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이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분위기는 왠지 모르게 험악해져가자 미안한 마음이 커지자 조여오는 압박감을 못 이겨 사과했다.
“미안해.. 걱정 끼치려고 그런 건 아닌데..”
“됐어. 선생님한테는 내가 말해 놀 테니 집에 가서 좀 쉬어”
“알았어..”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름이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붙잡은 채 아름이에게 의지하며 집으로 향했다. 서로 아무 말도 없이 걷다 보니 점점 아름이에게 미안하다는 마음과 더불어 고마운 마음 또한 커져만 갔다.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지만 별로 불쾌하다고 느끼진 않았다. 그저 이렇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너무나도 좋았다.
어느덧 걷다 보니 눈앞에 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헐떡이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숨을 고르자 그제야 내 상태를 눈치챈 아름이는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괜히 나 때문에 지각하겠다. 얼른 가봐”
“하지만…”
“괜찮아, 괜찮아”
손을 흔들며 멀쩡한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고는 아름이에게 작별을 고하고는 집으로 들어와 문을 닫자마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았다. 손등으로 이마를 닦으며 다시 일어나 현관문에 달린 구멍으로 조심스레 밖을 쳐다봤다.
문밖으로 조그맣게 아름이가 보였다. 안절부절못하고 주변을 서성이는 게 많이 걱정하는 듯싶었지만, 얼마 못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마도 시간이 없어서 학교에 갔으리라 짐작했다.
나도 엉덩이를 대충 털고는 앞으로 고꾸라지며 신발을 대충 벗어놓고 방을 향했다. 휘청거리며 지금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다리가 흔들거려 올라가기 힘들었지만 방문을 열고 들어와 침대에 누우니 한결 나아졌다.
시간이 지나도 지금 상태가 적응 안 되는 건 매한가지였지만 어찌 됐건 누워있을 수 있음에 소소한 행복을 가졌다. 그러고는 두 눈을 감은 후 천천히 숫자를 셌다. 어디에서 본 것처럼 잠을 빠르게 자기 위해서가 아닌 이렇게라도 하면 언젠가는 잠들겠지 싶은 마음으로 시도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많은 숫자를 세기도 이전에 기절하듯이 잠이 들었다.
“…어나”
느낌상 누운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방해하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좌절했다. 대체 언제쯤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걸까?
요 근래 편하게 쉰 적이 없다 보니 귀찮은 일에 휘말릴까 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자는 척을 했다. 그러나 상대방도 오기가 생겼는지 조르는 말투로 일어나라고 외쳤고, 시간이 지나도 내가 미동도 없자 포기했다는 듯이 조용해졌다.
드디어 방해도 없이 편히 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게 착각이라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갑자기 누군가 덮고 있던 이불을 들춰버리는 바람에 놀란 마음에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누군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드디어 일어났구나?”
처음엔 당황스러워서 누군지 알아볼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쳐다볼수록 어디서 본 것 같단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니 굳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자다 일어나면서 짜증과 실망을 동시에 느껴 표정관리가 잘 안됐다. 그녀 입장에서 바라보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그러한 나의 표정이 신기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한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 속 서로 가만히 쳐다보자 인내심에 한계가 왔는지 결국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어... 음..... 모르겠다. 너 누구야?”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기에 저렇게 고민하는 걸까 했지만 오히려 궁금한 건 내가 더 많았기에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기보다는 반대로 물었다.
“그러면 넌 누구야?”
나의 말을 들은 그녀는 예상치도 못한 되묻는 말에 머리를 부여잡더니 고민한다는 걸 알려주듯이 끙끙거렸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던 거라 그런지 나를 등지고는 대답했다.
“나는... 그러니까.....”
말끝을 흐리더니 말없이 책상으로 뛰어갔다. 책상 위에 있는 작은 거울을 붙잡고는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갑자기 당당하게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 나는 5(Ⅴ)야!”
“... 5?”
“그래 5!”
어이가 없었다. 순간 내가 말에 대한 이해를 못하는 줄 알았지만 사방팔방을 뛰어다니며 외치는 그녀를 보니 적어도 그건 아닌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