자신과 눈을 마주보게 하였다.

  “이봐… 그렇게 소리치면 이웃에서 신고할걸?”

  “으, 으으….”

  상대방에게 갑자기 멱을 낚아채지는 것에 얌전할 만큼 승한의 담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자신보다 키도 작고 곱상하게 생긴 외국 소녀가 그런다면 조금 달랐다.

  “…좋아. 나도 폭력은 싫어하니까.”

  그녀는 멱을 쥐던 고사리 같은 손을 놓았다. 그리고 자신이 구겨놓은 승한의 멱을 살며시 단정하게 해주는 배려까지 발휘했다.

  “아무래도, 내가 날을 잘못 찾아 온 모양이네.”

  인시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때, 드디어 승한은 그녀의 무릎까지 오는 긴 부츠를 눈치 챘다. 매우 불쾌했지만, 지금은 그것을 표출하지 않았다.

  설마 했지만, 정말로 창문을 열며 들어왔던 곳으로 나가려는 인시스. 그것이 수미상관이라는 얼토당토 않는 말을 꺼내며 가볍게 점프하더니, 마치 그녀에겐 다른 중력이 작용하는 것처럼 너무나 쉽게 창문 난간을 딛고 섰다.

  차가운 바람이 맞이하는 창문 너머의 세상을 보았다. 그곳엔 마치 승한과 인시스만 있는 세상인 것처럼 고요한 달빛이 그 둘을 비추고 있었다.

  “…좀 이상한데?”

  인시스가 말했다. 승한은 그녀의 표정을 보지 않았지만, 말투에서 나오는 진지함으로 그것이 농담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승한. 혹시나 해서 묻는데, 이 아파트에 사람이 살지 않는 빈 세대가 있어?”

  “음… 자세히는 몰라도 아마 없을 거야.”

  승한의 대답에 그녀의 미간은 더욱 압축되었다.

  “아무리 시간이 시간이라 해도, 이렇게 많은 세대 중에서 불이 켜진 세대가 한 세대도 없을 수 있나?”

  “어… 듣고 보니 그러….”

  그때였다. 바다를 담은 것 같은 그녀의 두 눈동자가 일순(一瞬) 초록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거의 그와 동시에 지금껏 듣지 못한 아주 큰 소리로 승한에게 호령했다.

 

  “엎드려———!”

 

  승한의 청각은 거기서 잠시 기능을 멈췄다.

  그녀의 외침이 먼저인가, 정체모를 폭발이 먼저인가. 그 해답은 자신이 엎드린 것으로 보아 아마도 전자가 먼저였던 모양이다. 승한은 진심으로 그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좀처럼 형용하기 힘든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엎드린 자신 앞에는 코트를 펄럭이는 인시스가 서있었고, 그 둘을 감싸는 초록빛의 기운은 좀 전에 그녀가 소개했던 두 자매 중 하나였다. 거기까지는 쉽게 파악이 가능했다.

  문제는 초록빛 너머의 상황이었다. 무언가 시커먼 것들이 초록빛 주위를 맴돌며 주변의 것들을 닥치는 대로 삼켰다. 물론 인터넷으로 부모님 몰래 산 야한소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걸 가지고 있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녀가 던진 것은 승한의 베개였다.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이것까지 챙겼는지는 의문이었다.

  “넌 어떻게 할 건데!”

  평균 남자 체력의 이상이라 자부하던 주제에 자기보다 머리 하나만큼이나 더 작은 소녀 뒤에서 엎드려 소리치는 것이 전부였다. 그 모습은 유치함을 넘어 꼴불견. 아니 그보다 더 심한 찌질이였지만, 결국엔 그도 일반인. 그것이 당연한 반응이었다.

  “난, 이 녀석을 상대해야지!”

  “이 녀석…?”

  세게 걷어차면 부러질 것만 같은 다리의 무릎 윗부분. 그곳에 결속된 나이프를 뽑아들며 산만하게 맴도는 시커먼 것들을 주시했다. 그러자 얼마 있지 않아 인시스가 바라보던 방향에서 다른 것들과는 구분이 되는 검은 덩어리가 나타나 다가왔다. 그것은 마치 고치와 같았다.

  “드디어 납시셨군.”

  뽑은 나이프를 얼굴높이까지 올려 자세를 갖추자, 고치 같은 검은 덩어리가 터져버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한 소녀가 나타났다.

  “뭐야? 벌써 깃든 거야? 지조 없는 녀석이네.”

  소녀는 검은 것들에 몸을 맡긴 채 머리카락을 넘기며 말했다.

  “게다가 이런 꼬마 계집애한테 깃들다니… 소름이 돋는군.”

  “꼬마? 네가 할 소리는 아닌거 같은데?”

  두 여자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오간다. 섣불리 간섭했다간 큰 화를 면치 못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은 혼비백산 상태인 승한도 알 수 있었다.

  이제는 그들이 있는 곳이 알 수 없을 만큼 검은 것들이 그 공간에 가득 찼다. 그리고 그것들이 남아있던 승한의 책을 마지막 한권까지 삼켜버렸을 때, 뒤늦게나마 그의 가족들의 안부를 걱정했지만 어떻게 손쓸 방도가 없었다.

  “저, 저기! 우리 가족은 무사….”

  “먼저 오너라. 녀석들이 그토록 경계하던 힘을 한번 보여 봐라.”

  승한의 말은 검은 것들이 물건을 삼키듯 소녀에 의해 가볍게 삼켜져버렸다.

  “흥, 먼저 오너라는 무슨! 네가 먼저 날아왔잖아! 그러니 이젠 내 차례가 당연하지!”

  인시스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장판에 부츠자국을 남길 정도로 힘차게 도약하여 그들을 감싸고 있는 초록빛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그러자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검은 것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인시스 역시 이럴 것을 예상했고, 침착하게 그것들을 나이프로 휘저으며 소녀와의 거리를 좁혀 나아갔다.

  “칫! 성가시네! 홍련!”

  인시스의 부름에 그녀의 등 뒤로 그것이 나타났다. 그리고 곧바로 주변의 검은 것들처럼 형태에 제약이 없는 상태가 되어 검은 것들 사이를 뱀처럼 흘러 지나갔다.

  “호오? 하나가 아니었네?”

  뱀처럼 이어진 것의 끝에는 문제의 불청객 소녀가 있었다. 아무래도 그 붉은 기운의 뱀은 이 혼잡한 공간 속에서 인시스를 그 소녀에게 데려다 줄 이정표인 모양이었다.

  인시스는 그것을 따라 달렸다. 애초가 승한의 방이었던 공간인지라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여기저기 산만하게 돌아다니는 검은 것들을 피해 요리조리 뛰다보니 바로 눈앞의 목적지도 한참 멀게 느껴졌다.

  “미안! 좀 늦었지?”

  마침내 소녀의 코앞까지 다가온 인시스는 입술 옆으로 흐르는 땀을 혀로 날름 닦으며, 가차 없이 나이프를 소녀에게 휘둘렀다. 표정은 천진난만해 보였지만, 그 날에는 명백하게 살기가 담겨있었다.

  푸슉. 확실히 무언가 베는 느낌을 예리한 나이프를 통해 느꼈다. 하지만 직접 육안으로 본 것은 그렇지 않았다.

  “아무래도, 네놈이 부리는 건 두 마리가 끝인가 보구나.”

  “시리오?!”

  눈앞에 있는 소녀의 오른쪽 안구를 향해 내지른 나이프는 그대로 소녀의 안구가 있던 공간을 통과해 지나갔고, 소녀의 두부(頭部)의 절반 이상이 주변의 검은 것들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매우 기괴한 모습이었지만, 소녀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어투의 변화 없이 담담하게 이어 말했다.

  “바보 같은 계집애. 네 년의 뒤에 있는 시리오를 둘러서 휘둘렀으면 조금은 더 재밌었을 것을… 흥을 깨트렸구나.”

  “칫.”

  인시스도 그 생각을 못한 것이 아니다. 소녀의 말대로 인시스가 내지른 나이프에 장화를 감쌌더라면 조금은 피해를 줬을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뒤에는 겁에 질린 베개 주인이 있어 그것이 불가능했고, 애초에 장화를 둘렀더라면 이렇게 쉽게 접근을 허락할 상대도 아니었을 것이다.

  “왜 시리오를 두 개다 사용하지 않는 거지?”

  “내 맘이다! 메에에롱!”

  나이프를 쥐지 않는 손으로 눈의 아랫부분을 당기며 혀를 내미는 모습은 딱 그녀의 또래 여자아이다운 모습이었다.

  “이해할 수 없군. 아무것도 깃들지도 않은 인간 하나를 구하려고 시리오 하나를 낭비하다니… 정말이지… 음…?”

  아직도 건재한 장화의 초록빛 속에서 벌벌 떨고 있는 승한을 소녀가 보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가 들고 있는 검은 베개도 시야에 들어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주변에 맴돌던 검은 것들의 몇몇이 그녀의 얼굴의 기괴한 부분으로 흡수되듯 달라붙었다. 그러자 소녀의 얼굴은 다시 온전한 모습을 되찾았으나, 표정은 이전과 다르게 매우 험악해져 있었다.

  “왜… 네년이 흡수했어야 할 시리오가 저기 있는 거지…?”

  소녀는 두 눈알만 굴려 바로 옆에 있는 인시스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주변을 유유히 맴돌던 검은 것들이 쏜 살처럼 일제히 인시스에게 달려들었다. 물론 인시스도 필사적으로 그것들을 나이프로 쳐내며 막았지만, 사방에서 날아드는 그것들을 다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재빨리 승한이 있는 장화 속으로 돌아왔다.

  “…대답해라.”

  “아이씨! 이렇게 쏘아붙이면 말하려 해도 못하잖아!”

  인시스는 양 손의 중지로 분노를 표출하며 마구 욕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뒤에 있던 승한이 더 놀랬다.

  “어디서 거지발싸개 같은 놈이 하나 더 왔나 싶었더니, 알레프가 아니라 시리오고! 에라이! 되는 게 하나도 없네!”

  퉤! 하며 침 뱉는 시늉에 승한은 진짜 침을 뱉었는지 바닥을 살펴봤다. 만약 성난 인시스가 그 모습을 봤으면, 그는 뒤통수가 따끔해지는 건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아! 진짜! 알레프들이 한 다스로 와도 모자를 판에, 왜 이렇게 깃들지도 않은 시리오들이 많이 꼬이는 거지?”

  이성을 잃은 듯 포효하는 인시스를 보고 있자니, 그녀에게 보호받는 승한이 오히려 그녀를 걱정했다.

  “인시스… 진정해….”

  “닥쳐! 지금 누구 때문에 이러는 건데!”

  “히익…!”

  승한은 등 위로 쌓이는 잔소리들의 무게를 느끼며, 역시 자기 자신이나 챙기자는 생각을 한층 더 두텁게 했다.

  “…그렇군. 이제야 알겠어.”

  인시스가 승한에게 화내는 동안, 잊혀진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무시당하던 소녀가 말했다. 실제로 인시스는 소녀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승한에게 하던 잔소리를 멈출 만큼 잊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소녀가 알 턱이 없었다.

  “그 놈이 말한 불온분자라는게… 네 년이었구나.”

  “그 놈? 불온분자?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손끝으로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쉬어보지만, 그렇다고 헛소리가 이해되지는 않았다.

  소녀는 검은 것들에 실려 인시스와 승한이 들어있는 초록색 장막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 인시스보다 더 어린 체구의 아이였고, 그 모습을 귀엽다고 느낀 승한이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낼 만큼 정신이 나가진 않았다.

  “보잘 것 없는 알레프여. 질문 하나 하도록 하지.”

  “…좋아! 무슨 바람인지는 모르지만, 들어보지.”

  소녀는 쭉 편 손을 내밀어 인시스에게 들이댔다. 그러자 그녀의 손바닥 위로 작은 검은 것들이 꾸물대더니 한 남자아이의 모습을 투영해냈다.

  “이 자를 만난 적이 있는가?”

  대답은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나왔다.

  “오오! 얘 어둑서니잖아? 너! 어둑서니를 아는 거니?!”

  아. 이거 설마 언어유희? 라며 혼자 웃는 인시스. 사실 승한도 살짝 웃었지만, 고개를 숙여 그것을 힘겹게 감췄다.

  “….”

  인시스의 대답이 소녀의 표정에 다시 평온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지금껏 보지 못한 미소까지 덤으로 줬다.

  “그렇군. 네 년이 확실하구나.”

  주변의 검은 것들이 소녀 주변으로 모여든다. 그리고 소녀를 감싸 안아 감추었다. 그것은 소녀가 나타났던 고치의 모습과 같았다.

  “지금까지 진중하지 못한 것에 정중히 사과한다. 어설픈 알레프여.”

  또 다시 고치가 터져버렸다. 그러나 그 안에서 나타난 것은 소녀가 아니었다.

  “하하… 이거… 일이 커져버렸네….”

  지면을 지탱하는 네 개의 발은 소의 것처럼 보였지만, 얼굴은 마치 호랑이와 같은 형상을 지닌 그것이 좀 전까지 그 자리에 있던 소녀의 목소리로 말했다.

  “내 이름은 그슨대. 지금부터 널 내 방해물로 간주하겠다.”

  마침내. 승한은 고간을 적시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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