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북방한계선 노예촌
이튿날 아침. 화염에 휩싸였던 콘웰의 요새는 재만 남고 다 까맣게 타버렸다. 살육은 남작령 병사들이 모두 쓰러질 때까지 계속 됐다. 서로 죽고 죽이는 혈투로 인한 사상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속히 본국으로 돌아간다.”
자이칼 자작의 말에 아직 약탈이 덜 끝난 병사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헬베로크 제국군은 잿더미만 남은 콘웰 성에서 전사자들의 병장기들을 회수하고 있었다. 두 명의 병사들이 베일리프의 갑옷을 벗겨냈다.
“이동한다!”
헬베로크군이 대열을 맞춰 행군했다. 바닥에 떨어진 콘웰의 깃발과 영주의 문장이 바닥에 널브러진 상태로 지나가는 병사들에게 짓밟혔다.
흑마를 탄 자작은 대열의 가장 선두에서 팔짱을 끼고 길을 나섰다. 그 뒤로는 수천에 달하는 병사들이 줄을 지어 이동하고 있었고 약탈 과정에서 사로잡은 포로나 인질들을 실은 수레가 뒤따랐다.
파에리스 사막. 뜨거운 뙤약볕이 무더운 열기를 더했다. 헬베로크 제국군은 미처 피난하지 못한 영지민들을 사로잡는 반면 아스트리아 포로들을 본국으로 압송하고 있었고 그중에는 콘웰 요새의 결사대도 자리하고 있었다.
털썩.
압송 대열을 따라 이동하던 포로 한 명이 쓰러졌다. 탈수와 탈진으로 의식을 잃은 것이었다.
그러나 헬베로크 제국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길을 재촉했다.
그럴 것이 귀족 작위를 가진 고위급 포로가 아닌 이상 군 전체의 행군을 늦출 수 없는데다 인력을 낭비할 수 없었기에 대열에서 낙오되는 자들은 과감히 버리고 가는 것이 통상적인 관례였다.
제국군은 카엘과 콘웰의 군관들을 회유했다. 그러나 기대한 반응을 얻지 못하자 군노로써 포로로 압송했다.
헬베로크 제국으로 압송되고 있는 아스트리아의 전쟁 포로들은 모든 병장기를 빼앗기고 심지어 맨발로 푹 찌는 모레 위를 걸었다.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발목까지 잠기는 깊이였지만, 이동은 꾸준했다. 지속적인 속도에 맞추지 못하거나 낙오되는 자들은 가차 없이 채찍이 날아들었다.
압송 행렬의 가장 후미에 너덜해진 흑의가 시야에 들어왔다. 채찍이 지나간 자리는 살점이 터지고 뜯겨져 채 딱지가 지지도 않고 피가 흐르고 있는 중이었다.
헬베로크 병사 한 명이 이유도 없이 채찍질을 해댔다. 이번에는 흑의인의 측면을 파고들었다. 해진 옷을 사이로 단련된 몸이 일제히 드러났다. 그는 살이 찢기는 고통에도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참고 있었다.
카엘은 충분히 뒤처지지 않고 걸을 수 있음에도 자처해서 후미에서 대열을 따랐다. 포로들은 그가 일부러 채찍을 맞고 있는 것을 알았다. 보통 한 번 가격당하고 나면 걸음이 빨라지기 마련인데 그러지 않았다.
"서둘러 움직여라!"
헬베로크 병사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채찍을 휘둘렀다. 사슬 줄이 묶인 가죽은 다시 한 번 살점을 헤집어놓았다.
*
헬체이스는 제국 헬베로크의 최남단에 위치한 요새이자 상업용 대도시이다. 대륙 각국의 상인들을 만날 수 있고, 온갖 물건을 구할 수 있으며, 모든 걸 경험할 수 있는 환락의 천국이라고 알려진 곳이었다.
그러나 헬체이스 요새 내부에는 상류층들이 대거 몰려 있기 때문에 평범한 제국민들은 요새 주위에 마을을 형성했다.
헬체이스 남서쪽에 위치한 브란트 마을. 그곳은 대륙인들에게 북방한계선 노예촌이란 이름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헬베로크 제국이 정복 전쟁 과정에서 사로잡은 대륙 각지의 나라 사람들이 노예로 끌려와 거래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국군은 통곡의 벽이라 불리는 거대 장벽을 지나 헬체이스 지역의 남서쪽 마을 브란트로 접어들고 있었다.
“멈춰라.”
헬베로크 제국령으로 진입한 뒤 두 번째 검문이었다.
보초장은 귀족 작위를 확인 후 예를 갖췄다. 이곳만 벗어나면 검문 없는 구간이 이어진다. 원래대로라면 영토 내에서 군대의 이동이 불가능하게 되어 있었지만, 자이칼 자작은 남부의 대제후로부터 전쟁과 약탈을 허가받고 그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얼마간을 상납하는 대가로 말이다. 그런 만큼 남부의 병사들이 자이칼 영지군을 막아설 이유는 없었다.
자이칼 자작은 곧장 영지로 향했다. 상당기간 성을 비워두었기에 먼저 본군을 이끌고 떠난 것이었다.
“우리도 서둘러 일을 마치고 본 영지로 돌아가도록 한다.”
콜튼은 휘하 병사들과 함께 브란트 마을로 들어갔다. 전쟁 중 사로잡은 포로들을 노예로 팔기 위함이었다.
사로잡은 포로의 수는 족히 오백여 명을 웃돌고 있었다.
자이칼 자작령의 깃발을 알아본 노예상들이 일거에 모여들었다. 이번에는 어떤 나라 사람들이 노예로 잡혀왔는지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과 예리한 눈으로 상품의 가치오 품질을 살피는 상인 등으로 뒤섞여 광장은 많은 인파를 이루었다.
“이번에는 꽤나 쓸 만한 노예들이 많이 들어왔군.”
노예들의 목과 손 그리고 양 발목에는 쇠고랑이 채워져 있었고, 파에리스 사막과 카논 산맥을 지나오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충분한 수분과 수면을 취하지 못했기에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에 오는 노예들 대부분이 비슷한 상태여서 그런지 이를 문제 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콜튼은 브란트 마을 목책 내 광장의 중심부에 자리한 자이칼 자작령 직영 거래소 철장에 사로잡은 노예들을 모두 가두었다. 거기까지가 그가 자작에게 부여받은 임무의 마지막 단계였다.
자작령 기사의 등장에 영지를 위해 일하는 노예상들이 마중 나와 예를 갖추었다. 수고비 또한 두둑이 챙겨 넣었다. 주머니를 확인한 콜튼은 기분이 좋아진 모양인지 선심 쓰듯 말했다.
“이놈들은 군노이다. 매우 사나운 놈들이니 각별히 신경 써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가 가리킨 철창 안에는 아스트리아 제국 콘웰 영지에서 사로잡은 노예들이 자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