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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무협물
혈마연애전기
작가 : 추적룡
작품등록일 : 2017.11.20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던가. 강호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혈사를 암시하는 서책의 출현. 때를 맞춰 출몰하는 괴인들. 수백 년 전 멸문한 혈교의 부활조짐. 마교와 사파의 심상찮은 움직임까지. 모든 일의 배후이자 새로운 혈마로 지목된 청년은 정작 엉뚱한 소리만 할 뿐이다. 자신은 강호제일미와 혼인하기 위해 강호에 출도했다고. 그리고 엄숙한 얼굴로 선언한다. 자신의 연애를 방해하면 정, 사, 마를 막론하고 가만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괴팍하지만 가슴 따뜻한 이 혈마는 과연 무림을 혈겁에서 구하고 영웅이 될 수 있을... 아니, 그보다 강호제일미에게 장가들 수 있을지. 본격 애인쟁취 분투기, 를 빙자한 무림과의 맞장뜨기가... 진짜 혈마의 전설이 이렇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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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12-18 23:25     조회 : 358     추천 : 0     분량 : 1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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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그러시다면... 헌데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어색하나마, 담장 위에서 포권과 함께 가벼운 예를 취한 후 서천휘가 물었다.

 

 “어쩐 일이라니, 창천문이 행사를 하는데 있어, 일개 장원의 허가라도 받아야 한다는 말이오?”

 

 “그런 뜻이 아니잖습니까?”

 

 서천휘는 최대한 공손한 투로 말했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상대의 진의를 몰라서 곤란하던 중에, 마주보고 대화를 하게 됐으니 말이다.

 

 “그렇잖아도 저희 소장주께서 다시 한 번 청하여 대접을 하려고 하던 중...”

 

 “그 말은 아니 들은 것으로 하겠소.”

 

 “어째서입니까?”

 

 “정녕 몰라서 묻는 거요?”

 

 “허어,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서천휘는 오늘 따라 같은 질문을 수차례나 반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가 어이없는 상황들이었다면, 지금은 비교가 안 될 만큼 중차대한 상황이었다. 다만, 답답해서 미칠 지경인 것만큼은 조금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귀 장원은 백년혈마와 무슨 관계요?”

 

 석진명이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

 

 서천휘는 크게 놀랐다. 설마 했던 우려가 현실로 드러난 것이다. 상대방의 말투는 굳이 칼날 같은 기세를 감출 생각마저 없어 보였다.

 

 “오해입니다. 저희 소장주께서 백년혈마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듯이 언급을 하셨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을 드릴 수 있는 터...”

 

 “무슨 소리요?”

 

 “책자 말입니다.”

 

 “책...자?”

 

 뭔가가 단단히 꼬여있다고, 순간 생각했다.

 

 “그, 그러니까... 소장주께서 한 권의 이야기책자를 얻으셨는데, 이야기 속에 나오는 백년혈마의 설명이 우연찮게도 실제와 동일한 것이었을 뿐으로...”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 어이없는 소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일단은 진지한 자세를 보여야 했다.

 

 “석 대협께서 원하신다면, 맹에 요청하여 정식으로 조사를 의뢰하여도 좋다는...”

 

 “뭔가 착각을 하는 듯하오만.”

 

 “그, 그게 무슨...?”

 

 “이야기 책이라니.”

 

 “제가 드린 말씀은 전부 사실인 바...”

 

 “그 따위 시답잖은 소리나 하자고 본문에서 여기까지 온 줄 아시오?”

 

 ‘침착해야 한다. 일단은 상대의 의도부터 파악해야 할 터.’

 

 서천휘는 위기 속에서 오히려 머리가 또렷해짐을 느꼈다. 상대의 말투가 도를 넘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럼 무엇 때문에 방문하셨단 말입니까?”

 

 어느새 서천휘의 말투는 공손하나 힘이 흘러넘쳤고, 단정하면서도 명징했다.

 

 “방문이라... 그 말은 어폐가 있소.”

 

 “그럼, 말을 달리 해 청풍현을 방문하신 까닭을 여쭙겠습니다.”

 

 석진명은 내심 아니꼬왔다.

 

 ‘서천휘... 상단의 고용무사 주제에, 한때 벽력검이라 불렸었다지. 그래봤자 산동의 촌구석에서 삼류 사파놈들이나 상대하던 촌놈 주제에...’

 

 석진명이 코웃음을 치고 난 후에 말했다.

 

 “본문은 이전부터 진금장을 주시해왔소. 우리가 청풍현의 인근에서 백년혈마를 만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말이오.”

 

 “그 말씀은 백년혈마를 뒤쫓아서 이곳에 오게 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진금장을 조사하다가 백년혈마를 만나게 되었다는 말이오.”

 

 ‘이럴 수가!’

 

 서천휘의 머릿속에서 벼락이 친 듯했다.

 

 ‘궁벽한 청풍현에 저들이 방문할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창천문이 위치한 하남에서 이곳을 경유하여 지날 일도 없다고 여겼으나, 그렇다고 해도...’

 

 서천휘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창천문의 명성이 드높다 한들... 지금의 말씀은 재고할 여지가 없는 터무니없는 말씀이십니다.”

 

 서천휘가 포권하며 석진명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절대고수의 반열에 들기 직전, 산동의 사파척결 작전에서 당한 부상으로 상인에게 몸을 의탁하는 신세가 됐다. 그 후로 여기까지 왔지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울 짓은 하지 않았다 자부하며 살아온 서천휘였다.

 

 “그럼, 묻겠소.”

 

 “얼마든지...”

 

 “진금장주는 어딜 가셨소?”

 

 “장주께서는 마침 백대상단의 회의에 참석 차 자리를 비우셨지만 이제 곧...”

 

 “과연 그럴까?”

 

 석진명이 한쪽 입가를 실룩이며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서천휘는 당당하게 말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먹장구름이 밀려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전에... 그대는 본인을 안다고 하셨소?”

 “저 같은 무림말학이, 어찌 석대협 같은 분과 면식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다만 석대협의 존성대명을 익히 들어봤고 먼 발치에서나마...”

 “금칠은 그만 됐소. 허면...”

 

 석진명이 더할 나위없이 싸늘하게 말했다.

 

 “본인이 이번에 맹의 수호검단주의 위에 오르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아시오?”

 “물론입니...”

 

 서천휘는 대답하다 말고 한 가지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아뿔싸, 그 말은 곧...’

 “후후, 소문이 이곳까지 전해졌나 보군.”

 “듣기로는, 석대협께서는 이제 곧 백대상단주 되시는 분의...”

 “그렇소, 본인의 악장(岳丈: 장인)이 되실 분이오.”

 “허면 그 말씀은...”

 

 당대의 정파 무림은 중원 백대상단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실은 ‘막대한 지원을 받고 있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양측의 관계는 갈수록 밀접해졌고, 그와 동시에 점점 더 우회적이고 은밀해져 갔다.

 

 사파에서는 이를 두고 ‘정도인사들이야말로 위선자들이다’라고 맹비난을 했지만... 세상만사가 그렇듯이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무림(武林)이 금권(金勸)과 노골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자칫...

 황실의 견제가 우려됐기 때문이다.

 

 하여, 정도무림과 상가의 중간에서 은밀한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자리가 바로 ‘검단주’의 위치였다. ‘수호검단주’가 된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백대상인 중 하나의 사위가 되는 것으로, 탄탄한 장래가 보장된다는 뜻인 것이다.

 

 석진명은 그 중에서도 수좌라 할 수 있는, 황금장주 황옥금의 사위가 될 예정이었다.

 

 ‘그렇다면, 백대상단의 회담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고, 저렇듯 의심을 한다는 얘기는...’

 

 물론 서천휘에게는, 석진명의 개인사보다는 그런 사실이 중요했을 뿐이다.

 

 “그렇소. 진금장의 가주인 진국보는 회담에 참석하지 않았소.”

 

 ‘가주께서는... 어딜 가셨단 말인가!’

 

 서천휘의 머릿속에 또 한 번 뇌성벽력이 울렸다.

 

 “이렇게 나를 따로 만나게 된 것은... 그대에게는 기회일지도 모르오.”

 

 석진명은 지금이 기회라고 여긴 듯 연이어 말했다.

 

 “방금 전, 매담집에 관해서 말했소?”

 “그렇...습니다만.”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하다 생각지 않소? 잘 생각해보시오.”

 “그, 그것은...”

 

 석진명은 강호 전체가 주목하는 혼사를 앞두고, 공을 세우고 싶은 조바심에 차 있었다. 그런 때에, 진금장주가 수상하다는 첩보를 얻은 것이다. 그 와중에 백년혈마를 만났고, 수하 일부를 잃고 망신만 당했다. 이 사실이 강호에 알려지면 자칫 혼담 자체가 위태로울 수도 있었다.

 

 ‘그 전에 새로운 공을... 모든 것을 덮고도 남을 만한 공을 세워야 한다!’

 

 석진명의 심기가 날카로운 건 그런 이유들이 복합되어 있었다.

 

 “또한, 백년혈마라는 악적이 유독 진금장의 소장주만은 아끼는 모습이더군. 끈적한 눈길로 바라보는가 하면...”

 

 “터무니없소이다! 음적(淫敵)의 사악한 언사를 어찌 곧이곧대로...”

 

 처억!

 

 석진명이 한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러고는 냉기어린 표정으로 자신의 주장을 이어갔다.

 

 “만약... 악적의 한 마디뿐이었다면, 나도 그대처럼 생각했을 거요. 허나,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라 의심할 수밖에 없지 않겠소? 귀 장원은 수상쩍은 점이 다분히 있다는 말이오. 백년혈마를 떠나서...”

 

 석진명은 말을 멈췄다.

 

 ‘진금장주는 혈교와 관련되어 있다! 지금도 혈교와 관련하여 자리를 비웠을 터!’

 

 그 말을 하고 싶어 입 안이 근질거렸다. 머릿속에선 쉴 새 없이 계산을 해댔다. 결국, 그 발언만큼은 자제하기로 했다. 공개적으로 진금장을 무림공적으로 선언하기에는 아직 일렀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내게는... 무턱대고 이곳을 쑥대밭을 만들 권한은 없다.’

 

 일단은 확증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이 말을 꺼내야겠군.’

 

 이제껏 회초리를 썼다면, 지금은 당과를 내밀어 유인해 볼 때였다.

 

 “허나, 본인은 그대의 말을 일부는 믿어볼까 하오.”

 

 어느새 석진명은 조금은 누그러진 눈으로 서천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실은 본인도, 그대에 대해 알고 있는 바가 있소. 산동에서 활약하던 시절... 벽력검의 명성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단 말이오.”

 “강호 동도들이 금칠을 해주었을 뿐입니다.”

 “또한, 조금 전의 태도로 미루어 보아...”

 

 석진명이 은밀한 눈빛을 건넸다.

 

 “그대는 일단 의심의 선에서 제외하려고 하오.”

 

 참으로 묘한 언사였다.

 

 ‘그대는 일단...이라니?’

 “어떻소? 내 말이.”

 “무슨 말씀이신지...?”

 “조만간, 장주가 돌아올 것 아니오. 장원내의 일들을 내게 알려준다면, 수호검단에서는 그대의 공을...”

 

 처억!

 

 서천휘가 공손히 포권을 하며 말했다.

 

 “조만간 해명이 필요하다면 이 몸이 직접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축객령이었다. 석진명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이다.

 

 “흥! 정히 뜻이 그렇다면.”

 

 석진명이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뒤돌아서다 말고 말했다.

 

 “참, 그러고 보니... 그 애송이는...”

 “...?”

 “진금장과 무슨 관계요?”

 “행색이 남루한 청년 말씀입니까?”

 “그렇소. 그자에 대해서도 수상쩍은 면이 많은 터. 본문은 예의주시할 것이오.”

 “현재로서는 딱히 그럴 일은 없을 듯합니다.”

 

 석진명은 자신도 모르게 척유한을 비호했다. 딱히 편을 들 생각은 없었으나, 일종의 인지상정과 같았다. 불쌍해 보이는 청년이, 자칫 야심에 찬 무림인사에게 희생당할까 우려했던 것이다.

 

 “후후, 참으로 재미있지 않소? 거지같은 놈이... 돈 많고 머리가 텅 빈 부잣집 여식에게 지분거린다, 라... 잘 어울리는 한 쌍이 아니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석진명이 일갈하며 정면을 쏘아봤다.

 

 휘이잉 -

 

 숲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하하... 하하하하하!”

 

 석진명의 웃음 소리만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아마도 백 리 밖을 달리고 있을 것이었다. 괘씸한 면이 있지만, 그의 무위는 진짜인 것이다. 어느새 내상 이전의 공력을 대부분 회복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후우, 가주께서 돌아오시면... 대체 무엇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서천휘는 바닥에 내려섰다. 분기로 인해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발걸음을 내디뎠을 때였다.

 

 투욱!

 

 “허어어어!”

 

 그만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 일류의 경지에 오른 후에 이토록 놀란 적은 처음이었다. 발부리가 어딘가에 걸려 넘어질 뻔한 것이다. 돌아보니, 담벼락 바로 아래의 음영(陰影) 속에 사람이 누워 있었다.

 

 “괜찮아?”

 

 어둠 속에서 일어서는 이는 서천휘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너, 너는... 그러니까... 거...”

 

 그 와중에도 ‘거지’라는 말을 입 안에 삼키는 고지식한 서천휘였다.

 

 “척유한이야.”

 “그, 그렇지... 아니, 그보다 네가 왜 여기에...?”

 “응?”

 

 척유한은 등을 툭툭 털고 일어났다.

 

 “그야 뭐... 배가 부르고 등이 따스해서 낮잠이나 자볼까 했지.”

 

 서천휘는 눈을 껌벅거리며 척유한이 누워있던 바닥을 내려다봤다.

 

 ‘......!’

 

 담장 아래는 대리국에서 생산되는 돌을 갈아 만든 뾰족한 돌담길이었다. 시각적으로도 수려했지만, 만에 하나 담장을 넘어오는 침입을 방비하는 효과도 노린 일석이조의 포도(鋪道: 포장한 길)였다. 척유한은 그런 곳에 태연히 누워있었던 것이다.

 

 ‘대체 이 자는 정체가 무어란 말인가?’

 

 오는 길에 몇 가질 물었지만, 휑설수설 할 뿐이었다.

 

 “이보게, 자네...”

 

 서천휘가 진지하게 다시 물으려 할 때였다.

 

 후비적!

 

 “근데, 시끄러워서 잘 수가 있어야지?”

 

 척유한은 어느새 서천휘의 곁에 서서... 코를 후비고 있었다.

 

 ‘이런, 지저분하게...!’

 

 기감이라고는 좁쌀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리숙한가 싶으면, 한편으로 배짱이 있어 보이기도 했고, 바보인가 싶으면 엉뚱하면서도 제법 말이 되는 소릴 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역시, 뭔가가 있다...!’

 

 서천휘는 자신의 막연한 감(感)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뜬금없게도 불가(佛家)의 얘기가 떠올랐다. 세상과 다르게, 어린아이와 같은 맑은 마음을 지닌 사람을 부처로서 여긴다는 고사가 떠올랐다.

 

 ‘내 이목을 감출 정도의 내공을 지닌 것은 아닐 테고... 명경지수와 같은 심성을 지닌... 다른 분야의 고절한 실력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어쨌거나, 더욱 밀착해서 지켜보기로 서천휘는 마음을 먹었다.

 

 “서 아저씨!”

 

 그때 진혜미가 멀리서 달려왔다.

 

 “헛 참, 아가씨도... 일꾼들을 시켜 가마라도 타고 오실 것이지.”

 

 겅중겅중 뛰어오는 진혜미를 보자, ‘조신하게 좀 오실 것이지’ 라는 말이 나올 뻔했지만, 조금 전 석진명의 악담이 생각나서 그 말을 참은 것이다.

 

 터억!

 

 “뭐, 건강해보이고 괜찮잖아.”

 

 척유한이 한 손을 서천휘의 어깨에 올려놨다. 조금 전까지 코를 후비던 손이었다.

 

 “허, 허억!”

 

 서천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차, 참아야 한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청년이니까...’

 

 쓱쓱!

 

 어쩐지 끈적한 것이 어깨에 묻은 느낌이었다.

 

 “근데 말야...”

 

 서천휘가 어깨를 두어 번 움찔 거릴 때 척유한이 물끄러미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끄응, 참자... 말이 상당히 짧지만... 정신이 온전치 못한 청년일 뿐이다.’

 

 서천휘는 애써 마음을 추스렀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긴 하루가 따로 없었다.

 

 “보기보다 콧털이 잘 어울리는데?”

 

 척유한이 툭 치며 말했다. 마치 뭔가가 만족스럽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뭐, 뭐야? 콧털이라니!”

 

 서천휘가 발끈했다.

 

 “이래봬도, 미염공(美髥公) 소릴 듣는 난데! 소중하게 기른 팔자(八字) 수염이란 말이다!”

 “잘 어울린다니까!”

 “팔자 수염이다!”

 

 “어머, 두 사람...”

 

 그때 진혜미가 다가왔다.

 

 “벌써 친해진 거 같네요?”

 

 “치, 친해지...”

 

 서천휘의 입에서 ‘친해지다니 무슨 말씀입니까!’라는 말이 튀어나오려 할 때.

 

 “응.”

 

 꾸욱 - !

 

 한 쪽 손으로는 서천휘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허그극!’

 

 순간, 서천휘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이... 이놈이? 더는 못 참겠다! 아무리 정신이 온전치 않다고 해도...’

 

 하지만 척유한은 제법 점잔빼는 얼굴로 진혜미를 돌아보고 있었다.

 

 “친해졌어.”

 

 척유한이 대꾸했다.

 

 “다행이에요.”

 

 진혜미가 웃었다. 여러 가지로 혼란스런 하루 중에 모처럼 짓는 밝은 표정이었다.

 

 ‘저, 정신이... 온전하네?’

 

 그 모습을 본 서천휘의 입이 다시 벌어졌다.

 

 ‘뭐, 말투는 여전히 싹퉁머리 없이 짧지만... 처음보다는 한결 낫군.’

 

 척유한은 시종일관 누구에게나 친구처럼 편안한 말투였다. 그것은 좋게 보자면 친근했지만, 서천휘처럼 ‘좀 이상하게 볼 수도’ 있었다.

 

 “서 아저씨...?”

 “그, 그럼요! 전 멀쩡합니다!”

 

 서천휘는 느닷없이 묻지도 않은 말을 하며, 공연히 큰소리를 쳤다.

 그때 척유한이 진혜미를 보며 물었다.

 

 “근데, 무슨 일 있어?”

 

 척유한의 눈빛은 멀쩡하다 못해, 진혜미를 배려하는 듯 보이기까지 했다.

 

 ‘녀석 보게? 누가 보면... 아가씨 생각은 자기 혼자 다 하는 줄 알겠구먼!’

 

 서천휘는 어이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석진명과 논쟁을 벌였기에, 진혜미를 보자 울컥했던 것이다.

 

 ‘흥! 허나 아가씨의 심중은, 이 몸이야말로 척하면 척이란 말이다! 일은 무슨 일이 있다고, 아가씨를 신경 쓰는 척은 저 혼자 다하는 건지...’

 

 그때였다.

 

 “그래요...? 표 났어요?”

 “응, 조금. 그렇지?”

 

 척유한이 서천휘를 돌아보며 능청스레 물었다.

 

 “어? 그, 그런 것 같기도...”

 

 서천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그랬구나...”

 

 진혜미가 살짝 당황스런 표정으로 중얼거리다 말고, 서천휘에게 말했다.

 

 “저기... 서 아저씨...”

 “네, 아가씨?”

 “아까, 우리들이 밖에서 난리를 겪고 있을 때 말야...”

 “무,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진혜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장원에 도둑이 들었었대.”

 “뭐, 뭐라고요?”

 “나도 방금 전에 알았어. 상황을 좀 알아보느라고 늦은 거야.”

 “헌데 도둑을 맞았다면... 제가 도착하자마자 말을 했어야 할 텐데...”

 

 오늘처럼 자신이 무력하게 느껴진 날은 없을 거라고 서천휘는 생각했다. 나름 침착하고자 애쓰며 진혜미에게 다시 물었다.

 

 “아니, 그런 중차대한 일을 누가 이제야 보고를 한 겁니까?”

 “서 아저씨, 화 안 낼 거지?”

 “설마, 왕삼이 녀석이...?”

 “내가 먼저 말문을 막았잖아.”

 “그래도 그렇지요!”

 “없어진 건 일단 별 거 없는 것 같아. 다만 한 가지...”

 “뭐, 뭐가 없어졌습니까?”

 “매담집이...”

 “네?”

 

 서천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금 전에 석진명에게 놀랐던 마음을 감추고자, 공연히 더 씩씩거렸다.

 

 “왕삼이 녀석을 그냥! 아가씨, 빨리 가시지요!”

 

 문득 보자, 척유한이 없었다. 서천휘가 고개를 돌려 앞을 보자, 벌써 저만치 앞에서 걸어가고 있던 척유한이 등을 보이는 채로 한마디를 건넸다.

 

 “빨리 와, 콧털!”

 “저, 저, 저... 싹...퉁...바...가...지...가...”

 “나 불렀어? 콧털!”

 “그새 두 사람... 많이 친해졌네?”

 “아, 아가씨!”

 

 

 

 

 

 

 ‘의리란 건... 좋은 것이야.’

 

 척유한은 성큼성큼 걸어가며 생각했다.

 하늘은 푸르렀고 주위엔 꽃과 풀이 가득 있었다.

 조금 전 먹어제꼈던 수천 개의 만두나, 대접받은 것이 고마워 남몰래 화초를 옮겨 심었던 일. 식후 운동 삼아 가볍게 몸을 풀었던 작은 웅덩이 파기까지... 어느 것 하나 지루할 일이 없었다.

 

 ‘서천... 뭐라는, 콧털도 제법 맘에 들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진혜미라... 그리고 이곳 청풍장...’

 

 척유한은 이 모든 것이 좋았다.

 아무것도 아닌 소소한 일상이야말로 한 번쯤 만끽해보고 싶은 것이기도 했다.

 

 ‘그래도... 할 일을 잊어선 안 되겠지.’

 

 여유로운 공기를 들이키는 와중에도, 척유한은 주먹을 한 번 움켜쥐어봤다.

 

 

 

 

 

 

 쌔애애액!

 

 석진명은 수하들과 함께 숲속을 빠르게 쏘아져 가고 있었다.

 

 “맹에서 기별이 왔습니다!”

 

 은영각주(隱影閣主)가 곁으로 다가와 보고했다.

 

 “한 시진 이내면... 계곡이 나타날 터인데, 그곳에서 철혈무적대(鐵血無敵隊)가 합류할 거라 합니다!”

 “알겠다.”

 

 석진명이 끄덕였다. 철혈무적대가 합류한다면, 염려할 것은 없었다. 대주인 황태현과는 가문끼리 친분이 있었기에 더욱 든든했다.

 

 ‘불길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엔 여전히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진금장주와 그의 딸 진혜미... 혈교와 과연 연관되어 있는가, 혹은 무관한가?’

 

 진금장에 사적인 악감정은 없었다. 조금 전, 서천휘에게 보냈던 경고성은 한 점 거짓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오늘의 수치를 지워야 한다!’

 

 석진명에게는 이것이야말로 최우선이었던 것이다.

 

 ‘공(功)을 세워서 두 배, 세 배, 아니 백 배, 천 배로 갚아야한다!’

 

 오늘의 치욕은 죽음보다 더한 굴욕이었다.

 어려서부터 기재로 불렸던 석진명에게는, 백년혈마에게 당한 것보다도, 진금장 무사들이 무심코 쳐다보는 시선들 하나하나가 더욱 불쾌했다.

 

 ‘진금장의 무사 놈들 앞에서... 허공에 결박된 채 허우적거리는 굴욕을 당하다니...’

 

 일류의식이 가득한 석진명에게는 일종의 결벽증과 같은 것이었다. 이를 지우고 싶은 마음이 이성을 분노로 바꿔놓았다 할 수 있었다.

 

 ‘더구나... 진혜미 앞에서...!’

 

 생각하면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대단한 미녀는 난생 처음이었다. 아리따운 얼굴에서, 잘록한 허리와 제법 풍만한 곡선미를 드러내는 몸매의 윤곽까지. 그뿐인가, 험악한 상황에도 주눅들지 않는 태도와 당당한 말투는 아무리 봐도 평범한 상단의 여식이 아니었다.

 

 ‘평생 찾던... 이상형의 여인이 아닌가?’

 

 그녀를 다시 보기 위해서라도, 진금장에 대한 조사를 앞세운 채 진금장에 들어가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 앞에서 백년혈마에게 농락당하는 꼴을 보였으니...’

 

 생각할수록 속이 쓰렸다. 물론, 혼사를 앞두고 딴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다. 자신의 아내가 될 사람은 중원 제일 상단주의 여식이 아닌가. 석진명은 굴러들어온 복을 차버릴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리 답답한지...’

 

 황금장주와의 혼담은 정략혼일 뿐이었다. 혼담의 상대는 얼굴조차 알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사람을 풀어 알아본 바에 의하며는...

 

 ‘중원제일 추녀!’

 

 자신과 혼사를 맺게 될 당사자인 황금장의 여식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만큼 추하다는 것이다.

 

 ‘그런 여인과도... 이문이 남는 혼사라면, 한 점 망설임 없이 치를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진혜미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것이 석진명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더군다나, 참으로 심난했던 것은...

 

 ‘그 거지 같은 놈!’

 

 진혜미를 떠올릴 수록... 시커먼 낯짝을 한 남자가 어른거렸다.

 

 ‘감히... 혜미 소저의 도톰한 입술을... 그 입술을 내 눈앞에서 뺏어?’

 

 자신이 인정할 수 있는 신분의 사내라면 모를까. 근본도 모를 자가 보란듯이 당당하게 입맞춤을 했다는 것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불쾌했다.

 

 ‘진금장...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자 없다고... 아니지, 없는 죄를 만들어내어서라도, 강호에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해 줄 테다. 그러고 나면 혜미 소저도 나의 존재를...’

 

 그때였다.

 

 패앵!

 

 ‘암기?’

 

 순간적으로, 청월검을 빼어들었다. 앙부일월(仰俯日月)의 초식으로 전광석화처럼 암기를 막아냈다.

 

 타앙!

 

 ‘감히! 이따위 수작으로 나를 어찌 해보려...?’

 

 하지만 그 순간.

 

 데에엥 -

 

 ‘컥... 커흑...!’

 

 오른팔이 떨어져나갈 것처럼 강하게 울려왔다. 격통은 순식간에 팔뚝과 상박을 거쳐서, 가슴과 명치를 지나 전신으로 퍼져갔다.

 

 “대, 대주!”

 “병신들! 뭣들하는 거냐!”

 

 놀란 수하들이 자신을 보자, 되려 꾸짖었다.

 

 “명(命)!”

 

 수하들이 사방으로 쏘아졌다. 암기를 쏜 자를 찾으려는 것이다.

 

 털썩!

 

 결국 석진명은 바닥에 내려섰다.

 

 ‘대체 어떤 자가...’

 

 석진명은 겨드랑이가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방으로 퍼져나간 수하들이 아무런 흔적을 찾지 못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대체 누가...?’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이 정도의 고강한 내력을 지닌 자가, 암습 따윌 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자, 뒷골이 섬뜩했다.

 

 ‘경고...?’

 

 무심코 석진명의 시선이 빼어들고 있는 청월검의 검면에 향했다.

 지극하게 아끼는 애검이었다.

 때로는 하루를 통틀어 검을 닦기도 했다.

 그런 청월검의 검면에 붙어 있는 암기는...

 

 ‘...비가(鼻痂)?’

 

 코딱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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