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등한시한 밤하늘,
그런 하늘에 홀로 아침을 기다리는 달,
그 모든 것의 아래로, 시끄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칼! 모두 상의를 해봐야 할 것 같아!”
“또 무슨 일이야 그릴?”
“지금 인간들 사이에 커다란 사건이 일어났어.”
“알겠어, 그릴. 곧 갈게.
하지만, 흥분한 네 모습은 어울리지 않는 걸? 하하“
그릴은 심각한 상황과 다르게
칼의 한마디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럼 얼른 와”
쾅 -
평소답지 않게 신경이 곤두 서 있는 그릴,
평소대로의 그릴이라면 침착한 성격에, 문을 소리가 나도록 닫지 않는다.
‘뉴게이트들이 관리하고 있는 이상,
인간들로부터 기원된 사건은 무마되어 버릴 텐데...
혹시, 아이젠 종족과 관련이 있는 걸까?‘
칼은 일어서 겉옷을 걸치고 문고리를 잡는다.
문득, 불길한 예감은 칼의 뇌리를 스쳐지나
문고리를 잡는 그 손가락 끝 언저리까지 실감나게 전해졌다.
‘이런, 설마!’
칼은 그릴의 비정상적인 행동을 유추한 결과
가장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보았다.
그래, 칼이 생각한 그 변수는 아마도 바이올렛일 것이다.
이윽고, 서둘러 발을 옮긴 칼은
드디어 뉴게이트들의 화합장소로 발을 들인다.
“이제 전부 말해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일단 가쁜 숨부터 들이켜 칼.”
“후우....
자, 이제 말해줘.“
눈치를 보던 막내, 전문현은 가장 먼저 입을 연다.
“그게.... 바이올렛이 사고를 친 모양이야.
인간의 뇌를 대량으로 흡수하고 있어.“
?!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가 인간의 뇌를 왜 흡수해?“
다들 눈치만 보고 있는 모양새였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칼,
우리 중에 만족할 수 있을 만한
육체를 얻어낸 것은 너 하나 뿐이야.“
비기의 돌직구는 금방 칼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아무튼, 바이올렛 손에 인간이 흡수되는 과정을 반복한다면
언젠가 우리보다 우월해져 우리의 자리가 위태롭게 변할 수 있어.
칼, 지금은 네가 힘들더라도 옳은 결단을 내려주어야만 해.“
그릴이 현실적으로 충고하자,
칼은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평소에 가장 뛰어난 판단력과 분석을 해오던 그릴,
그의 의심으로부터 좋은 결과만이 반겨주었으니까.
“정말 큰일이네.....”
모두 칼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일은 아니지, 형.”
전문현의 눈치 없는 말장난이 분위기를 새롭게 만들었고,
칼은 냉정한 판단을 내렸다.
“그래, 뉴게이트로서 우리의 권위를 지켜야 할 가치가 있어.
바이올렛에게 뒤지지 않도록 인류를 흡수하는 게 지금은 옳아.“
‘그래야...내가 계속 지도자로 남을 수 있어.
지도자의 위치를 지키지 못한다면,
그땐 내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지 못할지 몰라.‘
칼의 결정이 내려지자, 모두 행동에 옮겼다.
세상에 울려 퍼지는 크고 작은 비명소리들,
핏빛과 회색가루로 물든 거리들은 마치 연옥 같았다.
‘지금은, 내면의 나를 위해서라도 내가 이겨낼 때야.’
지구상의 인류,
그 절반이 애꿎은 죽음을 맞이했다.
회색빛으로 시들어간 붉은 색 장미,
거리의 모습은 정말로 그래보였다.
옥죄는 마음을 한줌의 죄책감으로 풀어내야만 하는 칼,
다른 뉴게이트들에게 어색함을 동조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애써 괜찮은 척 해야만 한다.
거짓된 모습, 바라는 세상을 위해
동료 앞에서 광대 행세를 행해야 하는 지도자 칼.
삐에로의 웃음 속 감춰진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정말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후우 -
칼은 한숨을 깊게 내쉬며,
또다시 속으로 되새긴다.
‘희생을 모면하기 위해, 희생을 저질렀어.
하지만, 그 희생으로 모자랐는지 또 다른 희생을 저질렀지.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붉지 않은 것들은 붉게 물들고,
붉었던 것들은 더 붉어졌으니. 난 이것으로 만족해야 하는가?‘
칼은, 멍청하게 졸고 있는 발을 졸라 걸음을 걸었다.
정원에 피어있는 수많은 꽃들,
하지만 이 붉은 날,
유독 더 붉어 보이는 새빨간 장미 한 송이,
이내 그 장미 한 송이를 꺾어 보인다.
‘장미꽃 향기가 퍼질 때,
하나의 영혼이 안식을 찾는다.
내가 이 날을 잊지 않으마.
언젠가 내가 원하는 세상이 내게 다가온다면,
난 그 세상에 결코 붉은 날을 만들어
인류가 지친 마음을 다독일 수 있는 휴일을 만들어 낼 거야.‘
칼은 아마 과거, 이 시간부터 이미 결심하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만들어 내고 있는 세상에 균형이 잡혔을 때,
‘일요일‘ 이라고 일컬어지는, 달력의 붉은 날을 만들어
이들에게 작은 휴식이라도 쥐어줄 것을.
이 힘든 날을 굳이 기억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칼은 그것이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작은 위로라고 생각했다.
메마른 웃음소리, 허탈한 웃음 그것은 칼의 웃음소리였다.
이 느린 기억들이 그 어떤 것들 보다 빠르게 지나가길 바라며,
아이젠 종족 모두의 죄책감을 혼자 떠 안아버린다.
칼의 고향이자, 칼의 부모인 ‘바다’.
바다 속에 많은 생명을 품고 있는 그 바다,
칼은 엄마인 ‘그녀’의 얼굴보다 심장을 더 닮은 자식인 것이다.
쓸쓸한 마음의 짐을 나눌 수 있는 동료는 없었으나,
언어로라도, 이해하는 척 해주는 동료는 있었다.
전문현은 항상 칼이 힘들 때 남몰래 다가갔다.
“형, 뭐하고 있어”
¨¨¨.
아무런 대답이 없자.
전문현은 한 번 더 칼을 부른다.
“형!”
“아, 너 왔구나.”
“뭐하느라 그렇게 멍을 때려.
또 힘든 생각 하는구나?“
“아니다. 아니야. 걱정해주는 거라면,
역시 너 밖에 없구나.“
“내가 어리고 든든하진 못해도,
우리 중에 형을 가장 생각한다고.“
칼은 아이젠 종족이면서,
어여쁜 말을 뱉는 전문현이 그토록 고마웠다.
“든든하지 못하긴,
너의 뒷태를 본다면 형은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형 고마워!
얼른 힘내, 대장이 이러면 어떡해!“
전문현은 칼에게 변명할 여지조차 주지 않고 빠르게 떠났다.
‘문현아... 너의 그런 태도가
너의 뒷태 보다 난 더 좋단다.‘
칼이 전문현의 응원을 받고 고개를 들자,
풀잎도 똑같이 고개를 들었다.
도대체, 왜 우리는 죄책감이 없게 태어난 것일까......
칼을 제외한 모두가 죄책감이 없으니,
칼의 고독은 유독 심해, 해독이 필요할 만큼 위독했다.
‘어쩌면, 우리는 생명이 영원하기 때문에 죄책감이 없는 것일까?’
칼의 그 직감이 사실이라면,
정말 슬픈 일일지도 모른다.
‘삶은 꿈이며,
영원은 권태를 낳는 악몽이야...‘
칼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들의 무한한 생명이,
결국 죄책감조차 싫증내 버린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