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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집사와 남편 사이
작가 : 루야
작품등록일 : 2017.11.7

메이블 공작, 비올레타 메이블에게 7살 이전의 기억은 없다.

그녀의 나이 7살, 죽을 뻔한 비올레타의 앞에서 부모는 걱정 하나 하지 않았다는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죽을뻔한 너를 살린 사람은 황제 폐하이니 그 분께 평생을 바쳐라.'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소녀는 그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노예처럼 부려지는 것에 불만을 가졌고 스물이 넘은 후로는 반항심이 생겼다. 하지만 무려 7살 때부터 지속된 세뇌는 그녀를 당당해질 수 없게 만들었다.

26살, 19년 동안의 속박을 마침내 예정된 죽음으로서 벗어나게 된 그녀. 행복한 삶은 고사하고 그저 죽음으로 도망칠 생각 뿐이었는데...

'저는 주인님의 충직한 종복이니까요.'

그대는 왜 내게 다가오는가.
마음을 열어 내 뒤를 맡기고 했건만 그대는 왜 존재하지 않을 나의 미래를 이야기하는가.


[ 시한부여주, 공작여주, 무심여주, 흑막남주, 여주호구남주, 남주후보 아마도 셋, 조금의 힐링물(잔잔X), 피폐물ㄴㄴ 초반부에 살짝 스릴러, 새드엔딩 아니에요 :D ]

-표지는 shutterstock!
-조아라와 동시 연재중..!

 
19화. 아들과 집사, 그리고 황태자
작성일 : 17-12-08 22:08     조회 : 260     추천 : 0     분량 : 5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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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올레타는 귀를 막았다. 하지만 손은 무용지물인 듯 날카로운 목소리들은 여전히 그녀를 괴롭혔다. 악을 쓰는 여자의 목소리는 한참이나 비올레타를 괴롭히다 모습을 감추었다. 뒤를 이은 것은 제 아내를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사내의 형상이었다.

 

  ‘겨우 변방 백작가의 영애를 명예로운 자리에 올려주었더니 감히 정부를 만들고, 그와의 아리를 내 아이라 속여?!’

  ‘아니에요……. 제발, 각하. 아니에요…….’

 

 처음, 여자는 남편의 발치에 비참하게 꿇어 그에게 사실을 납득시키려 애썼다. 허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녀는 지쳐갔다. 비로소 제 자궁에서 나온 아이를 남편의 정부가 낳은 것이라 칭할 때까지는 겨우 한 달 밖에 걸리지 않았다.

 

  ‘내 아이도, 네 놈의 아이도 아니면 이 년은 어디서 나온 건데!’

 

 여자는 입술에 흐르는 핏방울 닦아내는 소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남자 역시 경멸의 눈짓을 던지며 한 마디, 내뱉었다.

 

  ‘네 년이 정부와 놀아난 씨야. 괘씸하게도 그걸 숨기고 있지만.’

 

 남자의 시선이 여자에게로 꽂혔다. 그녀는 광기에 젖어 중얼거렸다.

 

  ‘아……, 그렇군. 그 빌어먹을 남편이라는 작자가 내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야.’

  ‘……왜 그러세요, 저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딸이에요. 어머니의 몸에서 난, 아버지께서 키워주신 딸이란 말이에요!’

 

 여자의 매서운 손속이, 남자의 냉혹한 발길질이 소녀에게로 날아들었다. 친부와 친모에게 부정당한 소녀는 신의 품으로 돌아갈 뻔한 고비를 한 번 넘긴 후부터, 세상 그 무엇보다 차갑고 무기력한 사람으로 자라났다. 아이가 생겨난 후로는 냉혹한 성격이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녀는 상처 많고 불행한 사람이었다.

 

 꿈이 흐려졌다. 비올레타는 왼쪽 눈에 흐르는 피눈물의 비릿함을 느끼며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진실을 외면하고 원하는 것만 보는 것은 그녀에게 꽤나 익숙한 행동이었으니 말이다.

 

 

 * * *

 

 

 비올레타는 뺨 위에 흐른 새빨간 피를 느끼고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내가 악몽을 꾸었던가,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옆 자리에서는 베르안이 여전히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상체를 일으키고 침대에서 일어서려다 축축한 불쾌감에 침대시트를 돌아보았다. 피가 시트를 붉게 물들이고 그녀의 잠옷을 침식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끈적하게 젖어 있는 잠옷을 손가락으로 훑은 비올레타가 실소했다. 월경, 베르안의 출산 이후 끊겼던 ‘달손님’이 돌아왔다. 이미 쓰임을 다해 죽음으로 돌아갔다 생각한 그녀의 몸은 다시금 아이를 만들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녀가 일어난 것을 느꼈는지 자신의 옆구리를 더듬던 베르안이 부스스 상체를 일으켰다. 망연자실하게 서 피 묻은 잠옷을 내려다보고 있던 비올레타는 휘둥그레 진 아들의 눈에 뭐라 해야 할지 말을 정하지 못했다.

 

  “……괜찮아요?”

  “일찍 깨게 해…… 미안하구나. 내 대신 줄을 당겨주겠니?”

 

 베르안은 말없이 시녀를 호출하는 줄을 당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녀 하나가 세숫물을 들고 부산을 떨며 침실로 들이닥쳤다. 이른 아침부터 호출을 받아 조금 졸려 보이던 시녀 델라는 피로 얼룩진 비올레타의 잠옷을 보고 손에 들고 있던 세숫물을 그대로 떨어뜨렸다. 그렇게까지 놀랄 일이 아닌데, 당황해 수건을 들고 바닥을 적시는 물을 닦아내는 델라를 바라보는 비올레타의 시선이 차가웠다.

 

 위층에서 일어난 소란을 인지했는지 시녀장 카시멜라와 노엘이 함께 뛰어올라왔다. 물웅덩이를 어쩌지 못해 당황한 델라와 피 묻은 잠옷을 입고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며 선 비올레타는 그들을 경악케 하기에 충분했다.

 

 그 자리에 굳어버린 노엘 대신 그의 손아귀에서 커다란 수건을 빼앗은 카시멜라가 불쾌감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에 몸을 떨고 있는 비올레타에게 다가왔다. 카시멜라는 걱정을 담은 손길로 그녀의 얇은 어깨를 감쌌다.

 

  “의사를 불러와라.”

  “예……? 많이…… 아프신가요?”

  “그래.”

 

 비틀- 비올레타는 카시멜라의 부축을 받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밑이 아프다. 마치 떨어져 나갈 듯 아프니 점점 그 아픔이 거세졌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아랫배를 문질렀다. 쓸데없다. 월경이 다시 시작된다고 해서 불임인 몸이 치료된 것도 아닐뿐더러 다시 아이를 가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 왜.

 

 비올레타의 명에 의아해하던 카시멜라는 그녀가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옹송그레 말자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델라, 당장 목욕물을 준비해라! 이사벨에게 알려 마을에 있는 여의를 불러오라 이르고!”

  “아, 알겠습니다.”

  “어서 움직이지 않고 무얼 하느냐!”

 

 델라가 대답만 할 뿐 몸을 일으키지 않자 카시멜라가 고함을 쳤다. 자신이 엎질러 놓은 물을 흘낏 돌아본 시녀는 종종걸음으로 욕실을 향해 달려갔다. 문간에 서 있던 노엘이 한 박자 느리게 비켜서 델라가 달려가는 뒷모습을 묘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따뜻한 것을…… 가져오겠습니다.”

 

 노엘은 평소보다 조금 흐트러진 느낌이었다. 비올레타의 상태를 걱정스레 보고 침실을 나선 그는 해야 할 일을 상기시키며 재빨리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이른 새벽부터 시작된 난리에 별장은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델라와 시녀 여럿이 다시 위층으로 향하고 망토를 뒤집어 쓴 이사벨이 별장을 나서는 것을 보며, 노엘은 주방이 아닌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얇은 종이 위에 깃펜으로 무언가를 끼적이는 그의 눈빛이 답지 않게 날카로웠다. 까악- 까악- 어딘가에서 까마귀 소리가 들려왔다.

 

 

 비올레타는 목욕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후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의자를 가지고 온 베르안이 초조하게 두 손을 쥐었다 펴며 그녀의 곁에 앉아 있었다. 맥을 짚고도 한참을 고민하던 여의는 시종인 들을 물려 달라 부탁했다. 카시멜라와 노엘이 침실 안에 서 있던 시녀와 시종들을 데리고 바깥으로 몸을 돌렸다.

 

 침실에 불편한 정적이 흘렀다. 여의가 비올레타의 손목을 정중히 이불 위에 놓으며 말했다.

 

  “혹시…… 불임이셨습니까?”

  “……그렇다.”

 

 그 사실을 알고 있던 베르안은 동요하지 않았지만 여의는 방금 들은 사실을 잊어버리고 싶은 듯,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뜸을 들이는 기색을 보이자 베르안이 그새를 참지 못하고 다급하게 재촉했다.

 

  “어서, 어서 고해라.”

  “송구하오나 여전히 수태가 불가능하십니다. 그래도 일단은 몸 상태가 좋아져 달거리가 돌아온 듯 보이니 시간을 두고 지켜본다면 임신이 가능 하실 지도 모릅니다.”

  “……그렇군.”

 

 아픈 허리를 문지르며 비올레타가 여상히 말했다.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태연한 말투였다. 몸 상태가 좋아져 달거리가 돌아왔다, 라. 결국 요양이 효과가 있었다는 소리 아닌가.

 

  “이만 나가보게, 수고비는 넉넉히 줄 테니 입을 다무는 것도 잊지 말고.”

  “화, 황공무지할 따름입니다.”

 

 입을 다물라는 건 그래도 관대한 것이었다. 여의는 혹시라도 이 사실을 안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지지는 않을까 염려하며 빠른 걸음으로 별장을 떠났다. 메이블 공작이 준 돈이 어마어마하니 필시 다른 곳으로 멀리 떠나가라는 소리였다.

 

 

 여의가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는 것을 확인한 베르안이 커튼을 치고 비올레타의 곁으로 돌아왔다. 아랫배를 팔로 감싸고 아픔에 이를 악 물고 있던 비올레타는 옆구리로 기어들어오는 아들을 다정하게 껴안았다. 베르안은 그녀가 갑자기 달거리를 시작한 것이 많이 당황스러웠던 것 같았다.

 

  “공저에서……, 시녀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길게 자란 베르안의 앞머리를 본 비올레타는 아이의 머리칼을 다듬을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어딘가 모르게 슬픈 표정을 한 베르안이 제 머리를 쓰다듬는 어머니의 손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저를 낳고서 몸이 안 좋아 지셨다고, 그런 말을 들었어요.”

  “……비안.”

  “사실이죠? 저 때문에 어머니가 불임이 되신 거잖아요!”

 

 도톰한 입술을 악 문 베르안은 울음을 참으려 입안 여린 살을 짓씹었다. 비올레타는 아무 말 없이 침실의 천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무래도 돌아간 후에는 저택의 입들을 한 번 더 단속해야 할 듯싶었다. 감히 공자의 귀에 저런 말이 들어갈 지경으로 입을 놀리다니.

 

 그녀가 답을 하지 않으려 대놓고 외면하자 베르안이 다시 물어왔다.

 

  “제발…… 아무 말이라도 해줘요.”

  “……사실이, 아니란다. 네 출생 탓에 그리 된 것이 아니야.”

  “아니면, 아니면 대체 뭐에요?”

  “너를 가진 지 아홉 달 쯤 지났을 때, 가벼이 승마를 나선 적이 있었다.”

 

 아직도 그 장면이 선연했다. 비올레타가 유독 아끼던 말은 승마를 나선지 십여 분도 되지 않아 입에 거품을 물고 발작했다. 평소의 그녀라면 절대 낙마하지 않았겠지만 임산부로서 몸이 무거웠고 그 결과, 비올레타는 사정없이 땅에 패대기쳐졌다. 뒤따라오던 기사가 몸을 날려 그녀를 안고 굴렀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베르안과 그녀 모두 목숨을 잃을 뻔 했었다.

 

 말의 여물통에 독풀을 집어넣은 범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불미스러운 사건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비올레타가 조사를 하지도 않고 덮기를 명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날 이후로 가문의 시종인 들은 한 번 물갈이가 되었다.

 

  “말이…… 나를 낙마시켰지. 그리고 예정일보다 빠르게 네가 태어난 것이야. 그 과정에서 네 잘못은 하나도 없었단다.”

  “사고였어요?”

  “……사고였어.”

 

 비올레타는 베르안에게 거짓말했다. 그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두 사람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베르안은 그녀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로 낮게 울었고 비올레타는 멍하니 허공에 시선을 두었다. 오래지 않아 그 불편한 침묵을 깨트린 것은 정중한 노크 소리였다. 똑똑, 뒤이어 낮은 목소리가 방에 들기를 허가해 달라 청했다.

 

  “노엘.”

 

 조용히 문을 닫고 침대 곁으로 다가온 그는 웬일인지 두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그 대신 잉크 얼룩이 아주 조그마하게 묻어있었다.

 

  “아침은…… 드시겠습니까?”

  “준비해준다면 들지.”

 

 베르안은 지금까지 그녀가 말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힘에 겨운지, 맥없이 비올레타의 품을 파고들었다. 평소 때라면 노엘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품는 것이 먼저일 텐데 그러지도 않았다.

 

  “아픔을 진정시킬 수 있는 것으로 준비해 오겠습니다.”

  “겨우…… 그 말을 하려 직접 왔나.”

 

 노엘은 뒷짐을 지며 살짝 상체를 숙였다. 그녀의 귓가에 대고 귓속말하는 행동이 은밀했다.

 

  “저를 필요로 하실 듯하여.”

 

 그는 가끔 필요 이상으로 영민했다. 비올레타는 집사의 통찰력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과하게’ 똑똑한 머리를 경계했다. 그래도 노엘이 어머니의 끄나풀이 아니라 그녀의 편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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