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가 멀뚱하니 사탕 바구니를 들고 서있자 그녀가 들어오길 기다리던 린이 문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녀가 들고 있는 바구니에서 흰 곰을 뽑아들었다.
"우와! 너 사탕 받은 거야?"
"어..."
"누, 누구? 설마 파랑 오빠?"
시아의 뒤로 보인 건 좀전까지 안 보이던 파랑의 바이크였으므로.
"어..."
"야, 대박! 파랑오빠한테 지금 고백받은 거야?"
"고백?"
워낙 린이 크게 말한 터라 하완은 듣고 싶지 않아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헐..."
그 역시 린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어떻게 그렇게 감쪽 같이 숨길 수가 있냐? 좋아한단 티도 안 냈잖아? 우와, 사람 마음은 정말 알 수가 없네. 언제? 언제부터래? 사귀재?"
속사포처럼 쏟아붓는 질문에 시아는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아, 그런 말은 안 했어. 그냥 동물원에서 곰한테 건빵 던져주듯 준 거란 말이야."
"동물원? 건빵? 야, 아무리 니 연애세포가 오래 전에 멸종되었다쳐도 어떻게 그런 야만스런 표현을 쓸 수가 있냐? 이 고귀한 사랑의 시작 앞에서. 저 오빠가 널 위해 이걸 준비하면서 얼마나 초조해하고 오매불망 오늘만을 손꼽아 기다렸을지 그런 심정 한 번 헤아려줄 수 없어?"
린은 연애소설을 쓰는 중이었다. 그 표정이 너무 가식적이어서 시아는 가증스럽기만 했다.
"오매불망이라니...아주 거만하게 주던데. 그리고 날짜상 오늘이 화이트데이도 아니거든? 그런데 무슨 손꼽아 기다려?"
"야, 낼은 우리 수업 없는 날이잖아. 화요일이니까. 그래서 미리 준비한 거지. 이 둔한 여자야."
듣고보니 그것도 맞는 소리였다.
"아작아작 잘 씹어먹으라고 했는데? 오다 주웠다며..."
"야, 그럼 무릎 꿇고 두 손으로 주리? 청혼하냐?"
"응? 뭐,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장소에서, 이렇게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어수선한 주차장 앞에서 주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야, 시작이 뭐가 중요해? 과정이 중요한 거지. 그리고 너한테만 준 거라는 게 포인트지. 야, 부럽다아. 너 태어나서 처음 받는 화이트데이 사탕 아니냐?"
"응."
"이제 너도 봄날이 온 거야. 아...나도 받고 싶다. 사탕..."
그렇게 린이 공연장 안을 들여다보는데, 마침 창 너머로 그녀들을 염탐하고 있던 하완이 존재를 들킬세라 커튼 속으로 숨었다.
"아, 깜짝이야. 왜 갑자기 돌아보는데?"
그렇게 하완은 숨어서 혼자 중얼거렸다. 하지만 린은 그를 보지 못한 눈치였다.
"시아야, 너 이번 기회에 파랑오빠랑 잘 해봐라. 너한테 잘 해주잖아. 핸드폰도 사주고 그랬잖아. 꽤 자상한데?"
"아, 그거야. 그 오빠가 깨뜨렸으니까...아, 뭐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러니까, 전적으로 본인 과실도 아닌데 자기가 책임진 거 잖아. 책임감 있는 남자라 이거지."
"그런...가? 그런데 그 오빠는 로사샘한테 관심있는 거 같던데?"
"사람 마음이 바뀔 수도 있는 거지. 그 회색여시가 정 떨어지는 짓을 했나부지. 아, 정말 그 여시 짜증나. 하완오빠한테도 얼마나 추파를 던지는지..."
"차였나? 로사샘한테?"
"에이, 그럴 리가...그래도 멀끔하니 무용수처럼 슬림하잖아. 브이 라인 턱선에 다리도 길고."
"하긴, 허우대는 괜찮지. 같이 다니기에 부끄럽지 않고."
"부끄럽긴, 야! 저 정도면 너 어디 가도 능력자 소리 들을 거다."
"그런데 너 너무 날 밀어주는 거 아니냐? 언제부터 파랑오빠를 그렇게 좋게 봤다고."
"어, 어? 난 원래 긍정적인 눈과 마인드를 가진 여자잖아."
"아, 눼눼..."
그러는 동안 출석체크는 시작되었고 학원생들은 대기실로 모였다. 유아들이 줄을 서서 메이크업과 업스타일 헤어를 받기 시작했다.
"자, 눈을 감아보자. 그렇지, 잘 하네."
"예쁘게 해주세요, 선생님."
대여섯 살 되는 아이들은 처음 받는 화장이라 그런지 꽤나 긴장하는 터였다. 자신들을 학원생이 아닌 전문가라고 여기며 꼬박꼬박 선생님이라고 불러주니 린과 시아는 멋쩍기 짝이 없었다. 간지러운지 자꾸만 윙크를 하며 얼굴을 찡그리는 아이들이 귀엽게만 보였다. 그렇게 순조롭게 진행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 저 응가 마려워요."
라고 하완을 보며 말했다. 그 아이의 메이크업을 하던 하완은 당황했다.
"어, 어? 응, 응가?"
그러며 주변을 돌아봤지만 그를 구원해줄 눈빛은 없었다.
"화장실 가고 싶어?"
"네."
앞으로 시아와 엮이지 않겠다고 다짐한 그였지만 지금은 위기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이 제일 가까이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야, 화장실 가야겠대."
"네에?"
올림머리를 하느라 손이 두 개여도 모자를 판에 이게 무슨 소린가 싶은 시아였다.
"저기 여자애가 화장실 급하대. 응가 마렵대."
"그런데요?"
"난 남잔데 좀 그렇잖아. 니가 대신 가."
"네에? 그럼 이 여자애 머리는요? 이제 10분 밖에 안 남았는데 아직 2명이나 더 있다구요."
"야, 그럼 내가 가리?"
"아, 뭐 애긴데 어때요?"
"부모는 어딨냐?"
"부모는 이미 객석에 앉아있겠죠. 얼른 데리고 화장실 갔다와요. 그러다 무대의상에 싸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야, 그것까지 내가 책임져야 해? 난 메이크업 담당일 뿐인데?"
"거참, 애 싸겠네. 인도적인 차원에서 해주는 거지. 뭐 그리 칼 같이 일을 나눠요? 나 같으면 이럴 시간에 데리고 화장실 가겠구만."
"아, 진짜 내가 미쳐."
그렇게 실랑이 하는 동안 아이는 이미 그의 옷자락을 붙들고 얼굴이 벌개진 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선생니임...쌀 것 같아요."
"아, 알았어. 지금 싸면 안 된다, 어? 조금만 더 참아봐!"
그러더니 아이를 번쩍 안아들고는 그가 화장실로 질주했다. 그 뒷모습을 보던 시아가 피식 웃었다.
"진즉에 그럴 일이지. 어디 궂은 일은 안 하려고...쯥, 아직도 지가 뭐라 되는 줄 아나? 흥!"
그렇게 도와주지 않는 걸로 복수를 하긴 했지만, 괜히 죄 없는 어린애한테 못할 짓인가 생각이 들었다.
"아...좀 그랬나? 그래도 여자애인데 남자 앞에 속옷도 벗어야하고 부끄럽겠지?"
그래서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나머지 두 명을 맡기고 화장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