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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이제는 지나간 것들에게
작가 : 은호
작품등록일 : 2017.10.28

"엄마의 새 남편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이름과
이제는 식어버린 이름
가까이 있어도 이해하지 못 했던 이름들에게 보내는 이야기

 
2부_1회
작성일 : 17-11-24 16:58     조회 : 225     추천 : 0     분량 : 9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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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한적한 도로를 달리는 버스 창문밖엔 눈 쌓인 풍경이 가득했다. 사람이 몇 없는 차 안에 덜컹거리는 소리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해가 져버린 직후의 차가운 푸른빛이 차내를 물들이고 있었다. 그에 아주 잠식당할 참에 버스 천장의 형광등이 켜진다. 차 안이 환해지자 창밖의 세상만 짙은 파랑에 잠겨버렸다. 이따금씩 하차 벨 소리가 찡하게 정적을 뚫으며, 뒷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찬 공기가 발목을 스쳤다. 3주째, 이 시간에 이 길을 달리는 일이 좋다.

  방학 중에 집에만 있고 싶지는 않아서 파주에 있는 도예 공방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힘들게 자리를 얻은 거라 감사히 여기고 있었지만 결코 집에서 가까운 거리는 아니니까, 엄마나 언니는 뭣하러 그 거리를 다니느냐고 물었지만 글쎄.

  한참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을 때에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패딩 주머니에서 꺼내 발신자를 본다. ‘신우진’. 그의 이름을 볼 때, 혹은 허공에 대고 그의 이름을 부를 때. 묘한 열기가 가슴과 어깨에 퍼지고 목 언저리에서 아지랑이가 피는 느낌이 든다. 그를 향해 부를 수는 없었던, 그 이름을 혼자서 작은 소리로 발음해 본다. 신우진.

  초록색 수신 아이콘을 밀어내고 귓가에 핸드폰을 댄다. “네.”

 그러면 저 너머에선 찰나의 고요함,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나에게 말을 건다.

  “끝났어?”

  “네, 버스 타고 가고 있어요.”

  “집으로 바로 가나?”

  “어떻게 할까요?”

 이미 마음을 정했으면서, 웃음을 섞어서 나보다 한참 나이 많은 아저씨를 떠본다.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기대서, 정해져 있는 그의 답을 기다린다.

  “여기 따뜻해.”

  “곧 봬요.”

  전화를 끊고 들여다 본 핸드폰 화면에 ‘00:27’의 시간이 깜박인다. 통화 내역으로 들어가면 줄줄이 나열된 그의 이름, 그 옆엔 항상 1분을 넘기지 못하는 통화시간이 기록되어 있다.

  자조하면서도 이 걸음을 멈출 수가 없다.

  공방에서 집으로 가는 길 사이에, 그가 있다. 이것이 구태여 길에서 세 시간 정도를 버려가면서 까지 아르바이트를 해야 할 이유다.

  시골길 같은 1차선 도로를 벗어나면 하나 둘 상가 건물이 보이며 시내가 나타나고. 조금만 더 가면 신도시와 출판 단지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사람이 없는 정류장에서 나는 내렸고, 버스는 엔진 소리를 내며 멀어져 갔다. 따뜻한 차에 있다가 갑자기 찬바람이 부는 거리에 서자 옷 사이로 냉기가 스미고 소름이 돋았다. 2월이 되어서야 들이닥친 이 한파는 아주 기록적인 것이라고 한다. 어쨌든 잠시만 걸으면 되니까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얼굴이 발갛게 얼을 무렵 하얀 외벽으로 둘러싸인 오피스텔 건물이 나타났다.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눌러 자동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바람소리가 그친 조용한 건물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 문 앞에 서서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려, 얼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내자 정전기가 일어 뺨과 옷에 달라붙었다.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간다. 그를 만나러 가는 일상적이면서도 낯선 길.

  507호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면 신발장과 짧은 복도, 작은 원룸형의 방, 그리고 바로 정면에, 책상 앞에 앉은 그의 등이 보인다. 책상 너머 전면 유리창으로 보이는 바깥세상은 짙고 무거운 푸른색에 잠겼고 그것을 배경으로 따뜻한 공기 속에서 그는 나를 돌아보는 것이다.

  “왔어?”

 이곳은 그가 원래부터 쓰던 작업실이라고 했다. 여기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은, 대략 2주 전의 일이다.

 

 

 

  “불륜은 문화라든가 그런 소리는 하지도 말아요!”

  테이블에 있던 잔이 엎어졌다. 가슴이 철렁했다.

  엄마가 올해의 출판인상을 받은 날이었다. 가족 모두가 행사장에 가야 한다고 엄마가 주장하는 바람에 그는 물론, 나와 언니도 북적거리는 행사장 테이블에 끼어 앉아 있어야 했다. 시상이 끝나고 경품추첨이니 특별공연이니 하는 식순이 마무리 된 후, 여기저기 인사를 돌리고 온 엄마는 테이블 옆자리에 앉은 중년의 남자와 줄곧 와인을 부으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는데, 어째 술이 많이 들어간다 싶어 걱정스럽던 찰나, 엄마가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무슨 내용의 대화를 하고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엄마가 갑자기 큰 소리를 내는 것도 이례적이거니와 이런 자리에서 ‘불륜’이란 단어가 나오는 것도 사람들을 놀래키기에 충분했다. 더군다나 흥분한 엄마가 손등으로 유리잔을 건드리는 바람에 담겨있던 물이 테이블 밑으로 와락 쏟아졌다. 다행히 잔은 깨지지 않았지만 옆자리 남자에게 물이 튄 모양이었다. 순간적으로 엄마가 앉은 테이블과 언니와 내가 있던 테이블을 비롯한 주변 모든 곳이 조용해졌고. 언니는 엄마를 끌어내야겠다는 생각이라도 했는지 의자에서 일어서서 주변 눈치를 봤다. 엄마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불그스름하게 취기가 오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눈썹을 찌푸렸다.

  저런 말이 왜 나와? 심장이 쿵쾅거리고 손이 떨려 주먹을 그러쥐었다.

  그렇게 눈을 어디 둬야할지 몰라 어물어물하다가 그만 엄마랑 눈이 마주쳤다. 내 눈은 흔들렸고 엄마는 이내 나를 무시했다. 곤혹스러운 얼굴로 옆 남자에게 사과를 하고 어깨를 두드리고 냅킨을 찾는 둥 부산스럽다. 언니가 누군가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어디선가 그가 나타났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가와서 엄마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깨끗한 냅킨을 찾아 옆에 있는 남자에게 건넸다.

  “죄송합니다. 대표님이 술이 좀 약한 편이라.”

  “아냐, 아냐. 괜찮아. 진숙 씨가 오늘 기분이 업 됐나 보구먼. 상도 받은 데다, 이렇게 남편도 옆에 있고.”

 냅킨을 받은 남자가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그를 가리켰다. 지금 보니 저쪽도 엄마 못지않게 술이 많이 들어간 모양이다.

  “옷 많이 젖었습니까?”

  “전혀, 전혀. 역시 아직 한창 때야. 아주 좋아.”

 남자는 주책맞게 웃으며 신우진 씨의 팔을 툭툭 쳤다. 그는 묘한 미소로 답한다. 바람 좀 쐬고 올래요? 그가 엄마에게 물었고 엄마는 그래야겠다며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사방은 다시금 북적이기 시작했고, 그 테이블을 향한 관심도 모두 떠나갔다.

  “올해는 와인이 괜찮은데?”

 엄마가 떠나자 대화 상대를 잃은 남자는 바로 반대편 옆자리에 있던 사람에게 건배를 청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조수석에 앉은 엄마는 머리가 아픈지 줄곧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운전대를 잡은 그가 이따금씩 눈을 돌려 엄마를 살피는 것이 백미러에 비쳐 보였다.

  “누가 보면 운전사가 필요해서 같이 온 줄 알겠어.”

 엄마가 작게 중얼거렸고, 불평하듯 내뱉었지만 내심 흡족한 것 같기도 하다.

  “훌륭한 운전사죠.”

 그가 농담하자 엄마는 흠-하고 웃으며 그건 그렇다고 맞장구쳤다.

  뒷좌석에 함께 앉은 언니는 아침부터 학원 수업을 하고 오느라 피곤했는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아까 엄마의 반응이 마음에 걸렸고. 들킨 건 아니리라 짐작하면서도 눈치가 보여 잠자코 있었다.

  “정말 한심해 죽겠어….”

 히터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차 안에서는 엄마가 혼잣말 하는 소리도 크게 들렸다. 교차로에서 신호에 걸리자 그는 브레이크를 걸어 놓고 엄마를 봤다.

  “오피스 와이프라느니 원조교제라느니 그런 소재가 흥행의 키워드인 냥 쉽게 생각하는 거 좋지 않다고요. 적어도 난 그래요. 일단 사람들이 한 번 더 들여다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건…그건 사실이라고 쳐도 너무 쉽게들 생각해…. 그게 사실이란 점도 좀 우습고….”

 마치 잠꼬대처럼 느릿느릿 이어지는 단어들이 내 가슴을 쿡쿡 찔렀다. 행사장에서 엄마가 소리를 지르기까지 나눴던 대화의 주제가 그것이었을까.

  “너무 쉽지….”

 밤길이라 잘 보이지 않지만 창밖의 사이드 미러에 비친 엄마는 얼굴을 창문으로 향하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가만히 보다가 손을 뻗어 엄마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슬쩍 정리해주었다. 신호가 바뀌자 다시 브레이크를 풀고 운전대를 잡는다.

  기분이 이상했다.

 

 

 

  차에서 내리면서부터 엄마는 그의 부축을 받아 집으로 들어갔다. 인사불성이 된 것도 아니고 걸음도 똑바르지만 불그스름한 얼굴은 분명히 취해 있었다.

  마지막에 들어온 언니가 알짱대는 금동이를 들어서 안고 하품을 길게 했다.

  “고생하셨습니다아- 저는 먼저 들어갈 게요- 가자 야옹아.”

 말끝을 길게 늘이며 언니가 방으로 들어갔고 나도 2층으로 올라가려 천천히 움직였다.

  “들어가서 좀 누워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물 떠다 줄까요?”

 뒤돌아서 듣는 그의 말은 다정했다.

  “아니 잠깐만. 가지 말아 봐요. 할 얘기 있으니까.”

  “얘기 할 정신은 있어요?”

  “내가 누군데, 그럼.”

 이 야밤에 할 이야기라니. 여러 가지로 뜨끔한 나는 뒤를 돌아보았고, 그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매달린 채 나와 눈이 마주친 엄마는 그저 수고했다며 올라가서 쉬라고 할 뿐이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와 엄마가 방에 함께 들어갔고 문은 닫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 방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자리에 누운 지는 한참 되었는데 도저히 잘 수가 없었다. 뭔가 중요한 걸 잃어버린, 또는 싸움에서 할 말을 다 못 하고 온 사람처럼. 누워서 뒤척이는 것마저 답답하게 느껴지고. 결국 새벽이 거의 다 되어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을 보면, 잠깐 손끝에라도 그가 닿으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다. 침대를 빠져나오고 조심스레 차가운 복도를 지나 그의 방문을 열었지만.

  하지만, 그곳에 간 이유조차 기억나지 않게 멍해져 버렸다.

  그가 있어야 할 침대는 구겨진 곳 하나 없이 깨끗하고 방은 차갑게 비어 있었다.

  텅 빈 어둠 속을 뚫어져라 바라보느라고 눈이 아프고 시야 안에 검은 점들이 몰려들었다.

  눈을 감자 헛웃음이 나왔다.

  그의 침대에 혼자 누웠다. 실수로 이 방에 들어와, 자는 척을 했던 내게 그가 처음 입을 맞췄던 그날처럼.

  갑자기 눈가가 뜨거워져 나는 팔에 얼굴을 묻고 몸을 웅크렸다.

 

 

 

 

 

 

  “아.”

  그렇게 갑작스러운 기상은 처음이었다. 얼굴에 따사로운 볕이 느껴져 서서히 잠이 깨어가던 찰나, 무언가가 내 몸을 건드렸고 간밤에 그의 방에 들어와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는 걸 자각하자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났다. 언니나 엄마가 방에 와 있나 싶어서.

  하지만 건드렸던 손을 치켜들고 나를 내려다보는 건 신우진 씨였다.

  “잘 잤나?”

 다정하게 미소 짓는 그 얼굴을 보자 긴장이 풀려 다시 누웠다. 갑자기 일어난 탓에 눈앞이 컴컴해지고 심장이 요동치며 어지러웠다. 눈을 감아도 햇빛이 새어 들어와 팔로 얼굴을 가렸다.

  “어지러워?”

 그는 내 다리에 손을 올리고,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너무 말라서 그런가 보다-라며 전에 없이 다정한 말투로 중얼거리고 허벅지를 쓰다듬는다.

  그래서 화가 났다.

  다시 벌떡 일어난 내 앞에 있는 건 의아한 얼굴. 이 남자는 간밤에 어디 있다가 나타나선 태연하게 내 몸을 만지나.

  그의 손을 쳐내고 침대에서 뛰쳐나와 문 앞에 섰다. 문을 열며 돌아본 당혹스러운 얼굴을 남겨둔 채 그곳을 나왔다.

  샤워기 밑에 서서 물을 맞는 내내 불쾌한 것이 자꾸만 떠올라서 손으로 몸을 문지르고 물줄기 속에서 숨을 참았다. [화양연화] 생각이 났다. 욕조에 웅크려 물줄기에 흐느낌을 숨기던 양조위의 아내. 그러나 나는 그들 중, 누구와도 같지 않다. 아내도 연인도 아닌. 아무것도.

  돌아왔을 때 그가 내 방에 있었다.

  “이렇게 들어와 계셔도 되는 거예요?”

  “다들 나갔어.”

  “오늘은, 안 바쁘세요?”

  “무슨 일 있었나?”

  “아니에요.”

 그를 등지고 화장대 앞에 앉아 젖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수건으로 물기를 털어냈다. 거울에 그가 나를 보는 모습이 비쳤고 내가 머리를 다 말릴 때까지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해줬으면.

  “저 괜찮으니까 일 하세요.”

  “괜찮은데 이렇게 찬바람이 부나.”

  “겨울이잖아요?”

 내가 생각해도 재미없는 말을 던지고. 그가 지켜보는 것도 아랑곳 않고 옷을 벗고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주말인데 공방에 가느냐고 물어서 남자친구를 만난다고 했다.

  말문을 닫은 나를 보고는 잠자코 밖으로 나가는 그. 잠시 뒤에 나도 집을 나섰다.

  그래서, 그 날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너 제정신이니?”

  아침이 돼서야 당당하게 나타난 나. 엄마는 역시나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이 시간에 엄마가 집에 있을 줄은 몰랐는데.

  “너 때문에 출근도 못 하고 있었잖니. 여자애가 연락도 없이 어디 외박을 해? 핸드폰은 왜 꺼놨어? 하다못해 문자라도 남겨야 될 거 아냐.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보시지? 얘, 듣고 있니? 사람 걱정은 있는 대로 시켜놓고 뭐하는 거야? 어머 진짜로 정신 나갔나 봐.”

 그렇구나, 걱정이 돼서 출근도 안 하고 현관에서 나를 맞닥뜨려서 이렇게…. 평소 같으면 뭐라고 말대답이라도 했을 것인데, 나는 입을 다물었고 엄마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내 시선은 엄마 뒤에 서 있는 그에게 있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이 나를 더 침묵하게 했고, 엄마가 혼자 화를 못 이겨서 소리치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니 이건 뭐 송장이 돼서 들어왔어. 자기! 당신도 뭐라고 좀 해요! 이게 당신 둘째 딸인데, 지금 부모한테 태도가 이게 뭔지!”

 그 말이 가슴을 관통하고 그 구멍으로 바람 부는 소리가 났다.

  “…있다가 잠깐 얘기하자.”

  “네.”

  “어머 뭐야. 이쪽에는 왜 또 이렇게 고분고분해? 암튼 너는 저녁에 너희 언니한테도 혼이 나 봐야 해. 하나가 오늘 단단히 벼르고 출근한 거 아니? 나도 늦어서 출근은 하는데, 너 당분간 외출 금지야!”

 

  엄마가 회사로 가버린 뒤, 나는 곧장 방으로 올라와서 옷을 벗고 침대로 들어갔다. 저 정도 화난 엄마한테 혼나는 일은 그렇게 타격이 크지 않지만 피곤하다. 누워서 핸드폰을 만지고 있으려니 문간에 그가 나타났다.

  “잠깐 드라이브라도 할까?”

 방에는 들어오지 않고 하는 말에 쳐다보니 그는 무표정하게 밑에서 기다리겠다-며 자리를 떴다. 그걸 보다가 어쩔 수 없이 일어나서 다시 외출복을 입었다.

 

  차는 거의 신호에 걸리지 않고 달렸다. 구파발을 지났고 송추 어디쯤인 것 같았다. 차는 한 대도 없었다. 이따금씩 커다란 화물차가 굉음을 내며 나타났다가 사라질 뿐이었다.

  그때까지도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고, 나도 창틀에 팔꿈치를 대고 손으로 턱을 괸 채 창밖만 보고 있었다. 출발하면서 틀었던 라디오에서 분위기에 안 맞는 경쾌한 댄스곡이 흘러나왔고 그가 오디오를 꺼버렸다.

  “왜 그런 거야?”

  “진짜 아빠 노릇이라도 하게요?”

  “꾸짖는 게 아냐.”

  “학기 중도 아니고. 그 정도 자유는 있잖아요.”

 거칠게 돌린 핸들에 차가 급히 방향을 틀었고 그 바람에 턱을 괴었던 팔이 저절로 풀렸다. 차는 갓길에 가서 섰다. 또 거대한 트럭이 덜컹거리며 옆 차선으로 지나갔다. 그 여파에 차체가 흔들렸다.

  “그렇게 해서 속이 풀린다면 괜찮지만,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닐 텐데.”

 그는 나를 꿰뚫어보는 식으로 말했다. 내가 하려는 이야기도 꿰뚫어 보면 좋겠다. 말하고 싶지 않다. 무슨 답을 듣게 될지 두려우니까. 머릿속에 맴도는 건 엄마를 향한 그의 다정한 목소리, 어깨에 두른 팔, 차가운 침대, 미소 짓는 입술, 따뜻한 손.

  “자기는 뭐든 마음대로 하면서.”

 결국 고개를 돌려버렸고, 창밖에 무성한 수풀이 있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것인데, 키가 작고, 가지가 얇은. 사시사철 작고 푸른 잎사귀가 달려 있는 풀 나무다. 그리고 시선을 조금 가까이 하자 유리창 위에 울고 있는 내 얼굴이 보였다.

  “모르시죠?”

  “뭐를?”

 숨을 골라야 했다. 언젠가 이야기하게 될 거라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내가, 엄마를 질투하고 있는 거.”

 생각이 말이 되어 나오자 가슴이 금이 가는 것 같았다.

  “더럽고. 욕먹을 짓이지만. 작가님이 엄마랑 있는 거, 아프고 싫어요. 아픈 느낌조차도 욕심이니까 그냥 받아들이려고 했지만….”

 쩍쩍 균열이 생기고 그 틈으로 뜨거운 것이 흘렀다.

  “더 안 할래요.”

 충분히 예상해 놓고 막상 닥치니 도망치려 하는가. 한 생을 갖은 색상으로 짜인 태피스트리에 비유하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지금 나의 태피스트리 일부분이 질투와 죄책감으로 들쭉날쭉 짜이고 있었다. 이 조차 언젠가 아름다움의 일부가 될까? 그렇다 해도 지금 당장은 보기가 싫다. 왜 이렇게 됐을까.

  “우습지요?”

 무응답. 그를 돌아보고 싶은데 용기가 없었다.

  “이제 그만….”

  “적당히 해둬.”

  “…무슨 말 할 줄 알고요.”

 갑자기 왜? 그는 가볍게 물었고 나는 웃었다. 갑자기가 아니에요-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건 작가님도 알았잖아요.”

  “어제 오늘 네 얼굴은, 도망치려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는데도?”

  숨이 막혔다. 그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은 보여주고 싶지 않아 고개를 푹 숙였고 지난 몇 달간 눌러왔던 마음에, 우습게도 안심이 찾아와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

  내 두려움마저도 그는 다 알고 있었다.

  “어쩌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저께 밤에, 엄마랑 이야기한다고 하곤 안 돌아왔잖아요, 방에.”

  “엄마랑 있었다고 생각했어?”

 고개만 끄덕였다. 다시금 그 밤의 참담한 기분이 되새겨지며 울음이 솟구친 바람에.

  “오해하게 만들었네.”

  “…아니에요?”

  훌쩍이며 곁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는 한숨을 쉬곤, 예전 작업실에 갔었다고 했다. 출판사에서도 가깝고 다시 사용하게 될 것 같아서 내놓지 않고 놔두었다, 필요한 것이 있어 다녀왔다 하는 것을 묻지 않았는데도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죄송해요.”

 그는 나를 보다가 찌푸리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시보드에서 휴대용 티슈를 꺼내주었다. 내가 겨우 얼굴을 닦고 코를 풀고 하는 동안 내내 조용히 있더니 문득 혼자 코웃음을 친다.

  “돌아가는 길에 사고가 나도 나는 몰라. 간밤에 한 숨도 못 자서.”

  “그…랬어요?”

  “어디 있는지만 알면, 당장 데려오고 싶었지.”

 주책맞게-그는 자조했다. 눈을 감고 좌석 등받이에 목을 기대고 긴 한숨을 쉬었다.

  “성공했네요.”

  “뭐가?”

  “저 어제 남자친구랑 있었던 거 아녜요.”

 눈을 뜨고 어디에 있었냐 묻기에 24시간 만화방-이라고 산뜻하게 말해주고 웃었다. 코도 눈도 빨갛게 부은 채 웃는 나를 보고 그는 눈썹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얼마 안 있어 그는 작품 마무리를 원래 작업실에서 해야겠다고 엄마에게 제안했고, 엄마는 오케이 했다. 흡사, 상사에게 결재를 받는 부하직원의 모습이었다. 그는 작업실 주소를 메신저로 보내주었다.

 

  그 이후로 줄곧, 오늘처럼 작업실에서 글을 쓰다가도 내가 오면 그는 잠시 일을 멈추고 손을 잡아주었다. 오늘도 그 손에 이끌려 곁으로 간다. 손이 차다고 했다. 차를 끓여준다며 일어서는 그를 다시 의자에 앉히고 그의 무릎에 올라앉으면 그는 약간 놀란 얼굴을 하면서도 군말 없이 내가 기댈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죄책감에도 유효기간이 있다고 했다.

  언제까진데요? 내가 물으면 그는 말이 없었다. 그가 답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도 않지만.

  “집에 너무 가끔 들어오는 것 아녜요? 그래도 엄마가 뭐라 안 해요?”

  “나보단 책 나오는 게 더 중하다고 생각할 거야.”

  그의 가슴에 기대어 호흡에 집중하고 있으면, 문득 어쩌다 내가 이 남자의 품에 있게 되었는지 이상할 때가 있다. 처음 그를 만난 날을 생각하고 다시 이 사람을 느끼면 그 둘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생각된다.

  ‘반가워요’라던 그의 딱딱했던 인사. 사랑에 빠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5분 쯤 된다고 한다. 이후에 그 사람과 계속 만날지를 결정하는 덴 불과 3초 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게 대책 없이 빠져드는 게 사랑이라지만, 조금은 대책이 있고 나서 빠져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인사를 받는 순간부터 나는 그를 좋아한 걸까.

  “그럼 오늘도 안 들어오겠네요?”

  “못 가지.”

  “금동이가 기다리는데.”

  “너는 안 기다리고?”

 웃어버린다. 웃음 끝에는 쓴 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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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부_5회 2017 / 11 / 1 224 1 3467   
4 1부_4회 2017 / 10 / 30 223 1 3790   
3 1부_3회 2017 / 10 / 28 245 1 2440   
2 1부_2회 2017 / 10 / 28 234 1 3416   
1 1부_1회 2017 / 10 / 28 422 1 5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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