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집으로 쳐들어 간지 벌써 3주일이 넘었다.
어느덧 진희가 이세계로 온지 한달이 다 되어가고 그간 많은 일이 있어났다.
이 짧은 기간 동안 베스페라 대륙의 핫이슈는 단연 스켈레스 공작이었다.
수다스러운 사교계의 여성들은 공작에 대한 추문을 부풀려서 떠나르기가 바빴고 어느 거리를 가던 간에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스켈레스 공작은 가루가 날리도록 까였다.
공작은 마족 소환 혐의와 역모혐의로 체포되어 수감되었고 황실에서 그를 더 추궁한 결과 까무러질 법한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72개의 기둥 외에도 마왕을 소환해서 자신의 아들을 살리고는 황성에 쳐들어가서 복수를 하려는 어마무시한 짓을 저지르려고 했다.
다들 마왕의 소환은 허황된 무리수라고 코웃음을 치면서 무시했지만 추궁을 당하는 공작의 눈빛은 진지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72마족을 소환하기 위해 자신의 영지의 노비 중, 처녀들을 몰래 골라내어 임신시키고는 제물로 바치려는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하지만 그의 원대한 꿈은 진희의 난입으로 인해서 공중폭파 되어버리고 걸국 그는 대륙법에 의거하여 즉결처분을 받아 처형되었다.
다행히 제물로 바쳐질 뻔한 여인들은 평민으로 신분이 상승이 되고 하인츠 자작의 영지로 편입되어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한편, 진희는 일이 마무리 되자 아직 성불되지 않은 세레나즈를 불러내서 자초지종 그간 일을 설명해 주었다.
세레나즈는 전에 단순한 역모인 줄 알고 진희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스케일이 생각보다 거대한 것을 깨닫고는 곤란하면서 미안해 했다.
그래도 진희는 대인배답게 쿨하게 넘겼다. 또한 완전히 그녀를 성불하기 전, 세레나즈를 자신의 몸에 빙의시키고 엘레스에게 잠시 그녀를 소개해 주었다.
엘레스는 처음에는 의심스러운 눈치였으나 진희의 몸에 빙의된 세레나즈가 온화한 말투로 엘레스의 흑역사를 나열하자 그제서야 꺼이꺼이 울면서 회포를 풀었다.
이후 세레나즈가 진희의 몸에 나와서 성불이 되었을 때, 엘레스는 아주 오랫동안 진희의 품에서 얼굴을 파묻으며 오열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소소한 변화가 하인츠 자작가에 찾아왔다.
푸른 잔디가 깔린 연무장.
진희가 엘레스에게 검술을 가르쳐 주고 있을 때 포드 집사는 먼발치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포드 집사가 엘레스의 훈련을 흐뭇하게 보는 사이, 그의 옆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났다.
포드 집사는 그의 정체를 알아차리자마자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하인츠 후작님."
하인츠 자작은 반란분자를 소탕했다는 명목 하에 후작으로 추대되었다. 또한 국유지화 된 공작령의 영지 절반을 황제에게 하사받았다.
그는 아직 후작이란 칭호가 어색한듯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멋지게 깎아놓은 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흠흠! 그래, 엘레스는 잘 하고 있는가?"
"예. 보시다싶이 마스터께서 공자님의 훈련을 잘 이끌어 가고 있으십니다."
"그럴 줄 알았다."
하인츠 후작은 포드 집사와 나란히 투닥거리는 그들을 바라보며 한참동안 서있었다.
한줄기의 큰 강풍이 하인츠 후작의 얼굴을 스쳤고 추위를 느낀 후작은 겉옷을 단단히 여매며 돌아섰다.
"이제 그만 가겠네."
"네. 하인들을 시켜 따듯한 차를 대령하겠습니다."
****
"아흐! 시원하다."
간만에 따듯한 물로 목욕한 진희는 침대에 몸을 풀쩍 던졌다.
아직 기술이 덜 발달한 아크라네스에서는 물로 목욕을 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
그러나 하인츠 후작은 진희가 그간 쌓아온 공들을 봐서 그녀가 무려 따듯한 물로 목욕을 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진희는 찝찝하기는 했지만 여기는 따듯한 물 자체가 황가에 비견될 큰 사치이므로 조금 자제하면서 특혜를 누렸다.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리의 물기가 냉기를 머금은 청량감을 남긴다. 진희는 침대에 대(大)자로 뻗으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하지만 공작가의 일이 끝나자마자 놀랍도록 긴장감이 없는 하루의 연속에 따분해진 진희는 잠이 오기는 커녕 눈만 말똥말똥했다.
진희는 이불 속에 몸을 파묻으며 자세를 옆으로 틀었다.
"응?"
어느샌가 협탁 위의 책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차원의 검]과 [무의 전사 일대기].
'오옷!'
진희는 자신을 감싸안던 이불을 팽개치며 얼어나 앉았다. 잠도 안오는데 시간이나 때울 심산으로 책의 겉표지를 넘겼다.
'차원의 검.'
진희는 엘레스가 준 위인전도 내용이 궁금했지만 일단 자신의 지구귀환이 먼저였던지라 무의식적으로 [차원의 검]이라는 책에 손을 뻗었다.
뿐만 아니라 책도 꽤 얄팍해서 금방 읽을 것 같았다.
그녀는 책의 내용 하나 놓치지 않고 집중하기 위해 낭랑한 목소리로 책을 읽었다.
"차원의 검은....."
[차원의 검은 날이 없는 레이피어 모양으로 전해지며 무의 전사가 애용하던 무기이다.]
"무의 전사?"
진희는 난도때도 없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무의 전사 내용에 잠시 얼굴을 찌푸렸으나 계속 읽어나갔다.
[.....비록 날이 없는 초라한 모양의 검이지만 무의 전사가 검기를 이용해 검을 휘두으면 무슨 물체이던 간에 두동강이 났으며 정령술을 혼합해 검을 휘두르면 천지가 진동하였다.
차원의 검이란 이름의 유래는 차원을 가르고 어디든지 넘나들 수 있다 하여 붙여졌다. 본디 고대에 차원이 생성되기 전의 시기에 검이 차원 여러개를 넘나들다 보니 차원을 가르는 기묘한 힘이 서렸다는 이야기도 존재하나 확실치는 않다.
다만, 확실한 것은 드워프 종족들도 여러 번 모사를 시도하다 포기한 검인만큼 뛰어난 무기인 것, 그리고 무의 전사가 아닌 이는 검의 힘을 제대로 이끌어내지 못한 다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검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의 전사가 종적을 감추기 전, 검의 소재가 묘연해졌기 때문이다.
대신 검의 종적에 대해 여러 유력한 가설이 있다.
첫째. 검의 가치가 탐이 났던 마족이 훔쳐가서 마왕에게 바쳤다.
둘째. 무의 전사가 종적을 감추기 전, 자신과 계약했던 정령왕들에게 넘겨주어 현재는 정령계에 있다.
셋째. 드래곤 모리오 클라우스가 현재 가지고 있다.
넷째. 안타깝게도 차원의 틈에서 떠돌고 있다.
다섯째. 그녀를 따르던 부하들에게 은밀하게 전해주었다.
그러나 이 가설들이 사실이라고 해도 현재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검의 행방을 알 수 없으며....]
"허어....."
진희는 기운이 쭉 빠지던지 한숨을 푹 쉬고는 책의 표지를 소리나게 탁 덮었다.
차원의 검이 자신을 집에 데려다 줄 유력한 물건이라는 것은 잘 알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들뜨면서 신나게 읽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표정이 썩어갔다.
도대체 종적이 묘연한 검을 무슨 수로 찾겠는가?
게다가 유력한 가설마저 편한게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검을 찾으려면 어디 있는지도 모른채로 여기저기 노가다로 쑤셔봐야 하는 스펙타클한 모험을 해야한다.
진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는 다시 요란하게 누웠다.
책을 읽기 전 상쾌한 기분은 어디론가 다 가버리고 머리 속이 더욱 복잡하데 꼬이는 기분이다.
그녀는 결국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곧바로 차원의 검을 찾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내용의 꿈을 꿨다.
****
챙챙챙!
진희는 어젯밤 희망고문 내용의 꿈 때문에 심란한 마음이었다.
엘레스랑 1:1 대련을 하는데 마음 속에 꿍쳐진 기분 때문에 계속 손이 미끌미끌했다.
결국,
챙캉!
여러가지 생각을 하느라 정신을 시장에 갖다 팔아버린 진희는 그녀답지 않게 검을 놓쳐버렸다.
엘레스는 옆으로 날아간 진희의 목검을 쪼르르 달려가 주워오면서 실실 쪼갰다.
"하핫, 마스터! 드디어 제가 이겼어요!"
엘레스는 넘사벽의 실력인 진희를 무장해제 시켰다는 것만으로도 기쁜지 쉴새없이 콧노래를 불렀다.
"...응."
진희가 계속 넋이 나간 표정을 지으며 멍 때리지 그제서야 분위기를 파악한 엘레스는 콧노래를 멈추고 진희를 걱정스레 쳐다봤다.
"무슨 일 있어요, 마스터?"
엘레스는 진희의 몸을 짤짤거리며 흔들어도 별 반응이 없자 잠시 야외 벤치로 이끌고 가서 앉혔다.
진희는 앉으니까 조금 정신이 드는지 힘이 풀린 눈으로 엘레스를 쳐다보았다.
엘레스는 진희의 파리한 손을 두손으로 꼬옥 잡으면서 주인을 걱정하는 강아지 눈빛으로 질문했다.
"고민이 있으세요?"
"....정령계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돼?"
"....네?!"
엘레스는 진희의 입에서 정령계라는 소리가 나오자 그녀의 손을 팽개치고 펄쩍 뛰었다.
"지...지금 그냥 농담하신거죠?"
"아니. 진심인데."
진희는 눈을 부릅 뜨고 엘레스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마치 세상 이보다 더 진지할 수는 없을 거란 표정으로.
엘레스는 한숨을 쉬면서 정수리를 벅벅 긁었다.
"아니, 도대체 무슨 마약을 하셨기에 그런 생각을..."
"...뭐?"
"아니에요."
진희는 엘레스가 자신의 뒷담을 까는 기분이 들었지만 어제 책에서 읽은 내용을 세세히 설명했다.
".......그래서 내가 그 검이 필요한데 찾으려면 어쩔 수 없더라고."
"차원의 검은 왜 필요한데요?"
"나중에 설명할게."
진희는 꼬치꼬치 캐묻는 엘레스를 저지했고 엘레스도 조금 쫄았는지 움츠러들었다.
엘레스는 별로 달갑지 않은 투로 진희에게 따졌다.
"마스터가 말한 정령계와 드래곤 모리오의 레어는 아우스테르 대륙에 있어요. 근데 마스터는 검을 찾기는 커녕 그 대륙에 발도 못 붙일걸요."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아우스테르 대륙은 절대 일반인이 독단적으로 갈 수 없다.
특별히 허가받은 여행증을 끊어야 대륙에 입장할 수 있는데 여행증을 끊으려면 최소한 실력을 검증받은 용병이나 기사 정도 되야 갈 수 있다.
게다가 아무리 기사나 용병이라고 할지라도 여기사는 여행증을 발급 받을 수 없다.
여자의 일생의 절대적 의무가 자손생산라고 여기는 대륙의 왕국들이 여자는 절대 아우스테르 대륙에 갈 수 없게 대륙법으로 박아놓은게 그 이유이다.
진희는 엘레스의 설명을 듣고는 더욱 경직되었다.
'그 놈의 여자, 여자!'
이러다가 검을 찾고 집에 가기 전에 애놓고 늙어죽을 판이다.
엘레스는 진희가 설득 당한 것 같자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꼈다.
아마 뛰어난 실력의 진희를 후작가에 영원히 발을 묶어 놓으려는 욕심으로 필사적으로 뜯어말린 것이리라.
진희가 현실에 굴복하기 싫어서 몸부림을 치던 와중에 포드 집사가 헐레벌떡 두사람에게로 뛰어왔다.
그의 염소수염은 땀에 쩔어서 늘 꼿꼿하던 모발이 30도 각도로 축 쳐졌다.
그는 숨이 차오르던지 잠시 숨을 고르고 난 뒤 간신히 입을 뗐다.
"허억허억....후작님께서 두 분 모두 데려오시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