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식사 후엔 목욕! 그런데...1
“잘 먹었습니다.”
룰루랄라. 정말 약간의 국물과 양념을 빼곤 반찬이며 찌개, 찜까지 싹싹 다 비워버린 은라였다. 짜지 않냐며 정 실장이 수레 밑에서 보온밥솥(!)을 꺼내 밥을 몇 번이나 더 덜어주었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은라는 간만에 한 포식에, 빵빵한 배에 기분이 좋아서 배부른 고양이처럼 의자에 기대서는 매실차를 홀짝이고 있었고 싹 비워진 그릇들과 밥솥(!!)을 보며 정 실장도 흐뭇하게 매실차를 마셨다.
“잘 드셔주니 만든 사람으로서 아주 보람차네요. 은라님 같은 분만 있으면 우리 주방 식구들이 더 신이 날텐데 말이에요.”
“저야말로요. 이렇게 많이 배부르게 맛있는 걸 먹다니. 이 10첩 반상이 처음으로 죽어서 기쁜 일이었는걸요.”
“어머나. 그 정도에요?”
“그렇다니까요. 진짜 맨날 이렇게 먹으면서 이런 데서 살 수 있음 저승에서 쭉 살고 싶을 정도인데요?”
“오호라. 진심이에요?”
진심이냐고 물으며 번뜩이는 눈빛. 은라는 순간 정 실장님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빛나는 것 같았다. 내가 잘못 본 건가? 꼭 먹잇감을 발견한 포식자처럼 무척 매서운 눈빛이었는데! 그래서 순간 심장이 쪼그라들었던 은라였다. 하지만 이내 온화한 눈빛으로 매실차를 들고 있는 정 실장을 보니 은라는 아, 그게 착각이었구나 싶어 도로 마음이 풀어졌다.
“네. 솔직히, 정 실장님이 아실지 모르겠는데. 제가 내일까지 죽을지 살지를 결정해야 되거든요.”
“아아. 그랬군요.”
“그런데 이게 참 곤란하단 말이죠. 제가 원래대로 살고 싶다고 하면 원래 죽어야하는 아기와 그 부모님 3명이 죽는 셈이 되어 버리거든요.”
“아하.”
“근데 또 제가 이승으로 돌아가도. 제가 고아라서. 집도 없고 돈도 없고 학자금 대출 갚아야할 일만 잔뜩. 하여간 돌아가봐야 외톨이에 빚쟁이인 백수일뿐이란 거죠. 그래서 참 고민이에요. 살고 싶긴 한데, 그렇다고 그렇게 살고 싶진 않으니까.”
“그럼 다시 태어나는 건요?”
“그것도 고민을 했죠. 그런데 그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되는데 어휴. 그건 그것대로 또 힘이 쭉 빠지는 일 같더라구요. 그 험한 세상에 뭐하러 또 태어나서 또 살아가요? 뭐, 금수저 물고 태어난다면 또 모르겠지만.”
“금수저로 태어날 수 있다면요?”
“아, 그렇다면 정말 많이 고민될텐데. 또 그것도 그래요. 왜냐면 그럼 우리 할머니랑 있었던 기억들 다 없어져버리는 거잖아요. 우리 할머니가 제가 성공해서 잘 살길 그렇게 바라셨는데. 제가 다 포기해버리는 거 같아서.”
“은라씨는 참 착하네요. 대부분 사람들은 쉽게 선택하던데.”
“그런가요? 아무튼 그래서 참 고민이에요. 죽느냐, 사느냐. 정말 그것이 문제라니까요.”
“으흠. 은라씨. 제 이야길 해줄게요.”
찻잔을 내려놓고 정 실장이 은라를 마주보며 말했다. 본인의 이야기라니. 진지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 분위기에 은라도 찻잔을 내려놓고 반듯하게 정 실장을 마주 보았다.
“저승의 사람들은 크게 두 종류에요. 저승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 그리고 이승에서 저승으로 온 사람.”
“와, 그렇군요.”
“저승에서 필요한 인재가 이승에 있다면, 그 사람을 데려오는 거지요.”
그렇게 말하면서 정 실장이 싱긋 웃었다.
“지금까지의 유형들과는 다르지만 아마 은라씨도 원한다면 그렇게 저승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저승에서 필요한 능력이 있는 인재라는 걸 입증해낸다면요.”
달그락. 조용히 손을 놀려 그릇에 맞는 뚜껑을 찾아 덮은 뒤 수레로 느긋하게 하나씩 옮겨 담으면서 정 실장은 계속 말했다.
“이번 생의 기억과 인연들을 간직하고 싶고. 원래 죽었어야 할 동명이인을 본래대로 죽게 하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다시 삶을 살기엔 삶의 의욕도 없고. 맞죠?”
“네.”
언제 이렇게 파악당했지? 라는 생각에 살짝 멋쩍어하면서도 은라는 대답했다.
“그렇다면 은라님에게 최적인 건 저승에서 살아가는 것이에요. 죽은 시점부터의 기억과 몸 그대로 옮겨와 저승에서 살고 있는 셈이고 이후로도 쭉 이어질 테니까요. 내일 염라대왕님을 만나면 말씀드려 보세요. 여기서 사는 걸 택해도 괜찮겠느냐고.”
잠자코 정 실장의 이야기를 듣던 은라는 그게 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로 저승에서 한 번 직업을 얻으면 평생직장인 셈이랍니다. 거의 잘릴 일이 없거든요.”
그게 결정적인 한방이었다. 생각해볼수록 그건 꽤나 매력적이었다.
‘어라. 그게 훨씬 더 이득 아닌가? 이제 죽었으니까 또 죽을 일 없지, 취업 걱정할 필요도 없지.’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그래서 은라는 모든 그릇을 수레에 옮긴 뒤 상보를 덮고, 깔았던 테이블보를 차곡차곡 접어 개고 있던 정 실장에게 질문을 했다.
“그런데 제가 저승에서 필요로 할만한 능력이 있을까요? 전 그냥, 한국의 평범한 취업준비생이었는데...... .”
경력도 없고, 대학도 그냥 평범한 인서울 대학. 돈이 아까워서 토익시험이니 자격증이니 이런 것도 딱히 여즉 딴 게 없다. 언론인이 되고 싶단 막연한 꿈이 있어서 텔레비전이나 신문기사, 잡지기사를 보며 시삿거리, 화젯거리는 다 놓치지 않았고 영화며 소설이며 콘텐츠 분야라는 나름 준전문가라 할만큼 많이 봤지만 그게 취업에 도움이 된 적은 없었다. 은라는 이승에서도 쓸모없었던 자신이 저승에서도 과연 쓸모있을까 싶어 걱정스러웠다. 은라의 말을 들으며 테이블보를 접어 정리하고 난 정 실장이 말했다.
“이승과 저승은 달라요. 이승에서 뭐가 어땠든 저승에서는 다를 거에요. 혹시 저승 곳간 이야기 아시나요?”
“아, 알아요!”
저승 곳간 이야기. 그건 할머니가 은라에게 자주 들려주던 옛날 이야기 중 하나였다.
어느 마을에 있던 부자지만 욕심쟁이에 구두쇠였던 원님이 저승에 가게 됐는데 죽을 때가 아닌데 잘못 온 거였다. 하지만 그냥 돌려보낼 수 없다고 저승사자가 저승에 있는 원님의 곳간에서 쌀을 내놓으라고 했는데, 이 저승 곳간이란 게 이승에서 베푼 만큼 쌓이는 거라 생애 베푼 적이 없는 그 원님의 저승 곳간엔 짚 한단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저승사자가 그 동네에 사는 덕진이라는 사람의 곳간에서 쌀을 빌려서 내고 이승에 가서 갚으라고 해서 그렇게 한 뒤 이승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래서 원님은 덕진이라는 사람을 찾아가서 갚으려고 했는데 덕진이 사양하는 바람에 쌀을 갚는 대신 다리를 놓았다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며 할머니는 네가 남에게 주는 것, 잃어버리는 것까지 모두 저승 곳간에는 차곡차곡 쌓이고 염라대왕님이 다 알아서 죽어 저승에 가면 다 보상을 받을 테니 억울해하지도 말고 너무 화내거나 집착하지도 말라고 하셨었다. 다른 아이들이 산타클로스한테 선물을 받고 싶으면 착한 어린이가 되라는 소리를 부모님께 들으며 자랄 때 은라는 할머니에게 저승 이야기를 들으며 착하게 살란 소리를 듣고 컸던 것이다.
“안다니 설명이 쉽겠네요. 그것처럼 저승과 이승은 비슷하면서도 절대 같지 않답니다. 이승에선 빛을 못 봤던 은라님의 재능이 저승에서 발휘될 수도 있는 것이죠. 저는 저승에서 일하면서 그런 사람들을 아주 많이 봤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우와. 알겠어요! 실장님, 고맙습니다.”
“후후, 뭘요. 그럼 잘 쉬세요.”
자신과의 대화로 은라가 기운을 내는 듯 보이자 정 실장은 흡족한 얼굴로 정리를 끝낸 수레를 밀고 문 밖으로 나갔다. 정 실장을 배웅하려 따라서 문 앞까지 갔던 은라는 문득 든 생각에 다급히 정 실장을 불렀다.
“실장님!”
“네?”
“저, 제가 한 가지 더 궁금한 게 있는데요..... . 혹시 저승에선 어디서 씻나요? 방엔 씻는 곳이 없더라구요. 하하.”
은라의 질문에 가던 길을 멈춘 정 실장은 “어머나. 그건 생각 못 했네요. 여기선 너무 당연한 거라.” 라고 하며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여긴 원래 방 안에 씻는 곳이 없어요. 그래서 간단하게 씻을 거라면 직원들이 따뜻한 물이며 수건까지 챙겨서 가져다 주는 문화죠.”
“어, 그런데 그건 너무 늦어서 민폐일 거 같은데요. 아하하. 그냥 씻지 말아야 할까봐요.”
뻘쭘해하는 은라에게 정 실장은 그럴 필요 없어요, 라고 하면서 덧붙였다.
“하지만 은라씨는 피곤하니 이왕 씻는 거 제대로 씻는 게 좋겠지요. 고된 여독을 풀려면 말이에요. 그러니 목욕탕으로 안내하지요.”
“목욕탕이요?”
“네. 이곳의 자랑인 아주 좋은 목욕탕이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