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야, 저기.”
세정이 달리는 열차 창 밖을 손 끝으로 가리켰다. 그녀의 손을 시선으로 따라가보니, 커다란 건물들 사이로 유독 큰 건물 하나를 가리켰다.
“저건 건물이야.”
이렇게 회사를 보고 나니, 내가 그때 만난 그 사람이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 대략 실감이 왔다. 실감은 났지만, 딱히 아무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손잡이를 잡고 덜컹거리는 열차의 규칙성 적은 리듬에 흔들리고 있을 뿐 이었다.
주말이라 이런 시간에도 적잖은 사람이 타고 있는 열차, 제법 더워진 날씨와 전날에 내린 비 때문에 높은 습도로 눅눅하고 불쾌한 공기, 그에 맞춰서 짧고 얇아진 사람들의 옷차림, 창 밖으로 보이는 소란스러운 도시의 풍경, 그 모든 것들 사이에 우리가 서있다. 그것만이 중요했다.
역에 도착하자 늘 듣던 치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열차 밖으로 내리자, 지상에 지어진 역 답게 끈적거리고 후덥지근한 공기가 팔에 달라붙는다.
“흠.”
“왜?”
“아니, 아까 올때부터 생각한건데, 보통 이런 도심 한가운데는 역이 지하에 있지 않나?”
“아아.”
세정이 내 의문에 입을 열며 얇은 목소리로 반응한다. 알고있는 건가?
“이 건물, 역만 있는 게 아니야.”
‘“응? 그럼?”
“좀 역이 크면 상가나 쇼핑센터랑 연결된 경우가 많잖아. 여기도 그런 경우야. 좀 큰 쇼핑센터랑 같이 있을걸.”
“오호.”
의문은 해결이 됐는데. 세정이 조금 심상치 않다. 앞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붕 뜬 것 같다. 뭘 원하는지 감이 와서, 살며시 미소가 지어진다. 조금 알 것같다.
“끝나면 조금 구경하고 갈래?”
“어?”
내 제안이 의외였는지, 놀라는 반응이다.
“그럴까? 그래, 잠깐 정도는 될 테니까. 응, 가자.”
오랜만에 보는 어린 아이다운 세정이다. 예전에는 말괄량이같기도 하고, 어리바리하고 어정쩡해 보여서, 마음에 들다고 할 수없었는데, 지금은 확실히 다르게 느껴진다.
왠지 이 일을 알기 전으로 돌아간 느낌도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귀여운 말투의 세정을 보자, 제안하기 잘했다고 느껴졌다.
역 밖으로 나오자 세정이 주위를 한 번 둘러 보더니, 말했다.
“혹시, 여긴 오지 않았을까, 했는데.”
햇살이 쏟아져 바닥에서 수 없이 많은 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지는 넓고 많은 인파로 떠들석한 역 앞. 세정이 찾는 사람은 알 수있었다.
“선배랑 만나기로 한곳이 정확히 어디야?”
소영 선배 일거다.
“원래는 우리 동네 역에서 만나서 같이 가려고 했는데, 거기에는 없었고. 여기에 오면 혹시나, 했는데, 역시 없네.”
“연락은 계속 안되는 거지?”
“응. 전화도 안 받지를 않고 문자 역시 답장이 없어. 혹시나 해서 다른 친구한테 부탁해서 sns까지 확인해 봤는데, 그쪽도 아무런 특이점 없이 접속하지 않았다는 것 밖에 알 수가 없었어.”
“선배 부모는 어떻게 생각할까?”
“글쎄. 학교에서 언니네 담임선생님한테 넌지시 물어보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부모는 달리 걱정하는 눈치는 없는 모양이야. 원래 언니가 좀 자유로운 사람이라, 얼마 안가 별다른 문제 없이 돌아오겠지, 하나봐.”
“아무리 그래도 여중생인 딸이 사라졌는데.”
“아, 그게, 언니가 부모님한테는 가기 전에 문자를 남기고 갔데.”
“그래? 뭐라고?”
“선생님도 내가 그 언니랑 같이 있는걸 몇 번 봤기 때문에 말해준 것 같은데, 아마, ‘그림을 완성하고 싶다.’라고 했나? 그랬을 걸.”
“그림? 선배 그림도 그려?”
“아니. 그림 그리는 취미나 특기는 없어. 오히려 그다지 잘 못해서, 내가 몇 번 알려준 적도 있어.”
아, 세정은 그림을 꽤나 잘 그렸다. 그런데, 그림이라니. 뭘 말하는 거지?
“그런데, 여기에도 없네. 어쩔 수없다. 우리끼리 이대로 가자. 언니는 아마 별일 없을 거야.”
세정이 두 팔을 앞으로 쭉 내밀더니, 말했다.
“그렇지. 그런 문자가 남았다면 본인 발로 간거 일테니까. 그건 그렇고, 여기서 회사까지는 얼마나 걸려?”
“걸어서, 십 분 정도.”
“좋아, 서두르자.”
역 앞 광장의 시계가 한 시 사십오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문제가 하나 생겼다. 세정이 회사 앞의 사차선 도로에 놓인 횡단보도를 보고 몸이 얼어버렸다는 거다. 여기가 아마, 세정의 어머니가 사고를 당한 곳 일 거다.
“괜찮겠어?”
“응, 괜찮아. 가자.”
그녀는 씩씩하게, 신호가 바뀌자, 나보다 먼저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횡단보도를 건너 회사 앞에 섰다. 이토록 큰 건물 안에 있는 그 한 사람, 그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 이곳까지 오는데 참으로 많은 일들이 이었다. 이제 그 사람을 만난다. 이제야, 그 사람을 만난다. 내 인생을 바꾼, 이 일의 최초 적인 원인을 제공한 사람. 이제야 만난다.
회사 안으로 들어가자, 로비에서 사원증을 인식시켜야만 들어갈 수있는 게이트가 있어, 바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데스크에 약속을 했다고 전하자,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하면 수화기를 든다. 선배의 말은 틀리지 않은 것 같다. 사원들도 적은 주말의 이른 오전에 찾아온, 두 젊을 학생의 말을 믿고 이렇게 확인을 친히 해주니 말이다.
“네, 네, 맞습니다. 중학생 정도로, 네, 네, 알겠습니다.”
데스크 직원이 잠시 수화기를 귀에서 때더니, 우리에게 물었다.
“저기 혹시 약속 잡을 실때 성함을 뭘로?”
“약속 할때 쓴 이름 필요 없으니까, 그냥 구 세정이라고 전해주세요.”
아마 약속을 잡은 본인이 맞는 지 확인하려고 물은 것 같은데, 그런 직원의 질문을 세정은 단번에, 삭제시켜 버린다.
“저기, 구 세정이라고 전해 달라고 하시는 데요. 네? 올려보내라고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사원이 방문증을 주기도 전에 세정이 성급하게 들어가, 어쩔 수없이 두 개의 확인증을 가지고 그녀의 뒤를 서둘러 따라갔다. 두 여직원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마자, 그녀는 망설임 없이 십 이라고 적힌 버튼을 눌렀다.
“어딘지 알아?”
신기해 하는 두 여직원의 시선을 느끼며 세정에게 물었다.
“응, 전에 한 번 와봤어. 딱 한 번이지만. 그것도 벌써 이 년전이야.”
여직원들이 오 층에서 내리고 나서도, 한참을 올라가서야, 띵동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십 이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왠 나이가 많이 든, 백발의 남자가 서있었다. 우리가 내리자 엘리베이터에 탄, 그 남자는, 사원치고는 나이가 많아서, 혹시 임원인가 싶었다. 하지만. 옆에 비서 같은 사람도 없고, 임원용 엘리베이터는 따로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갑자기 세정에게 말을 걸었다.
“오호, 이제보니, 세정양이군요. 저랑 만난적 있죠?”
그 사람은 세정에게 이렇게 말하며, 다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의 뒤로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접니다. 최 이사님의 주치의, 이 원장입니다. 어릴 적에 몇 번 만난 것 같은데요? 오늘은 아버지를 만나러 온건가요?”
“네, 아버지 만나러 온거예요, 이 원장님. 당연히 기억해요.”
“이야, 기억해 주시니 감사하군요. 정말 많이 크셨네요. 이제 거의 숙녀가 되셨습니다. 아, 옆에는 혹시 남자친구인가요?”
노년의 의사는 눈웃음을 지으며, 세정에게 질문들을 한다. 세정도 싫어하는 사람은 아닌듯하다. 그의 질문에 내 팔을 붙잡으며 대답한다.
“네, 맞아요.”
“그렇군요. 보기 좋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사님이 요즘 통 안좋으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세정양과 가연양이 좀 열심히 보필해 주싶시오. 이렇게 어여쁜 딸과 왠만한 딸 안 부러운 조카가 곁에 있어 드린다면, 충분히 힘이 되실 겁니다.”
“알겠어요. 참고 할게요.”
“하하, 가연양도 그렇고 세정양도 그렇고, 참 반듯하게 크고 계세요. 최이사님 딸, 최 세정이 이렇게 잘 큰것만 봐도 오늘은 안심하고 갑니다.”
아, 최 세정. 그렇구나. 아버지가 최이사이니, 딸도 원래는 최 세정인게 맞는 거긴 하다. 하지만, 그 대목해선 세정도 살짝 표정이 찌푸려졌다.
세정의 성씨에 대해서, 이 가족에 대해서, 알리가 없는 노인 의사는 ‘나중에 또 만나죠, 세정양도, 남자친구분도.’라는 말을 남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의사가 가고 우리는 그 사람의 사무실 앞에 섯다. 이 문 뒤에 있을 그 사람을 만나기 전에, 우리 둘다 각자의 각오를 한다.
입학식 때 부터, 이제까지의 일들이 머릿속을 지나간다. 그 모든 것을 끝낸다는 각오로, 문의 손잡이를 잡아 당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