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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세계의 환상
작가 : 아리본
작품등록일 : 2018.6.8

6개월 전 일어난 이상 세계 현상.
그 이후로 시작되는 사람들의 이야기

 
World 9-2 잠자는 공주
작성일 : 18-06-22 10:33     조회 : 258     추천 : 0     분량 : 23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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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정 표현이 풍부한 친절한 기사 창연은 훈련을 하고 있었다. 고된 훈련의 산물은 흘러내리는 땀방울과 딱지로 변한 상처일 것이었다. 그 딱지마저 강도 높은 훈련으로 떨어져 나가고, 지친 창연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열심이네요?”

  상쾌한 산들바람에 실린 목소리. 소리의 주인공은 흩날리는 에메랄드 빛 머리칼을 가진 공주 로웬이었다. 그녀는 뜨거운 숨을 내쉬고 있는 창연을 웃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공주님을 위해서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습니다.”

 “또 그 소리에요?”

  로웬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창연은 의외의 반응에 당황하여 그녀를 조심스레 올려다보았다.

 “절 지키다가 당신이 잘못 된다면 어떻게 해요.”

  따뜻한 마음. 창연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이 몸쯤은 얼마든지 잘못 되어도 상관없었다.

  창연은 배시시 웃으며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았다.

 “그럴 일이 없도록 제 자신을 더욱 강하게 만들겠습니다.”

  거짓말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공주의 찡그린 얼굴을 보는 건 더더욱 싫었다. 그랬기에 창연은 더욱 강해지기로 마음먹었다.

 “당신은 정말 재미있는 분이에요. 그렇게까지 해서 저를 위하는 이유가 뭔가요?”

 “그, 그건···”

  지금껏 편안하게 대답하던 창연은 이 질문만큼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기사, 그녀는 공주. 더더욱 그는 그녀를 지켜야 하는 입장으로써, ‘당신을 사랑합니다.’ 따위의 대답은 감히 입에 올릴 수 없었다.

  창연은 곤란해 할 수밖에 없었고, 로웬은 그를 바라보며 쿡쿡 웃음을 참았다.

 “당신은 정말 재밌는 분이에요.”

 “절 보고 웃을 수 있으시다니, 황송할 뿐입니다. 공주님.”

  창연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그녀에게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그랬기에 로웬의 얼굴에 점점 드리우는 그림자를 볼 수 없었다.

 “나중에···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꽃이 눈에 덮이는 날이 올 때, 스타티세와 함께 제게 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로웬은 들판 가득 펼쳐진 꽃밭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창연은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고, 고개 숙인 상태에서 눈만 깜빡이며 의문을 가져야 했다.

 “공주, 여기 있었소?”

  그때 그들에게 주황색 머리칼의 귀티 나는 한 남성이 갑옷을 입은 호위병들을 대동하며 다가왔다. 그 순간 로웬의 표정은 돌처럼 굳어졌다.

 “나요, 필립. 필립 왕자요.”

  필립은 그녀에게 반갑게 인사했지만, 로웬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여기까진 무슨 일이시죠?”

 “우린 곧 한 침대를 사용할 사이잖소? 당신의 반쪽이 될 남자로써 그대가 보고 싶어 참을 수 없었기에 여기까지 온 것이오.”

  필립이 말을 마치자마자 창연의 미간이 급격히 구겨지며 입도 자연스레 앙다물어졌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고맙소, 공주. 그나저나 이 북쪽 산은 이 혜성 마을에서 가장 추운 곳이라 했었는데, 역시 온화한 혜성에 속한 곳이라 그런지 그럼에도 따뜻하구려, 하하!”

  필립은 성채를 빙 둘러보며 감탄했다. 타국의 왕자인 필립은 혜성의 기후를 좋아했고, 편안한 분위기에 취하는 걸 즐겼다.

 “그나저나 공주는 그 기사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소?”

  필립의 물음에 한 순간 로웬과 창연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풀었다.

 “제 기사님과 한 대화마저도 왕자님께 말해야 하는 건가요?”

 “하하, 우린 이제 가족이 될 사이 아니요? 당연히 저 기사도 이제 우리들을 지켜주는 수호신이 될 텐데, 그렇다면 우리들의 가족이 될 것이고, 그렇다면 나도 알아야 하지 않소?”

  필립 왕자의 말이 끝나고, 창연은 역류할 것 같은 속을 꾹꾹 누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가 지키는 건 공주님뿐입니다. 필립 왕자님은 저기 있는 다섯 호위병들이 있지 않으십니까?”

  창연은 타국의 왕자에 대한 예를 갖추며 말했다. 하지만 필립은 호위병들을 흘겨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확실히 그대 말처럼 내 다섯 호위병들은 굉장한 녀석들이지. 하지만 이 다섯 명중 그 누구도 자네의 실력에 미치지 못한다는 건 알고 있나?”

  필립의 말은 모두를 당황시키기 충분했다. 특히 다섯 호위병들은 필립의 발언에 전부 혼란을 느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미천한 실력의 기사입니다. 보시다시피 지금도 공주님을 지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실력입니다.”

  창연은 상처투성이가 된 자신의 상태를 그에게 강조하며 말했다.

 “겸손한 수호신···”

  필립은 그의 모습에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모습은 존경스러움을 넘어 고결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앞으로도 그 마음은 변하지 말아주시길···”

  필립은 그에게 예를 표하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다섯 호위병들은 왕자가 움직였기에 다른 곳으로 이동했지만, 떨떠름한 표정으로 창연을 노려보며 조용히 불만을 표했다.

 “대단해요. 저 필립 왕자가 당신에게 예를 표하다니!”

 “공주님, 필립 왕자님은 훌륭한 분입니다. 장차 훌륭한 국왕이 될 재목이시죠.”

  창연은 필립의 인품을 진심을 담아 칭찬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로웬의 낯빛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리고 저분이 공주님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겁니다.”

 “전··· 싫어요. 저 사람에게 가지 않을 거예요.”

 “공주님?”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창연은 무심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탓에 볼 수 없었던 그녀의 표정이 눈 속으로 들어오자 눈물마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제 행복을 바라시나요?”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직도 절 올려다보고 있는 거죠?”

  그녀의 물음에 창연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전, 기사고··· 공주님을 지켜야하고···”

 “제 행복을 바란다면서, 제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아직도 모르시나요?”

  로웬은 그를 쏘아대듯 타박하며 원망했다. 하지만 창연은 그녀의 원망을 알아도 내색할 수도, 대꾸할 수도 없었다.

 “죄송합니다.”

  오직 이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로웬은 잠시 눈물을 글썽거렸지만, 개의치 않은 척, 몸을 돌려 시큰거리는 코를 훌쩍였다.

 “힘들면··· 언제라도 제게 와주세요. 부탁이 아니에요, 권유는 더더욱 아니구요. 이건 명령이에요. 저를 지키는 기사라면, 힘들면 제게로 오세요. 다시 말할게요. 명령입니다. 이걸 어긴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공주님.”

  로웬은 알고 있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가 자신에게 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더더욱 그는 참고, 또 참아낼 것이다. 지금도 힘들어보였지만, 그는 힘들다는 말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외로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창연은 그녀가 안전하게 들어갈 때까지 일정 거리를 유지하여 호위했다. 시간이 흘러 완전히 들어간 것을 확인하자 예를 올리며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더욱··· 더더욱···”

  창연은 계속해서 훈련에 매진했다. 한계에 다다른 체력으로 움직이기 힘들었지만, 마음이 나태해졌다 생각하며 더더욱 무리하게 움직였다. 기사대장이 나타나 그를 만류한 뒤에야 강제적으로 휴식을 취했다.

 “이젠 좀 괜찮아?”

 “네, 괜찮아요.”

  기사대장은 여전히 훈련할 생각으로 가득 찬 창연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창연아.”

 “네, 대장.”

 “공주님이랑 어디까지 가봤냐?”

  익살스레 묻는 기사대장에 창연은 순식간에 몸도 마음도 뒤틀려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 어디까지라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죠?”

 “왜? 공주님이 가장 신뢰하는 녀석이 너잖아. 공주님의 침실에 들어가는 남성은 그분의 가족들을 제외하면 네가 유일하지 않니? 가끔은 오래 머물던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후후후.”

  넉살좋게 농담을 하던 기사대장은 음흉하게 웃어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웃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창연이 불만스런 표정으로 모욕을 참아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아니겠지? 너같이 우직한 녀석이 그러지는 않았을 테고···”

 “전, 단지 공주님을 지킬 뿐입니다. 그런 농담은 삼가주세요. 오래 있던 이유는 공주님을 노리는 하이에나 같은 녀석들을 퇴치할 궁리를 짜기 위해 의논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단지 이야기가 길어져서 오래 있었을 뿐이에요.”

 “알아, 안다고. 그래서 걱정이라는 거야.”

  기사단장은 그에게 미안함을 느끼며 공주를 지킬 때를 생각했다.

  현재는 창연이 그 일을 맡고 있었지만, 그 전에는 기사대장이 그 일을 맡고 있었다.

  그녀는 여성이기도 했고, 공주와 어렸을 때부터 친했었기에 비교적 그녀를 지키는 직책을 쉽게 맡을 수 있었다. 더군다나 당시 그녀는 창연이 자신을 대신하여 공주를 지키는 일을 맡을 걸 상상조차 못했었다.

  단순히 창연은 공주를 지키고 싶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강해졌다. 그 의지가 여러 사람의 마음을 울렸기 때문일까, 창연은 공주를 지키는 호위기사가 되었다. 당시 공주를 지키던 그녀는 기사단장이 되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창연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개혁이 일어났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 개혁은 창연의 공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편으로는 그를 안타깝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미 공주와 창연 둘 다 서로에게 호감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두 사람이 이어졌으면 했었다.

  공주가 적극적으로 그에게 다가와도, 창연은 그저 신하로서의 예를 갖출 뿐, 그 무엇도 발전하지 않았다.

 “창연아.”

 “네, 대장.”

 “공주님의 행복을 바라니?”

 “당연하죠.”

  창연의 대답은 거침없었고, 기사대장은 피식 웃음 지었다.

 “그렇다면 넌 뭘 해야 할까?”

  의외의 대답에 창연은 눈을 깜빡이며 머리를 굴렸다. 공주의 행복을 위해 온갖 행동이 머릿속이라는 무대에서 춤을 추고 있었지만, 불필요한 대답들은 무대 뒤로 갈 수밖에 없었다.

 “더욱 강해지고, 필립 왕자님과 잘 되길 바라야죠.”

  틀에 박힌 대답. 신하로써 할 수 있는 진부한 대답. 기사대장은 그가 가장 멍청한 대답을 고른 것에 속이 들끓기 시작했다.

 “너 병신이냐?”

 “네?”

  기사대장이 된 이후로 봉인하다시피 하지 않았던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폭발하듯 분출된 욕지거리의 수위는 점점 거세졌고, 창연은 그녀를 말리느라 진땀을 뺐다.

  공주의 행복을 위해선 창연이 그녀의 곁에서 공주와 기사라는 상하관계가 아닌, 남자와 여자라는 수평을 이룬 관계로 있어야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바랄 리가 없었고, 그랬기에 창연은 공주와 기사라는 관계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창연아. 내가 지금 화가 굉장히 많이 났는데, 어떻게 할래?”

  기사대장은 한심한 그를 노려보며 씩씩거렸다.

 “제가 뭘 해야 할까요.”

 “내가 내는 과제를 완벽히 수행한다면, 화가 풀릴 것 같아. 어떻게 할래?”

 “대장이 내는 과제인데, 당연히 해야죠. 제게 하는 욕설에 대해선, 크게 신경 쓰지 않아요.”

  창연은 바보같이 웃으며 말했다. 그 때문에 기사대장은 양심을 크게 베인 것 마냥 편하게 있을 수 없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아, 아무튼! 내가 내는 과제는 마구간의 골칫거리를 해결하는 거야.”

 “골칫거리라면 그 ‘말’이요?”

 “그래, 그 녀석을 길들이는 거야. 필립 왕자 쪽에서 가져온 사나운 녀석이란 건 이미 알고 있지?”

 “네, 왕자님 쪽의 그 어떤 기사들도 길들일 수 없어서 가져왔다는 괴소문이 돌 정도로 엄청난 녀석이었죠?”

 “어때? 해볼래? 만약 네가 성공한다면 날 마음껏 모욕해도 좋아. 희롱해도, 매도해도 상관하지 않아. 이건 기사의 약속이니까.”

  기사의 약속. 저것은 부모를 걸고 하는 약속에 준할 정도로 무거운 의미로 통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던 창연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제가 어떻게 대장에게···”

 “공주님을 지키는 기사가 병신이라는 소리나 들어서야 되겠어?”

  기사대장은 의도적으로 그를 자극시켰다.

 “공주님을 행복하게 하고 싶으면, 네가 각오해야지. 네 행동에는 네가 책임을 지는 거니까.”

  각오의 숭고함. 그것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그가 ‘공주의 행복’에 대한 올바른 선택을 하길 바랐다. 기사단장은 알고 있었다. 창연은 대단한 녀석이었고, 필립 왕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충분히 증명시켜주었다.

 “알겠습니다. 충고 감사드립니다.”

  창연은 그녀에게 허리 숙여 존경을 표했고, 기사단장은 뺨을 긁적이며 가만히 있질 못했다.

 “그, 내가 한 말은 너무 담아 두진 말고, 알았지? 미, 미안해.”

  기사단장은 말을 마치자마자 밖으로 허둥지둥 빠져나왔다.

  지금의 창연이 골칫덩어리(말)를 길들이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필립의 다섯 호위병들도 그 녀석을 제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당시 그들의 상태는 최고의 만전 상태였기에 지친 창연으로써 그것은 불가능한 과제였다.

  하지만 창연은 그런 것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기사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 그녀가 내준 과제를 묵묵히 수행할 뿐이었다.

 

 

 “행복?”

  창연의 과거를 듣던 소인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렇다. 행복이다. 그것보다 자네의 이름은?”

  소인은 그의 물음에 대답하기 싫었지만, 알려주지 않는다면 그는 계속해서 자신을 광인이라 부를게 분명했기에 마지못해 한숨을 쉬었다.

 “소인이다. 나소인.”

 “소인, 자네의 행복은 뭐지?”

  갑작스런 창연의 질문에 소인은 입만 달싹거리며 당혹감을 느꼈다.

 ‘저 자식이 갑자기 왜 묻는 거지?’

  창연은 지친 기색이었지만, 덕분에 평소보다 순해보였다. 하지만 소인은 그가 어떤 상태든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갑작스레 친절하게 묻는 탓에 더욱 그에게 거리감을 느꼈다.

  그렇지만, 진실성은 사람을 움직인다 했던가. 소인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소민이도 그렇고, 우리 거인이형도, 그리고 블러드리아. 이 사람들의 행복이 내 행복이야.”

 “그런가···”

  창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순간 소인은 그와 자신이 어느 정도의 공통점이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아졌다.

 “오해는 하지마! 웃지도 말고. 솔직히 난 아직도 네 녀석이 죽을 만큼 싫어. 네가 소민이를 병원으로 보낸 장본인이니까!”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광인은 날뛰는데다, 난 강해지기 위해 누군가 싸움을 걸어온다면 거절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지.”

  창연이 천천히 반박하는 통에 소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진심을 알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저 녀석은 지금 말하는 것도 그렇고, 과거 때는 의외로 좋은 녀석인 것 같은데··· 대체 왜 저런 냉혈한으로 바뀐 거지?’

  소인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창연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저, 그 과제 이야기부터 다시 해주실 수 있나요?”

 “아, 네.”

  민화의 말에 창연은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창연이 골칫덩어리를 제압했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특히 필립 왕자의 귀로 그 이야기가 들려나가는 데는 로웬 공주보다도 빨랐다. 그는 자신의 다섯 호위병들의 앞에서 그의 칭찬을 아낌없이 퍼부었다.

  필립은 그저 훌륭한 수호신에 대한 아낌없는 찬사였겠지만, 다섯 호위병들이 느끼기엔 그저 경쟁심을 자극하려는 자신들에 대한 폄훼에 가까웠다.

 “왕자님은 정말 좋으신 분이신데··· 너무 그 창쟁이 녀석만 치켜세운단 말이야.”

 “우리가 그 자식보다 못한 게 뭐야? 젠장···”

  그들은 창연에 대한 불만과 열등감을 수위 높은 발언으로 뱉어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마음은 해결되지 않았고, 그들의 옆으로 한 마법사가 스치듯 지나갔다.

 “심창연··· 그 사람에 대한 불만이신지요?”

  조금은 소름끼치는, 그랬기에 남자를 홀리는 듯한 매혹적인 목소리가 다섯 호위병의 귓속을 방문했다.

 “저 사람은 누구야?”

  마법사다운 음침함이었다. 여성임에는 분명했지만, 보이는 것은 후드 사이에 짙게 칠한 붉은 입술뿐이었다. 그녀는 고혹적으로 혀를 움직이며 입술에 침을 발랐다.

 “전 일개 마법사일 뿐입니다.”

 “우린 당신을 모르는데, 당신은 우리가 생각하는 걸 어떻게 알았지?”

  그들은 대장간에서 방금 만들어진 날붙이처럼 날카롭고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신경 쓰지 말라는 일종의 위협이자 경고였지만, 마법사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어머, 너무 티나게 말씀하시는데, 감히 참견한건가요?”

  기분 나쁘게 웃어대는 그녀의 말에 호위병들은 자신들이 뱉은 말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곧 정중하게 그녀를 향해 사과했다.

 “미안하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런 것이오. 어떻게 우리 다섯 명이 덤벼도 제압하지 못한 걸, 그 녀석 혼자 제압했다는 게 너무 말이 안 맞지 않소?”

 “세상에는 말이 되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 너무나도 많답니다.”

  이내 그들에게는 정적이 흘렀다. 불가능처럼 보이는 사실을 긍정하는 그녀, 그리고 그저 불가능이라 치부한 다섯 호위병들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릴 것이 분명했다.

 “흘려듣는 명언이라 생각하겠소. 그럼···”

 “복수하고 싶은 게 아니신지요?”

  화살처럼 파고드는 그녀의 목소리. 다섯 호위병은 그 말을 차마 부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내 한 사람이 용기 내어 애써 부정하였다.

 “복수까지는···”

 “사실이 말해주고 있는데··· 그렇다는 건 정정당당한 기사님들의 논리대로라면, 이미 여러분들은 그 창병에게 진 것 아닌지요?”

  기사들의 정정당당한 논리란, 공평하고, 규칙이 있는 순수한 의미의 경쟁을 말했다. 다섯이 떼로 덤벼도 이기지 못한 말 한 마리를 그저 한 사람이 제압했다는 것으로 이미 그들은 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마법사의 말이 방아쇠가 되어 필립 왕자 때문에 쌓여가던 불만이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우리는 패배하지 않았소! 우리가 전문적으로 말을 사육하는 사람들도 아닌데다! 기사란 이윽고 1대1 대련으로 승부를 봐서 깔끔하고, 깨끗하게 경쟁해야, 그때야 인정할 수 있는 것이오!”

 “그렇다면, 이길 자신이 있다는 건가요?”

  살갗을 파고드는 마법사의 도발적인 물음.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다. 그들의 자존심은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발전하려 했다.

 “여러분은 다섯, 창연이란 사람은 하나. 그렇다면 창연이 다섯 배의 힘을 낼 수 있다면 비로소 공평해지는 것이라 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게 불가능하지 않소? 처자, 지금 우리를 놀리려는 것이오?”

 “어머? 그럴 리가요?”

  마법사는 요염하게 입술에 침을 바르며 말했다.

 “전 여러분들을 도와드리고 싶을 뿐이랍니다. 생각해보세요. 필립 왕자님을 호위하는 다섯의 특별한 여러분이 그런 공주 뒤꽁무니나 쫓는 창병 한 사람에게 밀린다는 건, 충분히 이상한 일 아닌가요?”

  이번에는 모든 호위병들이 그녀의 말에 동의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 모습에 보이지 않게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소리 내지 않고 그들을 비웃었다.

 “그런 제가 여러분들을 돕기 위해···”

  마법사는 품속에서 하늘색 포션을 꺼내어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이렇게 준비해 온 포션입니다.”

  그것은 얼음 결정처럼 때 묻지 않은 아름다운 빛깔이었다. 호위병들은 위험해보이지 않은 포션의 자태에 감탄했다.

 “이건 힘을 2배 정도 더 낼 수 있게 해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번 시음해 보실 기사님?”

 “내가 먹어보겠소.”

  한 호위병이 자신 있게 손을 들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포션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마법사는 그가 포션을 비우자 옅은 미소를 지었고, 포션의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처자! 이, 이게 포션의 효과라는 말이오?”

  포션을 마신 호위병은 숨을 거칠게 쉬기 시작했다. 심장 소리는 어렴풋이 들릴 정도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은근히 근육의 크기가 커졌다.

 “활력, 시력, 힘, 속도, 근력 등 모든 육체적인 것들이 두 배 정도는 강해진 느낌이 드시는지요?”

 “그, 그렇소! 터무니없소! 믿을 수 없소! 하지만, 하지만!”

  그는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했고, 주먹을 쥐어 바닥을 세게 쳤다. 주변이 울리지는 않았지만, 바닥은 보란 듯이 금이 갈라졌고, 나머지 호위병들은 적지 않게 놀랐다.

  마법사는 알 수 없는 미소로 입을 가리며 웃어댔다.

 

 “처자, 분명 목적이 있는 것 같은데··· 대체 우리를 도와주려는 이유가 무엇이오?”

  그들은 사람이 오지 않는 음험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며 마법사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여자에겐 비밀이 있답니다. 기사님들이라면 숙녀의 비밀 정도는 캐묻지 않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녀는 정중한 태도로 그들에게 부탁했고, 그들은 기사된 도리로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는 거요?”

 “이 포션은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다섯 배의 힘을 낼 수 있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걸 창연에게 먹인 다음 싸워주시고, 기회를 봐서 그의 몸에 이 스크롤을 갖다 대시면 됩니다.”

  마법사는 하늘색 포션 한 개와 블랭크 스크롤을 넘겼다. 하지만 스크롤에 대해 알지 못했던 그들은 그것을 이리저리 뒤집어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뭐하는 물건이오?”

 “스크롤이라는 봉인구의 일종입니다.”

 “봉인구?”

  호위병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용카드 한 장의 크기 정도밖에 되지 않아 보이는 스크롤의 크기도 크기였지만, 갑작스레 봉인구를 건넨 이유를 짐작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과학의 기술, 괴수들의 자원, 그리고 마법의 지식으로 창조된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봉인구의 일종입니다. 물론 마법, 괴수, 과학의 세 가지가 뭉쳤으니 기능은 봉인구만 있는 건 아니죠.”

 “그것보다 갑작스레 봉인구를 왜 건넨 것이오?”

 “당연히 경쟁이 끝나면 상승한 힘을 봉인시켜야 하지 않을까요?”

  호위병들은 마치 휴지통 근처에 떨어진 쓰레기처럼 찝찝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녀의 제안을 떨떠름하게 받아들였다.

 “꼭, 여러분들의 강함을 증명하시길···”

  마법사와 다섯 호위병들은 서로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고는 각자의 길을 향해 이동했다.

 ‘멍청하긴··· 이래서 기사나부랭이들은 이용해먹기 쉽다니까.’

  그녀는 그들을 비웃으며 붉은 입술의 입꼬리를 올렸다.

 

 

 “그 후드가 그 녀석?”

  이번에는 고속이 끼어들며 말했다. 창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소인, 그리고 이 몸. 그러고 보니 아가씨도 그 현장에 있었군. 아무튼 그때 본 사람들은 안다. 자네가 찾는 후드는 이 녀석과는 별 다른 관련이 없을 거라는 걸.”

 “맞아요. 겁이 많은 성격 같았어요.”

  창연의 말에 민화가 덧붙여 설명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걸 의외로 꺼리는 것 같았지. 당시 상황은 내 실수로 벌어진 일이었고··· 어쩔 수 없이 내 손을 빌린 느낌?”

  소인이 불량스럽게 말했다.

 “정보상, 후드를 쓰는 사람들은 ‘마법사’들이다. 당신의 주변에는 마법사가 없는 건가?”

  창연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역으로 소인과 이터널, 민화가 창연을 의외의 눈빛으로 바라봤다.

 “창연 씨? 혹시 주변에 마법사가 있어요?”

  민화가 조심스레 말했다. 공교롭게도 그녀의 주변 사람 중 장미의 집안은 마법사 집안이었다. 그녀는 얼마 전 이 사실을 노바를 통해 들었지만, 그녀는 어린아이들의 상상의 세계라 생각하여 그것을 깊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마법을 쓰는 것 같은 오컬트는 있다. 그런데 인간 마법사는 한 번도 못 본 것 같은데?”

  소인이 창연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마법을 쓰는 존재들은 분명 존재하지. 하지만 시대는 과학이다. 마법은 존재하지만, 과학을 이길 순 없지.”

  내내 가만히 있던 이터널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이렇게 세 사람의 몰아붙임에 창연은 입을 굳게 다물 수밖에 없었다.

 “주변 사람이라면, 장미 양? 분명 집안이 마법사랬나?”

  하지만 고속은 진지하게 주변 마법사를 고민하고 있었다. 민화는 아는 이름이 나오자 화들짝 놀라 시선을 그에게 옮겼다.

 “장미랑 친하세요?”

 “약속한 드래곤을 얼마 전에 줬습니다. 아직도 절 의심하는 건가요?”

 “아, 아뇨··· 그게 아니라, 그 마법사라는 거 믿으시나요?”

 “믿습니다. 장미 양이 제게 거짓을 말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죠. 그녀 덕분에 뱀파이어가 의식 불명 현상에 관련되었단 사실을 알았으니, 믿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고속의 대답에 민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가 확실하게 믿음직한 정보상이라는 걸 확신했다.

 “어이, 너.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네가 왜 그렇게 변했는지, 알려줄 수 있어?”

  소인이 시비조로 그에게 말했지만, 창연은 화를 내지 않으며 한숨을 쉰 다음 이야기를 이어갔다.

 

 

 “여러분, 제가 꼭 이걸 마셔야하는 겁니까?”

  창연은 하늘색 포션을 섬뜩한 물건 보듯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는 그들이 건넨 포션이 좋지 않은 느낌이 들어 마시기 꺼려했지만, 다섯 호위병들은 그가 마시길 계속해서 재촉했다.

 “창연, 우린 필립 왕자님께 증명하고 싶네. 꼭 마셔주게, 부탁하겠네.

  호위병 중, 대장의 역할을 맡은 기사가 그에게 간절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하지만 창연은 왜 마셔야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대장전이라는 좋은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 중 가장 강한 분이 저와 정정당당히 겨루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됩니다만…”

  호위대장을 제외한 나머지는 창연의 생각에 동의했다. 다섯 호위병 중, 대장이 제일 강한 건 당연했고, 1대1로 대련하는 것이 훨씬 정정당당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마법사가 샘플로 건넨 포션을 마신 호위병의 컨디션이 좋지 않는 것도 한몫했다. 복통, 속 쓰림, 근육통에 이따금 두통까지 호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사 특유의 단단하고 건강한 육체가 아니었다면, 방에서 누워 있어야 할 것이었다.

  더군다나 하늘에선 눈이 내리고 있었다. 때는 아직 2월 중하순, 봄이 다가오는 때였다. 하지만 포근해야할 눈은 점점 세차게 내리고 있었고, 창연과 네 명의 호위병은 싸우길 꺼려했다.

 “젠장…”

  호위대장도 그들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대장이었기에 그들 중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창연과 1대1로 대련하는 건, 그의 마음에 겁이 났기 때문에 쉽게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분야는 달랐지만, 이미 기량에서 압도당했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 다섯이 덤벼도 해결하지 못한 ‘골칫거리’, 창연은 보란 듯이 혼자서 해냈다.

 “자네가 마시지 않겠다면, 내가 마시겠네. 이리 주게!”

  호위대장은 억지를 부렸다. 그가 마셔봐야 공정할 것도 없었고, 창연이 마셔 그들 다섯과 싸운다 해도 이미 공평하지 않았다. 그는 억지를 부리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 기사답지 않은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결국 창연은 하는 수 없이, 섬뜩한 느낌의 포션을 마셨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음산한 느낌은 그의 미간을 절로 찌푸리게 했다. 순간적으로 먹은 것을 게워낼 뻔했지만, 억지로 삼켜 참아냈다.

  그리고 완전히 삼켜낸 그 순간, 창연의 몸 속 세포 하나, 하나가 개안한 묘한 느낌이 들었다. 당사자도 느껴질 정도의 신체를 비롯한 대부분의 능력들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것이 강하게 느껴졌고, 창연은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이면에서 이따금 느껴지는 잘못된 느낌은 벌레에 물린 것 같이 따끔하게 전해졌다.

  포션을 마신 창연과 다섯 호위병들의 대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마법사의 말처럼 창연은 약 다섯 사람 정도의 실력을 냈고, 호위병들은 효과가 나타난 것 같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하지만 포션의 진정한 효과가 나타나려 했다.

  멀리서 그들을 보고 있던 마법사는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창연과 다섯 호위병으로선 그녀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저 창연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이, 이게 뭐죠?!”

 “이봐! 무슨 짓이야?”

  영문을 모르는 다섯 남자는 당황한 창연에게 쉽게 접근할 수 없었다. 얼어붙던 대지는 점점 그 세력을 확장했고, 그 중 한 호위병은 호기롭게 그것에 접근하다 온 몸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때 세상의 공간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온갖 자연재해가 일어났다. 창연이 있던 성채도 예외는 아니었고, 이곳은 특히 전에 없던 폭설과 블리자드, 그리고 지진이 일어났다.

  그중에서 창연으로부터 시작된 결빙현상은 블리자드로 인해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여러분!”

  창연은 다급하게 외쳤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호위병들은 모두 얼어붙었고, 성채의 주민들을 비롯한 모든 건물은 지진과 폭설, 블리자드, 가속된 결빙현상으로 모조리 얼어붙었다.

  창연으로서도 영문 모를 일이었다.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결빙현상. 하지만 그는 얼어붙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추워야할 상황에서도 몸은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과 별개였던 공간 붕괴현상. 즉, 이상 세계 현상은 그를 삼키려 했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 현상에 두려움을 느낀 창연은 그 자리에 얼어붙듯 움직일 수 없이 그저 겁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창연의 눈앞을 어둠이 가리고, 성이 무너지듯 창연은 무너졌다.

 

 

  창연이 정신을 차렸을 땐, 공간은 원래대로 돌아왔고, 폭설, 블리자드, 지진은 말끔하게 사라지고 눈앞에는 난데없는 겨울왕궁이 펼쳐졌다.

  그 자태는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사람들의 절규, 원인도 모른 채 얼어붙은 모습, 그리고 자연스럽게 소실된 몇몇 건물들. 창연이 자세히 바라보면 볼수록 추악하기 그지없었다.

  그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얼어붙지 않은 것은 ‘블랭크 스크롤’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호위병들이 생각한 대로라면, 그리고 마법사가 말한 대로라면… 창연의 강해진 힘을 봉인해야 할 봉인구였다.

  비록 물건이었지만, 얼지 않았다는 것에 동질감을 느낀 것일까… 창연은 그것을 손에 꼭 쥐었다.

  그는 망령처럼 얼어붙은 성채 이곳저곳을 마냥 들쑤셨다. 혹시라도 얼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바람뿐이었다. 꼭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가축이나, 물건, 그 무엇이라도 괜찮았다. 손에 들린 블랭크 스크롤처럼 얼지만 않길 바랐다.

  하지만 그의 기대를 시원하게 배신하듯, 그가 가는 곳마다 모든 것이 얼어붙어 있었다. 그때마다 창연은 절망감에 전율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태양은 내리쬐지만, 얼어붙은 모든 것은 녹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기사는 망령이 된 모든 것들을 부정하고 절규한다. 목이 터져라 외쳐도 아무것도 바뀌는 건 없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자신에게서 나온 차가움. 자신도 모르는 모든 것을 얼려버린 힘… 하지만 기사는 마지막으로 모든 희망을 걸었다.

  ‘이 몸’에서 나온 얼음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녀’만은 얼리지 않았을 수 있다. 물론 이 생각이 그의 기대에서 나온 희망적일 수밖에 없는 가설이었지만, 그는 이 실낱같은 희망을 버릴 수 없었다.

  결국 그의 한 오라기 희망은 뭉친 절망으로 인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창연이 희망을 가지고 공주가 있는 방으로 서둘러 달려갔지만, 이미 그녀는 한 폭의 그림처럼 잠들어 있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간다. 죽은 듯 잠든 그녀와 이런 식으로 마주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원인 모를 자신의 힘. 그것이 폭주해서 결과적으론 공주를 비롯한 모두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실오라기를 잡고 놓지 않아서일까. 무의식적으로 공주의 손목에 손을 가져다댄 창연은 맥박이 뛰는 생명의 고동을 듣고, 느꼈다. 그 손은 자연스레 그녀의 심장을 향했고, 이내 그것이 미약하게나마 뛰고 있다는 걸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창연은 그녀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창연은 실을 밧줄처럼 잡고 놔주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부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런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들려온 건, 바람에 실린 목소리였다. 간드러지는 매혹적인 그 목소리는 창연은 매료시켰고, 홀린 듯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그것은 공주의 심장에 침식하려는 차가운 기운을 그의 심장으로 옮기는 방법이었다. 창연으로서는 그것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었고, 자신의 몸은 부서지더라도 ‘그녀만을 지키는 기사’라는 사명을 다할 수 있다는 것을 마지막 속죄의 길로 삼았다.

 “맘에 들어, 당신의 그 굳건한 마음. 그럼 알려주지. 첫 번째, 공주의 왼쪽 가슴, 즉 심장에 손을 댄다. 물론 맨살에 맨손을 대야하지. 두 번째, 가지고 있는 블랭크 스크롤을 심장에 올려놓은 손등 위로 가져다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화장대에 숨겨진 ‘흑색 해방기’라는 기계장치를 사용하여 그녀에게 침식되려는 차가운 기운을 모조리 흡수하는 거지. 하지만 이 방법을 사용할 경우,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운 기운이 해방기 밖으로 빠져나간다. ‘해방기’라는 이름의 뜻을 이해하면 무슨 상황인지 대충은 알 수 있겠지.”

  목소리가 알려준 방법은 간단하기 그지없었지만, 첫 번째로 인해 창연은 잠시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고민하며 그녀의 화장대에 숨겨진 흑색 해방기를 찾은 그 순간에도 창연은 망설였다.

  감히 기사가 지키는 존재의 맨 가슴에 손을 대는 건 허락되지 않는 그야말로 긍지를 버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비록 잠들어 있는 상태였지만, 도저히 스스로는 용납할 수 없는 추악한 행위였다.

  몇 분이 지나도 창연이 고민만 하자, 목소리는 짜증 섞인 어투로 소리쳤다.

 “계속 갈등할건가!”

 “이, 이 몸은! 공주님을 지키는 일개 기사에 불과하다. 이 분의 때 묻지 않은 수정 같은 옥체를 이런 더러운 손으로 더럽혀야 하는 건가!”

  하지만 창연의 소리침에 역으로 당황한 것은 목소리 쪽이었다. 목소리는 입을 굳게 다문 것 마냥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했다.

 “다른… 다른 방법…”

 “없어!”

  목소리는 단호하다. 결국, 창연은 마음속으로 그녀에게 사과하며 그녀의 옷을 벗겨 젖혔다. 불순한 목적으로 한 행위가 아니었기에 창연은 목소리가 알려준 방법을 재빠르게 했다.

  그녀의 심장에서 나온 하늘색의 차가운 기운은 스크롤과 함께 해방기에 흡수되듯 빨려 들어갔다. 처음 보는 광경에 창연은 거친 숨을 내쉬며 마음을 진정시켰고, 공주는 안전해졌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렇게 밝은 미소로 공주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전혀 변한 게 없었다. 오히려 창연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옷을 입혀 주었다.

 “공주님?”

 “이봐, 아직 끝맺음을 하지 않았잖아?”

 “끝맺음?”

  목소리는 웃음 섞인 말투로 그에게 말했다. 창연은 묘한 기분에 그녀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그 해방기를 네 심장에 가져다 대야 한다. 그럼 공주의 차가운 기운을 네가 대신할 수 있지.”

  창연은 목소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해방기를 심장에 댔다. 음산하고 소름끼치는 한기가 그의 심장을 통해 온 몸의 혈관을 얼리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공주는 살 수 있다는 믿음에 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공주는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어 보였다.

 “공주님? 이, 이봐…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우흐흐… 창연, 내가 언제 공주를 깨어나게 한다고 말했지?”

 “뭐야?!”

  창연은 뒤통수를 세게 맞은 느낌이었다.

 “난 그저, 그녀의 차가운 기운을 네게 전달하는 방법만을 알려줬을 뿐이야. 희망을 품은 건, 네 녀석이고, 난 그저 ‘방법’이란 걸 알려줬을 뿐이지. 아, 물론 그렇게 화낼 필요는 없어. 이게 공주에게 나쁜 영향은 전혀 없지. 그저 이유도 모른 채, 얼어붙게 될 운명을 네가, 그저 이유도 모른 채, 잠들어버릴 운명으로 바꿔버렸을 뿐이니까. 하하하!”

  창연은 목소리의 비웃음을 마냥 들을 수밖에 없었다. 혈액 속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고드름 같은 느낌은 그의 혈관을 마구 찔러댔고, 창연은 후들거리는 무릎을 이기지 못하고 털썩 무릎 꿇었다.

 

 

 “이게, 이 몸의 성격이 변하게 된 원인이다. 차가운 심장… 내게는 문제가 없지. 물론 전혀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그 이후로 감정이 얼어붙게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고, ‘이 몸’이라는 1인칭을 쓰게 되었다. ‘나’라는 호칭은 사람에게나 쓰는 호칭이지. 하지만 ‘이 몸’은 성채의 모든 걸… 공주님을… 얼어붙게 했다. 그저, 이 몸은 몸뚱어리만 있는, 죽지 못해 사는 짐승 그 이하다.”

  창연은 씁쓸하게 말하며 코를 시큰거렸다. 이야기를 듣던 모두는 그의 암울한 과거에 자연스레 숙연해졌다. 특히 소인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창연 씨도, 이상 세계 현상의 피해자였군요.”

  민화는 슬픈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창연은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고, 그저 높이 솟아오른 북쪽 산을 바라보았다.

 “이봐 창연, 혹시 그 ‘바람에 실려 온 목소리’가 그 목소리인건가?”

  고속의 물음에 창연은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소인, 이터널, 고속은 그가 해방기를 얻게 된 경로를 듣자, 마냥 남 일 같지가 않았다. 개인차는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비슷한 경로를 통해 해방기를 손에 넣었기 때문이었다. 차이점이라면, 그들에게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 이후로는 별로 좋지 못했지.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과 공주님을 어떻게든 살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기 때문이지. 소인, 네가 맛봤던 그 포션은 이 경험을 통해 이 몸이 스스로 습득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비슷한 포션을 사용하여 공주님을 살리려 했지만, 결국 남은 건 포션을 만들 수 있는 기술뿐이었다.”

 “그, 그런 건 궁금하지 않아!”

  소인은 툴툴댔다. 그에게 눈을 마주칠 수 없었고, 일렁이는 감정에 한숨만 쉬었다.

 “이 몸을 차가운 기운으로도 얼릴 수 없는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다. 더군다나, 속죄하는 마음으로 감정을 얼어붙게 만들었지만… 대체 뭐가 문제인건지, 감정은 이따금 녹고, 얼고를 반복한다. 특히 두려움은 가장 빠르게 녹았고, 그랬기에 포우에게 완벽하게 패배했다.”

 “시영이형에게… 아니, 포우에게 두려움을 느꼈던 거야?”

  소인이 차분하게 말했다. 창연은 그의 말을 듣고 부정하지 않았고,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소인, 네 말이 맞다. 포우에게 느꼈던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죽음을 각오했지만, 막상 그에게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무서웠다. 정말이지 이 몸은…”

 “그렇지 않아요!”

  자기혐오에 빠진 창연에게 민화는 크게 소리쳤다.

 “죽는다는 건, 감정이 얼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에요. 사람이라면, 당연히 느끼는 감정이에요. 창연 씨, 당연하게 느끼는 걸로 자신을 탓하지 마세요. 성채가 얼어붙었던 것도, 공주님이 잠에 빠져든 것도, 다 창연 씨가 원하거나, 의도한 건 아니었잖아요!”

 “하지만, 아가씨… 결과는 변하지 않습니다. 제가 모두에게 제 과거를 밝힌 이유는 소인에게 고마움을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포우가 제 멱살만을 잡았었지만, 전 그때 계속했다간 쇼크로 인해 죽었을지도 몰랐던 일이었죠. 그러니, 소인, 날 살려줘서 고맙다.”

  창연은 그에게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소인은 이를 바득 갈며, 온 몸을 미세하게 떨었다.

 “말 잘했어… 네가 그런 말 해봤자, 나는 널 용서하지 않아. 소민이를 병원에 보낸 이유 하나만으로 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거야…”

  소인은 흥분과 치솟는 분노를 참으며 이빨을 잘근잘근 씹었다. 하지만 창연은 오히려 그의 그런 모습에 고마움을 느끼며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였다.

 “어이, 마지막으로 궁금한 건데, 네가 시영이를 포우라고 확신했던 이유가 뭐야?”

  고속이 말했다. 시영과 포우라는 단어로 인해 창연은 자연스레 침을 꿀꺽 삼켰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긴장감에 창연은 서늘한 김이 나오는 한숨을 쉬었다.

 

  창연이 시영을 포우라 확신했던 이유는 시영과 포우가 나타난 곳 대부분에 ‘창연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창연은 유령 소동이 일어났던 때, 시영에 대해 의문을 품은 적이 있었다. 정확히는 그가 사용한 ‘구체’에 대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능력의 기원은 크게 마법, 과학, 괴수의 세 가지로 나뉜다. 하지만 시영이 사용한 구체는 세 가지의 기원 중 어디에 속하는지 파악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창연은 그 날 이후로 시영을 남모르게 쫓았다. 원래의 목적은 ‘구체’에 대한 궁금증이었지만, 미행하면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했었다. 그것은 6개월 전 이후로 잘 보이지 않던 포우가 그가 있는 곳 대부분에 귀신같이 달려온다는 점이었다.

  구체에 대한 호기심은 그로써는 보기만 해선 도저히 알 수 없었기에 흥미는 점점 떨어졌다. 하지만 포우의 존재 하나만으로 그는 시영을 계속 쫓았고, 마침내 ‘음산한 골목’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유마 씨… 어디 있는 거지? 아, 찾았다!”

  당시 로제는 시영의 부탁으로 오컬트 무리를 빠져나와 스마트폰에서 ‘유마’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다급하게 그에게 전화를 걸던 중, 낯선 사내를 발견했다.

  그는 창연이었다. 창연은 특유의 서늘한 눈빛으로 전화를 거는 로제를 노려보며 뒷걸음질 쳤다.

 ‘누구지? 이 골목은 사람이 오지 않기로 유명한데?’

  로제를 비롯한 사람들은 조사 때문이라는 명분이 있었지만, 창연은 그런 것처럼 보이지 않았었다. 수신음은 계속해서 들려왔고, 로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화를 끊고 수상한 창연을 쫓아가려 했지만, 때마침 전화를 받은 유마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그렇게 로제가 스스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창연은 슬금슬금 시영이 있는 골목을 보기 위해 다급하게 움직였다.

 ‘강한 여자다. 사용하는 총탄의 위력 또한 굉장한 건 당연한 건가?’

  시영과 로제를 지켜보던 창연은 그녀가 발사한 강렬한 총탄의 위력에 화들짝 놀랐었다. 더군다나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었기에,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랬기에 갑작스레 전선을 이탈해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녀를 보고 놀라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감정을 얼린 기사가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지만, 중요한 건 시영을 미행하는 일이었기에 창연은 더 이상 그 일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말이 되지 않았다.

  시영은 백색 해방기를 꺼내들어 슬롯을 가볍게 눌렀다. 그 직후 그의 몸은 하얗게 물들었고, 오직 두 눈만이 붉게 물들었다. 그 모습은 포우의 모습이었고, 창연은 숨이 턱 막히는 느낌에 가슴을 세차게 두들겼다.

 “포우?!”

  창연은 두 눈을 비볐다.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거짓말 같았다. 시영이란 녀석의 근처에서 포우가 나타나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 포우는 충분히 의문의 존재, 더군다나 시영이란 녀석에게는 유독 사건이 많이 일어났다. 그리고 영웅이라 불리는 포우였기에 나타날 명분과 이유는 충분했다.

  하지만 동일인물일거라는 건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이미 두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을 두 눈으로 수차례 목격했었고, 그들은 서로 다르게 행동했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지나칠 정도로 충격을 받은 창연은 그 이후로도 시영을 계속해서 쫓아다녔다. 하지만 마치 자신이 미행하는 걸 눈치 채기라도 한 것 마냥, 시영은 그 이후로는 포우로 변하지 않았다. 예전처럼 계속 시영이 있는 곳에 포우가 난입했고, 그들은 서로의 일을 할 뿐이었다.

  그러던 중, 햄버거 가게에서의 일이었다. 시영, 아미, 매니저가 같은 테이블에, 고속이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었을 때였다.

  This Illusion이라는 환영을 만드는 기술. 시영은 그것을 어렵지 않게 사용했었다.

 ‘그렇게 된 거였군.’

  창연은 아미도 This Illusion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시전자의 근처에서 환영을 불러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환영과 본체는 서로의 위치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엿듣기를 통해 알아내었다.

 

 “이렇게 계속해서 따라붙었기 때문이었다. 아, 그리고 누군가 그에게 전해줬으면 하군…”

 “뭘요?”

  민화가 조심스레 그에게 되물었다.

 “아미라는 이름의 아이돌? 아무튼 그녀와 가까이 지내지 않는 게 좋을 것이라는 말이지.”

 “왜? 너 인마, 혹시 아미의 극성팬이야?”

  소인이 시비조로 말했다. 하지만 창연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극구 부인했다.

 “그게, 그와 그녀를 위한 길이기 때문이다. 기사가 비겁한 수를 써서도 졌다면, 완벽하게 패배한 거고, 이 정보가 이 몸이 알려줄 수 있는 그에게 도움이 될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겁한 수라뇨?”

  민화가 조심스레 그에게 물었다.

 “무서웠기에, 이길 수 없을 것 같았기에, 일부러 그의 심리를 자극한 겁니다. 물론 없는 말을 지어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졌으니 할 말은 더 이상 없습니다.”

  창연은 모두에게 사과의 의미로 허리를 숙였다.

 “이젠 스스로 차선책을 찾는 수밖에…”

  그러고선 북쪽 산을 향해 처절한 걸음으로 터벅터벅 걸었다. 외로운 그의 뒷모습에 민화를 비롯한 모두는 숙연해졌다.

 “저 자식은… 조만간 내가 먼저 친다.”

  하지만 소인만은 누구보다도 먼저 그를 향해 이를 갈았고, 약간의 피가 묻은 사슬은 울부짓들 떨리고 있었다.

 “소인아, 넌 반쪽이잖아. 혼자 힘으로 되겠어?”

 “형?”

  소인은 휘둥그레진 눈동자로 그를 원망하듯 노려보았다.

 “아니, 널 자극하려는 건 아닌데, 아무래도 넌 창연이에게 진 거 아냐?”

 “제, 제대로 싸우지도 않았잖아요! 더군다나 그땐 온 몸이 젖어 있어서…”

  하지만 소인은 슬며시 입을 다물었다. 어떠한 말을 하던, 그들에게는 모든 말이 핑계거리로 들릴 게 분명했다. 그랬기에 소인이 할 일은 핑계가 아닌 걸, 창연에게 승리하는 것으로 증명하는 것이 최선이라 느꼈다.

 “창연 씨도, 창연 씨지만… 시영이가 걱정 돼요. 걔는 이번 일에 휘말렸을 뿐이잖아요. 인터뷰도 그렇고, 창연 씨와의 싸움도…”

  민화의 걱정스러움이 가득 담긴 말에 이터널을 제외한 모두가 동의했다. 이터널은 기계처럼 무감정하게 슬금슬금 움직였다.

 “뭐 하시는? 앗!”

  민화는 갑작스레 일어난 이상 세계 현상에 화들짝 놀란 모습을 보였다. 반면 이터널은 전혀 개의치 않은 표정으로 블랭크 스크롤을 사용해 이상 세계 현상을 봉인시켰다.

 “검? 뭐, 나쁘진 않군.”

  스크롤은 순식간에 ‘검’이라는 힘이 채워졌다. 이터널은 그것을 흔들어 달칵달칵 소리를 냈다.

 “무슨 소리죠?”

 “해방기 속에 있는 ‘코어’를 흔드는 소리다. 이걸 흔드는 것으로 부서지기 전까지 무한으로 에너지 공급을 할 수 있지.”

  이터널은 적당히 흔들다 허리춤의 홀더에 검 스크롤을 끼워 넣었다.

 “그런 기능이 있었어? 난 내가 가지고 다니다 떨어뜨려서 나는 망가진 소리인줄 알았는데?”

  고속은 품에서 천둥 스크롤을 꺼내 신기한 듯 흔들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소인도 그림자 스크롤을 꺼내 조심스레 흔들었고, 달칵거리는 소음에 민화는 슬그머니 귀를 막았다.

 “이거 혹시?”

 “맞아요, 형이 혜성 고등학교 운동장에서 버린 그거예요.”

  고속은 오랜만에 보는 그림자 스크롤에 눈을 떼지 못했다.

 “아무튼! 다들 그만 흔드세요. 중요한 건 그걸 흔드는 게 아니잖아요.”

  민화의 외침으로 모두 스크롤을 흔드는 팔을 멈췄다. 그리고 이터널을 제외한 모두의 목적은 시영의 과거도 듣는 것으로 통일되었다.

 “미안하지만 난 빠지겠다.”

 “이터널 씨?”

  모두의 이목은 이터널에게 집중되었다.

 “해방기 소지자가 모이는 행위 자체가 좋은 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겠지? 어디까지나 난 포우의 정체에 관련해서 휘말렸을 뿐, 끼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이곳에 남아, 과거에 빠진 어리석은 기사의 이야기를 들은 이유는 이곳에 나타날 이상 세계 현상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비록 그 시영이란 사람에 대해서는 걱정되지만, 난 어디까지나 제삼자다. 엮이고 싶은 생각도, 과거를 밝혀낼 생각은 더더욱 없지. 과거에 얽매여선 앞으로 절대 나갈 수 없다. 극복하는 자에게만 길은 열리고,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는 것으로 그 길은 찬란하게 빛난다.”

  이터널은 마치 녹음된 기계처럼 또박또박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기계음이 섞이지 않았지만, 마치 기계 같은 느낌은 세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목소리가 기계음같이 들렸다.

  이터널은 각 잡힌 자세로 뒤로 돌아 밖으로 나갔다. 민화와 고속은 그의 마지막 말이 신경 쓰였고, 소인은 그저 실컷 떠들고 떠난 이터널이 꼴불견을 바라보듯 노려보았다.

 “저 자식은 뭘 잘난 듯 나불대는 거야?”

  고속은 심기가 불편한 소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달아오른 그의 분노가 쉽게 가라앉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분노하는 것으론 아무것도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그가 빨리 떨쳐내길 바랐다.

 “그럼, 두 분은 갈 건가요?”

  민화의 물음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들은 어느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시영의 과거를 알아냄으로 그의 응어리와 문제를 해결해주려 했지만, 막상 어디로 가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특히 고속은 얼마 전 시영을 믿기로 다짐했었고, 자신과 닮았다 느낀 그에게 필요 이상으로 접근하는 게 옳은 일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직전, 소인이 입을 열었다.

 “갈 데 없으면, 강해성 탐정 사무소로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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