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명, 이…아니, 오빠.
오빠도 아주 알아도 너무 잘 알다시피 난 사투리가 표준어보다 훨씬 편한데, 이 편지가 오빠한테 내가 전하는 마지막 인사가 될 것 같아서 그냥 새삼스럽게 표준어로 한 번 써 봤어. 그러니까 좀 어색해도 이해해 주길 바래.
오빠가 부산에 있는 우리 집까지 와서, 인천까지 죽 가다가 영국에서 에스토니아까지 그 머나먼 길을 간 이유가, 고 유재하 씨의 첫사랑들을 인터뷰하려고 그랬다고 했지? 그 중에서 우리 엄마도 껴 있었고. 그래서 우리 엄마는 그 사람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겠지만, 난 사실 그 음악가에 대해서는 노래만 알지 그 사람이 어땠는지는 잘 몰라. 그렇지만, 지금 내 옆에 그 사람이 있다면 난 그 사람은 ‘아저씨’라고 부르면서 친아빠같이 따랐을 거야. 왜냐하면,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은, 우리 엄마의 자상하고 낭만적인 첫사랑 상대이자 열정이 있고 대인 관계 원만했지만 한편으로는 고뇌에 시달렸던…그런 한 사람의 인간이었거든. 그래서 어쩌면 그 ‘유재하’라는 분이 내 이상형일지도 몰라. 그런데 말이지, 나는 오빠한테서 그 사람의 모습이 가끔씩 보였어. 뭐랄까, 뭔가 진짜 친오빠나 삼촌 같은 모습으로 그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났다고나 할까?
에…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오빠가 나한테 장난칠 때나 그럴 때는 그런 모습이 하나도 안 보였지만, 오빠가 일에 열중할 때, 예를 들어 취재에 몰입하거나 밤중에 노트북을 두드리고 커피를 마셔 가며 피곤한 눈시울을 비비고 있는 모습, 그리고 김 여사를 인터뷰하러 재즈 라운지에 갔을 때 입었던 정장…아,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튼 그런 오빠의 모습이 내 눈에 보였을 때 말이야, 오빠가 굉장히 매력적으로 보였거든.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모습은 내 눈에, 내 콩깍지 수백 장 끼인 것 같은 눈에 아주 잘생긴 연예인이나 모델, 심지어는 그 음악가같이 보였다는 게 내 착각이었다고 하지만, 그 착각은 멍청하지만 달콤하기 그지없는 착각이었지. 그래, 내가 아무래도 오빠에게 반했었나 봐.
하지만 오빠가 내게 그저 수다스러운 여자아이나, 좋은 동료거나, 아는 동생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이 편지를 오빠가 읽고 있을 때는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 테니 이왕 이렇게 된 이상, 나 그냥 오빠를 그 때 그 모습, 마지막으로 보는 그 모습 그대고 내 마음 속에 묻어 두려고.
오빠에 대한 다른 기억은 그냥 물 흐르듯이 내버려 두고, 내가 오빠 이름마저 가물가물할 때가 될 쯤에는 그냥 ‘내가 젊었을 때 그런 사람이 있었지’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그 기억을 나두려고 해. 다른 사람에게 오빠에 대해서 말해야 할 때 내가 어떤 색으로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오빠는 이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모르지만, 다시는 만날 인연이 없을지도 모르는 오빠에 대한 내 솔직한 마음을 오빠도 알아 두었으면 해서 이렇게 털어 놓는다.
정 내 얼굴이 보고 싶을 때면, 롯데 자이언츠 홈 경기를 하는 날이면 텔레비전이나 스마트폰을 켜서 중계를 잘 지켜 봐. 관중석을 찍는 카메라 어딘가에, 갈색 곱슬머리에 어딘지 모르는 익숙한 이목구비를 가진 여자가 리본 모양으로 묶은 주황색 봉지를 머리에 쓰고 목이 터져라 응원하고 있으면 그게 바로 나야. 원한다면 내 얼굴 봤다고, 오랜만이라고 연락 줘도 좋아. 나도 오빠와의, 서진명이라는 한 ‘남자’와의 인연이 이렇게라도 계속될 수 있다면 물론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까.
…사랑한다, 이 문디 자슥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