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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벽속의 남자
작가 : 탁지원
작품등록일 : 2017.12.18

기술의 진보가 심화되면 그것은 마법과 같게 됩니다.
지금 인류는 인류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기술 혁명의 초입에 와 있습니다.
이제 AI는 여태까지 인류가 축적한 지식보다 몇십만년을 앞서 갈 것이고
생명공학과 나노공학은 인간의 생태적 특성을 근본적으로 바뀌어 놓을 것입니다.
이는 곧 기술을 선점한 인간들중에서 신이 출현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인류의 출현 앞에 현생 호모 사피엔스들은 어떠한 선택의 여지가 있을까요.

이제 주인공은 신이 될지 인간으로 남을지에 관하여 자신이 운명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39. 장흥에서 통화하다
작성일 : 17-12-18 21:17     조회 : 265     추천 : 1     분량 : 1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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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내 인생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2009년이 지나가고 그 다음 2010년이 되었다.

 

 나는 열일곱 고1학생에서 열여덟살 고2가 되었으나 실제로 이것을 전혀 체감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름조차 바꾸고 숨어 사는 처지에 나이 한 살 더 먹는게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더 이상 학교도 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고1,고2 따져봐야 다 부질 없는 짓 아니겠는가.

 

 이대로 가다가는 앞으로 수능 보는 것은 고사하고 여태까지 배운 것 조차 다 까먹을 지경이었다. 나의 위장 신분인 김준호의 신상명세에 따르면 나는 이미 군대를 제대한 스물 두살짜리 청년이니까 아마도 수능을 봤다면 이미 서너번을 치뤘겠지만.

 어차피 딱히 가고 싶은 대학도 아니였지만 막상 그 동안 공부해온 노력에 비하여 수능조차 볼 수 없다는 것이 답답하게 여겨졌다.

 

 가마터에 쪼그려 앉아 서쪽으로 머뭇거리며 사라지는 석양을 보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기약도 없이 강진의 가마터에서 할아버지를 도와 잡일이나 하는 백수 김준호로 살아갈 생각을 하니 한참 남은 나의 앞날이 깜깜하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던 영어과목만이라도 까먹지 않기 위해 할아버지께 부탁해 강진 읍내에서 영어 관련된 아무런 책이라도 사다 달라고 사정했다.

 난 할아버지가 성문종합영어 같은 학습책을 사 올지 알았건만 할아버지는 쌩뚱맞게도 영어 원본으로 된 소설책, J.D 셀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갖다 주셨다. 밤마다 마땅히 할 일이 없던 나는 하는 수 없이 흐미한 백열등 밑에서 열심히 그 책이라도 읽었다.

 

 나는 평소에도 <오 헨리 단편집>이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의 소설을 좋아했기 때문에 할아버지께서 갖다 주신 책이 점점 마음에 들기 시작해서 그 책을 아주 외우다시피 하게 되었다.

 

 간략히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 이라는 책의 내용은 사회부적응자인 주인공이 타락한 세상에서 순수함의 결정체인 자신의 여동생을 지키려고 하는 내용이었다. 세상에 소외된 채 순수함을 찾아 떠도는 남자 주인공의 모습에서 세상과 단절되어 산속에 숨어 사는 외톨이가 된 나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는 듯 해서 더욱 공감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열심히 책을 읽는 내 모습이 대견했던지 읍내에 갈때마다 계속해서 책을 구해다 주셨다. 주로 영어로 된 소설책들이였는데 그나마 알고 있던 지식들을 잊지 않고 공부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서 나는 일이 끝나는 밤부터 새벽 늦게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것은 언제가 반드시 내 이름 안현을 되찾고 어머니와 함께 이전에 행복한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야 말겠다는 나의 강한 의지의 분출이었다. 그 가냘픈 희망의 끈이 그대로 끊어지는 것을 그냥 멍하니 산골짜기 가마터에서 넋놓고 보고만 있을 수만은 없었다.

 

 산속 가마터에서 생활이 조금 안정되자 나는 이전의 나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 보기로 했다.

 

 그 날은 토요일이었는데 때 마침 할아버지께서 강진 오일 장터에 가시는 날이었다. 잘 팔리지도 않는 도자기들을 그래도 정성껏 신문지로 둘둘 말아 깨지지 않게 포장해서는 산 밑까지 내려가시는 걸 도와드리고 다시 가마터로 올라왔다. 아마도 할아버지는 장터가 파하면 삼거리 다방 설마담한테 가서 그나마 번 돈을 탈탈 털어 술값으로 바치고 오느라 해가 저물고도 한참 있다가 올 것이다.

 

 나는 간만에 할아버지 몰래 시내에 나가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돈 몇천원이라도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가 푼돈을 모아두던 돼지저금통에서 약간의 소액을 융통하기로 했다. 돼지저금통에 등에 난 입구를 젓가락을 가지고 정교하게 공격하기 시작하자 얼마 안되서 돼지는 오백원짜리를 토해내기 시작했고 금새 몇 천원이 모여졌다.

 

 돼지로부터 뽑아낸 동전이 열개 정도 되자 표가 날 정도로 돼지가 너무 가벼워지면 안되기 때문에 그정도에서 멈추기로 했다. 돼지저금통에서 꺼낸 그 몇 천원이 내가 가진 전재산이었다.

 

 가마터 뒤에는 오랫동안 타지 않아서 타이어에 바람이 빠진 자전거가 하나 있었는데 나는 그 자전거를 짊어지고 산속 가마터에서 산밑 오솔길까지 내려왔다. 그리고는 자전거를 끌며 강진 읍내까지 나갔다.

 

 행여나 중간에 재수없이 장터에 나간 할아버지와 마주칠까봐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읍내 우체국 옆의 자전거포에서 타이어에 바람을 넣을 때까지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자전거포 아저씨한테 물어봤다. 여기서 강진읍내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 어디냐고 묻자 아저씨는 여기서 자전거로 한시간 정도 걸리는 장흥읍이라고 알려 주었다. 나는 타이어에 바람을 넣자마자 할아버지가 돌아 오시기 전에 장흥에 갔다오기 위해서 미친듯이 자전거의 페달을 밟았다.

 

 평소 같으면 이 정도 속도로 자전거를 탄다면 심장이 헐떡거리면서 꽤나 힘들어 했어야 했는데도 다행히도 여기 와서는 과거처럼 그렇게 심장이 고통스럽게 아픈 적이 없었다.

 이제 바람을 넣어 타이어가 빵빵해진 자전거를 타니까 장흥읍내까지는 금방 한달음에 내달을 수 있었다. 거기 군민회관 앞에 멈춰서 자전거를 세워 놓고 주변에 공중전화박스를 찾기 시작했다.

 

 화물차 사내는 절대 외부와의 연락을 하지 말라고 했지만 난 더 이상 참기 힘들었다. 어머니와 소식이 끊긴지가 무려 반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조심하기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지난번 여수에서는 경찰서로 전화한 것이 검은 잠바들에게 발각된 것이니까 경찰서 같이 혹시나 통화가 녹음되거나 하는 곳에는 일체 전화하지 않고 단지 주변 몇몇 사람들의 집으로만 전화하기로 했다.

 

 그 정도로 조심하면 들키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여기는 나와 아무 연고도 없는 장소이다. 전라도에서도 한참 후미진 마을, 장흥인데다가 공중전화로 통화하는데 절대 날 추적할 수 없을 것이다 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전화가 끝나면 난 이 곳이 아닌 옆마을 강진으로 가서 다시 숨어있을 것이다.

 

 나는 기억에도 가물거리는 절친 맹기남의 집전화 번호를 눌렀다. 과연 토요일 낮에 기남이가 집에 있을지는 나도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그가 빈둥거리며 집에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신호가 가고 기남이 어머님이 전화를 받으셨다. 어머니는 오랜만에 전화한 내가 누군지 묻지 않으셨고 바로 기남이를 바꿔 주셨다. 하늘이 도우사 다행히도 기남이는 집에 있었다. 헤어진지 수개월만에 듣게 되는 그의 목소리는 놀람으로 가득차서 흥분한 그의 목소리가 수화기 밖으로까지 크게 울려 퍼져 나왔다.

 

 - 현아! 너 현이 맞지? 야이 정신나간 놈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는 있는거야?

 대체 여태까지 뭐하고 있던거야? 지금은 또 어디구?

 

 속사포처럼 퍼붓는 맹기남의 흥분한 목소리에도 나는 최대한 냉정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도리어 궁금한게 더 많은 건 나였다.

 

 - 미안해. 하지만 그건 알려줄 수 없어.

 그나저나 요새 학교는 어때?

 

 - 학교가 어떻냐구? 너 지금 그걸 말이라구 하냐?

 니가 민변구 대갈통을 박살낸 이후 모든 게 다 변했어.

 며칠동안 민변구가 데리고 온 조폭들이 학교 정문을 지키고서 널 찾는다고 난리를 폈어.

 또 무슨 일인지 형사들이 찾아와서 에릭을 조사해갔고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에릭이 전학을 갔구 말이야.

 

 - 에릭이 전학을?

 

 - 그래. 2학기 시작하고 얼마 안되서 갑자기 중국 어디인가로 급하게 이민을 가게 됐다고 하면서 어느날 그냥 바람처럼 떠나 버렸어.

 

 나는 에릭이 전학을 갔을 줄은 전혀 상상도 못했었다.

 자신이 벌인 끔찍한 살인이 발각 될까 두려워서 였을까? 아니면 또 다른 무슨 계획을 꾸미기 위해서 였을까?

 

 어쨌든 그의 전학이 곧 그가 영원히 내 곁에서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는 나를 납치하기 위해 처음 보는 동네 아줌마도 눈하나 깜빡 하지 않은채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던 냉혹한 인간이다. 사람까지 죽여가면서 나를 쫒았는데 단순히 전학 갔다고 그렇게 나를 쉽게 놓아버릴 인간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계속해서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그리고 결국 머뭇거리다 마침내 물어 보았다.

 

 - 그리고…너 혹시 선영이 소식은 아냐?

 

 - 뭐? 누구?

 너 지금 우리반 그 장선영이 말하는거냐?

 나 참 어이가 없네…지금 니가 선영이 안부나 묻고 그럴때냐?

 

 난 좀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꼭 알고 싶었다. 선영이가 어떻게 지내는지를.

 

 - 아직도 걔를 못 잊고 있다니 너도 참 징그럽다.

 안그래도 한동안 그 얘가 학교에서 큰 이슈였다.

 

 - 이슈? 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 그 날 학교축제때 걔가 센터에 서서 재즈 댄스를 췄잖아. 그걸 학부모형 중에 있던 유명한 연예기획사 대표가 보고는 끼가 넘친다고 하면서 바로 스카웃 한거야. 그 별것도 아닌 얘를…

 그 다음에야 일사천리로 학교 자퇴하고 지금은 그 기획사에서 걸그룹 데뷔 연습 중이래.

 참 사람 팔자라는 것이 우습지…

 

 다른 사람들은 그럴 수가 하고 신기해 했지만 나는 전혀 아니었다. 내가 본 선영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그동안 학교에서 선영이의 진가를 못 알아봤던 것뿐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처음 봤을 때는 알아차리기 힘들겠지만 난 그녀를 본 첫눈에 바로 알아챘다.

 그녀의 도도하고 무심한 듯한 모습에 다른 사람과는 다른 그 쉽게 얻을 수 없는 무엇인가가 숨어있음을 나는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그리고 그녀의 약간 틀어진 사팔뜨기 눈은 항상 꿈을 꾸는 듯 했고 내가 그녀와 눈을 마주 치고도 피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도록 나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나는 그녀의 자세한 소식을 더 알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래서? 언제 데뷔한대?

 

 계속 선영이에 대해서 집요하게 묻는 나에게 맹기남이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정신차려! 아 자식아! 니가 지금 장선영이 꽁무니나 캐고 있을 때냐구!

 너 니네 집에서 살인사건 난 거 모르냐!

 

 그제서야 난 선영이로부터 갑자기 내가 서있는 현실세계로 돌아온 듯 했다.

 살인사건이라니? 어머니와 내가 살던 집에서 살인사건이라니...꿈에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나는 온몸이 감전된 듯 꼼작 못하고 수화기를 든 채로 그대로 얼어 붙었다가 한참만에 간신히 입술을 떼었다.

 

 -살인….누가? 언제? 정말 우리 집이 맞아?

 

 기남이 역시 우울한 소식을 전하느라 목소리의 톤이 한참 잦아 들었다.

 

 -죽은 사람은 경찰인데 죽기 전전날 학교에 와서 너에 관련해서 조사하던 형사중 한명이였어. 니가 사라지고 몇 주가 지난 8월말 인가에 그 형사가 학교를 방문해서 나를 비롯해서 담임, 민변구, 에릭 전부 다 조사해갔거든.

 근데 그 다다음날 그 형사들중 한명이 바로 너희집에서 시체로 발견된 거야. 그것도 바로 아무도 없는 텅빈 니네 집 거실에서…

 우리 아버지가 그래도 명색이 기자아니냐? 그래서 몇가지 나한테 알려 주셨는데 거실 소파에 피범벅이 된채로 두 눈이 도려내진채로 누워서 발견됐다고 하더라구.

 이건 아주 대담하고 잔인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범죄방법이라고 알려주셨어. 마피아나 삼합회에서 목격자들에게나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하여튼 그때부터 경찰에서 너와 니네 엄마를 찾는다고 난리가 난지 한참 지났어.

 

 근데 아직도 이걸 몰랐단 말이야? 도대체 인터넷 안하고 뉴스도 안보고 너 지금 어디서 뭘하고 다니는거야?

 

 기남의 말을 들은 나의 머리속에는 단 사람만 떠올랐다. 아무도 없는 텅빈 나의 집안의 거실에 대체 누가 사람을 살해하고 그 시체를 남겨 놓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우리집의 거실…정말이지 나는 그 집안에서 그 거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는 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심장이 안좋아 밖에 나가노는 것보다 책을 보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봄날 햇빛이 가득 들어오는 거실 소파에 비슴듬이 기대어 앉아 내가 좋아하는 모험소설을 읽은 시간이 너무나 좋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나도 몰래 깜박 선잠이 들면 부엌에서 일을 마치고 나오신 어머니께서 나를 그녀의 무릎에 눕히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참을 그렇게 계시곤 했다.

 

 나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꽉 깨물었다. 이 세상에서 나한테 그런 잔인한 짓을 할 놈은 에릭밖에 없었다. 대체 왜 이토록 나의 평범한 일상을 잔인하게 뭉개버리려 할까? 난 나를 향한 그의 잔인함의 원인과 앞으로의 전개에 대하여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경찰에 가서 이 상황을 설명할까?

 아냐…지금 누가 나의 말을 믿어 주겠어.

 우리집 거실에서 나를 조사하던 형사가 시체로 발견되고 어머니와 나는 실종되었고 내가 생각하는 유력한 용의자인 에릭은 중국으로 떠나버린 이런 상황에 말이다. 게다가 나는 지금 안현이란 이름조차 감추고 도망자 신세이지 않는가…’

 

 점점 더 일은 꼬여만 가고 난 이제 졸지에 살인 누명까지 뒤집어 쓰게 되어 버렸다. 에릭은 아마도 자신을 조사하던 형사를 떼어내면서 동시에 나를 수배범으로 옴짝달싹 못하게 붙들어 놓기 위해서 이런 흉계를 꾸몄을 것이다.

 아무 감정의 기복도 없이 처음 보는 동네아줌마의 머리통을 전봇대에 들이 받게해 죽이던 에릭이라면 그 이상이라도 할 놈이 분명했다.

 

 나는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전화를 끊기 전에 기남에게 마지막으로 한가지 부탁을 했다.

 

 -기남아.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부탁 할게.

 

 -뭔데? 제발 무리한 건 하지마. 나도 내가 전날 만난 형사가 살해 당했다는 말을 듣고 후달려서 며칠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잤으니까.

 

 - 우리집에 가면 내 책상 서랍에 내가 정리해둔 내 소지품이 있거든. 그 것만 좀 챙겨줘. 내가 당분간 집에 못 갈거 같아서 그래.

 

 -니네 집에 소지품? 거기 살인현장이라고 해서 아무나 함부로 못 들어갈텐데.

 그리고 너 도대체 어디서 뭐하는데? 뭐하는데 그러느냐구? 좀 나한테만이라도 알려줘.

 

 -안돼. 알면 너한테도 좋을 거 없어.

 우리집 현관문 비밀번호는 6954니까 들어가서 이층 내 방 책상 맨 아래 서랍의 붉은색 상자만 갖다가 니가 보관해줘.

 

 -야. 나보고 지금 살인현장에 가라는거냐.

 

 -제발. 부탁이야. 지금 너말고는 부탁할 사람도 없어.

 

 -아. 정말…

 

 나는 애원하고 매달려며 어떻게든 기남이를 설득했다. 결국 기남이는 애걸복걸하는 내 부탁을 들어 주기로 했다.

 

 -고마워. 그리고 너 혹시 우리 어머니 소식 들은 거 없냐?

 

 -니네 어머니? 너하고 같이 있는거 아니였냐? 아니면 니네 외할어버지 댁에 계시든가?

 

 기남이는 도리어 나에게 어머니의 행방을 반문해왔다. 괜히 물어봤다는 생각에 나는 외할아버지에게 전화를 해서 물어볼 생각으로 그만 전화를 끊으려 했다.

 

 -현아! 잠깐만!

 

 -응? 왜?

 

 -난 니가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잘 모르겠고 어디 있는지도 모르지만 좌우간 몸 성히 지내라. 넌 평소에도 몸이 안좋았잖아…

 내가 니가 부탁한 박스는 어떻게든 찾아서 갖고 있을게.

 

 나는 나를 걱정해주는 기남이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서둘러 기남이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이번에는 외할아버지 집으로 전화를 했다. 한참을 신호가 가도 아무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

 

 혼자 사시는 외할아버지는 집에는 도우미 아줌마가 있었는데도 아무 응답이 없는 걸로 봐서 집에 아무도 없는게 분명했다. 할 수 없이 할어버지 핸드폰으로 전화 할려 했는데 이번에는 하두 전화한지가 오래 되서 할아버지의 핸드폰 전화번호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이 나지 않은 나는 결국 할 수 없이 전화를 끊고 공중전화 부스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다시 강진의 가마터로 돌아가기 위해 서둘러 자전거의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일단 기남이한테 부탁해 내가 어린시절부터 소중히 간직해온 물건들은 모아놓은 상자만이라도 건질 수 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상자안에는 행복했던 시절 우리 가족의 사진들, 어머니가 전해주신 아버지의 수첩 그리고 틈틈이 몰래 훔쳐보면서 그려놓은 선영이의 모습까지 내 소중한 것들이 전부 다 담겨있었다.

 

 그만하면 할어버지 몰래 위험을 감수하고 장흥까지 와서 전화를 한 것은 나름 소득이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상상치도 못한 기막힌 일도 알게 되었다. 내가 살인 혐의로 수배를 당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 이런 누명을 씌울 사람은 에릭 그 놈 말고는 없었다. 다시 살인을 저지르고 이번에는 그 시체를 우리 가족이 살던 거실에 갖다 놓다니…

 

 그 집의 거실은 내가 태어나서 우리 가족이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나의 소중한 기억이 서린 공간이였다. 학창시절 대부분을 찐따로 산 나에게 유일한 피난처이자 안식처였던 공간마저 그는 무참하게 밟아 버렸다.

 

 비록 몸은 안좋았지만 어머니와 함께 평범한 찐따의 삶을 살던 고등학생이였던 나였다. 그러던 나는 불과 일년도 안된 시간 동안에 이제는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채 신분조차 감추고 강진의 산골 가마터에서 위장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가여운 그녀…나의 어머니는 어디에 계신지 행방조차 알 수 없었다.

 

 도대체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이런게 된 것일까?

 답은 분명했다. 이게 다 에릭 그 놈 때문이었다.

 하지만 도대체 왜? 무엇때문에?

 내가 그의 비위를 거슬렸을까?

 그도 아니면 나도 모르는 그가 탐내는 것을 내가 갖고 있는가?

 그도 저도 아니면 그저 심심해서 갖고 노는 건가?

 

 시간을 되돌려 에릭을 처음 만난 고등학교 입학식 때부터 돌아가서 도대체 왜 내가 이런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지 알아보려 했다. 불과 몇 개월전 선영이 앞에서 나를 모욕주고 떼어 놓을때만 해도 치기어린 고등학생의 왕따놀이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날 밤부터 사람들을 살인하고 납치하고 그것도 모자라 우리집 거실에 피범벅이 된 시체를 갖다 놔서 나와 어머니를 수배범을 만들어 놨다.

 이게 과연 열여덟 고등학생이 했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이던가..

 

 발은 정신없이 페달을 밟고 있었지만 이유를 캐묻고 있는 내 머리속은 터질 것만 같았다.

 에릭이 어디에 있든 꼭 만나서 묻고 싶었다. 도대체 나의 어떤 점 때문에 이렇게 나를 괴롭히냐고. 그 이유를 듣고 그에 합당한 대가를 그에게 치루게 하고 싶었다.

 

 ‘차라리 조금 더 일찍 학교를 그만 두었더라면…아니 애당초 그 학교에 입학하지 않고 그냥 집근처 가까운 학교에 다녔더라면…아니야…어릴적 내 심장이 병에만 걸리지 않았어도 난 심장이라는 별명과 찐따소리도 듣지 않고 평범한 소년의 삶을 살 수 있었을지도 몰라…’

 

 후회와 억울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렇게 자전거 페달을 밟으면서 다시 강진의 산속 가마터로 향하는데 나도 모르게 자꾸만 눈물이 흘러 내렸다.

 억울해서였을까? 아니면 바보 같은 자책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살인자 미치광이 에릭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을까?

 나도 모르게 그렇게 흐르는 눈물이 맞바람을 맞아 뒤로 흩뿌려렸다. 난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고 그대로 달렸다.

 

 논두렁길을 한참 달리다가 갑자기 내 머리속에는 무엇가 불현듯 떠올랐다.

 

 불현듯 이 모든 것이 나로부터 비롯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한 불만만 토로 했지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한 것에 대해서는 잘 생각해보지 않았다.

 만일 내가 매번 그렇게 찐따 같은 짓거리만 않했어도 일이 이렇게 심각하게 꼬여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저 어머니가 가엽다는 핑계로 어머니께서 시킨대로 학원에 다니고 그 학교에 입학하고 심장이 아프다는 핑계로 매번 학교 행사에 불참했었다. 그렇게 피하고 도망다니다 찐따로 찍히고 끝내 여기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된 것이다.

 만일 내가 비록 아픈 심장을 가졌더라도 나에게 닥친 세상일에 당당히 맞섰다면 일이 이토록 비참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 자전거 안장위에서 맹세했다.

 이번에 흘리는 눈물이 내 인생의 마지막 눈물이 될 거라고. 더 이상 이전에 그 찐따 안현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때와는 달리 이제는 나에게 남들이 갖지 못하는 특별한 능력이 생겼다. 나는 이미 나의 능력의 위력을 목격했다.

 비록 슈퍼맨처럼 하늘을 날거나 바위를 부시지는 못해도 스나이퍼처럼 숨어서 상대의 빈틈을 노리기에는 안성맞춤인 능력이다. 게다가 벽만 있다면 언제든 그 안으로 숨을 수도 있다. 상대방은 벽속으로 숨은 나를 절대 나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이제부터 나는 세상에 둘도 없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나에게 남아 있던 그 찐따 안현이라는 나약함은 저 가마터 아궁이에 넣고 다 불살라 버리리라 다짐했다.

 

 당장 가마터로 돌아가자 마자 주변을 정리하고 내 힘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로 했다.

 

 근데 한가지 고민이 있었다.

 자전거 페달을 오래 밟고 한참을 달리자 심장이 욱씬거리는 것이 다시 그 망할 놈의 심장판막협착증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그동안 잊고 있었는데 다시끔 내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이놈이 상기시켜 줬다.

 어찌됐든 이 지긋지긋한 놈을 떨쳐버리고 새 판막을 달아야만 에릭과 제대로 맞서 싸울 수 있것만 같았다.

 

 그런데 나는 지금 강진 산골 가마터에 빈털터리 신분으로 살고 있다. 서울에 있는 심장전문의 주치의한테 진료를 받은 지는 벌써 일년이 다 되어가고 내 심장속의 판막은 점점 더 힘에 겨워 너덜너덜해지고 있었다.

 

 난 당장 내 심장을 건강하게 만들어줄 방법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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