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탕바구니는 분명 그녀가 파랑에게서 받은 그것이었다. 시중에 비슷한 물건이 여러 개 있는 걸 알지만 여자의 촉으로 감지했을 때 그건 분명 자신의 손을 거쳐간 물건임이 분명했다. 살짝 얼굴에 열이 올랐다. 확인사살이 필요했다. 심신의 안정을 위해서는.
"시아, 사탕 받았나봐?"
그러자 시아가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는 무슨 상관이냐는 얼굴로 툭 내뱉었다.
"네, 뭐..."
'쳇, 회색여시 너만 남자들이 다 좋아한다고 착각 마시지?'
시아의 속마음은 그랬다. 어떤 경로로 들어온 거든 간에 지금 이 순간은 이 사탕 때문에 기가 좀 살았다.
"남자친구 생겼니?"
뭐라고 말을 쏴야 회색 여시에게 타격을 입힐까 잠깐의 궁리 끝에 대답했다.
"네."
"헐..."
그렇다면 시아와 파랑이 사귄다는 얘기가 되는 거였다. 정말이지 아무리 개방적인 인간이라고 해도 이 행동은 정말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헐?"
당혹스럽다는 로사의 표정에 시아는 자존심이 상했다. 자기가 사탕을 받은 것과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게 그렇게 이 여자한테는 그렇게 어이가 없는 일이었나 싶었다. 무시해도 이렇게 사람을 무시할 수 있는지 화가 치밀었다. 모든 남자가 자길 좋아할 거란 착각에 빠진 공주의 코를 남작 눌러주고 싶었다.
"같은 고등학생?"
"아닌데요. 성인인데요."
"성인?"
"네."
"학원 사람인가?"
"그것까지 샘이 알 필요 없잖아요?"
"아, 그래, 뭐 그렇지. 얼마나 됐는데?"
"이제 1일인데요, 뭐."
로사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래, 뭐 잘 사겨라."
하며 로사가 헤어반 교실을 나왔다. 정말이지 기분이 진흙탕이었다. 하완은 소아성추행범이고 파랑은 다른 여자와 사귄다니, 그것도 고등학생하고...한 번 맞아도 아픈 총을 두 대나 맞은 심정이었다. 둘 중 어느게 더 충격인지 경중을 따질 수가 없었다. 물론 세상에 남자가 단 둘인 것은 아니나, 어장관리하다 두 마리 다 놓친 것 같아 허탈하고 허무했다.
"이런 젠장."
생각보다 파랑에 대한 마음이 꽤 컸다는 것에 대해 그녀 스스로 놀라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뺏어오자니 넘 없어보이는 것 같아 싫었다.
"쳇, 세상에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그 동안 내가 너무 교사 직분에만 충실했던 거야. 너무 안 놀았어. 아, 오늘 바람 좀 쐬야겠다. 내가 너무 정숙했던 거지.'
그러더니 그녀가 메이크업 박스를 활짝 열었다. 그리고는 브러쉬에 흑검정 아이쉐도우를 꺼내 눈가에 정성스럽게 발랐다. 은색 펄을 꺼내 눈두덩이에 뿌렸다. 번쩍거리는 손잡이 이어링으로 귀걸이도 바꿔 꼈다. 그리고 매혹적인 레드립으로 입술을 마무리했다. 화려하고도 고혹적인 스모키 화장이 완성되었다. 거울을 보고는 그녀가 입술을 오므렸다 폈다. 그리고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컴팩트 케이스를 닫았다.
"오늘 아무나 걸려봐."
가늘고 긴 명품백을 어깨에 두르고는 그녀가 비장하게 퇴근했다. 그렇게 도착한 가로수길에서 그녀는 대여섯장의 연예매니지먼트사 명함을 받았다.
'역시 죽지 않았어. 이런 날 어디에 팔아? 어디에 갖다 붙이냐구? 파랑, 그 자식은 또 뭐고, 김하완은 또 뭐래...이렇게나 잘 나가는데.'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가 자존감을 되찾아갈 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하완이었다. 그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샘, 전화하셨어요?"
"네, 했어요."
"왜요?"
"오늘 실습 때 무슨 일 있었어요?"
그녀는 자기 입으로 말하기조차 께름칙한 소재라 떠올리기도 싫었다.
"일? 아니요."
모른 척 하는 것보니 살짝 두렵기도 했다. 혹시 남의 고통을 모르는 사이코패스 같은 건 아닐까하는 마음에.
"얼핏 들기로 거기 아이하고 무슨 일이 있었다고..."
"아이랑요?"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혹시 아이 몸에 터치했어요?"
그제야 하완은 그녀가 하는 소리가 무슨 내용인지 캐치했다.
"아, 정말...저 진짜 억울하거든요? 그거 누가 뻥튀기한 건 줄 알아요? 아, 암튼 정확한 팩트만 말할게요. 아이 하나가 화장실이 급하댔는데 그 자리에 손이 되는 여자애가 없었어요. 너무 시간이 임박한데 분장할 애들은 줄을 서있었고, 그래서 제가 대신 가서 걔 응가 뒷처리해줬다고요! 아, 정말 다시 떠올리니까 입맛이 뚝 떨어지는 구만."
"네에? 하완씨가 직접요?"
"도와달라고 했더니 유시아가 처음에는 튕기더니만 나중에는 애한테 내가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다며 걱정스러워서 화장실로 왔다는 뻘 소리나 하고...그게 부풀려져서 제가 오해를 받았다구요! 진짜 나 억울해서 지금 미칠 것 같거든요?"
"헐...그럼 도와주고 욕 먹은 거에요?"
"내가 설령 응가하는 그 여자애한테 딴 마음이 있어서 뭘 했다면 진짜 혀 깨물고 죽을 일입니다. 상상만해도 더티하구요. 저요, 건강한 20대 남자라 성숙한 여자 좋아해요. 애송이 젖내 나서 싫다구요. 사람을 어떻게 그런 파렴치한으로 몰 수가 있는지 걔 뇌 구조를 내가 직접 파헤치고 싶단 말입니다."
그의 울분 섞인 토로보다 그녀는 ‘성숙한 여자’가 좋다는 그 말만 들렸다. 이렇게 분기탱천하고 있는 그를 위로해주고 어루만져주는 성숙한 여자, 그게 자신이 되면 되지 않은가. 이미 이 남자의 결백은 그녀에게 다시금 기정사실이 되어버렸다.
"에구, 그랬구나. 어떡해요, 억울해서."
"그래도 샘이 믿어주니 좀 낫네요."
‘그렇지, 이때다!’
그녀는 지금이 타이밍임을 느꼈다. 기회는 잡으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 어디세요? 아직도 공연장에 있는 거에요?"
"아니요. 나왔어요."
"그 일은 제가 학원 입장에서 해결할께요. 자세한 사실확인 필요하니까 일단 이리로 와요. 혹시 밥 먹었어요? 기분도 그럴 텐데 제가 밥 살게요. 얘기도 좀 자세히 듣고요."
"네? 학원 밖에서요?"
"네, 일단 먹어야 힘을 내죠. 먹어야 기분도 풀리고...밥이 안 내키면 술이도 한 잔 살게요. 저도 애들 관리를 제대로 못 한 탓도 있으니까요. 하완씨 명예훼손과 누명에 어떻게 보면 저도 일조한 셈이고..."
뭐라 하는지 그녀 스스로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아무 말이나 질러 보았다. 괜히 말을 길게 해서 매달리는 것처럼 보이나 싶기도 했다. 시크한 그는 먼저 제안하는 여자를 쉬운 여자라 거부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뭔가 지는 느낌 지울 수 없었지만 실컷 말을 벌려놨으니 이젠 던져진 주사위였다. 그런데 철옹성 같은 그가 ‘콜’을 외쳤다.
"그래요, 그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