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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연재 > 일반/역사
나는 김구다! 제2부 - 홍구공원 1932, 백범 김구
작가 : 과하객
작품등록일 : 2017.11.22

'나는 김구다!' 제2부의 연재를 다시 시작합니다. 전날 천붕을 당해 의욕이 꺾였던 글인데 권유가 있어 다시 써보게 되었습니다.
역사를 기록하는 작업에 가장 조심스러운 부분이 인물의 명예에 누를 끼치는 일인데, 혹시 아니다 싶은 부분이 보이거든 가차없는 질책을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6. 기미년 2
작성일 : 17-11-22 14:57     조회 : 406     추천 : 2     분량 : 5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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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기미년 2

 

  “왜적은 총칼로 가로막고 있는데 우리는 빗자루 하나 들지 못하게 하시니, 이래서야 싸움이 되겠습니까?”

  기미년 3월 1일 새벽, 활빈당원들의 출정식에서 젊은 당원들을 대표한 김당쇠의 볼멘소리였다. 선생의 다음과 같은 지시가 떨어졌을 때 젊은이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있었는데, 그들의 불만을 대표한 발언이었다.

  “흰옷을 입고 선두에 서시오. 총을 쏘거든 몸으로 막아 백성들을 지키고, 칼로 찌르거든 고맙게 받아 흰옷을 물들여 오시오. 그게 운동본부의 지시이고, 내 뜻이기도 하오.”

  흰옷을 입은 결사, 훗날 백의사(白衣士) 불린 지사들의 모임은 이때에 결집된 결과였다. 기미년 만세운동으로 쓰러진 백성들을 기려 조상 전래의 백의를 입고 복수의 결의를 다진 열혈 청년들의 자발적인 모임이 발전한 것이었는데, 일컬어 피로 맺어진 정의의 백의전사였던 것이다.

  “본부의 결의는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였소. 우리 활빈당의 성격에는 맞지 않겠지만, 결의는 결의, 명심하시오. 오늘의 싸움은 무저항, 평화주의 만세운동이라는 사실을.”

  선생의 지시를 다시 한 번 확인한 활빈당의 젊은 당원들은 눈처럼 흰옷을 떨쳐입고 맡은 바 임무를 찾아 흩어졌다. 몇 날 밤을 새워 선언서를 돌리고 전국 각처에 봉기일과 시간을 전하는 임무를 완수한 끝이었지만 눈빛은 더욱 불타오를 뿐이었다.

  기미년 3월, 이때의 기억을 훗날의 국어학자 이희승은 이렇게 회고했다.

 

  중앙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경성직뉴회사의 서기로 있으면서 나는 3.1만세의 봇물 속에 뛰어들었다.

  나는 급히 탑골공원으로 달려갔다. 수많은 학생들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으며 공원 문으로 밀려나오고 있었다. 콧잔등이 시큰하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틈바구니에 끼어들어 정신없이 만세를 외쳐댔다.

  본격적인 탄압과 제재가 가해지기 시작한 것은 사흘째인 3월 3일부터였다. 그날은 서울역 앞에서부터 만세를 부르자는 사발통문이 돌았다.

  나는 2일 밤, 중동(학교) 때부터의 친구인 이병직 군의 집에서 태극기를 그렸다. 3일이 되자 밤새워 만든 태극기 50여 개를 가슴에 품고 아침 일찍 서울역 앞으로 나갔다.

  만세 행렬의 선두가 남대문에 닿았을 때 미리 진을 치고 있던 일본군 기병들이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지금의 시경 앞쯤에 이르렀을 때 나는 일본인 순사에게 붙잡혔다. 그가 여학생 한 명을 왼손으로 붙잡고 있는 터여서 나는 본능적으로 있는 힘을 다해 팔을 뿌리치고 도망쳤다. 지금도 두고두고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때 내가 도망치는 일에만 마음이 급급해 그 여학생을 구할 생각을 못한 점이다.

  

  백의사가 본격적인 활약을 시작한 것은 그 무렵부터였다. 이희승이 구하지 못했음을 후회하던 여학생은 백의사의 장수 김당쇠에 의해 구해져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간다.

  “왜인들은 더욱 강퍅해질 거요. 특히 여학생들은 저들의 노리는 바요. 몸조심하시고, 우선 피하시오. 부상이 심한 듯싶은데 사람을 붙여드리겠소.”

  여학생의 본집은 천안 근처의 소읍이라 하였다. 왜적 경찰에게 붙잡혀 험한 꼴을 볼 뻔했던 여학생은 당쇠가 호위역으로 붙여 준 젊은이의 도움으로 고향으로 돌아갔고, 이로써 또 하나의 독립운동의 불씨가 심어져 피어오를 날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날, 선생 휘하 백의의 젊은이들은 모든 방면에서 빈틈없이 움직였다. 태화관의 33인 민족대표를 암중에서 호위한 일부터, 탑골공원의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운동 행진의 선두에 서서 일반 백성들을 보호하는 일까지, 맡은 바 임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돋보인 점은 선생의 명령을 충실히 지켜 무저항 비폭력주의 만세운동을 고수했다는 점인데, 왜적의 총칼을 몸으로 받으면서도 그리하였으니, 훗날 무장투쟁을 천명하고 왜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결사체 백의사는 그러한 신고 속에 탄생한 것이었다.

  독립선언서는,

  “오등(吾等)은 자(慈)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 차(此)로써 세계만방(世界萬邦)에 고(告)하여 인류평등(人類平等)의 대의(大義)를 극명(克明)하며, 차(此)로써 자손만대(子孫萬代)에 고(誥)하여 민족자존(民族自存)의 정권(正權)을 영유(永有)케 하노라.”

 로 시작하여,

  “오등(吾等)이 자(慈)에 분기(奮起)하도다. 양심(良心)이 아(我)와 동존(同存)하며 진리(眞理)가 아(我)와 병진(幷進)하는도다. 남녀노소(男女老少) 없이 음울(陰鬱)한 고소(古巢)로서 활발(活潑)히 기래(起來)하여 만휘군상(萬彙群象)으로 더불어 흔쾌(欣快)한 부활(復活)을 성수(成遂)케 하도다. 천백세(千百世) 조령(祖靈)이 오등(吾等)을 음우(陰佑)하며 전세계(全世界) 기운(氣運)이 오등(吾等)을 외호(外護)하나니, 착수(着手)가 곳 성공(成功)이라. 다만, 전두(前頭)의 광명(光明)으로 맥진(驀進)할 따름인저.”로 끝맺고 공약삼장을 부기하여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운동임을 천명한다. 구구절절이 명문인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요리집 태화관은 이완용이 전년(前年)까지 살던 곳으로 나라를 팔아먹는 모의를 했다고 하니 노린 바는 아니었다지만 절묘한 역설인 셈이다.

  3월 1일 오후 4시경, 의암 손병희를 비롯한 민족대표들은 급히 출동한 일경에 의해 모셔져 가고 있었다.

  “우리를 곱게 모시도록 하시오. 조선 백성들에게 난폭한 모습을 보여 폭동을 일으킬 생각이 있지 않으시다면.”

  의암은 종로경찰서장 아오기에게 그렇게 말했고, 운집한 조선 백성들의 눈길을 의식한 아오기는 총독부의 수뇌들에게 하소연을 하여 야마가타 정무총감의 차를 오게 했다. 그야말로 모셔져 가고 있는 민족대표들의 연행 장면을 전송하며 선생은 전날 나눈 의암과의 약속을 되새겼다.

  “일은 우리가 벌인다지만, 뒷수습을 해줄 사람이 문제요. 일본에서 급히 귀국한 유학생들을 비롯해 열혈청년들은 넘쳐도, 대국을 주재할 사령탑이 부재가 되니 모처럼의 비폭력운동이 곁길로 흐를까 걱정이오. 백범이 힘을 써주어야겠소.”

  선생은 의암의 부탁을 기억하여 만세운동에 나선 흰옷을 입은 전사들에게 다시 한 번 명령을 내렸다.

  “왜적이 총칼을 휘둘러 와도, 자리를 지켜 물러나지 마시오. 무기를 들거나, 험한 말을 하거나 삿대질을 하는 것도 일절 금하오. 총을 쏘거든 몸으로 막고, 칼을 휘두르거든 피를 각오하고 달게 받으시오. 이번 만세운동에서는, 흰옷을 피로 물들이는 걸 가장 큰 공로로 하겠소.”

  그 밤, 선생은 모처럼 중근을 불러 하소연을 했다.

 

  -이렇게 하면 되겠나? 벌써부터 동지들이 잡히거나 죽어나가고 있는데, 나는 아직 비폭력을 부르짖고 있을 뿐이네. 중근 아우가 보기에 우리가 옳은 것 같은가? 비폭력운동으로 명분을 지켜 여론을 우리에게 돌리려한다는 말 따위, 전날 저들의 최고 인물이라던 이토(伊藤博文)의 배신을 본 적이 있는 나로서는 찬성할 수 없네. 그때의 배신자 이토는 중근 아우가 처단했지만, 나 역시 저들을 처형장에 올리는 일에 우선권을 주고 싶네. 당장 우리 동포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의암은 여전히 비폭력을 주장하고 있고, 그가 대표이니 따를 수밖에 없지만, 부처님의 자비를 가르치던 만해선사의 입담이 오히려 강해졌을 지경이라서, 어찌할 바를 몰라 아우를 청하니, 길을 열어 주시게나.

 

  ― ― ― ― ―

 

  선생은 조선독립신문 제1호의 기사를 보고 있었다. 독립선언서와 함께 비폭력 무저항 평화주의를 천명한 만세운동의 취지를 잘 설명하고 있는 문서였기 때문이었다.

  (조선 민족 대표 제씨는 최후의 일언(一言)으로 동지에게 고하야 왈 오제(吾儕)는 조선을 위하야 희생으로 공(貢)하노니 오(吾) 신성 형제는 오제의 소지(素志)를 관찰하야 하년(何年) 하월(何月)까지던지 아(我) 2천만 민족이 최후의 1인이 잔여하더라도 결단코 난폭적 파괴의 행동을 물행(勿行)할 지어다. 1인이라도 난폭적 파괴적 행동이 유(有)하면 시(是)는 영천고 불가구(永千古不可救)의 조선을 작(作)할지니 천만 주의하고 천만 보중(保重)할지어다.)

  발행일이 1919년 3월 1일자로 된 조선독립신문 제1호를 찍어낸 윤익선(尹益善)은 선생의 동향 후배로 오랜 동지였다. 대표적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은 윤익선이 이종일(李鍾一)과 협의하여 보성사(普成社)에서 인쇄하여 전국에 배포하였는데, 선생은 활빈당 조직을 동원하여 적극 협력하였다.

  3.1 만세운동은 오로지 독립만세를 외칠 뿐인 무저항 비폭력 평화주의 운동이었다. 허를 찔린 일제는 일시 관망하는 듯했으나 봉기 2일째에 이르러서는 기어코 피를 부르고 말았다. 남녀노소 귀천에 가릴 것 없이 이천만 동포 모두가 참가한 비폭력 시위에 일제의 군경은 총칼을 들이 대어 진압작전을 시작했고, 무차별한 폭력과 고문과 학살을 방법으로 삼았다.

  “수원 제암리(堤岩里)에서 일본군경이 기독교도와 천도교도, 대종교도 30여명을 교회당 안으로 몰아넣어 어린아이까지 모두 죽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 교회당에 불을 지르고, 바깥으로 나오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까지 모두 불에 타죽게 만들어 무고한 양민 28명을 학살하고, 다시 인근 마을 채암리(采岩里)에 가서 민가에 방화하여 31호를 불태우고 39명을 학살했다는 보고입니다.”

  “진주의 기생단이 논개의 후예 됨을 증명하려 만세운동에 동참하고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썼는데, 왜경이 모두 체포하여 인신으로서는 차마 겪을 수 없는 모욕을 주었다 합니다.”

  “대동일보 1919년 4월 19일자에 경성 모 보통학교의 졸업식 때 있었던 일이 ‘한(韓)에 사람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의 제목으로 기사화되어 뜻있는 이들에게 읽히고 있습니다.

  (조선 독립운동의 풍조가 발생한 이래, 조선인 학생의 기염(氣焰)이 크게 치열해져서 학교에서도 기탄없는바 되어, 공연(公然) 자국어(自國語)를 사용하고 있는데, 요즘 기교(其校)에서 수업을 개시할 때 일본어로 조선인 학생의 이름을 점호하얏으나, 1인도 응하는 자가 없어서 다시 조선어로 불렀던 바, 즉시 조선어로 응답하였음과 여(如)함은 매우 흥미 있는 일로서, 더욱이 주의할 것은 과반(過般) 경성 보통에서 졸업식을 거행 후, 조선인 학생 수백 명이 일제히 기립하야 독립만세를 고창하여 교원도 제지할 수 없었다 한다. 조선인 청년의 기염이 참으로 경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하겠다.)”

  “종로 경무서(警務署)에서 한 소학생(小學生) 아이를 심문할 때, 난타를 당할수록 만세를 열호하고, 구타를 그치면 만세도 그치므로 적 경찰이 그 이유를 물었더니, ‘물이 병에 가득차면, 움직이면 반드시 흘러나오나니, 만세가 몸에 가득 차서 조금만 움직여도 그 소리가 스스로 용출(湧出)함이 물과 같은즉, 만세를 그치게 하고자 하거든 나의 몸을 안정케 하라’하였다 합니다.”

  “노령의 동포들에게 배포된 신문에 실린 기사의 일절을 부경주 사형이 전문으로 보내 왔습니다.

  (슬상(膝上)에서 유아(幼兒)가 부모의 명(名)을 학(學)할 시(時)는 기(其) 차(次)에는 필히 왜노(倭奴)는 아동의 원수라고 교(敎)하라. 심(心)을 협(協)하라. 결심하라.)”

  “우리가 구해주었던 여학생이 고향마을의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잡혀 와서 고문을 받고 옥중 원혼이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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