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나랑 얘기 좀 해요."
그냥 말하면 됐지 왜 속삭이는 건데 무섭게.. 평소에 싸가지 없다고 생각했던 여자가 갑자기 돌변해서 얘기 좀 하자고 속삭이면 어느 누구도 무섭게 느껴질 것이다. 얘기하라고 하자 옆집여자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쾅-하며 위층이 문을 닫는 소리를 내자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저기.. 위층의 재인씨가 여긴 웬일이에요? 혹시 그쪽이랑 아는 사이에요?!"
"..얼핏 아는 사이긴 한데.. 여기 온건 돌려줄게 있어서 그런 거고요."
"얼핏이라도 잘 아는 사이라는 거네요... 혹시 썸은 아니죠?!"
"네?!! 제가 저 남자랑요?!!"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 남자랑 썸이 나겠는가.. 무엇보다 저 남자는 여자를 상대로 썸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전혀 아닌데요. 잘못 보셨습니다."
"그래요?...그럼 다행이고요."
다행이라고?..혹시 이 여자.. 위층 남자한테 관심 있나?
"혹시 윗층 남자 좋아해요?"
"?!!!그런 걸 뭘 그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봐요? 예의없게!!"
"아니..내가 뭐 사랑하냐고 물어본 것도 아니고..그리고 그쪽이.."
예의를 논할 처지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수호는 일단 참았다. 옆집여자는 몇 번 보았던 시니컬한 인상과 다르게 약간 머뭇거리더니 이내 눈을 치켜뜨며 수호에게 경고를 한다.
"집까지 드나들 정도면 친한 사이 같은데 혹시라도 저 남자한테 관심 있으면 얼른 마음 접어요. 재인씨는 내가 찜했으니까."
"......하아?....."
"....뭐에요? 그 표정..내 말이 말 같지도 않다는 거예요?"
"아니요. 좀 어이가 없어서.. 제가 저 남자한테 관심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게이인 걸 뻔히 아는데 웬 관심? 김밥 좀 싸준 게 관심의 표현중 하나라 생각 했나 이 여자? 게이인 걸 몰랐어도 김경복이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시점에서 수호는 저 남자와 적대관계에 더 가까웠다.
"생각해보니 그런 사람한테 잡채니 김밥이니..별걸 다 나눠준 꼴이네.."
"뭐라고 했어요. 방금?"
"아.. 그냥 혼잣말이에요. 암튼 걱정할 필요 없으니 안심해요. 내가 저 남자한테 관심 가질 일은 죽어도 없으니까."
"...."
여자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수호의 의중을 잠시 파악하더니 이내 위아래로 흘깃 쳐다보고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니 다행이네요. 분수에 맞게 욕심 부리지 않는 사람 같아서 안심했어요."
"....분수요?"
무슨 말을 그따위로 해?! 역시 한번 싸가지는 영원한 싸가지었다. 수호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기에 뭔가 싶었는데 저 여자에게 평가 당한 거라 생각하자 분노에 얼굴이 서서히 붉어졌다. 뭐? 분수에 맞다고? 내가 어때서?!! 그리고 저런 남자가 뭐가 대단하다고 노리면 욕심부리는 사람이 되는 건데?! 재인과 이런 식으로 비교되는 치욕을 두 번이나 겪다보니 노이로제가 올 지경이었다. 이웃 간의 트러블이 생길까봐 아침부터 참았건만 더는 못 참겠다는 생각이 들어 화를 내려던 순간 옆집 여자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수호의 손을 잡더니 도움을 요청한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저 좀 도와줄 수 있어요?"
"....뭐라고요..?"
방금 댁한테 화내려던 사람에게 도움이라니.. 손만 덥석 잡지 않았더라면 지랄이 뭔지 제대로 보여줬을 것이다.
"아니.. 위층이랑 친해보이니까 왕래하면서 저도 좀 같이 친해지고 하면...아 그러니까! 위층 남자랑 잘되게 도와달라고요! 척 하면 알아들어야지."
정말 제멋대로일세 이 여자.. 화가ㅍ나서 그냥 거절할까 하다가 순간 음습한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둘이 잘 될 일도 없는데 한번 엮어나 줄까? 위층남자도 한 성격 하니까 옆집여자를 만나서 싸가지 없게 굴어준다면 수호의 속도 시원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 나쁘지 않네요. 좋아요. 도와줄게요."
"진짜요?! 고마워요. 아.. 제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성시아라고 해요. 패션회사쪽에서 일하고 있죠."
"아.. 저는 진수호라고 합니다. 보건선생님이에요."
"수호씨라고 부를게요. 그럼 우리 연락처 공유하죠."
"...."
원하지 않는 연락처가 생겼다. 그래도 윗집 싸가지 남자가 아랫집 싸가지 여자에게 섭섭지 않는 복수를 해준다는 큰 그림을 그려본다면 이 연락처는 당분간 갖고 있을만 했다. 흐흐...
그 시각 수호가 음습한 웃음을 흘리고 있을 때, 집으로 올라간 재인은 갓 만들어서 뜨끈한 은박지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였다. 김밥.. 생각해보니 어릴 때 이후로 먹어본 기억이 없었다. 젓가락을 가져와 김밥 하나를 집었는데 맛이 옛날 기억과는 많이 달랐다.
"양념갈비 같은데.. 무슨 맛이 이렇게 특이하냐?"
단무지는 확실히 아닌데 아삭하게 씹히는 식감이 갈비맛과 잘 어우러졌다.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확인한다는 명목으로 계속 맛보다가 어느새 싸준 김밥을 다 먹어버렸다. 두 줄이나 먹었는데도 아쉬운 느낌이 남았는지 젓가락을 쉬이 내려놓지 못하다가 거실에 쌓여있던 서류를 확인하고는 미련을 접는 재인이었다.
"이야~ 아침에 수업 없으니까 좋네. 수호가 이런 것도 챙겨주고.."
아침에 다인의 도시락을 싸고 남은 김밥을 혜원에게 건네자 마침 출출했다며 식탐을 보이고 있었다.
"많이 먹어라. 어제 저녁부터 만들어 먹었는데도 재료가 집에 많이 남았다."
"김밥은 재료 만들면 딸랑 한 두개 만드는 게 아니니까.. 덕분에 내 입이 호강하네~ 근데 햄이 아니라 양념갈비를 넣네? 맛 특이하다. 엄청 맛있어."
"다인이가 입맛이 진짜 깐깐하거든. 어린 게 토종 한국입맛이라 햄 같은 거보다 갈비를 더 좋아해."
"조카가 상전이네.. 그래서? 오늘 조카 소풍준비 잘 해줬어?"
"어.. 오빠가 아니라 완전 원수지.. 이런 행사 있으면 미리 말해주지 좀.. 하루 전날 알아서 부랴부랴 도시락이며 준비물이며 준비했잖아."
"대단하다. 난 출근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넌 정말 훌륭한 엄마가 될거다."
"그런 칭찬은 결혼 하고 난 이후에 말해줄래?"
-똑똑
보건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당골인 민혁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평소에 뺀질거리던 모습이 아닌 다리를 다쳤는지 절쭉거리며 걸어오는 것이었다.
"다리 왜 그래?"
"농구하다가 다쳤어요. 약 좀 주세요."
운동복 바지를 걷으니 상처가 난게 보였고 수호는 살짝 인상을 쓰며 말했다.
"피 많이 나네.. 넘어지기라도 한 거냐?"
"네.."
"다행히 꾀맬 정도까진 아니네. 소독하고 연고 잘 바르면 괜찮을 거야."
옆에서 지켜보던 혜원은 김밥을 씹으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쯧쯧.. 요즘 수면도 부족하다는 놈이 웬 농구? 그러니까 다치지.. 진짜 당골손님이네."
"나만 여기 당골손님인가?"
"암튼 몸 좀 잘 챙겨라. 너 혼자 산다고 이모가 얼마나 걱정인데..."
"...."
응? 이모?
"이모라니? 둘이 잘 아는 사이였어?"
"응? 말 안했나..? 우리 막내이모 아들이거든. 내 친척동생이야."
"뭐?!!!!!"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당연하지! 둘이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어서 더 놀랐네. 어떻게 그렇게 티를 안 낼 수가 있냐?"
"내가 원래 무덤덤하잖아."
"왜 그동안 사촌인건 말 안했어?!"
"아.. 사촌인거 알게 되면 괜히 편애한다고 생각 할 수도 있고 학교생활 불편 할 수도 있어서 서로 말 안 한 거뿐이지 굳이 숨기려고 한건 없었는데.."
".......그래?..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
수호의 빠른 수긍력에 혜원은 잠깐 기가 막혀 웃다가 상처를 치료받는 민혁에게 다시 눈길을 돌린다.
"근데 너 곡 작업은 거의 다 끝난 거야? 작업 시작하면 다른데 눈길한번 안 돌리잖아. 농구 할 여유도 있어?"
"곡은 다 만들어졌어. 이제 가사랑 신경 쓰면 돼."
"에휴.. 한숨 돌리던 차에 다친 거구만.. 그래. 그럼 치료 받고 가. 난 이만 올라갈게."
혜원이 나가자 눈으로 대충 인사를 보내고 수호는 상처를 닦아낸 후 소독약을 꺼내들었다. 딱 봐도 아파보이는 상처부위에 소독약이 닿자 민혁의 몸이 살짝 흠짓거렸다.
"아..! 쌤 따가운데요.."
"안 따가운 소독약 있냐 그럼? 조금만 참아. 이래야 상처가 안 남아요."
"네..."
"그나저나 이선생이랑 친척사이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긴.. 이선생이 음악선생이고 친척관계니까 네 작곡에 도움도 많이 줄 수 있었겠네..."
"그렇게 도움 준 적은 없어요. 그냥 친척들 중에 유일하게 저 음악하는 거 지지해주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음악실 장소 제공정도의 도움은 주고 있죠."
"그 정도면 많은 도움 주는 거네. 장소 제공이 얼마나 중요한데.. 작업실을 빌려준거나 마찬가지잖아. 흠.. 생각해보면 나랑 이선생님이 네 후원자 같은 거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선생은 이선생대로 작업실 빌려주고 있고 나는 나대로 숙박실 빌려주는 거잖아. 그러니 후원자나 마찬가지지."
본인 입으로 보건실을 숙박실로 인정한 셈이다. 상처에 밴드까지 붙이고 나자 수호는 흐뭇하다는 미소를 지어보였고 그 표정을 본 민혁은 약간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저 다친 게 기분 좋으세요? 표정 되게 좋아 보이시네요.."
"네가 잠자러 오는 게 아니라 본래의 목적으로 이곳에 들린 게 뿌듯해서 좀 웃었다. 아! 맞다.. 난 이런 일을 하러 온 사람이었지? 하는 자각을 일깨워줬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장난처럼 웃으며 킥킥대는 수호의 표정이 정말 기분 좋아 보이자 민혁도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자신이 계속 이곳에 자러 오던 게 그렇게 못 마땅했나?
"그렇게 기분 좋으시면 앞으로 좀 다쳐서 올까 봐요."
"얼씨구? 됐네요! 내가 무슨 사디스트인줄 아냐? 아픈 사람 보면 기분 좋게? 그런 식으로 일거리 늘어봤자 좋지도 않네요."
"크큭. 그냥 농담 해봤어요."
수호는 싱거운 놈이라며 혀를 찼다. 하지만 늘 나이답지 않게 피곤하고 어른스러워보이던 녀석이 이제야 제 나이또래처럼 비춰져 수호도 내심 좋아 보인다 생각했다. 저렇게도 농담을 할 줄 아는 녀석이었구나.. 그 작곡이라는 게 완성되어서 기분 좋아 저러나? 나중에 한번 들려달라고 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