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어떡하지? 이제 배우한테 맞게 마감 하려고 오늘 마지막으로 피팅하러 온 건데.”
“글쎄, 일단 엘리자베스는 다음에 하러 와.”
“그럴 시간은 없어… 알다시피 이것도 다 끝난 게 아니고. 오늘은 피팅을 해봐야하는데...”
현석과 유진이 고민에 빠졌다. 다른 학생들이 맡은 배역의 피팅은 하나 둘 끝나갔다. 배우가 무대에서 몸을 움직였을 때 불편하지 않게 하기 위해 일부러 조금 여유있게 제작하다보니 피팅 때 옷을 입어보는 것이 필요했다. 실제로 품이 많이 남진 않았지만 장식이 풍성한 옷들은 몸에 딱 맞아야 예쁘게 보였다.
“그럼 뭐. 대기자가 누구야? 종철이 다치면 누가 하기로 했어?”
“어 그건… 근데 종철이가 다시 올 지도 모르고…”
“그거 얘야. 이유진.”
준모가 왕자 옷을 입은 채로 거울 벽 앞에서 앞 뒤로 돌며 옷을 보다 말했다. 현석은 두 손을 모아 박수를 쳤다.
“그래? 종철이한테 일어난 일은 안 된 일이지만, 우리는 우리 몫을 해야지. 유진아, 옷 갈아입어.”
“나? 잠깐만, 종철이가 아직 병원이라. 곧 올 수도 있고.”
유진이 망설이며 뜸을 들이자 현석도 강요할 수가 없었다. 유진은 종철이 잡은 기회를 빼앗는 것 같아 기분이 영 껄끄러웠다.
“그런 거 하나하나 어떻게 신경쓸래? 의상 팀 생각을 한다면 그냥 네가 입어. 지금 당장 무대에 오르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 종철이가 오면 그때 다시 걔 사이즈에 맞추면 되잖아.”
“그럼 애초에 내가 입는 것 보다 그냥 다음에 하면 되는 일이잖아.”
준모가 혀끝을 찼다. 유진은 매번 준모와 대립했다. 준모는 연기자 캐스팅이 불발되거나 처음에 거론된 상대와 다른 사람이 캐스팅 되는 일을 종종 봐왔다.
어른의 사정으로 제작사에서 섭외가 다 끝난 출연진을 자른 적도 있었다. 사고로 배역이 바뀌는 일은 허다했다. 일일히 그런 일에 감정을 쏟을 여유가 없었다.
“아니 그건 좀… 아까 말했듯이 어떤 느낌으로 나오나를 보려고 하는 거니까. 생각보다 마네킹한테 입혀서 작업하는 거랑 실제 사람이 입는 거랑은 차이가 있거든. 그래, 종철이랑 유진이 네가 그래도 체구가 비슷하지? 키나 몸무게나. 그럼 유진이 네가 입어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마침 키가 비슷하니까 입는다고 생각해.”
현석이 보다못해 끼어들었다. 유진의 심정을 고려해서 현석이 다시 돌려말했다. 유진도 배역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입혀볼 대타라는 생각에 마음이 가벼워졌다.
“알겠어. 그럼 입고 올게.”
“자 여기 가발이랑 신발도 있어.”
“이런 것도 다 해야해?”
“당연하지, 아무리 피팅이라지만 하는 건 다 해야해.”
“나는 임시인데…”
“임시니까 더 잘 해야지, 종철이가 왔을 때 좀 편하지 않겠어? 얼른 다녀와. 중간에 어떻게 입는 지 모르겠으면 그냥 나오면 내가 도와줄게.”
“알겠어.”
‘저 자식 얘기는 고분고분 잘만 들으면서.’ 준모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른 의상팀 친구가 준모에게 옷이 잘 맞는지를 물어 잠시 뒤로 빠져있었다. 준모의 어깨 움직임과 허리 핏을 확인하려 여러 각도로 몸을 움직이게 했다.
한편 유진은 탈의실에 들어와 문을 닫고 옷을 갈아입었다. 동화 속 주인공들을 캐릭터로 옷을 만들다보니 유치해질 수 있는 부분이 있을 터였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화려한 공주들과는 다르게 수수한 옷차림이었지만, 진주 가루를 뿌려 은은하게 빛나는 드레스는 다른 공주들 옷과는 다르게 우아했다.
”와 이거 예쁘긴 예쁘네. 너무 잘 입었나? 가발이라도 대충 하고 나가야겠다. 이런 거 너무 잘하면 좀 그렇지?”
유진은 거울 속 자신을 보다 가발을 대충 눌러쓰고 나갔다. 강당에 다른 학생들이 유진을 보고 깔깔 웃었다.
“야 무슨, 머리가 그게 뭐냐?”
“왜? 잘 어울리지?”
“하하. 유진아 이리 와봐. 옷 입은 김에 피부 톤도 좀 밝게 해보자.”
현석이 신나서 나섰다. 코스플레이로 화장법을 익혀둔 덕에 솜씨가 나쁘지 않았다. 가발을 머리 끝에서부터 제대로 씌우고, 피부 톤을 한 톤 정도 올렸다. 가발이 밝은 색이다보니 하얀 얼굴이 잘 어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