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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연재 > 일반/역사
나는 김구다! 제2부 - 홍구공원 1932, 백범 김구
작가 : 과하객
작품등록일 : 2017.11.22

'나는 김구다!' 제2부의 연재를 다시 시작합니다. 전날 천붕을 당해 의욕이 꺾였던 글인데 권유가 있어 다시 써보게 되었습니다.
역사를 기록하는 작업에 가장 조심스러운 부분이 인물의 명예에 누를 끼치는 일인데, 혹시 아니다 싶은 부분이 보이거든 가차없는 질책을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24. 상해의 김구 5
작성일 : 18-05-07 04:43     조회 : 421     추천 : 2     분량 : 5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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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상해의 김구 5

 

  선생은 일찍이 스승의 권유로 중국 땅을 유람할 때 몇몇 결사의 사람들을 사귀어둔 적이 있었다. 백련교 계통의 대도회는 의화단 사건의 주력으로 홍경래의 난의 여당(餘黨)이었던 활빈당과 연줄이 있었고, 그에 연계하여 청방과도 교분이 이어져 대만에서의 구니노미야 암살 작전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임시정부 내무차장의 자격으로 경무국의 비밀공작을 지휘한 신익희는 인력거꾼이나 야경꾼의 행색을 예사로 하고 왕해공(王海公), 왕방평(王邦平), 왕방우(王邦牛) 등의 가명을 썼다. 그는 명문 평산(平山) 신씨(申氏) 출신으로 신중한 성격의 사람이었으므로 일찍부터 선생의 오른팔 노릇을 하여 흑막의 일을 자주 하였다.

  장개석 휘하 국민군 부사령관으로 하남성 독판이었던 호경익은 신익희의 인품에 반해 국민군 중장에 위촉하고 남경정부심계원 고문의 직위를 주었다. 나날이 야욕을 더해 가는 일본에 대항하려는 한중합작전선(韓中合作戰線)의 방편이었는데, 침체기에 있던 임시정부와 이해가 맞아 떨어져서 한중 연합 게릴라 부대가 편성되는 성과를 보았다.

  조선인 500명을 중심으로 중국과 러시아 청년 1000여 명을 더한 분용대 명색의 특수부대를 편성한 신익희는 일약 대일전선에 나섰다. 대만에서의 구니노미야 암살작전은 호경익 사후의 일이었지만 생전의 기대에 부합한 공로가 될 터였다.

  대도회는 산동지방이 본거지이고 청방은 상해 일대를 세력권으로 가진 비밀결사다. 해공의 분용대는 구니노미야 암살 작전에서 청방과 대도회의 이름을 도용했다. 이는 물론 대만을 세력권으로 가진 가로회와 삼합회의 양해와 상해 청방의 총수 두월생의 묵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중국의 비밀결사는 나라를 엎을 만큼 세력이 크고 뿌리가 깊다. 황건적이 한나라를 무너뜨린 이래 면면히 이어온 비밀결사의 방파는 당나라 멸망의 원인이 된 황소의 난과 송나라를 약화시켜 몽고에 바친 방납의 난, 백련교 일파의 명나라 건설 등으로 부침을 겪다가 근세에 이르러 태평천국의 난으로 청나라의 기세를 꺾더니 대도회와 홍창회가 의화단 사건을 일으켜 나라를 뿌리 채 흔들기에 이른다. 1924년 손문이 혁명군을 이끌고 북벌에 나섰을 때 청방은 장강 일대의 방원들을 동원하여 이를 도왔는데, 당시의 상해경비사령 양호동, 진군 등은 청방의 유력한 방원이었다고 한다.

  청방은 태평천국의 난이 증국번에 의해 진압될 때 충왕 이수성의 원모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단체라고 한다. 호경익을 비롯한 군벌들 중에 청방의 사람이 많은 이유는 충왕의 심려원모가 작용한 경우일 것이다. 중국의 방파들은 반청복명의 전설을 만든 천지회를 존중하여 이민족을 극도로 배척했으므로 호경익 역시 일본이라는 공통의 적을 가진 임시정부와 뜻을 같이 하여 신익희의 분용대가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남경정부 심계원 고문으로 위촉되어 육군중장의 신분이 된 신익희는 한중합작의 특수부대를 만들고 자금 중 일부를 임시정부에 돌려 재정을 돕는 등으로 활략하지만 호사다마라 호경익의 급사로 급전직하 위기에 몰린다. 신익희가 호경익의 막하에 있을 때 편성한 분용대 중에서 한인 출신들을 끌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임시정부로서는 크게 다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호경익의 후임으로 하남성 독판이 된 악유준은 오패부 계열 군벌 출신이었다. 중국의 군벌은 일종의 독립왕국으로 무리를 몰고 다녔으므로 호경익의 사람이었던 신익희는 배척을 받는다. 중국군 중장의 직위를 버리고 임시정부로 돌아온 신익희는 국무령 김구를 만나 의논을 했다.

  “호경익장군의 죽음에 흑막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밝혀내세요. 그는 우리에게 은혜를 끼친 사람입니다.”

  명령일하, 신익희는 왕해공의 이름으로 분용대 한인반을 지휘하여 움직임을 시작했다. 왕해공의 분용대는 나창헌의 정위단(正衛團)과 김오산의 백의대와 힘을 합쳐 왜적의 상해 일본총영사관을 습격하여 폭탄을 던지고 그 혼란을 틈타 경부보 등정(藤井)을 납치해 내막을 캤다.

  “악유준은 우리와 타협을 했습니다. 이는 청방의 두월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편이라는 이권이 걸린 이상 청방도 하남성 독판도 우리 일본에 등을 돌릴 수 없습니다.”

  청일전쟁 이후 제해권을 빼앗긴 중국은 일본 상선단에 해운을 의존하고 있었다. 이는 상해 역시 마찬가지였으므로 서로 이익을 존중하는 동안에는 평화가 유지되었다.

  상해는 나날이 건물이 늘고 자동차가 많아지고 각국의 조계가 경쟁하듯이 호화판 영사관을 세웠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일본 총영사관은 사이좋게 선물을 주고받았고, 때로는 중국군사령부에서도 폭탄이 듬뿍 담긴 선물이 왔다. 왕해공은 임시정부 경무국의 이름으로 악유준의 중국군사령부에 아편과 술을 담은 상자에 폭탄을 곁들여 답례품을 보냈다.

  왕해공이 가세한 이후 임정의 왜적에 대한 공세는 한층 격렬해지고 철저해졌다. 동북삼성의 지배자 장작림을 폭살한 이후 노골적으로 대륙 침략의 야욕을 드러낸 일본군은 만주 땅에 사는 조선인들을 주구로 삼고자 했고, 이에 동조한 친일 조선인 단체가 우후죽순으로 일어났으므로 독립운동을 총지휘하던 상해의 임시정부로서는 기강을 바로잡을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게 있어서 재중 조선인은 양날의 칼이었다. 1920대 말 만주벌에는 150만 명 이상의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 훈춘사건을 빌미로 한만국경을 월경한 일본군에 의해 빚어진 경신참변(庚申慘變)으로 민족운동계열 동포들이 대량 학살된 이후 만주벌에는 친일단체들이 난립하여 횡포를 부렸다.

  최정규(崔晶奎)가 시작했던 보민회(保民會) 같은 경우는 일본영사관의 두호로 무장을 갖추고 독립지사들을 습격하기도 하여 임정 경무국 백의대의 칠가살 명부에 이름이 올라 있기도 하였다.

  “일본의 주구가 되어 이류 일본인이라도 되어 보겠다는 친일파들이 난동을 부리고 있어요. 학교를 세우고 인재를 기르는 애국지사들이 친일파들의 부역 탓에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간 개과천선을 바라고 관용을 베풀어 왔는데, 그 단계가 넘은 것 같습니다.”

  선생은 눈빛으로 행동을 지시했고, 긴급히 부름을 받은 오산과 당쇠는 묵언으로 명을 받았다.

  이 기묘한 사제들은 나 어린 스승과 나이 많은 제자의 명분에 의형과 의제로 연분이 얽혀 있었다. 서른 몇 해를 함께 간난신고를 겪는 사이에 쌓인 신뢰가 이심전심 한 마음으로 엮였고, 서로 두뇌가 되고 수족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염동협이라는 젊은 친구가 있습니다. 믿고 일을 맡길 만합니다.”

  맏형격인 오산은 나이를 핑계 삼아 후진을 권했다. 나이 서른을 넘겨 선생을 따라나선 지 30여년, 60대 중반에 든 오산으로서는 자신을 대신할 믿음직한 젊은이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염동협은 그가 특별히 점찍은 젊은이였다.

  “형님이 보신 사람이니 당연히 유능한 사람이겠지요. 일간 데려오세요.”

  염동협이 선생의 앞에 나타난 것은 이틀 후였다. 천성이 호걸인 염동협은 임시정부 무력단의 총수인 선생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의견을 내놓았다.

  “총의 시대고 폭탄의 시대입니다. 쇠토막이나 손발을 휘두르는 무술 따위로 독립을 얻을 거라고는 생각지 마십시오.”

  선생은 이 대담한 후진을 미소로 맞았다. 선생은 오산에게 ‘당돌한 젊은이’라는 언질을 받고 있었고, 이런 유의 젊음에 대처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가령 제가 암살자로 이렇게 총을 겨누면 어떻게 하실 거요?”

  염동협은 품에서 단총을 꺼내어 선생을 가슴께를 겨누었다. 익숙한 솜씨였고 거리낌이 없는 태도였다.

  “이렇게 받지.”

  순간, 선생은 염동협의 손목을 비틀어 총기를 빼앗았다. 빼앗는 서슬에 방아쇠가 당겨져서 총알이 발사되었지만 선생의 귓가를 스쳤을 뿐이었다. 배석했던 오산과 왕해공이 달려들어 염동협을 제압한 건 다음 순서였다.

  “믿는 구석이 있으셨군. 하지만 내가 진짜 암살자였다면 선생은 살아있지 못했소.”

  선생이 다시 미소를 지었고 오산과 왕해공이 눈빛으로 호응했다. 선생은 손짓으로 염동협을 놓아주게 하였다.

  “그래, 내게 무슨 충고를 주고 싶어 오신 걸까?”

  선생의 질문에 염동협은 폭탄선언을 하였다.

  “제게 일지군을 주십시오. 서울을 점령해 보이겠습니다.”

  염동협은 열띤 목소리로 의견을 말했다. 선생은 젊은이들의 열정을 높이 사는 사람이었다. 고개를 끄덕여 다음 말을 재촉했다.

  “만주 땅에서 우리 동포들이 학살당하고 있다는 소식은 알고 계시겠지요? 저는 조선일보 기사를 보았고, 때문에 길림성 일대를 돌아 이곳에 왔습니다.”

  염동협은 만보산사건을 말하고 있었다. 선생은 일본인들의 이간질과 친일파 조선인들의 부역으로 중국인 농부들과의 충돌이 생겨 수많은 조선인 농민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오산과 당쇠를 파견하여 사태의 진압을 맡겼었다.

  “친일파 조선인들에게 책임을 물어 처단하셨더군요. 병근을 발본색원하지 않고 고약을 바른 격이라 따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생은 제압당한 염동협이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는 것을 못들은 척하고 오산에게 시선을 돌렸다.

  “백의대가 조선인민회의 부역자들과 충돌했을 때 도움을 받았습니다. 부역자들의 무장이 대단해서 고전 중이었는데 단기로 수괴를 뽑아냈습니다.”

  조선인민회는 보민단(保民團)에 이은 대표적인 재만 조선인 친일단체였다. 보민단은 재만조선인회(在滿朝鮮人會)를 표방하고 갖은 악행을 저지르던 끝에 임시정부의 명령을 받은 통의부 소속 박희광 김광추 등에 의해 회장 최정규(崔晶圭)가 1924년에 사살되어 와해되었는데, 그 여당이 만주 곳곳에 지부를 세우고 조선인들만으로 장원을 경영했다. 동학 계열인 제우교(濟愚敎)의 탈을 쓰고 일제의 주구가 된 탓에 단군밀교의 총수 부경주에 의해 집중 공격을 받았다.

  “부사형이 보민단의 장원을 공격할 때도 힘이 되어 주었답니다. 사격술이 뛰어나서 그 옛날 이걸(李杰) 사제의 재현인 듯싶다고 칭찬을 했습니다.”

  이걸은 구한국 원수부 출신 장교로 선생에게 투신하여 활략을 하다가 3.1운동 초에 일본군 대륙낭인부대의 암습을 받고 죽었다. 훗날 오산과 당쇠가 백두산 포수 김의군을 도와 원수를 갚은 사건은 보고된 바 있지만 가장 유능한 수하를 잃은 선생은 내내 괴로워했었다.

  “이걸 동지가 사격술의 명수였지. 중근 아우의 이등박문 공격 때 암중에서 큰일을 했어. 부형님이 이걸 동지와 비교를 했다니 사격술이 대단하기는 한 듯싶소만.”

  선생의 칭찬에 염동협은 겸양의 말을 하였다.

  “사격은 감(感)입니다. 적의 형상을 추정하여 마음으로부터 총탄을 보냅니다.”

  염동협은 시력이 나빴다. 장님에 가까운 약시로 선생의 면전에서도 두터운 안경을 끼고 있었다.

  “이걸 동지도 비슷한 말을 했었지. 요즘 심검(心劍)을 연구 중인데 역시 같은 말이 있었어. 무술의 길은 모두 닮은 것 같아요.”

  선생은 염동협을 칭찬한 후 말문을 바꾸어 오산과 당쇠에게 만보산사건의 결과를 물었다.

  “그래, 어떻게 되었소? 다녀오신 일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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