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악한 악적!”
“제... 제발 용서를...!”
“어림없다! 죽음으로 죗값을 치러라!”
“기... 기회를 주신다면... 새 삶을 살겠습니다!”
“누가 속을 줄 알고?”
“소, 소협...!”
“내 손에 죽는 걸 영광으로 알...”
“자, 잠깐만요, 아가씨!”
왕삼은 다급히 손을 치켜들었다. 왕삼의 팔뚝에는 작은 침(鍼)들이 빼곡했다. 침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좀이 쑤시는 걸 참아가며 반 시진(1시간)이나 침을 맞느라, 콧잔등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왕삼의 그런 노력을 알기는 하는지... 진혜미가 잔득 째려보며 외쳤다.
“내 대사에서 끼어들면 어떡해! 거기가 젤 중요한 대목이란 말야!”
휘이잉 -
미풍이 시원한 진금장(眞金莊)의 뒤뜰.
정자에 좌정한 채, 왕삼은 자기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크윽... 암튼, 이놈의 입방정!’
목을 삐끗한 거 같다고 말을 꺼낸 게 화근이었다. 껀수를 그냥 넘길 진혜미가 아니었던 것이다. 왕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리나케 침구를 들고 왔다.
소위 ‘명의(名醫) 놀이’였다.
진금장에서는 다들, 아픈 곳이 있어도 필사적으로 태연한 척을 했다. 실험대상이라도 될까봐, 진혜미 앞에선 걸린 고뿔도 감추는 것이다. 그런데 한 사람. 수다스런 왕삼이 오늘도 어김없이 딱 걸린 것이다. 문제는 진혜미가 명의 흉내뿐만 아니라, 이야기책에도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기자기한 사랑 얘기 따위가 아니라, 도검이 난무하는 무림의 영웅담에.
‘에효...’
왕삼은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됐나,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한편으로 이해 할 구석이 있긴 했다.
진금장의 무남독녀 외동딸이자, 진금상단(眞金商團)의 후계자인 진혜미는... 방년 열아홉. 인근의 동년배 규수들 중에선, 특이할 정도로 혈기 왕성한 그녀였다. 좋아하는 취미는 말 타기와 검술...이지만, 부친의 등쌀에 난초 잎이나 만지작거리며 지내온 터였다.
그러니 부친인 진국보가... 무려 이십여 년 만에 상행에 따라 나선 탓에 집안이 무주공산이 된 요즈음, 얼마나 신이 났겠는가. 더구나 잔소리로는 진금장 내에서 이인자를 자처하는 집사 명청근까지 함께 갔으니... 바야흐로 요 며칠간, 진혜미의 세상이 온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대도... 한 손에 이야기책을 든 채, 매담자(賣談子: 이야기꾼)의 대사를 격앙된 소리로 읽어가면서, 다른 한 손으로 침을 놓는다는 건 너무하지 않는가.
더구나... 진혜미의 연기력은 솔직히 형편없었다. 침 맞는 것보다 무서운 건, 책 읽는 시늉 같은 연기, 소위 족(足)연기를 고스란히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지. 어쩌면 왕삼 콧잔등의 땀방울은 족 연기 탓인지도 몰랐다.
“...대강 이렇습니다요, 아가씨.”
왕삼은 자신의 소장주에게, 그런 의견을 조심스레 피력했다. 물론, 족 연기만 쏙 빼고서.
“그게 왜?”
“네?”
“침 놓는 거랑, 매담극 하는 거랑... 동시에 하는 게 어때서?”
“에 또, 그것이...”
왕삼은 기가 막혔다. 차라리 강짜를 놓는 거라면 모를까. 저 눈빛은 진짜로 모른다는 거였다. 당당하게 나오니까, 오히려 이쪽에서 말문이 막혔다.
“그러니까, 가설라무네...”
환자의 역할은 어디까진가? 위험천만할 수도 있다는 것을 설명해주는 것도 환자가 할 일인가. 아니 그런 걸 떠나서, 누가 이런 엉뚱한 일을 벌인단 말인가?
“알겠다!”
그때 진혜미가 눈빛을 빛내면서 말했다.
“내가 실수라도 할까봐 그러는구나?”
미안해하기는커녕, 그걸 깨달았다는 것만으로 뭔가 뿌듯해 하는 표정의 진혜미였다.
왕삼은 문득, 자신도 헷갈리는 거 같았다. 진혜미와 얘기가 길어질 때면 종종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어쨌거나, 고집불통인 아가씨와 말이 통할 수 있다는 사실만은 일단 다행이었다.
“그... 그렇죠?”
왕삼은 헤벌쭉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곧바로,
“그건 왕삼이 몰라서 그래.”
“네... 넹?”
“책 읽으면서 하면 집중이 더 잘된다구. 무림 얘기라 그런지, 혈 자리도 더 잘 보이고.”
“그런... 억지가...”
“진짜라니까?”
“헤엥...!”
“정말이야!”
억울하다는 듯, 진혜미의 길고 또렷한 봉미(鳳尾)가 꿈틀거렸다.
“나... 못 믿어?”
소장주의 결정적 한마디였다.
물론, 진혜미로서는 뭔가를 의도하는 말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자신을 믿어달라는 것뿐이지만. 그런 직후, 찰나 간의 순간은... 진혜미 자신도 모르는 오묘한 힘이 있었다.
‘헉! 보면 안 돼!’
왕삼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늦었다. 어쩔 수 없이 감았던 눈을 떠야했다.
‘큭! 이미 봐 버렸다, 아가씨의 미소를...’
싱긋!
진혜미가 말없이 미소 짓고 있었다. 그것은 선머슴 뺨치는 그녀로선 좀처럼 볼 수 없는 표정으로...
백만금짜리 미소였다!
순수하고 해맑은 미소는 마치,
‘나, 믿지?’
...라고 물어오는 듯했다.
휘이이잉 -
선선한 봄바람이 산들거리며 불어오는 듯했다. 미풍 속에서, 흩날리는 꽃잎처럼 청명한 진혜미의 음성이, 은은한 꽃향기를 머금고 전해지는 듯했다.
‘흠냐... 여긴 어디? 난... 누구?’
향긋한 꽃 내음에 머리가 멍해지는 착각에 왕삼은 눈을 껌벅였다.
“에? 에에에...”
왕삼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이 순간 때문일 것이다. 진혜미만 모르고 있는 그녀의 별명은...
묵언여신(黙言女神)!
아주 잠시, 입만 다물면 선계의 여신이나 다름없는 그녀였던 것이다.
“후후!”
진혜미가 웃음 짓자, 봉미가 호를 그리며 부드럽게 출렁였다. 그 아래로, 보는 이의 시선을 잡아끄는 호수 같은 눈망울이 일렁였다. 좀 더 아래는, 오뚝한 콧날과 앵두처럼 도톰한 입술이 조화로워 꽃다운 얼굴(花容)이었고. 눈을 뿌린 듯이 보드라운 피부는 한밤중에도 빛을 발할 법했으니, 가히 달의 자태(月態)라 이를 만했다.
화용월태(花容月態: 아름다운 여인)라는 말이 이처럼 잘 어울리는 이가 또 있을까.
하지만, 청순한 용모와는 달리...
“진즉에 그럴 것이지!”
짧은 침묵이 끝났다.
퍼퍽!
진혜미가 웃음을 거둔 얼굴로, 왕삼의 어깨를 툭 쳤다. 마치, 시침(施鍼: 침 치료)중이었다는 것을 까맣게 잊었다는 듯이.
“아이쿠, 아야야!”
“어맛, 미안!”
“아... 아가씨!”
“응?”
“이... 일부러 그랬죠?”
“하! 그럴 리가?”
“히잉!”
투투... 툭!
이번에는 시침 삼연타였다.
“꺄오오!”
왕삼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왜죠? 아까까진 안 아팠었는데... 침 놓으시는 게... 갑자기 아파졌어요!”
“엄살은?”
투투투투툭!
오연타!
“아이고오... 왕삼이 죽네...!”
진금장 뒤뜰에 곡성이 울려 퍼졌다.
“안 죽는다구!”
진혜미가 버럭했다.
이렇듯 입만 열었다 하면, 눈 뜨고 행동했다 하면... 뿔난 망아지에 선머슴이 따로 없는 그녀였다. 참고로, 위의 평은 진혜미라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거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그녀의 부친 진국보의 언급이니... 꽤나 정확하다고 봐야할 것이다.
‘하, 하긴...’
왕삼은 생각했다.
‘혜미 아가씨가... 만약 성격까지 조신했다면...’
그거야말로 불공평한 노릇이 아닐까. 어쩌면 저런 왈가닥 성격이야말로, 하늘의 배려는 아닐는지. 외모부터 성격까지, 모든 게 완벽한 사람이라면, 그야말로 얼마나 재미없고 팍팍하겠는가. 뭐, 그거야 터무니없는 생각이긴 했지만.
어쨌건 진혜미의 미모는 그만큼 대단했고, 또 유명했다. 이곳 청풍현에서는 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 였다.
청풍현 사람들은 믿었다. 진혜미가 집안에 꽁꽁 갇힌 신세가 아니라, 강호에 나가기만 하면... 그녀의 미모에 온 세상이 발칵 뒤집힐 거라고.
하여 청풍현 사람들은 조용한 목소리로... 그녀를 이렇게 칭했다.
강호제일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