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서는 눈을 뜬채로 그냥 멍하니 침대에 누워 있었다. 마치 지난 며칠간의 일들이 꿈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악몽이기를 기도하며 이를 현실을 부정하고 악몽임을 증명해줄 증거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한 나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휴대폰에 떡하니 찍혀 있는 통화 기록이 있었다.
PM 10:55
<이름없음>
016-926*-4885
전화에 찍힌 기록이 모든 것을 말해줬다. 어젯밤 틀림없이 나는 에릭과 통화를 했던 것이었다.
끔직한 악몽이 빼도 박도 못할 현실이였다는 것이 결국 나의 머리속에 각인되었다. 갑자기 세상 살기가 싫어졌다. 이 상태로는 어느 학교로 전학을 가도 왕따인생이 마찬가지일 것 같아서 차라리 자퇴를 하고 홈스쿨링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날부터 언제쯤 자퇴 얘기를 꺼낼지 어머니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아직도 어머니의 주식은 개폭망 상태로 전혀 오르지 않고 있어서 그녀의 기분은 최악이었다. 여기다 내가 자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그야말로 가스통을 메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격이었다.
나는 상황을 파악하며 기회를 엿봤다. 하지만 보충수업 전까지 불과 보름 동안에 자퇴 얘기를 꺼낼 만한 좋은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칼같이 보충수업일은 찾아 왔고 나는 끝내 말씀을 드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 날은 사실상 개학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냥 수업을 빼먹고 PC방에 갈까 생각도 했지만 일단 첫날은 탐색차 가보기로 했다. 가서 기남이도 보고 무엇보다도 최종 리허설 때 마지막으로 스쳐 지나간 선영이 얼굴을 한번만이라도 다시 보고 싶었다.
혹시나 몰라서 지난 번에 던져 두었던 귀걸이를 찾아 다시 이쁘게 선물 포장했다.
‘정 안되면 그녀 책상 서랍에 몰래 넣어 두고라도 오자…어차피 그녀에게 주기 위해 산거니까…’
나에게 처음 찾아온 짝사랑의 열병은 쉽게 사그러들지 않았다. 보충수업날 학교에 가는 그 순간까지도 한 학기 내내 나는 선영이와의 짝사랑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어머니는 더 이상 나를 학교에 태워 주시지 않았다. 어머니의 기분도 좀 다운되어 있었고 특히 낡은 그랜져에서 내리는 내 모습을 친구들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그냥 버스를 타고 터벅터벅 걷는 게 마음이 편했다.
그날 따라 교문에서부터 교실까지 왜 이리 낯설게 느껴지든지…나는 마치 신입생이 된 것처럼 생각됐다. 그리고 이 학교와는 아무리 해도 결코 친해질 수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교실은 약간 소란스러웠다. 이주일만에 만난 아이들은 잠깐 동안의 휴식기간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서로 꺼내 놓느라 바뻤다.
“어이 친구~”
유일하게 날 반겨주는 목소리. 기남 이였다.
“응. 그래. 가족여행은 잘 갔다 왔어?”
“그냥 뭐 제주도에 있는 외가댁에 있었어. 너는 어때? 무슨 재밌는 일 좀 있었어?”
“재미있는 일? 그런 일이 나한테 생길리가 없잖아…”
시무룩한 나를 보고 기남이는 위로해주고 싶었나 보다.
“그까짓 댄스 공연 따위 잊어 버려. 완전 개허접했다니까. 안하는게 백번 잘한거야. 싸가지 없는 강사년 같으니라구…”
그래…그 강사가 싸가지가 없긴 했지…나는 기남이에 말에 공감했다. 기남이는 나하고 더 수다를 떨고 싶어 했지만 난 제일 먼저 할 일이 있었다. 바로 한동안 못 본 선영이를 찾아 보는 것이였다.
그녀는 여전히 교실 앞쪽 창가에 앉아 있었다. 머리를 커트했는지 얼굴이 더 작아보이고 화사해보였다. 난 창문밖을 보는 척 하면서 몰래 그녀의 옆모습을 계속 훔쳐 보았다.
“그만해라. 얼굴 닿겠다…내가 말했잖아. 쟤한테 엮이지 말라니깐…”
기남이가 내 시선을 쫒아 그녀를 확인하고는 또 말리려 들었다.
‘기남아…이젠 상관 없어. 단 며칠이라도 맘껏 선영이 얼굴이라도 보고 떠날게’
이젠 민변구나 차동팔,신영귀가 무슨 짓거리를 해도 상관 없었다. 어차피 다 때려칠 테니까. 어머니가 말리신다면 가출을 해서라도 그만 두겠다는 마음을 나는 이미 굳히고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잘못될까봐 항상 끔직하게 걱정하시는 분이니까 내가 가출까지 하면서 자퇴한다고 하면 차마 말리시지 못하리라는 것을 난 잘 알고 있었다. 난 단지 그 충격을 좀 줄이고 싶었을 뿐이다.
민변구는 지각을 하는 듯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잘됐다. 그 자식의 역겨운 쌍판을 몇시간만이라도 안보는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교실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담임이 들어왔다. 나무봉으로 탁자를 탁탁 두들기면서 아이들을 조용히 시켰다.
난 처음부터 저 담임 선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담임한테 갖다 바친게 한 학기만 해도 벌써 백만원 정도 된 거 같았다. 돈귀신 같은 세키…속에서 욕이 나왔다.
할말도 없으면서 괜히 조회랍시고 시간을 끌더니 십분만에 대충 마무리하고 나갔다. 그런데 나가면서 담임이 나를 돌아보고 나직이 한마디 했다.
“안현. 너 이 세키. 상담실로 따라와.”
상담실? 교무실도 아니고 상담실? 상담실이 어떤 곳인가 하면 학교에서 가장 은밀한 곳에 있는 은폐된 곳이였다. 그 곳에 갔다 온 학생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시뻘개져서 나오곤 했다.
주로 사배자나 문제가 있는 아이들을 상담이라는 명목으로 불러다 놓고 협박을 하거나 표안나게 구타를 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근데 그 곳으로 나를 오라니?
“현아. 저 담탱이 세키 왜 저러냐? 쉬는 도중에 어디 미쳐서 왔나?”
기남이가 재빨리 상황을 알아 채고는 나에게로 다가 왔다. 나는 다리가 좀 후들거렸다.
‘무슨 일 일까? 최근에 어머니께서 봉투를 안 갖다 줘서 그런가? 학기초에 그만큼 처먹었으면 됐을텐데…도대체 무슨 일이지?”
난 후달렸지만 일단 용기를 내서 상담실 문을 두드렸다.
“여기 들어와 앉어.”
담임은 들고 있던 책들을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는 의자를 끌어다 내 앞에 앉았다. 난 잔뜩 주눅이 들어 담임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내 뺨을 갈겼다.
아주 세게 맞은 것은 아니지만 기분이 아주 딱 더러울 만큼 아프게 맞았다. 난생 처음 뺨을 맞고는 난 잠깐동안 넋이 나갔다.
“안현…너 이 세키…너 왜 선생님이 때린 줄 알어?”
‘젠장. 내가 그걸 어떻게 아나. 지가 때리고 싶으니까 때렸겠지. 왜 갖다 준 돈이 부족했냐.’
난 이 황당한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담임은 슬슬 나를 갖고 놀았다.
“너 이 세키…왜 축제날 결석했어? 이사장님께서 축제 참가율 체크 한다고 했어? 안했어?
너 때문에 우리반이 참가율에서 얼마나 손해를 봤는지 알아!”
그거였구나. 난 피땀 흘려 연습하던 공연에도 참가 못하고 쫒겨나서 이불 덮고 울고 있었는데 니네는 참가율 계산하고 있었구나…
이 때 나에게는 두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하나는 담임한테 빅엿을 선물하고 뛰쳐 나가서 다시는 이 학교에 돌아오지 않는 것과 그냥 비굴하게 담임 앞에 겁먹은 강아지처럼 앉아 있는 것.
하지만 난 뛰쳐 나갈 용기가 없었다.
“자식아. 이게 다 이 담임이 너 생각해서 해주는 말이야. 아파? 아프냐구? 괜찮지? 이게 다 너 잘되라구 때린 거야.”
‘이 미친놈아. 그렇게 잘 되라고 때릴 거면 집에 가서 니 마누라하고 자식세키나 두들겨 패라.’
난 이 변태 같은 담임 놈한테 구역질이 났다. 정말로 토하고 싶어서 대충 네네 하고 말았다.
“어머니 시간 되시면 한번 들리라고 말씀 전해 줘라.”
역시나 돈타령으로 담임은 나에 대한 훈계를 빙자한 폭력을 끝냈다. 문제가 생기면 내가 결석한 핑계를 대면서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 하겠지…담임은 그러고도 남을 놈이였다.
가뜩이나 다니기 싫은 학교 차라리 망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 벽이 확 다 무너져 버려 저 따위 담임놈은 무너진 벽밑에 깔려서 죽어버렸으면 하고 바랬다.
하지만 이 것은 그 날 악몽의 시작일 뿐이였다. 아픈 뺨을 감싸며 교실로 돌아온 나에게 이보다 더한 악몽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