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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벨트는 제 겁니다, 전하
작가 : 곰고미
작품등록일 : 2016.9.3

창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남자는 얼굴 한가득 화사한 미소를 띠었다.

"바지 좀 벗어주겠는가, 그대."

어머니. 일하러 왔는데 순결을 위협받고 있습니다.

 
흔한 황태자와 보좌관의 관계
작성일 : 16-09-05 22:25     조회 : 258     추천 : 0     분량 : 5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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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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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트라는 눈을 뜨자마자 자신의 시야를 꽉 채우고 있는 살색에 미간을 찌푸렸다. 애초에 위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가 잠을 깨운 원인이기는 했지만 눈으로 들어오는 시각정보와 합쳐지니 더 무거운 것 같다.

 

  "무겁군."

  "어머. 여자한테 실례되는 말이네요. 그거."

 

 눈을 떴더니 자신의 의도가 한 톨도 존재하지 않는데 살색으로 배경이 가득 차있을 경우 그 사람이 느낄만한 감정은 황당하거나 화가 날 상황이거나. 대부분의 경우 이 두 가지 중 하나였다. 레트비온 제국의 단 하나뿐인 황태자의 침실에서 자고 있던 레트라 드 레트비온의 경우 두 번째가 자신의 상태와 딱 들어맞았다.

 

 즉, 그는 현재 깨어나자마자 화가 난다는 기분이 매우 더러운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이니 입에서 나가는 말이 고울 리가 없다. 표정관리를 할 생각도 없이 그대로 여자를 바라보는 시선과 잔뜩 찌푸려진 미간에는 '좀 더 큰 실례를 할 예정이니 얼른 비켜라' 라는 의도를 가득 담겨있었으나, 그의 허리에 자리를 잡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구속하고 있는 여자는 그의 위에서 전혀 비켜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덕분에 안그래도 주름이 가득한 레트라의 미간에는 곧은 직선이 하나 더 그어졌다.

 

 후우… 그래. 짜증나는 건 짜증나는 거고. 현재 자신의 위에 있는 살색의 여성과는 말 한마디 섞는 것조차 짜증났지만 그것보다는 이 상태가 지속되는 쪽이 훨씬 더 짜증을 불러일으킬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은근히 비키라는 표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려올 생각이 없어보이는 여자는 대놓고 말을 해줘야 위에서 비킬 것 같았기에 레트라는 좀 더 큰 짜증을 막기 위해 그녀와 말을 섞는 것을 감수하기로 했다.

 

  "그래서. 내가 그대에게 실례를 했다 치고. 나에게 현재진행형으로 민폐를 끼치고 있는 그대는 언제 내려올 거지?"

  "흠. 글쎄요. 민폐를 쾌락으로 바꾸고 나서?"

 

 음. 내가 틀렸군. 대놓고 말해도 내려오지 않는거였어. 표정만 보아도 '나 기분 안 좋소' 라는 감정을 읽어낼 수 있을 정도였지만 그의 위에 올라와있는 여자는 마치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생긋 웃으며 레트라가 원하는 대답이 아닌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대꾸할 말을 잊은 그가 황당함을 느끼며 가만히 여자를 올려다보니 이제는 대놓고 유혹을 하려는 듯 제 몸의 굴곡이 좀 더 돋보이도록 몸을 비틀며 입 꼬리를 씨익 올린다. 그 모습이 과연 요염하기는 요염한터라 웬만한 남자들이라면 그 행동과 말에 내포된 의미에 우물쭈물하며 얼굴을 붉혔겠지만 아쉽게도 레트라는 그러지 못했다. 그러기에 그는 여전히 짜증이 난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행동은 레트라를 유혹한다는 본래의 목적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가 현재 상황에 대해 느끼고 있는 화를 순식간에 짜증으로 치환시켜버린다는 결과는 이루어낼 수 있었다. 사람을 마주한 지 3분도 되지 않아 이정도로 짜증나게 만드는 그녀의 실력에 속으로 감탄을 삼키며 레트라는 대놓고 내려오라 말을 하는 것도 통하지 않는다면 대체 무슨 말을 해야 이 여자를 위에서 치워낼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했다.

 

  "자 그럼. 귀여운 꼬마 황자님을 보여주실까요?"

 

 슬금슬금. 그의 생각과 감정에는 아랑곳않은 채 여자의 손이 몸 뒤로 향하더니 그의 다리를 한 번 훑고 허리춤으로 향한다. 어제 보좌관의 말을 듣지 않고 옷을 갈아입지 않은 채 잠자리에 들었더니 아침에 눈을 뜬 그의 허리에는 아직도 벨트가 존재하고 있었다.

 

 꼬마 황자님을 보려는데 장애물이 있네? 달칵달칵. 입 꼬리를 올려 매끄러운 호선을 그리며 버클을 가지고 놀듯 툭툭 쳐대던 여자의 손가락이 버클의 안쪽으로 들어가 위로 쓱 훑어 올린다. 혀로 핥는 착각이 들 정도로 농염한 손길이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 듯 하다.

 

 말이 도저히 통하지 않음을 깨닫고 가만히 어디까지 하나 지켜볼 요량이었던 그는 천천히 움직이던 손가락에 의해 벨트의 버클이 풀어지는 것과 동시에 서서히 차오르던 짜증이 머리를 넘어서는 것을 경험했다. 그래. 이 여자 대단하긴 하군.

 

 결국 그녀를 만난지 10분이 채 되지않아 기어코 머리를 뚫고 나온 짜증이 머리 위의 종을 울리는 것과 동시에 레트라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꺄악!"

  "쾌락은 이미 느꼈다고 치지. 내 머리 위의 종이 울렸거든."

 

 가볍게 제 몸을 일으키는 것으로 여자를 침대에서 내쫓는 것에 성공한 그는 툭툭 옷을 털어내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침대 밑 바닥에 내팽개쳐진 여자는 제 몸을 가릴 이불은커녕 실오라기조차 없는 상태로 내려다보는 남자의 시선에 노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했다. 내팽개쳐졌을 때는 조금 당황했으나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녀가 넘어진 자세 그대로 다시 한 번 레트라를 유혹하려는 순간 또 다른 방해가 들어왔다.

 

  "아…"

 

 달칵. 그녀가 무언가 시도해보려 하기도 전에 스르륵 부드럽게 열린 침실의 문틈을 통해 나지막한 탄성이 흘러 나온다. 그 소리에 방 안에 있던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그 쪽으로 향했으나 같은 곳을 바라본 두 사람의 표정은 확연하게 달랐다.

 

 갑자기 노크도 없이 들어와 이 광경을 목격하게 된 목격자를 바라보는 여자의 얼굴은 일그러졌으나, 자신의 방에 노크도 없이 침입한 침입자를 바라보는 레트라의 얼굴에는 씨익 미소가 그려졌다.

 

  "내 머리 위의 종이 초인종이었나 보군."

 

 문 앞에 서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자신의 보좌관을 보며 그는 미소 지었다. 딱 좋은 타이밍이다.

 

 말을 걸자 언제 놀랐냐는 듯 순식간에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가는 보좌관의 모습에 방금 전까지의 짜증이 눈 녹듯 사라진다. 유쾌한 기분으로 여전히 똑같은 표정, 똑같은 위치에 서있는 보좌관을 바라보던 레트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갈 시간이로군."

  "그렇긴 합니다만 바쁘시면 10분정도 늦추겠습니다. 10분 안에 끝내고 나오시지요."

  "호오. 10분이나 주는 건가."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이 상황을 보며 10분 안에 끝내고 나오라는 말을 꺼내는 작태에 새어 나오는 웃음을 금할 수가 없다. 상식적으로, 진짜 그 짓을 하고자 한다면 10분으로 가당키나 하겠는가.

 

 전혀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레트라는 짐짓 고개를 끄덕이며 황태자가 지을 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시선을 제 보좌관에게 고정시키며 여자를 향해 말했다.

 

  "거기 여자. 들었겠지? 나의 친절하신 보좌관님이 10분씩이나 주신다는군."

  "그...ㄴ,네..."

 

 방금까지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고압적인 분위기와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압도된 그녀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을 움츠렸다. 그저 말을 하고 있을뿐인데도 그걸 바라보는 그녀의 발끝에서 두려움이 스물스물 올라온다. 그의 말이 무슨 소리인지, 무슨 영문인지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그녀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레트라를 바라보았다.

 

 분명 짓고 있는 것은 아름다운 미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보는 그녀의 깊숙한 곳에서는 두려움이 샘솟았다. 너무나도 두려워 시선을 피하고 싶었으나 주변의 빛을 모두 흡수하는 듯한 그 모습은 그녀의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아름다운데 무섭다. 무서운데 아름다워 시선을 뗄 수가 없다. 그녀가 그런 복잡한 심경을 느끼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트라는 한층 더 진하게, 갓 피어난 장미꽃처럼 진한 향기를 풍기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자네. 옷을 좀 입는 것이 어떠한가. 내 발바닥 위 1cm까지는 용서해주겠네."

  "에?"

 

 얼굴에 피어난 미소와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 대사에 여자는 이상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자신과 같은 상황이라면 누구든 이런 소리를 낼 것이라 여자는 장담할 수 있었다. 옷을 입으라니? 차라리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거나 그녀의 목숨을 끊으라는 잔혹한 문장이 흘러나왔다면 이정도까지 괴리감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옷이라니?

 

 그러나 더 황당한 일은 다음에 일어났다. 레트라는 여전히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여자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아. 자네는 바지 좀 벗어주겠나. 자네가 말한 30분 안에 끝내보도록 하지."

  "싫습니다."

  "자네 주인은 나일 텐데. 그리고 당연히 자네가 내 것이니 그 바지도 내 것일 테고."

  "주인이 아니고 상사입니다. 그리고 벨트는 제 겁니다, 전하."

 

 무표정한 보좌관에게 던져진 말은 황당했으나 그 말을 꺼낸 레트라의 얼굴에는 여태까지 중 가장 밝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아까까지의 웃음과는 의미부터가 다른, 보좌관의 반응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한 개구장이의 미소였다. 금방이라도 소리와 함께 터져나올 것 같은 웃음을 삼키며 그는 보좌관의 말을 받았다.

 

  "그러한가. 그렇다면 내가 오늘 벨트 하나를 하사하도록 하지. 여태까지의 공로를 치하해서 말이야."

  "필요 없습니다. 월급이나 올려주시죠."

  "매정하기는. 돈이 좋다면 내 벨트를 받고 자네의 벨트를 팔면 되지 않는가. 그 김에 바지도 좀 벗어주고 말이지."

 

 터벅터벅. 그녀가 이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그녀를 지나친 레트라는 만면에 미소를 띄운 채 보좌관의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올렸다. 물론 보좌관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레트라의 손을 피해냈지만 이미 레트라가 자신을 본체만체 지나쳐 남자에게 향했다는 그 사실을 인지한 여자의 속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럼. 난 이만 가보겠네. 내 옷장에서 옷 한 벌 챙겨가게나. 그 상태로 나갈 순 없지 않은가."

 

 피식. 누가 봐도 비웃는 걸로 보이는 웃음과 함께 그녀에게 시선을 던진 레트라는 다시 한 번 보좌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유유히 방을 빠져나갔다. 얼결에 끌려가듯 밖으로 향하는 보좌관에게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으나 입술을 짓씹고 있는 여자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모욕을 받은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다. 어떤 티파티를 가도, 어떤 연회를 가더라도 남자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을 즐기던 그녀였다. 이런 냉대, 심지어 남자에게 밀려 냉대를 받는 것은 그녀의 짧은 생 중 겪어보기는커녕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도저히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겨우겨우 머리로 받아들이자 뜨겁고 거친 물결이 몰려온다. 분노. 살아가며 절대로 겪을 리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 감정이 거세게 밀려들어와 머릿속에 있던 모든 것을 몰아냈다. 여러 가지 생각들로 가득 찼던 머릿속에 남은 것은 단 한가지.

 

  "가만두지 않을거야…"

 

 꽉 다물어진 잇새로 잔뜩 억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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