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대 뒤에서 쉬고 오는 동안에 무대 위에서는 재즈 댄스 강사하고 민변구가 무엇인가 쑥덕거리며 서로 얘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민변구가 심각한 얼굴로 강사에게 설명을 하고 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동시에 날 쳐다 보았다. 싸한 느낌이 밀려왔다.
내가 다시 연습을 하러 자리에 서자 강사가 나에게 다가왔다. 강사는 나한테 친절하게 말을 건넸다.
“괜찮니?”
“네? 뭘요?”
“왜 얘기 안했니? 몸이 안좋다면서? 심장이 그렇게 안좋니?”
“아…예…괜찮아요. 약먹고 쉬면 금방 괜찮아져요…”
나는 속으로 민변구 이 더러운 세키…욕이 나왔다. 그 때 민변구가 신영귀를 데리고 나에게로 다가왔다.
“강사님. 얘는 무리하면 안되요. 체육시간에도 항상 벤치에만 앉아 있는 얜데 갑자기 이런 무리한 춤연습을 시키시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쩌실라고 그래요.”
나는 어이가 없었다. 민변구 니가 날 걱정해줘? 도대체 뭐하는 거냐?
덩달아 신영귀가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강사님. 제가 저 얘 학급 반장하면서 잘 아는데 쟤는 무리하면 큰 일나는 학생이에요. 아마 담임한테 얘기하면 지금 당장 난리가 날걸요”
나는 머리가 멍해졌다.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그 모습을 본 민변구가 잽싸게 외쳤다.
“저 봐요. 자기 몸도 못 가누는걸. 만일 여기서 사고라도 나면 축제고 뭐고 전부 처벌 받아요”
강사는 처벌이란 말에 움찔했다. 그리고는 나를 데리고 잠시 구석으로 갔다. 맹기남과 덕선이가 걱정스러운 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이니? 몸이 아주 안좋아 보이는데…”
억울하고 분해서 속에서 불기둥 같은 것이 솟아 올라왔다.
“괜찮아요. 연습하게 해주세요”
강사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기…웬만하면 쉬는게 좋겠다. 아까 보니까 계속 동작도 틀리고 내일이 공연날인데 이렇게 해서는 전체한테 피해만 끼치는게 될 거 같구나”
뒤를 돌아다보니 아이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중에는 선영이도 있었다. 그녀는 그냥 멍한 눈으로 잠시 나를 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하고 싶어요. 여기까지 왔는데 공연에 참가하게 해주세요…”
나는 강사의 바지가랭이라도 붙잡고 애원하고 싶었다.
“춤은 고집만으로 되는게 아니야. 얼굴이 창백한게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날 거 같다. 우선 병원부터 가보거라”
그녀는 친절하고도 냉정하게 내 간절한 요청을 거절했다.
더 이상 구걸하고 싶지 않았다. 강사에게 내 노력은 그저 하찮은 몸부림 이였을 뿐이었다. 지켜보는 기남과 덕선이를 뒤로 하고 가방에 짐을 싸서 나왔다. 선영이는 무심하게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솔로 파트를 연습하고 있었다.
나오는 길에 입구에 서 있던 민변구와 신영귀가 날 보고 비아냥 거렸다.
“짜식아. 춤 출 체력이 있으면 평소에 학급일을 그렇게 열심해 해봐”
난 눈물이 나올 거 같았지만 그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체육관을 나서자 마자 그제서야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집에 와서는 바로 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벽에다 머리를 세게 찧으면 죽을 수도 있을 거 같아 벽에다 쿵쿵 머리를 계속해서 박았다. 어머니가 왜 이러냐고 밖에서 물어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불과 하루전만 해도 걱정하시는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고 싶었는데 이제는 날 이렇게 하자투성이 몸으로 낳아준 부모님을 다시 원망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난 심장이 없는 피노키오가 되고 싶어졌다. 그랬다면 심장판막협착증 따위로 고생하지도 않을 텐데 하면서 말이다.
결국 축제날, 나는 공연장에 가지 않고 집에 있었다. 선영이에게 줄려고 했던 포장된 선물도 그냥 아무데나 던져 버렸다. 저녁 무렵 기남이한테서 한통의 전화가 왔다.
-괜찮냐?
-응….뭐 똑같지…
-너가 없으니까 공연이 완전 개노잼이더라. 다 망했어.
젠장할..소녀시대…완전 립싱크에다가 건성으로 춤추고 꼴랑 10분 공연하고 가버렸어.
뻔한 거짓말이겠지만 위로해주려 하는 기남이가 고마웠다.
“보충수업때 학교 올거지?
보충수업…2주정도 방학을 하고 학교는 다시 보충수업을 하면서 사실상 개학을 한다. 내가 학교를 때려칠려면 그 2주안에 결론을 내야 한다.
-일단은…한번은 가봐야 겠지.
-그래. 얼굴 좀 보자, 난 내일부터 가족여행을 가서 그 직전에나 돌아올거야. 갔다 와서 보자.”
-그래…전화 줘서 고맙다.
기남와 통화를 하고 다시 책상에 앉았다. 민변구…그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난 알고 있었다. 그 자식은 날 갖고 논 것이다. 심심풀이로.
그가 뱀처럼 낼름 거린 혓바닥 때문에 평생 가장 열심히 노력했던 일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나의 그녀…선영이에게 고백하려던 일도 모두 다 허망하게 날라가 버렸다. 난 이제 다시는 선영이에게 고백할 기회를 갖지 못할 것이다. 민변구…그 자식은 남의 고통을 즐기면서 쾌감을 느끼는 놈이 분명했다.
그 때 내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누구지…기남이랑은 아까 통화 했는데…’
조심스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안현?
낯선 목소리였다. 누구지? 이 번호는 기남이 말고는 아무한테도 가르쳐준 적이 없는데…
-네. 전데 누구세요?
-나다. 에릭.
에릭? 에릭 방? 이 자식이 나한테 전화를? 난 전화기를 쥔 손이 부들거렸다.
-듣고 있나?
난 한참을 망설이다 대답했다.
-응. 근데 너 내 전화번호 어떻게 알았어?
-난 내가 원하면 알 수 있다. 민변구가 어제 너 연습하는데 다녀갔지?
원하면 알 수 있다니? 자기가 무슨 통신사 사장 아들이라도 된단 말인가? 갑작스런 에릭의 전화에 나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민변구가 강사한테 니가 심장이 안좋아서 공연에서 빼라고 했다는데 맞냐?
이 자식은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신처럼 어디에서나 어느 때나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래…니 친구 민변구가 그랬다…
-흠…우선 민변구는 내 친구가 아니야. 날 그정도 형편 없는 레벨로 평가하지 말아 줬으면 해.
너 민변구한테 복수하고 싶냐?
이 자식들이 지금 뭐하는 짓이야. 한 놈은 나한테 소중한 것을 통째로 빼앗아 가버렸고 또 다른 한 놈은 한밤중에 어떻게 알았는지 내 번호로 전화를 해서 자기 친구한테 복수하고 싶냐고 묻고 있다.
이런 개싸이코 같은 것들…난 그들 손아귀에서 장난감이 되어 버린 느낌이 들었다.
-너 대체 무슨 소리야? 뜬금없이 나한테 전화해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말해. 민변구한테 안 이를 테니까. 다시 묻는다.
민변구한테 복수하고 싶냐?
복수? 복수로 말하자면 민변구를 믹서기에 넣고 갈아 마셔도 속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근데 어쩌라구? 그게 내가 하고 싶다면 해 줄 수 있는 일인가?
-니가 뭘 해 줄 수 있는데?
-민변구의 팔다리 하나 정도는 꺾어 줄 수 있지. 그걸 원하나?
난 말문이 막혔다. 사람을 갖고 노는 것도 어느 정도가 있지 날 아주 병신으로 알고 있었다.
-난 니가 뭔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니네 맘대로 해봐. 어차피 니네끼리 일이잖아.
-그 대신 조건이 있다.
-뭐? 조건? 장난 칠려면 이제 그만 하자. 전화 끊자.
에릭의 목소리가 무거워지며 전화기 너머로 그의 차가운 음성이 울렸다.
-끊지마라. 장난 아니다.
-그럼 뭐하는 거야? 니 친구 민변구가 날 완전히 엿먹였어. 그리고 너는 전화해서 민변구한테 복수해주겠다고?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냐!
결국 나는 소리를 질렀다.
-다시 얘기하지만 민변구는 내 친구가 아니야. 니가 복수를 원한다면 내 조건은 간단해.
-조건? 그래 말해봐. 그게 뭔데?
-전에 내가 니 심장을 달라고 한 말 기억하나? 너는 복수의 대가로 나한테 완전히 복종하면 돼.
난 순간 실소가 터져 나왔다.
-너 아무래도 만화책을 너무 많이 본 거 같다. 니가 무슨 파란 해골 13호나 세계 정복을 꿈꾸는 히드라 군대의 사단장이라도 되냐? 미쳤군…미쳤어…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튀어 나왔다. 내가 보기엔 에릭은 완전 미친놈이 분명했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넌 계속해서 고통 속에 살게 될거야. 진실을 알지 못하고 연출된 세상속에서.
이…이런 미친….난 이제 더 이상 단 한마디도 에릭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난 더 이상 너하고 말장난 하기 싫다. 난 그냥 너희들이 내 인생에 상관 안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앞으로 그렇게 될거구 말이야. 이만 끊자.
난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내던지듯이 종료 버튼을 누르고 침대 위에 쓰러졌다.
“미친놈들…”
계속해서 욕이 튀어 나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에릭의 전화가 계속해서 생각났다. 실현가능성도 없는 말이였지만 정말 그의 말대로 누군가 나타나 민변구한테 복수해줬으면 했다.
만일 내가 민변구의 목숨이라도 빼앗아 달라고 했으면 해 줄 수 있을까? 정말이지 민변구를 참을 수가 없었다. 나의 고통을 장난으로 즐기는 그의 악마 같은 얼굴을 도저히 머리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민변구에 대한 복수를 꿈꾸며 그렇게 하얗게 긴 밤을 새우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