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그림자의 공격 (1)
공기방울 속 오현과 서령은 서책방을 나선 사내의 뒤를 계속 쫓았다. 단희와 친밀한 관계로 보이는 사내. 어쩌면 그가 영배의 죽음에 대해서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인도 차지하고, 서책방도 차지하고... 일석이조을 노린 범행일 수도 있겠네요.”
서령이 신이 나서 물었다.
“아직 속단하기엔 이르오.”
반면 침착하게 대답하는 오현.
“낭자는 또 넘어져서 공기방울 밖으로 갑자기 튀어나가는 불상사나 없게 조심해 주시오.”
오현의 싸늘한 지시에 서령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반박할 수도 없었다. 서령은 심혈을 기울여 오현의 옆에 바짝 붙어 걸었다.
자꾸만 팔꿈치가 부딪혀 불편했는지, 오현이 서령을 힐끔 째려봤다. ‘뭐, 어쩌라구요?’ 라며 반기를 드는 서령의 눈빛.
오현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팔꿈치를 바짝 당겨 가슴 앞으로 팔짱을 꼈다. 쳇! 서령도 오현을 힐끔 째려보며 질세라 팔짱을 꼈다.
그때였다.
별안간 무뢰배들이 나타나더니, 앞서 걷던 사내의 양옆에 딱 붙었다.
“소란 피우지 말고, 조용히 따라오쇼!”
오른쪽에 선 무뢰배가 목소리를 낮춰 사내의 귓가에 속삭였다. 겁에 질렸는지 사내는 찍소리도 못하고, 온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랏! 이 새로운 전개는 또 뭐지?!’
‘입질이 왔군!’
오현과 서령의 두 눈이 희번덕거렸다.
***
인적이 드문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자, 무뢰배들이 사내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아악!”
쓰러진 사내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잘생긴 그의 얼굴이 공포로 일그러졌다.
“이 봐! 박목원이! 오랜만이야! 우리 보고 싶지 않았나?”
“그거 알랑가? 이번 달 이자가 아직도 안 들어왔더라고!”
무뢰배들이 발로 사내를 찍어 누르기 시작했다.
“아악! 잘못했소! 아악! 고, 고, 곧 갚을 것이오!”
바닥에 널브러진 사내가 두 손을 모아 싹싹 빌며 말했다. 하지만 무뢰배들은 발길질을 멈추지 않았다. 목원의 비명도 계속 이어졌다.
서령이 끝내 참지 못하고, 오현의 옷소매를 잡고 흔들었다.
“그를 도와주세요!”
“이번 작업의 목적을 잊었소? 우리는 영배가 타살 당했다는 증거만 찾으면 되오.”
오현은 미동도 하지 않고, 그저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헐, 진짜 치사한 인간, 아니지, 치사한 사신 같으니라고!’
서령이 원망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오현을 째려보았지만, 오현은 역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도 목원을 향한 무뢰배들의 폭력은 계속되고 있었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서령이 달려 나가려고 발을 떼었다. 하지만 오현이 그녀의 팔을 잽싸게 낚아챘다.
“어허! 기다리래두!”
“이렇게 마냥 기다리다 저 사내가 죽어버릴 것 같다구요! 난 도련님처럼 냉혈한이 아니라서요!”
서령이 바락바락 소리 질렀지만, 오현은 아랑곳 않고 그녀의 팔을 꼬옥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박목원이! 당신, 영배 그 자에게 미안한 마음은 안 드는가?”
“자네도 자네 집 앞 마당에 있는 나무에 목 매달리고 싶지 않으면 돈을 제때제때 갚아야 할 것이야!”
발길질을 멈춘 무뢰배들이 손바닥으로 목원의 머리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허헉, 다, 당신들 짓이었소?”
겁에 질린 목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리 말하면 섭하징!”
무뢰배가 목원의 턱을 그러쥐었다.
“이게 다, 돈을 제대로 안 갚은 자네 때문이 아닌가!”
“그리고 자네랑 그렇고 그렇다는 그 영배네 계집 때문이 아닌가!”
그들이 낄낄거렸다.
“다음 주 까지 이자를 갚지 않으면, 이번엔 영배네 계집이 남편을 잊지 못하고, 자살하는 슬픈 이야기를 듣게 될 거야.”
목원의 뺨을 툭툭 두 번 치고 일어선 무뢰배들이 퉷, 침을 뱉고 저들끼리 키득거리며 자리를 떴다.
서령은 그녀를 스쳐 지나가는 무뢰배들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하게 맺혀있었다. 어느 누구에게든, 어떤 상황에서든 폭력은 정당할 수 없다. 분노로 가득 찬 그녀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적어도 쓰러져있는 저 사내를 도울 수 있게 해 주세요.”
오현을 올려다보는 서령의 눈동자에 간절함이 묻어있었다. 그는 하는 수 없다는 듯 그녀의 팔을 풀어주었다. 그제야 서령은 공기방울 밖으로 달려 나갈 수 있었다.
“이보시오! 괜찮으시오!”
목원의 온 몸 이곳저곳은 살갗이 터져 붉은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몸을 가누기조차 힘든 것 같았다. 어찌할 줄 모르겠는 표정의 서령이 오현을 올려다보았다.
하아, 작음 한숨을 내쉰 오현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말했다.
“업히시오.”
***
딸랑.
“어서오,”
책방 문이 열리는 소리에 단희가 자동적으로 인사말을 꺼냈다. 하지만 그녀는 시작한 말을 미처 끝내지 못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들을 보고는 그녀의 입이 얼어버린 탓이었다.
문 앞에는 한 시진(두 시간) 전에 책방을 다녀간 소설가들이 서 있었다. 그 중 훤칠한 작가의 등에는 피투성이의 사람이 업혀있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는 다름 아닌 목원이었다.
“아, 아니... 이게 대체 무, 무슨 일입니까?”
단희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제대로 벌리지도, 그렇다고 다물지 못했다.
“막다른 골목길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어요.”
“저희가 나오고 이 자가 서책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봤던 터라, 안주인께서 아는 사람일거라 여겨 여기로 데려왔습니다.”
대략적인 자초지종을 설명했으나, 단희의 귀에 제대로 도착했는지는 의문이었다. 단희는 벌벌 떨리는 눈과 손으로 목원을 살피며 ‘이를 어째, 이를 어째...’라는 말만 되풀이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리번거리던 오현은 한 쪽 벽면에 위치한 평상 위에 목원을 조심히 눕혔다.
“가서 의원을 모셔오시오.”
오현이 서령에게 말하자, 서령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벌떡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역시 서령은 발이 빨랐다. 일각(약 15분 정도) 정도 흘렀을 때, 그녀는 동네 의원을 데리고 나타났다.
머리 희끗한 의원은 혀를 끌끌 차며 목원의 상처를 살폈다.
어찌나 다급하게 뛰었는지, 서령의 이마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서령이 흐르는 땀을 닦으려 손등을 이마에 갖다 대는데, ‘아얏!’ 찌릿하고 손목이 아팠다. 아까 기우뚱하면서 책장에 부딪힌 손목이었다.
순간 아픔에 일그러진 서령의 얼굴이 오현의 시야에 들어오자, 그의 매끈한 이마도 같이 일그러졌다.
***
다시 어두운 밤이 찾아왔다. 너른 은호의 방엔 호롱불 하나만이 조용히 타고 있었다.
그때였다.
방 한 쪽 구석에서 스르륵,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뭔가가 나타났다. 은호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5명의 영혼들이었다. 아니, 악귀라고 하는 것이 옳았다. 저승으로 가지 않고 수 백 년을 떠돌고 있는 악귀들이었다. 창백한 얼굴의 악귀들이 뿜어내는 어둠의 기운은 강렬했다.
“크크, 이곳은 언제 와도 기분이 좋아.”
“맞아, 이곳만큼 피 냄새가 진동하는 곳도 없지. 낄낄.”
은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악귀가 다가와 은호 앞에 앉았다.
“우리를 찾았다고?”
“그랬지.”
은호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무슨 일이지?”
“사신이 도망친 악귀들을 찾는데 무슨 이유가 있을까? 잡아 쳐 넣고 싶은 것이겠지! 그렇지 않은가?”
웃음기를 걷어낸 은호가 차갑게 말했다. 그의 대답에 빈정이 상한 악귀 넷이 으르렁 거리며 한 발짝 다가왔다. 하지만 우두머리 악귀는 평온해 보였다. 그가 한 손을 들어 다른 영혼들을 진정시켰다.
“빨리 본론을 말해. 악귀들과 친하다는 걸 들켜서는 안 되는 걸로 아는데?”
비릿한 미소가 우두머리의 입가에 걸렸다. 은호가 종이를 두 장 건넸다. 한 장에는 오현의 얼굴이, 다른 한 장에는 서령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둘을 떼어 놔.”
종이 속 얼굴을 힐끔 훑어 본 우두머리가 키득거렸다.
“역시 소문이 맞았군. 사신구슬이 쪼개졌다지?”
뒤에 서 있던 다른 악귀들도 낄낄댔다.
쾅!
눈을 치켜뜬 은호가 탁자를 세게 쳤다.
“네 놈들이 감히 비웃어?!”
순간 은호의 몸에서 어둠의 기운이 훅, 하고 강력하게 뿜어져 나왔다. 죽음의 기운이었다.
움찔, 놀란 악귀들의 웃음소리는 어느새 기어들어 가고 없었다. 하지만 우두머리 악귀는 여전히 평온해 보였다.
“아우한테 굳이 그렇게 까지 해야겠어?”
“어떻게 하겠다는 게 아니다. 그냥 확인만 보려는 거지.”
훗, 은호가 차갑게 웃었다.
“당신 말고 다른 사신을 상대하는 일은 피하고 싶은데, 나도 궁금하긴 해. 반쪽짜리 사신이 어떤지 말이야. 좋아, 접수하지.”
할 말을 마친 우두머리가 벌떡 일어서더니, 바로 사라졌다. 다른 악귀들도 마찬가지였다. 방 안에 은호 혼자 남았다.
“재미있겠군.”
은호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휘어졌다. 그의 눈엔 전에 없던 생기가 돌았다.
***
“어머! 이게 그 얼음이란 것이군요!”
오현이 방금 손가락을 튕겨 만들어낸 얼음을 본 서령은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말로만 듣던 얼음을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둘은 어느새 청은다방 서쪽 별채에 앉아 있었다. 목원과 단희가 안정된 것을 확인하고는 막 돌아온 상태였다.
“우와! 정말 차가워요!”
손가락 끝으로 얼음을 툭 건드렸다가 차가운 기운에 깜짝 놀란 서령이 손가락을 재빨리 오므렸다. 오현은 기다란 헝겊에 얼음 조각들을 털어 넣고는 돌돌 말았다.
“다친 손, 이리 내봐요.”
이 자가 갑자기 왜 이래, 의아한 눈빛으로 오현을 보기만 하는 서령.
“어서!”
오현이 다시 재촉하자 서령은 스윽 오른손을 탁자 위에 올렸다. 그녀의 손목은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아까 서책방에서 버둥대다가 책장에 부딪친 손목이었다. 오현은 얼음이 든 헝겊을 그녀의 손목에 올려놓았다. 서늘한 느낌이 서령의 피부를 기분 좋게 자극했다.
“으으, 시원해!”
오현은 헝겊의 양끝으로 손목을 한 번 감고는 매듭을 묶었다. 그의 부드러운 움직임에 서령의 가슴은 또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쓸데없이 친절한거야, 서령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다른 건 다 할 수 있지만, 인간의 상처를 낫게 하는 것만은 할 수 없소. 그러니 제발 좀 몸조심 하시오.”
발그레해진 서령의 얼굴을 눈치 채서였을까. 오현이 다른 말을 굳이 덧붙였다.
“낭자가 다치면 작업 진행에 크든 작든 영향을 미치니... 하는 말이오.”
치, 그럼 그렇지, 서령의 관자놀이가 불끈 뛰었다.
“네네. 잘 알겠습니다요, 사신 도련님.”
그 때, 드르륵, 문이 열리더니 소야가 소반을 들고 들어왔다.
“붓기 가라앉는데 좋은 차입니다.”
소야가 다소곳한 자세로 주전자를 기울여 찻잔을 채웠다.
“고마워, 소야.”
“뭘요. 저희 도련님 때문에 고생하시는 아씨인데, 이 정도는 해 드려야지요.”
소야와 서령이 서로를 보며 씨익 웃었다. 빠직, 오현의 심기가 불편해지고 있었다.
“너 자꾸 까먹는 거 같은데, 낭자와 나는 피고용인과 고용인 사이다.”
오현이 까칠하게 말했지만, 서령과 소야는 듣고 있지 않았다.
“해 드리는 김에 낭자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것도 하지 그러느냐?”
빈정이 상했는지 괜히 툴툴 심술을 부려보는 오현.
“괜찮으시겠습니까요? 또 아씨께서 다치시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구요.”
“설마 하루에 두 번씩이나 사고를 치겠느냐?”
오현은 뒷짐을 진 채 밖으로 성큼성큼 나가버렸다.
“도련님께서 우리 사이를 질투하시나 봅니다.”
소야가 일부러 오현이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말했다.
“소야, 그러다가 너 막 구르는 수가 있어. 몸 좀 사려.”
서령이 빙그레 웃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