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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공주님과 맹수들
작가 : 체스트넛
작품등록일 : 2018.9.12

수능을 백 일 남긴 고3 임윤경.
친구가 보내준 소설 주인공, 알타로스 공국의 공주 유아나에게 빙의하다!

거기까진 좋다. 문제는, 소설 내용이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
그녀가 기억하는 건 충격적이고 허무했던 결말 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유아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속이 시커먼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녀는 도주를 감행하지만, 국경을 지키는 하터스 백작가의 장남, 아이번 하터스에게 24시간도 안 돼 붙잡히고 만다.
그리고 잡혀간 백작저에서, 유아나의 삶을 쥐고 흔든 남자 뢰베 공작을 만나게 되고.

가출하다 검거된 고양이처럼 목덜미를 잡혀 집에 돌아왔더니,
어머니인 여왕이 제국의 수도로 떠나란다.
그녀의 양 어깨에 공국의 독립이 달려 있단다!

‘나한테 이런 걸 맡겨봤자..!’
울면서도 할 건 다 하는 공주님과,

“옷 정도는 혼자 입을 수 있습니다.”
“……아이번. 단추, 한 칸씩 밀려서 끼웠는데요.”
일견 무심해보이지만 사실은 어리버리한 늑대님.

“또 그 늑대를 만나러 가는 거라면,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공주님은 제 손님이니까요.”
그리고, 또다시 유아나의 삶을 흔들려는 사자님.

의도치 않게 두 맹수를 조련하게 된 유아나의 이야기.

 
2화
작성일 : 18-09-12 19:01     조회 : 212     추천 : 0     분량 : 8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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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화

 

 

 “……님, 공주님!!”

 “로즈, 차가운 물을 가져와!”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와, 무언가 출렁이는 소리가 들렸다.

 가져오지 마……

 유아나는 비몽사몽 중에도 다급히 소리쳤다.

 하지만 유아나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사람의 목소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끔찍한 소리였다.

 마치 야생동물이 천적을 만났을 때 낼 것 같은 목소리.

 유아나는 최선을 다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푸합!”

 ‘뿌리지 말라고!’

 얼굴을 마비시킬 것처럼 차가운 물을 맞은 유아나는 눈을 번쩍 뜰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기절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단다, 아가.”

 ‘애가 기절을 하면 그냥 자게 냅두지 그러셨어요!’

 침대 맡에 앉아 머리를 받쳐주고 있던 중년의 여인이 돌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유아나는 아직도 멍한 채, 여인의 푸른 눈에 고인 눈물이 얼굴 위로 뚝뚝 떨어지는 걸 보고만 있었다.

 “또, 또 이대로 일어나지 못 할까봐…….”

 침대를 둘러싼 사용인들은 모두가 눈물을 삼키느라 훌쩍이고 있었다.

 여인, 유아나의 어머니인 여왕 메티스는 한 손을 들어 유아나의 얼굴에 떨어진 눈물을 훔쳐냈다.

 “네가 또 기절한 채 일주일 내내 깨어나지 못 할까봐……”

 ‘어쩐지 내가 되게 큰 잘못을 한 것 같네.’

 유아나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사람들이 술렁이는 게 느껴졌다.

 여왕의 옆에 서 있던 마고라는 여자가 걱정을 가득 담은 얼굴로 미지근한 물을 건넸다. 유아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컵을 받아들었다.

 ‘공주님이 아랫사람에게 고개를 숙이셨다!’

 ‘역시 아직 편찮으신 거야!’

 물론 사용인들, 그리고 여왕까지 한 마음으로 충격 받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목을 축인 유아나는 크으, 소리를 내고는(다시 한 번 사람들 사이로 충격의 물결이 일었다.) 주변을 한 번 돌아보았다.

 평소에 보던 얼굴들과는 확연히 다른 생김새. 저를 ‘유아나’ 라고 부르는 사람들.

 그녀는 손을 들어 치렁치렁 늘어진 머리카락을 들어올렸다.

 단발병이 있어서 항상 어깨 밑으로 머리가 길 새가 없는 윤경과는 달리,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여왕을 보았다. 상상하던 것보다 젊은 여왕이 눈물을 머금은 채 유아나의 볼을 쓰다듬었다.

 창 밖에서 바다 새가 우는 것 같은 소리가 끼룩, 끼룩 들려오고.

 ‘맞구나. 유아나가 있던 소설 속의……’

 “알타로스.”

 그녀는 목구멍이 아홉갈래로 갈라지는 듯한 소리로 단어를 내뱉었다.

 “맞아요, 알타로스! 공주님이 정신을 완전히 차리신 것 같습니다 전하!”

 여왕의 뒤에 서 있던 푸근한 인상의 여인이 손뼉을 쳤다.

 유아나는 부축하려는 여왕의 손길도 마다하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였다.

 물론 모든 사람들은 꼭 첫걸음을 떼는 아이를 지켜보듯이 유아나를 보고 있었다.

 ‘엄청 부담스럽게 쳐다보네.’

 괜히 쭈뼛거리며 창가로 다가선 유아나는 커튼을 걷고 커다란 창문을 열었다.

 바다의 짠내음이 섞인 바람이 창문으로 휙 불어 들어왔다.

 순간 울컥 솟아오르는 눈물을 참고, 유아나는 뒤돌아서서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여전히) 천적을 만난 야생동물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찌됐건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금방 돌아갈게요.”

 그녀의 충격적인 목소리와 90도로 숙인 허리에 느낌표 하나, 그 내용에 물음표를 하나 띄운 사람들은 곧 혼비백산하여 비명을 질렀다.

 다시 창문으로 몸을 돌린 유아나가 바깥으로 발을 내딛었기 때문이었다.

 “꺄아아악!”

 “공주님!!”

 가장 가까이 서 있던 여자가 급하게 손을 뻗었지만 유아나의 몸은 이미 밖으로 떨어지는 중이었다. 아랫배부터 찌르르하게 공포가 목구멍을 죄어 왔다.

 그녀는 이게 죽음이구나, 생각하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엉?”

 그리고 유아나는 자연스럽게 둥둥 떠서 창문으로 돌아왔다. 비명을 지르던 하녀들이 얼른 창문을 걸어 잠그고 그 앞에 진을 치고 섰다.

 다시는 공주님이 그런 미친 짓을 하게 두진 않겠다는 듯 서로 팔짱까지 단단히 끼고.

 유아나는 그대로 동동 떠서 여왕의 앞에 살포시 놓였다.

 여왕은 한 손을 앞으로 쭉 뻗은 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대체 왜 이러는 것이냐, 유아나. 그럴거면 차라리, 차라리 어미를 먼저 죽이거라!”

 여왕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고함을 치고는 몸을 홱 돌려 침실을 나갔다.

 여왕을 따라왔던 호위무사들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유아나에게 경례를 올리고 그녀를 쫓아 나갔다.

 그리고 유아나는, 여전히 영문을 모른 채 침실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으으엉??”

 ‘나 분명히 방금 뛰어내렸는데??’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소리를 내면서.

 

 **

 

 “꼭 이렇게까지 해야 돼?”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질러놓고선 무슨 말씀이세요!”

 “그래, 그래. 내가 잘못했다…….”

 예전의 고운 목소리를 되찾은 유아나는 예의 그 창가에 서 있었다. 시녀 마고에게 양쪽으로 팔을 붙들린 채로.

 하녀들은 바보 같은 소리를 내던 유아나를 부드러운 천으로 꽁꽁 감쌌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자 여왕이 그녀를 집무실로 호출했다.

 ‘그 후는…… 끔찍했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여왕과 유아나만이 알았다.

 그리고 유아나는 그 긴 면담을 ‘지옥의 17시간 릴레이! 유아나가 왜 그럴까 알아내기 챌린지’라고 불렀다.

 장장 이틀에 걸쳐 틈만 나면 불려 가 끝없는 면담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이랑 진로상담을 17시간 하는 기분이었지. 내가 대체 왜 공부를 하지 않는지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진로상담.’

 그리고 그로부터 3일 후. 유아나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정확히는, 안정적인 척 행동했다. 예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며 머리를 부여잡고 쇼를 한 것 빼고는.

 아직 사정을 모르는 ‘임윤경’으로서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그 ‘자살 소동’은 그저 이러면 꿈에서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반쯤은 충동적이고 반쯤은 계획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떨어질 때의 충격에도, 갑자기 하늘로 둥둥 떠오른 충격에도 꿈은 깨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속사정을 알 리가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갑자기 깨어나더니 갑자기 창밖으로 뛰어내린 (미친) 공주님일 뿐이었다.

 그런 고로, 사실 유아나는 지금 안정되기는커녕 세상에서 제일 불안한 상태였다.

 ‘이건 여기서 나가는 방법이 아니라는 뜻이겠지.’

 유아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연한 하늘빛 꽃이 가득 핀 정원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방 창문 밖으로는 나무와 꽃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이 방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은 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다.

 창문 바로 앞에는 오로지 유아나만을 위해 꾸며진 작은 정원도 있었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많이 나다니지 못 하는 유아나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유아나가 정원을 보려 앞으로 몸을 조금 빼자, 마고가 불신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홱 돌아보았다. 그리고 발에 단단히 힘을 주는 게 느껴졌다.

 ‘아니, 창문 걸쇠에다가 쇠사슬을 세 겹이나 둘러놓고, 거기다 마법까지 걸어놨다면서. 이렇게까지 할 일이야?’

 그럴 수밖에 없는 짓을 하긴 했지만. 유아나는 작게 투덜거렸다.

 “됐어. 이제 그만 볼래. 뭐,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구만.”

 마고는 여전히 믿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팔을 풀어주었다.

 유아나는 터벅터벅 걸어가 침대에 풀썩 주저앉았다.

 “밖에 나가보고 싶은데.”

 마고가 곁에 다가와 앉으며 말했다.

 “곧 나가게 해주실 거예요. 이제 공주님도 안정되신 것 같으니까요.”

 “나 괜찮다니까 정말.”

 “조금 안정되시긴 했지만, 괜찮으신 건 아닙니다. 괜찮은 분은 갑자기 창밖으로 뛰어내리지 않아요.”

 단호한 표정으로 말한 마고가 볼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었다.

 “더 괜찮아지시면 엘리한테 부탁해서 거리로 외출도 나가요. 그러니까 지금은 푹 쉬세요.”

 ‘나 거의 일주일째 방 안에서 먹고 자고 싸고만 하고 있는데.’

 물론 싫은 건 아니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놀기만 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다른 건 몰라도 빠른 시일 내에 그 남자를 만나고, 유아나가 죽음행 케이티엑스를 타게 될 거라는 건 잘 안단 말이지.’

 지금은 유아나의 열여덟살 생일이 막 지난 여름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스무살이 되던 해에 뢰베 공작과의 결혼이 정식으로 추진된다.

 유아나는 입술을 질겅질겅 물어뜯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그녀가 아는 건 그런 것뿐이었다. 나머지는 먹물이라도 뿌려놓은 것처럼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이상한 소설 속에 떨어지긴 했지만 소설을 다 읽은 상태이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였다.

 유아나가 산산조각 나던 결말장면과 커다란 줄거리를 빼고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그녀는 ‘이 쓸모없는 머리!’를 외치며 다시 한 번 창밖으로 뛰어내릴 뻔 했다.

 물론 눈물까지 흘려가며 기억을 떠올려보려 시도는 했다. 하지만 생각 난 건 그 소설을 읽다가 선생님한테 걸릴 뻔 했던 순간뿐이었다.

 “공주님. 입술이 상하십니다.”

 마고가 과자 그릇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과자를 집어먹던 유아나는, 마고의 손에 덕지덕지 붙인 밴드를 보고 입을 열었다.

 “손 많이 다쳤네.”

 “아, 어제 조금 훈련을.”

 마고가 멋쩍게 손을 뒤로 숨겼다.

 “조금이라고 하기엔 밴드가 좀 많은 거 아니야?”

 “시,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농담이었는데.’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마고가 고개를 숙였다.

 여느 공주의 시녀들이 그렇듯, 이래봬도 마고는 알타로스의 건국공신인 유클리드 가의 귀한 자식이었다.

 무가인 가문을 따라 기사의 길을 걷고 싶었던 그녀였지만, 알타로스 왕국이 에델레드 제국의 일부가 되며 그 꿈은 무산되고 말았다. 제국법상, 여성은 기사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전쟁 중에 아버지마저 잃은 그녀는 여왕의 권유로 친구인 유아나의 시녀가 되었다. 하지만 검에 대한 열정은 여전해서, 성의 오래된 수련장에서 매일 수련을 하고 있었다.

 가볍게 던진 농담에 진지해진 모습을 보며, 유아나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검을 해서 그런 건지 뭔지, 가끔 되게 딱딱하게 군단 말이야. 어릴 적부터 친구라면서.’

 마고는 몸이 약해 성 밖을 쉽게 나다닐 수 없었던 유아나를 위한 말동무였다. 오버로드 가문의 여식 엘리와 친해진 것도 마고 때문이었다.

 약간의 신분 격차는 있었지만 세 사람은 거리낌 없이 어울려 왔다. 그랬다고 한다. 사실 이 모든 것은 기억이 안 난다고 끙끙거릴 때 마고가 하나하나 설명해준 것이었다.

 ‘그래서 되게 거리낌 없는 친구인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고.’

 마고는 유아나의 손짓에 고개를 들었다. 그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 밖에서 하녀 로즈가 말했다.

 “오버로드가의 엘리야님이 뵙기를 청하십니다.”

 “들어오라고 해!”

 “나 왔다!”

 유아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이 거칠게 열렸다. 쾌활한 인상의 붉은 머리 여자는 하녀들을 시켜 무거운 책들을 책상에 척척 쌓았다.

 “엘리, 그런 식으로 들어오지 말라니까!”

 마고가 엄한 얼굴로 엘리에게 핀잔을 줬다.

 “왜? 들어오라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한 엘리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제국식으로 허리를 조이고 엉덩이를 부풀린 드레스를 입은 엘리는 척 봐도 세련돼 보이는 미인이었다.

 그녀가 책상에 쌓인 책에 손을 턱, 올리며 말했다.

 “네가 부탁했던 세계지도랑 이 지역 상세지도. 제국에서 출판 된 걸로 가져왔어. 갑자기 이건 왜 보고 싶다는 건진 모르겠지만.”

 “아. 고마워. 빨리 보고 돌려줄게.”

 “됐어. 너 가져. 이런 것쯤 너한테 못 주겠어?”

 유아나는 씨익 웃고 커다란 지도책 표지를 넘겼다.

 “근데 이건 왜 갑자기 보고싶다는거야?”

 “언제 내가… 국제 미아가 될지 모르잖아?”

 “하하하! 니가 어떻게 미아가 돼! 애도 아니고.”

 엘리는 깔깔거리며 유아나의 어깨를 쳤다.

 ‘얘는 아무리 봐도 하는 짓이 김지은이야.’

 엘리의 손에서 익숙한 친구의 향기를 느끼며 유아나도 마주 웃었다.

 “손이 나날이 매워지는구나, 엘리. 특훈하니?”

 “어머, 특훈은 무슨? 내가 요즘 하는 훈련은 신부수업 뿐인데.”

 엘리는 ‘신부수업’을 강조하며 표정을 구겼다. 딸을 제국의 귀족과 결혼시켜 사업을 확장하겠다는 아버지의 높은 포부 때문이었다. 그래서 엘리는 제국식으로 옷을 입고, 제국의 예절을 배우며 자라났다.

 “요즘에 내가 뭘 배우는 지 알아? 제국 남자들이 환장한다는 애교화술.”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친 엘리가 허리에 손을 척 얹었다.

 “그래서 가출했어. 자꾸 교사가 이 세상에서 곧 사라질 듯 가녀리게 웃으라길래. 그 자리에서 사라져줬지.”

 마고가 짧게 감탄했다. 엘리는 남정네에게 백타 먹히는 애교 화술만을 15년 동안 정통으로 연구했다는 교사에 대한 하소연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마고는 그녀에게 팔을 붙잡힌 채 고개만 주억이고 있었다.

 유아나는 그들을 보고 픽, 웃으며 책장을 넘겼다. 제국이 그린 지도답게 그림 하나하나가 세심하고 화려했다. 엘리는 아무렇지 않게 준다고 했지만, 고가의 물건일 게 뻔했다.

 유아나는 목차를 살피고 알타로스 근처 지역으로 책장을 넘겼다. 알타로스와 제국을 가르는 무오사 산맥이 그려져 있었다.

 “아, 맞아. 이거 예전 책이라서 무오사 산맥이 좀 작게 그려져 있어. 요즘 책은 빨리 구하기가 좀 힘들더라구.”

 “그게 관계가 있어?”

 그걸 몰라? 라는 표정으로 쳐다보던 엘리는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이것도 기억 안 나나보네. 알타로스 왕국 시절엔 최대한 야만스러운 이미지를 만들고, 산맥을 별 것 아닌 것으로 만들려고 부던히 노력했었거든.”

 그녀가 손가락을 뻗어 산맥을 짚었다.

 “우리 지도로는 이것의 세 배 정도야. 알타로스에서 제국의 국경까지 가는 길을 닦고도 하루가 꼬박 걸리는 거리인 걸. 뭐, 우리 집이야 정복 덕분에 무역로도 트이고, 살림도 좋아졌지만 하여튼 교활한 놈들이야. 제국 놈들. 이제와선 여기가 자원의 보고니 뭐니……”

 잠시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 눈치를 보던 마고가 엘리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옆구리를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던 엘리는 아, 하고 얼굴을 굳혔다.

 ‘뭐야. 어디서 뭐라도 튀어나왔나?’

 영문을 알 수 없는 유아나는 쓱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것도 바뀐 건 없는데.

 표정을 굳힌 엘 리가 눈을 굴리며 입을 열었다.

 “미안. 내가 너무 흥분했나봐.”

 “제가 충분히 주의 주도록 하겠습니다. 노여움을 풀어주십시오.”

 “노여움?”

 엘리는 별안간 입을 때리기 시작했다.

 “이놈의 입! 이게 다 허구헌 날 신부수업이다 뭐다 집을 드나드는 제국놈들 때문이라니까!”

 아니. 뭔데. 왜 갑자기 이러는건데?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유아나에게, 마고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저희 모두 공주님과 왕국의 편입니다. 엘리도 절대 제국의 정복을 반기거나 하는 게 아닐 것입니다.”

 엘리는 옆에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유아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나라가 빼앗기는 슬픔을 겪은 건 이 몸의 주인일 뿐이고, 그 속에 든 윤경에게는 그저 먼 나라의 역사쯤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

 하지만 몸은 달랐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치밀어 오르더니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유아나는 마고가 재빨리 건넨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엘리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건 이 몸의 분노구나.’

 유아나는, 소설 속의 유아나는 누구보다 해맑게 웃는 인물이었지만 속은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이 분노와 슬픔은 어머니의 죽음을 두 눈으로 보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순간에도 생긋 웃을 수 있던 여자가 느낄 만한 종류가 아니었다.

 손수건을 찢어져라 비틀며 분노를 삭이던 유아나는 이내 마고에게 그것을 건넸다.

 마고는 완전히 구겨져서 회생이 불가능해 보이는 손수건을 갈무리해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유아나는 손수건 대신 소매로 얼굴을 슥 닦아 냈다.

 “난 괜찮아. 하지만 앞으로는 언행에 주의하는 편이 좋을 것 같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아니라 이 몸이 니 목을 조르러 날아갈 수도 있을 것 같거든.’

 

 유아나는 혼자 책상에 앉아 지도책을 넘겼다. 아까 친구들의 과민한 반응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유아나는 엄청 유약하고 착한 애 아니었나? 게다가 어릴 적부터 친구라면서 엄청 무서워하네.’

 소설 속에서 유아나는 이 정도 실언을 했어도 헤헤 웃어넘기곤 했다. 그래서 바보 취급을 받았다.

 ‘근데 아까 그 반응은… 그리고 이 몸의 반응도.’

 유아나는 에라, 모르겠다. 싶어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어차피 아는 것도 없는데 이런들 저런들 어떠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아나는 묵직하게 목 부근을 누르는 목걸이를 들어올렸다.

 티비에서나 보던, 맑은 바다색의 보석이 동그랗게 세공된 목걸이였다.

 별다르게 화려해보이지도 않고, 심플하기 그지없는 목걸이였지만 이래봬도 이건 알타로스의 보물, 루의 눈물이었다.

 ‘유아나 알타로스가 이용당하는 원인이기도 하고, 그녀 힘의 원천이기도 하지.’

 물론 이걸 어떻게 사용하는 지도 전혀 알 수 없었다.

 처음에야 정말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했지만, 마법마저 사용할 줄 모른다는 사실에는 눈앞이 캄캄해져 왔다.

 ‘어떻게든 되겠지’의 전제는 ‘유아나의 마법이 있으니 도망쳐도 죽지는 않겠지’ 였기 때문이었다.

 “아아아. 진짜 하나도 모르겠어.”

 유아나가 머리를 싸매고 침대에서 뒹굴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유아나는 고개만 들어 들어오라고 소리를 쳤다.

 하녀가 커다란 컵을 얹은 쟁반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유아나의 표정이 단박에 구겨졌다.

 “한번에…… 다 마셔야겠죠?”

 “그 편이 나을 것이라는 의원님의 조언이 있었습니다.”

 유아나는 하녀의 단호한 표정에 어쩔 수 없이 컵을 집어 들었다.

 코를 손으로 막고 액체를 단숨에 들이킨 유아나는 최대한 숨을 쉬지 않으려 노력하며 컵을 내려놓았다.

 언제나 볼일이 끝나면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던 하녀는, 유아나가 컵을 내려놓는 장면까지 지켜본 다음 조용히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식전 티타임에 공주님을 초대 하셨습니다.”

 유아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방금 먹은 약이 식도를 기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현재 시간, 약 오후 네 시.

 티타임인척 하면서 지옥의 잔소리 릴레이를 시작하기 딱 좋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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