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고모 왔어?!"
"에구에구.. 다인이가 고모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구나."
"목? 나 목 안 빠졌는데?.."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자신의 목을 확인하는 어린 조카를 보자 웃음이 그려졌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집으로 들어가자 그 웃음도 바로 로그아웃 해버렸지만..
"집..꼴이 왜이래 다인아? 집에 폭탄이라도 맞았어?"
"폭탄?..아. 아빠랑 엄마랑 나갈 때 짐 챙긴다고 여기저기 막 뒤지던데? 그래서 그래."
".......이 인간들을 진짜..!! 나보고 치우라는 거 아냐 지금.. 이래서 오기 싫었는데.."
"응? 뭐라고?"
"..아니야. 아무것도.. 일단 치우고 있을 테니까 다인이 tv보면서 놀고 있어."
"응! 다 치우면 나랑 놀아줘!"
"그래.. 내 체력이 허락한다면.."
도우미 아주머니를 그냥 쓸 걸 그랬나.. 난장판이 된 집을 청소한지 한참이 되었지만 강호부부에 대한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집이 넓어서인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고 청소가 끝날 무렵 하늘은 벌써 어둑해지려 하고 있었다.
"고모..아직 멀었어?"
"다했어. 짠~ 깨끗해졌지?"
"응응! 근데 고모... 나 배고파..."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다인이 배고프지. 뭐 먹을까? 뭐 먹고 싶은거 없어?"
온지 첫날부터 넓은 집을 청소해서 그런지 몸이 쑤셨다. 다인이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시켜줄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절망을 부르는 답변이 들려왔다.
"나 고모가 해준 찜닭 먹고 싶어! 저번에 놀러갔을 때 해준 거 있잖아."
"찜닭...? 그건 내일해주면 안될까? 오늘은 음..그래 피자! 다인이 피자 좋아해? 그거 시켜먹자."
"에 피자? 싫어..나 고모가 해준 찜닭 먹고 싶단 말야."
얘가 누굴 닮아서 입이 이렇게 토속적이야.. 오랜만에 보는 조카가 해달라고 계속 징징거리자 수호는 찌푸둥한 허리를 쫘악 피더니 냉장고 안을 확인해보고는 장을 봐야겠다며 외투를 챙겼다.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해주려하자 다인이는 기분이 좋아져 마트를 알려주겠다며 따라나섰다.
"닭은 이게 좋겠다. 다음엔 당면사러 가자 다인아. 당면 좋아하지?"
"응!응! 잠깐만 나 저기 소세지."
넓은 마트에 풀어주자 다인이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신이나 보였다. 부모님과 떨어진지 1일째인데 적어도 첫날만큼은 우울해하는 기색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5살 조카 모습에 의구심이 생기긴 했지만 이내 다인이가 향한 소세지 시식 코너로 건너가 저것도 살까말까 고민하는 수호였다.
"우리 다인이. 소세지 맛있어?"
"응! 맛있어."
그래.. 어차피 반찬도 필요한데 하나 사자. 구매 결정을 완료했을 때 시식코너에서 일하던 아주머니가 친근하게 말을 건다.
"어머! 아드님이 참 이쁘네요. 엄마를 쏙 닮았네."
"...엄마요..?"
이 나이에 5살 아이를 둔 엄마소리를 듣다니.. 당혹감에 아주머니와 다인이를 번갈아 쳐다보는데 다인과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씨익 웃으며..
"쏙 닮았어?"
그런 것만 인정하지 말고 사실이 아닌 부분을 말하라고! 우리엄마 아니라고. 지금쯤 유럽으로 향할 너희엄마가 이 사실을 알면 슬퍼한다?! 조카라고 말한 뒤 다른 코너로 넘어갔는데 그 이후로도 그런 오해를 몇 번이나 받고서야 장을 다 볼 수 있었다.
"내가 고모를 쏙 닮았나?"
"글쎄.. 그런가?"
마트에 돌아오는 길에 다인이는 수호와 닮았다는 소리가 기분이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하긴.. 네가 친탁을 하긴 했지. 고모랑 닮은 게 좋아 다인인?"
"응! 난 고모가 우리 엄마 같아"
"...그 말 너희엄마 앞에서는 하면 안 된다? 분명 서운해 할 거야."
"그치만 어릴 때 난 다 기억하는데.. 고모가 밥해주고 안아주고 재워주고 자장가 불러주고... 고모가 더 우리 엄마 같아."
"너희부모도 잊은 과거의 내 노력을 기억해주는 건 눈물 나게 고마운데.. 그래도 엄마 앞에서는 그런 말 하지 않기. 응?"
"알았어. 대신 우리 집에 살 동안만 엄마라고 부르면 안돼? 나 고모 엄마라고 불러보고 싶었단 말이야."
"하하.. 참아주라.. 고모도 시집은 가야지."
".....싫어?....."
사소한 일이라 생각했는데 아이는 바로 우울한 기색을 보였다. 왜 아버지를 아버지라 못 부르는 서글픈 홍길동의 표정을 하고 있는건지... 울 것 같은 표정에 수호가 당혹스러워 하더니 이내 제약을 건다.
"한 달을 안 되고 오늘 하루만! 오늘 하루만 그렇게 부르던가.."
"진짜?! 야호! 그럼 오늘은 우리 엄마야. 엄마~"
다인은 신나게 건물로 들어갔다. 저렇게 좋을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1층으로 내려오길 기다리는데 다인이는 계속 엄마라고 부르며 쫑알쫑알 옆에서 수다를 떨었다. 아이의 밝은 모습에 웃으며 얘기를 듣고 있는데 뒤에서 낮은 목소리의 남자가 수호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여기 현관 키 떨어져있는데 그쪽 거 아닙니까?"
현관 키? 건물 안으로 들어오면서 주머니에 넣었는데 빠졌나?.. 주머니가 비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아차 싶은 마음에 장바구니를 위로 추스르며 남자에게 다가갔다.
"제거 맞아요. 감사합니다. 짐이 많아서 흘린......."
순간 정적이 흘렀다. 이.......남자가 왜 여기 있지?!!! 시간이 좀 지났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전 남친이 사랑한다던 남..자.. 여자도 아닌 남자. 그때 그 한재인이라는 남자였다. 한동안 마음고생 했던 게 서서히 나아지고 있을 무렵이었는데 하필 이곳에서 그 남자를 만나 상처를 괜히 긁게 만들었다.
잘난 얼굴은 그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정장을 차려입고 아몬드형 눈을 빛내고 있는 남자도 수호의 얼굴을 잠시 응시하더니 기억을 되새기고는 헛웃음을 뱉었다.
"그때 그분 맞으시죠? 여기 사셨습니까?"
"아뇨..쭉 사는 건 아니고 잠시... 그쪽이야말로 여기.. 사세요?"
제발 아니라고 해라. 아는 사람 집에 놀러온 거라고 말하길...간절히 기도해본다.
"네. 여기삽니다."
...도대체 나 누구한테 기도 한거니.. 수호는 허탈해하며 앞으로의 한 달이 지옥 같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에 눈앞이 깜깜해지는데 다인이가 총총걸음으로 다가오며 말을 건다.
"아는 사람이야 엄마?"
"?!!!!"
지옥 길은 바로 하이패스 고속도로를 탔다. 타이밍이 왜 이래?!
".....엄마요? 아이가 있으셨습니까?"
"아니요..!! 이건..."
해명할 시간 따위는 주지 않는다는 듯이 1층으로 내려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일단 모두 안으로 들어갔다. 층 버튼을 누르는데 수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고많은 층 중에 하필 바로 위층인 56층 버튼을 누르는 재인과 다시 눈이 마주치자 재인은 어깨를 가볍게 으슥하더니 말을 한다.
"바로 제 아래층에 사는 줄은 몰랐네요."
"네......"
"그 이후로 크리스씨랑 만나보셨습니까?"
"아뇨. 더 이상 만날 이유는 없어서.."
수호의 말에 재인은 옆에 꼬옥 붙어있는 다인에게 흘깃 시선을 흘리더니 수긍하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하긴.. 아이까지 있으신 분이 그런 일을 겪고도 계속 만나려 하는 건 좀 그렇겠네요.."
"오해가 있으신데.. 이 아인 제 조카입니다. 엄마라고 부르는 건 그냥 애가 장난치는 거고요."
아까 상황을 해명하고 있는데 그마저도 다인에 의해 헛수고가 되어 버렸다.
"응? 다인이 장난치는 거 아닌데.."
애처로운 눈빛으로 아비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 표정을 재현하고 있는 다인에게 다시 한번 기겁을 했다. 너마저 왜 이러냐 진짜..!
"지금.. 아이를 부정하시는 건가요?"
"하! 부정이라니요.. 말씀한번 이상하게 하시네. 내 조카를 조카라고 말하는데 뭐가 부정이에요. 사실이지! 진다인! 내가 누구야? 사실대로 말해. 얼른!"
"웅......고모."
"들었죠?!!"
"....그렇다고 해두죠."
"해두는 게 아니고 진짜.. 하아..흐흠! 그리고 그때는 제가 실례가 많았습니다. 앞으로 크리스 일로 회사에 찾아가는 일도 없을 거고 그런 놈이랑 더 이상 엮일 맘도 없으니까 저희 둘을 같이 엮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땡
마침 55층에 도착하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재인은 턱짓으로 할 말 다했으면 나가보라는 모션을 취했다. 마치 제 상사같은 도도한 모습에 하나부터 열까지 밥맛인 남자라고 수호는 생각했다. 내리고 나서 바로 56층에 멈춰서는 엘리베이터, 그 숫자를 보며 한숨을 내쉬는 수호다.
"하아..이런 비싼 아파트.. 게다가 펜트하우스에서 산다고?.. 김경복 말대로 능력은 좋나보네."
성별을 제쳐두고 저 남자와 자신을 두고 제3자가 비교한다면 당연히 저 남자가 우월하다고 손을 들 것이다. 같은 여자도 아닌 남자를 상대로 자존심 상해하는 것도 웃긴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였다.
괜히 착잡해지는 마음을 안고 다인이에게 찜닭을 해주러 집안으로 들어가는데 거실유리에 비친 수호 자신의 모습을 보니 남자가 오해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소를 하고 나온 뒤라 편안한 옷차림에 한손엔 장바구니, 다른 한손엔 다인이를 잡고 있었다. 누가 봐도 한 가정의 어머니상이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