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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기타
(hair)헤어날 수 없는 탈모
작가 : 탈모인
작품등록일 : 2017.12.16

의대생 한지현은 탈모 강의를 듣고 7년 전을 떠올린다. 평범한 여중생이던 자신의 머리카락이 급작스레 빠지게 된,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탈모 병변은 돌연변이가 일어난 암세포처럼 분열하고... 결국 지현은 대학병원 피부과에 내원한다. 열일곱의 나이로 모든 머리카락을 잃게 된 지현은 대인기피증과 극심한 우울증에 빠지게 되는데...
여느 때처럼 모자를 눌러쓰고 진료를 받고 나온 지현은 '전신 탈모증'을 앓는 동갑내기 유청명을 만나게 된다. 자신의 아픔을 이해해 주고, 진심 어린 위로를 해주는 유일무이한 친구이다.
훗날 의대생이 된 지현은 자신의 힘으로 전신 탈모증을 치료하려 하는데...
가발부터 피부과, 동의보감, 심리상담까지 탈모의 모든 면을 다룬 메디컬 소설!

 
17장: 라비린토스
작성일 : 17-12-16 17:09     조회 : 298     추천 : 0     분량 : 9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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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라비린토스(labyrinthos)

 “지현아, 가발 맞추자꾸나. 이제 고등학교 입학식도 얼마 안 남았잖아. 응?”

  대학병원 가기 전날이었다. 심장이 벌렁거렸고 얼굴은 화끈거렸다. 중학교 졸업식이 일주일 남짓, 고등학교 입학식은 한 달 좀 더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약효는 아직이었다. 몰살당한 머리카락은 좀체 돋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습관처럼 거울을 들여다봤지만 머리의 색상에는 어떠한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발바닥부터 두피까지, 내 몸의 표면은 오로지 살색 물감으로 채색된 상태였다. 코가 거울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서 살펴보면 그나마 머리카락 몇 올을 관찰할 수 있었는데, 그마저도 길이는 팔다리에 난 털과 비슷했다. 그 볼품없는 모습을 보다 못한 엄마가 결국 가발을, 말 그대로 최후의 수단을 권유한 것이었다.

 “몰라. 머리 아프니까 나중에 이야기해.” 신경질적으로 방문을 닫으며 내가 말했다.

  어두운 방으로 들어간 나는 쓰러지는 나무처럼 침대 위로 엎어졌다. 표면뿐만 아니라 머리는 내부도 엉망이었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 머릿속은 과포화 상태의 쓰레기통처럼 번잡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악취를 풍기는 미래를 대면했다. 한 달 뒤, 고등학생이 된 나를 떠올려 보았다. 교복을 입은 내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나는 무릎 근방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치마에 갈색 교복 마이를 걸치고 있었다. 마이의 어깨에는 뭔가가 얹혀 있었다. 거무스름한 물체의 다발이었다. 실처럼 가느다란 물체의 다발은 목을 타고 올라가 머리에 뿌리를 내렸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눈을 떴다.

  민머리는 현실이었다.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현실이었다. 이제는 사진 속의 낯익은 내가 아닌, 여전히 이질적인 거울 속의 내 모습이 실상이었다. 그래도 한 달 뒤라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혹시나 약효가 갑자기 나타나 머리카락이 다 자랄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한 오라기의 희망을 나는 어렴풋이나마 마음속에 떠올려 보았다.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일이라는 걸 머릿속 가장 예민한 곳에서 인지하고 있기에 실뭉치는 투명한 먼지로 사라졌다. 16년이라는 삶의 관성을 거역하고 싶은 밤이었다.

  여느 때처럼 밤이 지나자 아침이었다. 시커먼 늑대가 되어 가슴속 모든 걸 울부짖고 싶은 밤조차 동녘 햇살에 씻겨 아침으로 정화된 모양이었다. 1월 셋째 주의 화요일이자 대학병원 가는 날이었다. 오후 1시가 되자 나는 세 개의 모자를 쓰고 집을 나섰다. 도로는 한산했고 버스는 돌고래처럼 매끄럽게 차도를 달렸다. 버스가, 미간을 찌푸릴 정도로 탐스럽게 반짝이는 해산바닷가를 지날 무렵이었다. 외투 주머니의 슬라이드 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청명의 문자였다.

 ‘지현아. 어디야? 오고 있어?’

 ‘버스 안인데, 이제 막 해산바닷가 지났어. 너는?’ 청명의 답장은 1분도 안 되어 도착했다. 지금 나처럼 청명도 문자를 읽자마자 곧바로 답장을 보내는 것 같았다.

 ‘해산바닷가구나. 나도 막 출발했어. 병원에 도착하려면 2시 반이 좀 넘을 것 같아. 혹시 나중에 진료 끝나고 시간 되니?’

 ‘당연하지. 그럼 나중에 병원에서 봐.’

  미소를 지으며 나는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차창 아래로 스쳐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사람들의 뒤통수가, 적확히 말하자면 머리털이 단연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는 하릴없이 사람들의 새까만 뒤통수로 빨려 들어갔다.

  원형 탈모인은 한 명도 볼 수 없었다. 하긴 병변이 웬만큼 크지 않다면 드러나지 않을 터였다. 대신 아저씨의 훤한 정수리와 벗어진 이마가 내 눈길을 끌어당겼다. 이전에는 인지하지 못하고 지나치던 그 모습을 나는 새로운 눈으로 유심히 살펴보았다. 비록 머리털이 부분적으로 빠졌을 뿐이지만 그 영향력은 결코 적지 않았다. 잉크 한 방울이 투명한 물을 오염시키는 것처럼 부분이 전체를 훼손시키고 있었다. 비록 머리카락의 개수 차이는 사자와 고양이의 간극처럼 막대했지만, 머리털이 온전치 않다는 점에서 미묘한 동질감이 들었다. 사자와 고양이가 같은 고양잇과에 속하듯 남성형 탈모든 전두 탈모든 결국 탈모는 탈모였다.

  가장 많이 본 건 역시나 검은 숲, 다시 말해서 비탈모인의 머리였다. 가마를 중심으로 바람개비처럼 솟아난 그들의 머리숱은, 항공 촬영한 아마존처럼 울창한 밀림을 형성했다. 드센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그들의 뒤통수는 훔치고 싶을 정도로 탐스러웠다. 어쩜 저렇게 푸짐하고 윤택이 날 수 있는지, 불과 몇 달 전까지 나도 저랬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이마와 절묘한 경계를 이루다 관자놀이서 ‘ㄴ’자를 그리며 내려와 귓가를 살랑거리는 머리털이 형성하는 외관은 그야말로 인체의 예술이었다. 머리카락은 인간의 몸에서 가장 아름답고 매력적인 물건이었다. 상당수의 비탈모인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경외감이 우러나오는 그 고혹적인 예술 작품을 요리했다. 길이 조절, 펌, 염색의 3대 조리법에다 층 내기, 땋기, 묶기 등 자잘한 조미료를 뿌린 비탈모인의 두발은 면요리처럼 다채로웠다. 면요리를 만들기 위해선 면발이 준비되어야 했다. 어떠한 맛깔나는 소스도 원재료인 면이 구비되지 않으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그리고 머리 위의 면발은-비록 대부분은 보유하고 있지만-적지 않은 사람들이 잃어버린 상태였다.

  한 시간 넘게 상영된 씁쓸한 다큐멘터리가 끝나자 대학병원이었다. 나는 곧바로 4층 피부과로 올라갔다. 어두운 낯빛의 어른들로 북적이는 대기석에서 청명의 앳된 얼굴은 유난히 두드러졌다. 청명의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안도의 미소가 물결처럼 번졌다. 대학병원에서 미소 지은 건 처음이었다. 청명은 목을 45도 각도로 굽힌 채 책을 읽고 있었다. 중력에 이끌린 가발의 옆머리는 책과 수직을 이뤘다.

 “청명아.”

  책을 읽던 청명은 고개를 올려다보았다. 서로의 눈빛이 하나의 접점에서 만나자 청명도 환하게 웃었다. 청명의 옆자리에 앉으며 나는 표지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리스 로마 신화]였다. 만화책으로는 많이 봤지만 소설은 처음이었다.

 “지현아. 진료 끝나고 1층 카페에서 잠시 얘기 좀 하지 않을래?”

 “그래, 좋아.”

  1번 진료실의 의사는 청명을 먼저 호명하였다. 내가 진료실에 들어간 것은 그로부터 10분 뒤였다. 역시나 별다른 말은 없었다. 간략하게 안부를 물은 뒤에 의사는 모자 세 개를 벗으라고 말했다. 모자 속에 감춰진 공허한 머리를 확인하더니 의사는 약을 처방해 주었다. 다시 모자 세 개를 쓰고 진료실을 나와서 나는 청명과 함께 1층 카페로 내려갔다.

  녹차 두 잔과 샌드위치를 구매한 우리는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시작했다. 저번에 앉았던, 구석진 곳에 위치한 원형 테이블이었다. 찻잔을 기울이자 녹차의 뜨뜻한 기운이 기다란 터널을 타고 뱃속 주머니로 흘러내렸다. 안온한 기운이 뱃속으로 가득 퍼졌고, 나는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책 읽는 걸 좋아하는구나. 아까 보니까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고 있던데?”

 “대기석에서 기다릴 때 많이 심심하잖아. 괜히 쓸데없이 휴대폰만 만지작거리게 되더라구. 그래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을 가져왔어. 오랜만에 읽었는데 꽤 재밌더라구.”

 “어느 부분을 읽고 있었니?”

 “라비린토스에 대해서 읽고 있었어.” 말을 마친 청명은 녹차를 홀짝였다.

  초등학교 시절, [그리스 로마 신화]를 만화책으로 달달 읽었지만 정작 라비린토스가 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에 남은 건 화려한 그림체뿐이었다. 한 모금의 녹차를 머금으며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감도 잡히지 않았다. 결국 나는 라비린토스가 뭔지 청명에게 물어보았다. 샌드위치를 부채꼴로 베어 먹은 뒤 청명이 대답했다.

 “라비린토스는 크레타 섬에 있는 미궁인데, 크레타의 왕인 미노스가 다이달로스를 시켜서 만들었어. 미노스에게는 파시파에라는 왕비가 있었어. 파시파에와 황소가 부정한 관계를 맺어서 낳은 미노타우루스를 가두기 위해 만든 미로가 바로 라비린토스야. 라비린토스는 아주 복잡하게 설계되었대.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헤어날 수 없을 정도래.”

  말을 마친 청명은 샌드위치를 한 입 더 베어 먹었다. 두 번 베어 먹은 샌드위치 사이에서 샐러드 한 조각이 쟁반으로 떨어졌다.

 “그렇구나. 듣고 보니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 같아.”

  라비린토스에 대한 이야기를 마친 뒤, 나도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샌드위치를 각각 두 조각씩 먹은 우리는 녹차를 한 모금씩 머금었다. 뱃속이 채워지자, 청명은 한층 진지해진 표정으로 조금 특별한 이야기를 꺼냈다.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사실 서울의 큰 병원에도 다녀 봤어. 치료를 받으니 머리카락이 자라긴 했는데 다시 빠지더라구.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치료를 받아도 머리카락이 100퍼센트 다 자라지는 않았어. 50퍼센트에서 60퍼센트 정도 자라났던 것 같아. 그다지 실효성이 없는 수치지. 가끔씩 드는 생각이지만, 나는 언제쯤이면 원형 탈모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싶어. 도대체 언제... 나는 이 끝 모를 터널에서 헤어날 수 있을까?”

  말꼬리를 흐리던 청명은 녹차를 머금음으로써 말을 맺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나 역시 목구멍으로 녹차를 흘려보냈다. 그때였다.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뜻 없이 스쳐갔다. 녹차를 식도로 넘기자마자 나는 조심스러운 말투로 청명에게 물어보았다.

 “참, 청명이 너는 어느 고등학교에 가니?”

 “난 집 근처의 I여고 가. 너는?”

  고등학교 배정은 지난 12월에 이루어졌기에 청명과 만나기 전이었다. 혹시나해서 물어보았지만 역시나였다.

 “그렇구나. 난 V여고에 가는데.”

  현실적인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는 평범한 대화를 시작했다. 서로의 중학교 시절에 대하여 끝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처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눠서인지, 어느덧 창밖에는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누군가 빨리 감기 버튼을 눌러 시계바늘이 2배속으로 움직인 것 같았다. 아직 오후 6시였지만 1월 말이다 보니 바깥의 어둠은 시간대에 비해 묵직했다.

 “혹시 좀 더 시간 되니?”

  카페 문을 열고 나가던 청명의 질문에 나는 시간이 된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해산공원에 산책하러 가지 않을래?“

  머리카락의 소멸은 속박을 의미했다. 탈모가 발병한 이후로 병원과 학교를 제외한 다른 곳에 가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때문에 집에서 20분 거리인 해산공원에 산책하러 가자는 청명의 제안에 머릿속은 벌집의 내부처럼 복잡해졌다. 저녁이라 해산공원에는 어김없이 사람들이 바글거릴 터였다. 상상만으로도 평온했던 심장의 온도가 상승했고, 머릿속은 ‘갈 수 없다.’는 생각으로 점철되었다. 청명은 나를, 우물쭈물 대답을 미루며 간접적으로 거절한 나를 다시 설득했다.

 "지현아, 지금은 밤이니까 괜찮아. 낮이면 몰라도 밤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다지 설득력이 없는 말이었다. 무슨 일이든 ‘괜찮다’고 말하고 보는 어른의 빤한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머뭇거리며 나는 답변을 회피했다. 그런 나를 안쓰러워하는 눈매로 바라보며 청명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현아, 네가 무슨 심정일지 충분히 이해가 돼. 나도 처음 몇 달간은 집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거든. 그러다 갑갑함을 느껴서 점차적으로 활동 반경을 넓혀 나갔는데, 차츰 괜찮아지더라구. 너도 그동안 집에만 있어서 많이 답답했을 거잖아. 산책하는 게 정 내키지 않는다면 마스크라도 쓰는 게 어때?"

  청명의 눈은 내 마음속 깊숙한 곳까지 꿰뚫고 있었다. 마치 두개골을 절개한 뒤에 머릿속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것 같았다. 청명의 조언대로 나는 병원 약국에서 하늘색 방한대를 구입하여 눈 밑까지 오도록 착용했다. 방한대가 입과 코를 완전히 뒤덮자 산소마스크라도 착용한 듯이 마음속이 편안해졌다. 세 개의 모자에 방한대까지 착용하자 얼굴의 대부분이 가려졌고, 가슴속에선 안도감 비슷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대학병원을 떠난 버스는 1시간 뒤에 해산바닷가 정류장에 도착하였다. 버스에서 내리자 서늘한 밤공기가 얼굴 살갗으로 고스란히 와 닿았다. 정류장에서 5분도 걷지 않아서, 해산바닷가 바로 옆에 위치한 해산공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해산공원을 산책하는 수십 명의 사람들도 눈에 들어왔다. 하이에나를 목격한 임팔라처럼 내 심장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 내려갔던 방한대를 다시 눈 밑까지 끌어올렸다.

  해산공원은 해산바닷가의 백사장 바로 옆에 위치했다. 백사장 끝 지점에서 1분 거리였고, 공원 전체는 바닷물로 빙 둘러싸여 있었다. 길이 1킬로미터의 타원형 트랙이 놓인 해산 공원은 4월이면 개나리꽃이 만발해 관광명소로 이름이 드높았다. 사람들 틈에 섞여 청명과 나는 첫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면서 나는 성취감 비슷한 기분을 맞보았다. 우리는 계속해서 트랙을 나아갔다. 주변의 번쩍이는 눈빛과 키득거리는 소리와 수군거림이 가슴속을 피해망상처럼 쏘아댔지만 청명이 있어서인지 버틸 만했다. 계속해서 나아가던 청명과 나는 어느덧 전망대가 위치한 트랙의 중간 지점에 이르렀다. 전망대로 올라간 청명과 나는 난간으로 다가갔다.

  전망대 난간에서 왼쪽을 바라보니 해산바닷가 백사장이 고스란히 엿보였다. 오른편에는 호텔과 모텔이 뒤섞인 채 네온사인을 내뿜고 있었다. 정면에는, 바닷가의 몸통이 드넓은 평야처럼 펼쳐져 있었다. 스테이크 소스처럼 끼얹힌 어둠 탓에 널찍한 형체만이 드러났다. 바다의 시원한 바람은 모자와 방한대의 틈으로 스며들었다. 심장 박동과 더불어 두피의 땀과 머릿속 열기가 차갑게 식었다. 나는 한참 동안 널찍한 바다를 찬찬히 지켜보았다.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횡으로 가로지른 것은, 자로 그은 듯이 가지런한 수평선을 응시하던 와중이었다.

 "청명아. 사실 어젯밤에 엄마가 가발을 사라고 했거든. 그런데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가발을 써야 한다는 사실을 아직도 못 받아들이겠어. 가발을 써야한다는 게 도무지 납득이 안 돼."

  말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음성을 높인 바람에,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이야기를 마쳤다. 잠자코 고개를 끄덕거리며 내 말을 듣던 청명은 왼손을 턱에 갖다 댔다. 턱 끝을 엄지와 검지로 문지르는 게 뭔가를 골몰히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손을 내리고 청명은 산뜻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말을 듣고 나서 잠시 초등학교 2학년 때가 떠올랐어. 5살 때는, 그러니까 유치원 다닐 무렵에 머리카락이 빠졌을 때는 그냥 유치원을 안 가면 됐어. 하지만 초등학교는 그럴 수 없었어. 예전에 말했듯이,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 머리카락이랑 온 몸의 털들이 두 달 만에 몽땅 빠져 버렸어. 워낙 급작스레 빠지는 바람에 학교를 몇 주 동안 빠질 수밖에 없었어. 그 몇 주 동안, 부모님이 가발을 사주었지만 이미 다른 애들이 다 알아버린 뒤였지. 그래서 나는 학교에 가기 싫었던 나머지 가발을 사고도 계속 결석을 했어. 엄마가 학교 가라고 해도 너무 무서워서 도저히 갈 수가 없었어. 학교는 안 가고 놀이터에서 시간을 때우다 집으로 돌아온 적도 많았어. 그러다가 수업일수의 3분의 1 넘게 결석하는 바람에 유급하고 말았어.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믿기지가 않아. 믿어져? 무슨 대학교도 아니고 초등학교를 유급하다니. 여하간 유급당해서 집에 있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어. 처음엔 신을 원망했고 머리카락이 빠진 내 운명을 부정했어. 뭔가 저주에 걸린 기분이었어. 주위엔 아무도 없는데 왜 나만 이럴까 싶었어. 헤어날 수 없는 늪처럼 어두운 방에서 나는 계속해서 한탄하고 울부짖었지.

  그러니 지현아. 이제 너는 고등학생이잖아. 그러니 너는 가발을 살 수 밖에 없어. 그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아. 정 힘들다면 집에서 쉴 수도 있겠지만 막상 집에 있는다고 상황이 더 나아지는 것도, 뚜렷한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어쩌면 그게 더 힘들 거야. 지현아, 가발을 쓰면 불편하지만 그래도 그게 더 나을 거야. 그러니 일단 가발을 사도록 해. 주문하고 받으려면 한 달 정도 걸리니까 내일 당장 가발전문점에 가 봐."

  전망대를 내려온 우리는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사람들의 입에서 튀어나온 각양각색의 말소리들은 짬뽕처럼 어우러졌다.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로 목소리의 볼륨을 낮춘 채, 거의 속삭이는 음성으로 우리는 말을 주고받았다.

 “가발을 쓰면 안 불편하니?”

 “솔직히 가발이 불편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아. 날씨에 극도로 민감해지고, 목과 어깨가 결리고, 가발을 쓴 게 발각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게 돼. 만약 누군가가 잠을 잘 때도, 달리기를 할 때도, 수영할 때도, 24시간 내내 착용하더라도 불편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오랫동안 쓸 수 있는, 흡사 아바타 같은 가발을 만들어내지 않는 이상 그건 어쩔 수 없어. 하지만 말이야. 중요한 건... 가발을 쓰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가발 없이는 도무지 사람들을 마주 대할 수 없어. 그 사실 하나가 가발의 모든 불편함을 상쇄시켜 줘.“

  불투명한 유리 너머를 건너다보는 느낌이었다. 청명의 말은 내 일처럼 생생하게 이해되지도, 가슴속 깊숙이 와 닿지도 않았다. 하지만, 가발을 써야 한다는 쪽으로 머릿속 시소가 기울은 것만은 분명했다. 며칠 남은 중학교 졸업식도, 한 달 남은 고등학교 입학식도, 모자와 방한대 속의 민머리도 더 이상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종내 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질문을 던지기에 이르렀다.

 “청명아. 너는 가발을 어디서 샀니? 가발 회사도 여러 개던데.”

 “난 E가발전문점에서 샀어. 해산바닷가 근처에 있는 곳인데, 100% 인모라서 가장 자연스럽거든. 그런데 아까도 말했지만 빨리 가 봐야 할 거야. 가발을 맞추는 데 한 달 정도 걸릴 테니까 말이야. 그 외에 가발에 대해 알려줄 게 많은데, 참 너네 학교는 졸업식이 언제야?"

 “다음 주 수요일이야. 사실 졸업식 때문에 요새 고민이야.”

  졸업식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무기력한 한숨이 입 밖으로 비어져 나왔다.

 “지현아. 혹시 졸업식 때 가발이 필요하다면 내가 빌려줄게.“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청명은 나에게 제안했다.

 “그래도 될까? 너네 학교는 졸업식이 언제야?” 나도 조심스러운 어조로 응대했다. 가발을 빌리는 건 학용품 빌리는 것과 무게감이 다른 행위였기 때문이다.

 “괜찮고말고. 우리 학교는 다음 주 목요일이거든. 그리고 내가 예전에 쓰던 가발이 몇 개 있는데 이참에 하나를 챙겨줄게. 조금 망가진 상태라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히 쓸모가 있을 거야.”

  청명의 제안에 된장처럼 발효된 고민의 덩어리가 미세한 가루로 분쇄되어 버린 듯했다. 꽉 막힌 게 뚫렸을 때의 개운함을 느끼며 나는 환한 미소로 고마움을 표현했다. 청명과 나는 해산공원 앞에서 작별 인사를 나눠야 했다.

 “다음에 봐.”

 “그래, 병원에서 보자.”

  해산공원 앞에서 청명과 헤어진 나는 20분 거리의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엄마를 찾았다.

 “가발 사 주세요. 쓰고 다닐게요.”

  나의 갑작스런 변덕에 엄마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기색으로 말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얼른 맞추자꾸나. 가발 맞추고 받으려면 시간 좀 걸릴 테니까 내일 당장 가 보자꾸나.”

  가발은 얼마나 할지 문득 궁금해졌다. 시장이나 의류매장의 패션가발은 10만 원 이하도 수두룩했지만 아무래도 가발전문점에서 맞추면 좀 더 비싸지 않을까, 라고 나는 막연하게 짐작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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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7장: 라비린토스 2017 / 12 / 16 299 0 9262   
9 16장: 첫 만남 2017 / 12 / 16 320 0 4151   
8 14~15장: 전두 탈모증, 첫 눈 2017 / 12 / 16 320 1 4775   
7 12~13장: 털, 파파게노 효과 2017 / 12 / 16 331 0 7170   
6 10~11장: 삭발, 터닝 포인트 2017 / 12 / 16 335 0 4141   
5 8~9장: 공포, 대학병원 2017 / 12 / 16 309 0 4954   
4 6~7장: 니조랄 샴푸, 조롱 2017 / 12 / 16 332 0 4659   
3 4~5장: 피부과, 불안 2017 / 12 / 16 300 0 3857   
2 3장: 원형 탈모증 2017 / 12 / 16 315 0 3522   
1 1~2장: 탈모, 가발 2017 / 12 / 16 482 0 2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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