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죽음과 다름 없는 고통과 절망 구덩이 속에 몰아넣고는 자기는 패거리들과 함께 헤헤거리며 희희낙낙 돌아다니는 민변구를 나는 도저히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무엇인가 물리적으로 그를 타격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다. 정말이지 사시미 칼이라도 있었으면 하고 주변을 둘러 보았다. 하지만 이 곳은 학교다. 그런 것이 있을리가 없었다.
하지만 마침 2층 난간 한쪽에 자잘한 작은 선인장 화분들을 모아 두었다. 그 중 흙으로 된 화분 하나를 잡으니 딱 내 손에 알맞게 들어왔다. 그리고는 아래쪽의 민변구가 내 바로 밑을 통과할 때를 노렸다.
2층 내가 서있는 곳에서 민변구의 머리통까지는 불과 몇 미터 되지 않았다.
민변구는 내가 2층에 있는 줄도 모르고 신이 나서 수다를 떨면서 바닥에 침을 뱉으며 내쪽으로 다가왔다. 그 한참 뒤로는 언제 나타났는지 모르게 에릭이 그들을 따라오고 있었다.
난 화분을 쥔 손을 위로 쳐들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서 그 자식의 대갈통을 겨냥해서 내리 꽂았다.
<퍼억!>
던진 나도 놀랄 정도로 너무나 정확하게 민변구의 머리통 정수리를 정확히 명중시켰다. 흙화분은 산산히 깨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으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민변구가 그자리에서 대자로 뻗어 버렸다. 차동팔과 신영귀는 영문을 모른채 넘어진 민변구한테로 달려갔다.
나는 나의 너무도 정확한 타격에 놀라서 그만 2층 기둥 뒤로 잽싸게 몸을 숨겼다.
하지만 밑에서 누군가 나를 본 것만 같았다. 곧이어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다! 누가 2층에서 화분을 던졌다.”
난 가슴이 터질 듯이 쿵쾅 거렸다.
약…심장약이 어딨지…아! 책가방에 있는데…아까 사물함에 넣고 같이 잠가 버렸는데…
난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도망가야만 했다. 저들에게 잡히는 순간 난 죽음이다.
“야이 2층에 개자식아. 너 거기 꼼짝 말고 서있어!”
차동팔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에릭을 포함해서 세명이 현관 입구로 뛰어 오는게 보였다.
도망가야 하는데…가야 하는데…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민변구도 기절했던 상태에서 깨어났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 듬어 보았다. 시뻘건 피가 정수리에서 한가득 얼굴로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여학생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도망가기 시작했다. 아마도 온 얼굴이 피범벅이 된 민변구는 진짜로 지옥에서 튀어 나온 괴물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범인을 잡으러 나머지 세명과 같이 뛰어 오기 시작했다.
“이 세키…누군지 잡히면 정말 사지를 찢어 버린다…”
난 정말 잡히면 무조건 죽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어떻게든 도망가야만 했다. 좁은 복도를 지나 별관 통로를 가로 질러 과학실이 있는 별관 이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심장이 마구 거칠게 뛰어서 터질 것만 같았다. 난 왼쪽 가슴을 움켜 쥐고 헉헉 거리면서도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숨을 곳을 찾았다.
“저기다. 잡아라!”
뒤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거의 다 쫒아 온거 같았다.
“저 세키…저거 혹시 심장 아니야?”
신영귀가 뒷모습만 보고도 나를 알아챘다.
“비켜!”
민변구가 머리부터 가슴까지 피범벅이 된 채로 어디선가 대걸레를 한자루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는 허벅지에다 대고 대걸레 막대를 반토막으로 분질러 버렸다. 이제 대걸레 막대는 끝이 날카로운 흉기가 되어 버렸다.
피를 뚝뚝 흘리면서 쫒아 오는 민변구를 피해 나는 어디로든 숨어야만 했다. 여기저기 필사적으로 문을 당겨보았지만 방학 중 별관 교실의 문은 하나같이 잠겨 있었다.
“제발…제발…”
너무나 절망적인 상황에 땀이 비오듯 쏟아지고 심장 박동은 점점 더 격해졌다. 갑자기 <변사체>란 단어가 떠올랐다.
저녁 YTN 뉴스에 내가 등장할 것만 같았다.
<서울시내 모 고등학교 뒤 야산에서 십대로 보이는 소년의 토막난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경찰 조사결과 숨진 소년의 신원은 이 학교 일학년에 재학중인 ‘안현’ 이란 학생으로서…>
안돼. 이렇게 허망하게 죽을 수 없어. 불쌍한 우리 어머니…어머니를 위해서라도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난 정말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여기저기 문을 당겨 보다가 마지막으로 복도 맨 끝의 교실까지 갔다. 간절하게 잡아 당긴 교실의 문이 드디어 철컥 하고 열렸다. 난 주저없이 빈 교실안으로 숨었다.
교실 안은 방학 때문에 책걸상을 전부 뒤쪽으로 몰아 놓은 상태였다. 책상 밑으로 숨기에는 공간이 없었다. 그리고 여기는 2층이지만 쓰레기 소각장이 있는 창문 밖으로는 비탈길이여서 사실상 여기서 땅바닥까지는 3층 이상의 높이였다. 난 이제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다.
밖에서 욕을 하면서 나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호신용 스프레이라도 하나 갖고 다닐걸…
하지만 지금 피를 뚝뚝 흘리면서 반 미쳐있는 민변구 앞에서 그 따위 스프레이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만일 잡히면 난 그의 주먹질을 견대낼 자신이 없었다. 특히 며칠 동안 잠을 못자 나는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였다. 게다가 민변구는 지금 눈깔이 뒤집힌 상태로 손에는 끝이 뽀죡한 대걸레 막대를 들고 있었다.
<덜컥덜컥>
여기저기 잠긴 교실문을 흔들어 보는 소리가 들렸다.
‘이 세키들아. 제발 그냥 지나가라…제발…’
난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숨을 곳이 없는 나는 결국 뒷문 뒤의 벽에 기대어 있었다. 아무리 소리를 안내려 해도 내 심장이 너무 쿵쾅거려서 다 들켜 버릴것만 같았다.
그 자식들의 발자국 소리가 한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내 심장의 이심방 이심실이 모두 폭발할 것만 같았다.
마침내 그 자식들은 내가 숨어 있는 교실의 문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앞 문을 벌컥 열어 제끼고 거칠게 뛰어 들어왔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 왔을 때 나는 머리 속이 아득해지면서 그대로 숨이 멎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제발 이대로 어디론가 내가 사라져 버리길 간절히 기도했지.
땅밑으로 꺼지든 하늘로 솟아버리든 말이야. 나의 기도는 간절함과 공포가 뒤섞여 있었어.
바로 그때였다.
내가 기대여 있는 벽 뒤에서 무슨 사람의 손 같은게 나와서 나를 끌어 당기는 것 같았어. 분명히 내 뒤에는 단단한 시멘트 벽으로 막혀 있었는데 말이야.
나는 그 손길이 이끄는 대로 내 몸을 벽에다 기울였어.
신기하게도 단단한 시멘트 벽속으로 나는 한걸음 뒤 물러 설 수 있었어. 처음에는 왼발을 한발 뒤로. 이어서 오른쪽 발도 한걸음 뒤로 그렇게 물러날 수 있었어.
마치 물속에 빠지듯이 내 몸은 서서히 벽속으로 빠져 들고 있었어. 처음에는 발이, 그 다음엔 가슴이, 손이…마지막으로 얼굴이 벽속안으로 파묻혀 들어갔어.
마침내 그렇게 내 몸 전체가 벽속으로 꺼져들듯이 빠져 들어가 버리고 말았어.
이제 나는 그들과 벽을 사이에 두고 완전히 서로 다른 세계에 있게 되버린 거야.
벽안은 컴컴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 처음에는 눈앞의 내 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참 뒤에야 서서히 사물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한 거야.
나는 우주인이 유영을 하듯이 아주 조금씩 서서히 움직 일 수 있었어. 그러면서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지.
그제서야 나는 분명히 자각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 벽속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