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형사는 에릭이 사는 펜트하우스 문의 벨을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눌렀다.
“누구시죠?”
현관문의 CCTV에 불이 들어오면서 둔탁하고 굵은 남성의 목소리가 스피커로 흘러 나왔다.
“저 보안실 입니다. 외부 침입 경고벨이 울려서 잠시 점검차 방문했습니다.”
그러면서 공형사는 슬쩍 보안요원 유니폼의 명찰을 카메라쪽에 대고 보여주었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윽고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현관문이 열렸다. 공형사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그 안으로 들어섰다.
현관 입구에서 거실까지는 길게 복도로 연결되어 있어 현관 입구에서는 집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 공형사는 그렇게 한참을 복도를 지나가고서야 거실야 다다를 수 있었다.
천천히 거실쪽으로 나아간 공형사에게 누군가 이사를 가는 듯 사방에 어지럽게 쌓여진 박스들과 웃가지들이 보였다.
“저 보안등에 갑자기 불이 들어와서요. 혹시 창문이 깨지거나 창문을 통해서 무슨 이상한 게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공형사의 질문에 박스에 짐을 넣고 있는 검은 잠바를 입은 한 남자가 무뚝뚝하게 반말로 대답했다.
“아니. 여기는 별 이상 없는데 위층에 한번 가보지 그래”
공형사는 빈정이 상했지만 지금 누구와 시비를 걸 상황은 아니었다.
펜트하우스는 복층으로 구성되어 2층은 따로 벽면에 붙은 나선형의 계단으로 올라가야만 하는 구조였다. 일층의 서너명의 남자들은 바쁘게 무엇인가를 계속 박스에 포장하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문서를 파쇄하는지 대형 파쇄기가 씨그럽게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일반 가정집에 문서 파쇄기라…아무리 펜트하우스지만 어울리지 않는군…
공형사가 보기에는 이 곳은 가정집이 아니라 무슨 단계업체 사무실 같은 느낌이었다.
이층에 올라서자 웅웅하며 머리를 울리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영어로 계속 퍽퍽 하고 외치면서 기계를 발로 차는 듯한 소리도 같이 들려왔다.
공형사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열린 문틈으로 살짝 그 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 안에는 넓은 벽면을 가득 채운 수십대의 모니터와 한쪽 구석에 대형서버가 쉼없이 불빛을 반짝이며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한 젊은 남자가 서류를 집어 던지고 욕을 하면서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발로 걷어 차고 있었다.
‘에릭이다...’
엊그제 학교에서 처음 본 얼굴이지만 공형사는 절대 그를 잊을 수 없었다.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 영화 주인공인 디카프리오를 연상시키는 금발에 푸른 눈매, 매끄러운 콧날.
같은 남자라도 단번에 빠져들만한 그런 외모를 공형사는 태어나서 실제로 처음 보았던 것이다.
공형사는 에릭이 있는 방을 살금살금 지나쳐 이층의 끝까지 가보았다. 다른 방들은 문이 잠겨 안을 확인 할 수 없었다. 그는 천천히 돌아서 이층에서 내려왔다.
“뭐가 이상한 거라도 있나?”
아까 처음 문을 열어준 검은 잠바를 입은 남자가 밑에서 기다리다가 계속 반말로 물어봤다.
“아니요. 별 이상한 점은 없는데요. 또 오작동인가 봅니다.”
“그래? 허접한 것들. 말로만 최고의 주상복합이라고 떠들면서…
알았으니까 그만 가봐.”
그 남자는 무뚝뚝하게 대답하고는 박스를 들고 다시 거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근데 그가 입은 검은 옷이 아무래도 공형사의 눈에 왠지 모르게 낯익어 보였다. 그때 공형사는 번쩍하면서 떠오르는 모습이 있었다.
‘아…맞다. 한강시민공원 카니발에서 사체로 발견된 남자들도 저것과 똑 같은 제복을 입었었지…그렇다면 사망한 중년여성을 납치한 녀석들과 에릭이 서로 무엇인가 깊은 관계인 것은 분명하군!’
공형사의 눈에는 마치 검은 옷의 남자들은 에릭을 위해서 짐을 꾸리는 듯이 보였다. 이만하면 대충 안을 둘러본 것 같아서 공형사는 그만 문을 나서려 했다.
그 순간 그의 귓가에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잠깐! 거기!”
그 목소리는 때마침 이층에서 내려온 에릭이 공형사를 부르는 소리였다.
“이 자식들이 외부 사람 함부로 들이지 말라니까. 막판이라고 이 세키들이…”
“아…그게 아니라 보안요원이 집안에 갑자기 보안경고등이 울렸다고 해서…”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에릭이 말대꾸를 한 검은 옷에게로 다가가 그자의 가슴을 날라차기로 걷어찼다. 가슴팍을 걷어채인 자는 그대로 뒤로 넘어져 한바퀴를 굴렀다.
“내가 만주몽골로 가니까 아주 신이 났냐. 이 개 같은 코리안 마더 퍼커들이…”
뭔가 내려오면서부터 대단히 심사가 꼬였던지 내려오자마자 분을 참지 못하고 에릭은 차례대로 검은 옷의 사내들한테 발길질을 해댔다.
공형사는 이 난잡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잽싸게 현관쪽으로 몸을 피하려 했다. 그리고 서둘러 현관문을 열려 했다. 하지만 들어오는 것만큼 나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현관의 출입키는 나갈 때도 락을 해제하게 되있었다.
“거기! 내가 잠깐 서보라고 했잖아”
공형사는 무언가에 붙들린 듯 그만 그자리에 꽁꽁 얼어붙고 말았다.
“보안요원이라고? 내가 여기 웬만한 보안요원들은 얼굴을 다 아는데 말이야…”
에릭은 천천히 걸어오면서 모자를 깊게 눌러 쓴 공형사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아…네….하핫…제가 온지가 얼마 안돼서…하하하”
공형사는 순간적으로 더 깊게 모자챙을 내려 쓰면서 에릭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그의 눈빛을 피했다.
“그래?”
“하하…네….이사가시는 거 같은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요”
공형사는 형사 생활 십년만에 이렇게 후들거리기는 처음이었다. 기껏해야 열입곱 소년한테 마치 잡혀서 심문이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무슨 어린 녀석이 그렇게 싸가지 없고 차갑게 말할 수가 있지…저놈한테 얻어 맞고 참는 놈들은 또 뭐구…’
현관을 빠져 나온 공형사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시 로비로 내려가 편경위를 만났다.
“그래 어떻든가?”
“아마도 이사를 가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거실에는 이삿짐이 잔뜩 쌓여져 있었고 방에는 서너명의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이삿짐 나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에릭은 이층에 있었구요”
“이사? 대체 갑자기 어디로 이사를 한다는 거지?”
“모르겠습니다. 근데 이상한게 있습니다.”
공형사는 자기가 보고 온 대로 편경위에게 보고했다.
“마치 일반 가정집이 아니라 무슨 회사 사무실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대형 파쇄기와 컴퓨터 서버 수십대가 집안에서 돌아가는게 아무래도 보통 장소가 아닌 듯 합니다.”
“대행파쇄기와 서버 수십대?….그래서 아까 내 후배 보안팀장이 그 집이 전기료가 무지막지하게 나온다고 했구먼…”
“그리고요…중요한 것이 또 있습니다.”
숨돌릴틈도 없이 공형사의 보고가 이어졌다.
“지난번 구리한강시민공원에서 건져낸 카니발에 사체로 발견된 경호업체 남자들 있잖습니까?”
“응. 한여름에도 검은잠바 입고 사망한 놈들 말인가?”
“네. 근데 저 안에 있던 남자들이 그들고 똑 같은 검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가슴에 있는 붉은색 피라미드 삼각형 같은 것이 분명 같은 마크였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저 안에 있는 자들과 구리한강시민공원에서 사망한 자들은 같은 회사 사람이고 그들은 모두 바로 저 열입곱살짜리 고등학교 일학년 에릭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음…”
편경위는 낮은 신음소리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생각해보았다.
‘불과 열입곱살 짜리 소년이 타워팰리스 펜트하우스에 혼자 살면서 여러 명의 경호업체 직원들을 거느리고 있다. 그리고 그는 어느 곳에서 신상명세가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미대사관에서까지 등장해서 그의 신원을 가려주고 있다…
도대체 너의 정체가 뭐냐? 에릭…’
고민에 빠져 있던 그를 깨운 것은 공형사의 목소리였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편경위님.
비밀리에 지시도 안받고 하는 거니까 영장발부는 이미 물 건너간 상태고 계속 이 앞에서 잠복이라도 해야 할까요?”
편경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 여기서 잠복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지하주차장에서 차로 이동할텐데.
아무래도 내일 학교로 가서 에릭이란 놈과 그 주변인물에 대해서 더 탐문해봐야 겠어.
자네는 행방불명된 그 안현이란 학생을 찾는데 최대한 주력해주게.”
“네.그렇게 하죠”
공형사는 밝게 대답했다. 어서 집에 가서 갓 돌을 지난 딸아이와 놀아줄 생각을 하니 그는 퇴근길의 발걸음이 기쁘게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