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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고잉홈
작가 : 에이슈
작품등록일 : 2017.11.17

덩치 큰 사회, 덩치 큰 사람들, 덩치 큰 세상속에 작은 사회, 작은 사람들. 치이거나 가려지거나 소멸되거나 하는 이 작은 사람들의 공간에 빛을 비춰주고 싶은 마음으로 들여다보는 그들의 이야기이다.

 
시작
작성일 : 17-11-17 13:22     조회 : 265     추천 : 0     분량 : 9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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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장

 

 1. ‘제로’의 일상(승주)

 

  새삼 세상의 이치에 감사하기로 했다. 내가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못하는 것도, 오래된 것이 사라지고 나면 새로운 것이 다시 찾아오는 것도 세상의 이치임엔 틀림없을 것이다. 형체 없는 땅을 딛고 서 있는 기분은 여전하지만 그것이 구름 위처럼 느껴지거나 깊은 물의 수면 위처럼 느껴지거나 하는 것은 내 마음의 상태에 따라 달랐으니까. 난 그렇게 새로 시작하는 한해를 또 맞았다. 아빠를 못 본지 만 일 년을 넘겼다.

  지난 연말까지만 해도 난 나에게 위로가 될 만한, 혹은 뭔가 기댈만한 것을 찾는데 급급했다. 그래서였을 거라 생각했다. 계속 발을 딛어 딱딱한 뭔가가 닿을 때까지 움직여보려고 했다. 새해라는, 만 일 년이라는 의미는 내게 그래서 달랐다.

  ‘닿지 않으면 어때? 딱딱한 땅이 아니면. 내 발 아래, 깊은 물이 아닌 허공이 아닌 구름 위 일수도 있는데.’

  난 스스로의 변화를 감지하고 자신을 대견하게 여기려고 했다. 아빠가 계셨더라면 그도 분명 그랬을 것이다.

 

  일상은 그야말로 일상이었다. 변화를 바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변화를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혹독한 겨울의 추위만이 날 괴롭혔다. 결로로 인해 얼어붙은 내 방의 작은 창문과 얄팍한 사방의 벽은 어디로든 그 괴롭힘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게 했다. 하지만 그 추위마저 친구로 생각할 수 있을 만큼 내 마음 속의 방은 점점 커지고 아늑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일 빼기 일은 영이 매일 반복되는 내 일상이 그렇게 난 좋아지고 있었다. 이렇게 남김없이 내 모든 것을 다 소모해버리고 언젠가는 아빠를 만날 것이다. 아빠가 남겨 놓은 그 어떤 것들도 다 가져갈 것이다. 적어도 이 차가운 세상 위에 나와 아빠의 흔적일랑은 찾아볼 수 없도록 내 모두를 다 써버리고.

 

 2. ‘골목라면’의 사장님, 사장님의 ‘골목라면’

 

  나는 라면을 끓여본 적이 없다. 수없이 라면을 먹어보긴 했지만 내 손으로 직접 끓여본 적은 적어도 내 기억엔 없다. 어렸을 때엔 가끔 아빠가 끓여 주시곤 했는데 그 때마다 아빤 늘 내게 미안해 하셨다.

  “미안해, 아들. 오늘은 라면이야. 내일은 꼭 밥 해줄게.”

 밤낮 없이 일하던 그는 바쁜 시간을 쪼개어 꼭 밥을 지어 주셨는데 반찬이 몇 개 없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재료 한 가지는 꼭 넣어주려 하셨다. 그러다 도저히 시간이 되지 않을 때 먹었던 게 라면이었다. 혼자 챙겨 먹을 만큼 자란 이후로는 내가 아빠 식사를 챙길 수 있었는데, 아빤 역시 바쁘다는 이유로 끼니를 제대로 챙겨 드시지 못하시거나 라면으로 대충 때우는 일이 잦았다. 고등학교 때 늦게 학교에서 돌아와 보면 아빠가 혼자 라면을 먹고 있는 광경을 가끔 볼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난 아빠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상대적으로 시간 여유가 있었던 나는 아빠를 위해 밥과 찌개를 꼭 준비해 놓으려 했다. 그 때에는 라면을 별 영양가 없이 대충 배만 채우려는 간식쯤으로 여겼었다.

  아직도 난 라면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릴 적부터 세뇌되어 버려, 라면을 먹는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건 사실이다. 어쩌면 처음 ‘골목라면’에 오게 되었던 이유가 그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구수하고 진한 사골 국 끓는 냄새에 끌려, 가게 앞까지 다가왔는데 고개를 들어 간판을 보니 라면 가게였다. 국물 냄새만으로 영양가 가득한 특식을 연상케 했지만 막상 들어와 보니 정체는 ‘라면’이었다.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라면과는 전혀 다른 비주얼과 내음이었지만 분명 라면이었다. 그 날 소주와 함께 처음 먹어본 그 ‘라면’은, 한동안 소진되어 채워지지 않던 내 육체의 에너지를 채워 주었고 갇혀 있던 영혼을 깨워 주는 훌륭한 영양식이었다.

 

  난 박 지부장님을 이제 찾아가지 않기로 했다. 그 분과 사모님이 꼭 불편하거나 부담스러워서 만은 아니다. 본디 난 외로운 사람이었다. 내게 외로움은 ‘괴로운 것’ 내지 ‘좋지 않은 것’ 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아빠의 유전자 덕인 것 같다. 내 곁에 아빠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걸 상상해 본 적이 없고, 있다 하여도 그 누군가의 곁에 있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닐 것이다. 난 꾸미지 않은 ‘나’로 사는 게 편했고, 편하게 사는 게 ‘사는 것’의 의미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아빠가 곁에 없으니 다시 아빠를 만날 그 날까지 외로운 것은 당연하고 난 그 사실에 만족한다. 아빠를 그리워할지라도, 이러한 생각에 머무르고 나니 살아지는 것 같다. 살만 했다.

 

  “안녕하세요. 라면이랑 소주 주세요.”

  ‘골목라면’을 들어서며 사장님에게 인사와 동시에 주문을 했다. 사장님은 고개를 크게 끄덕하셨다. 아직 손님은 없었지만 그는 분주했다. 사장님의 과묵함은 여전했고 변함없이 국물이 끓고 있었다. 그는 파를 썰고 있었다. 가게 안팎으로 퍼지는 냄새도 그대로였다. 그것이 너무 좋았다.

  금요일 저녁이다. 내일은 출근하지 않는 토요일이고, 난 내일 할 일에 대한 생각을 하며 라면을 기다리고 있다. 한 일 주일 전에 문득 들었던 생각인데, 여행이 나의 주말 계획이다. ‘여행’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적이 있었나 싶게 새삼스럽지만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였다. 비록 올 겨울 추위가 절정에 이를 거라는 주말 날씨 예보가 있었지만 공기는 더없이 맑을 거라 했다. 내일 아침 눈이 떠지는 대로 집을 나와 시외버스를 탈 것이다. 무조건 가장 빠른 버스로. 그리고 어느 곳으로든 버스 투어를 하고 적당한 때에, 적당한 곳에서 내려 그곳을 걸을 것이다. 복잡한 곳이 됐든 한적한 곳이 됐든 추위가 잊어질 때까지 걷다가 그 때 떠오르는 생각대로 다음 코스를 정할 것이다. 어차피 난 수원 시내를 벗어나본 적이 없다. 나와 가까운, 내가 모르는 주변을 새로이 살피는 일이 재밌을 것 같다. 혼자 기대에 들떠 있는 동안 사장님이 다가오고 계셨다.

  “좋은 일이라도 있나 보네요.”

  사장님은 느리게 말하며 내 앞에 라면과 소주를 놓고 가신다.

  “아, 아니......... 감사합니다!”

  생각에 빠져 있다가 나의 대답은 사장님의 느린 말에도 타이밍을 맞추지 못했다. 빈속에 소주를 먼저 한잔 넘겼다. 달았다. 그래서 국물을 떠먹기 전 한 잔을 더 마셨다.

  곧 라면 한 사발에 소주 한 병을 모두 비웠다. 기분이 무척 말끔하고 좋았다.

  “사장님! 저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어서 오세요!”

  난 사장님에게 소주 한 병을 더 주문했는데, 그는 때마침 가게를 들어오는 손님을 향해 인사를 하느라 날 보지 못한 눈치였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사장님이 있는 주방 쪽으로 갔다. 머리가 잠깐 어질했다.

  “저........ 기......... 사장님, 소주 한 병 가져갈게요.”

  냉장고에서 소주를 직접 꺼내며 난 그에게 말했다. 그는 다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저, 해장라면이랑 소주 한 병 주세요.”

  사장님은 곧 방금 온 손님의 주문을 받으셨다. 난 두 번째 소주를 한 잔 따르고 또 내일 여행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사장님이 어느새 꼬치어묵 몇 개를 내 앞에 가져다 놓으신다. 넋을 놓고 있다가 난 또 인사의 타이밍을 놓쳤다.

  빈 라면사발과 꼬치어묵, 어느새 비워진 소주 병 두 개가 순간 기억의 마지막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손님들이 테이블을 거의 채우고 있었고 시끄럽지 않을 정도의 대화소리와 좀 전까지 들리지 않았던 음악소리, 달그락 그릇소리가 들렸다. 내일 계획에 대해 생각했던 것까지는 알겠는데 어떤 구체적인 계획을 생각 중이었는지 기억나질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분주한 사장님과 아까 가게로 들어왔던 두 번째 손님도 있었다. 그녀의 테이블에도 라면사발과 어묵 꼬치, 소주 두 병이 놓여 있었다. 잠시 그 장면이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렸다. 내가 취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찬물을 가져다 마셨다. 그리고 잔에 남아있던 식은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아직 남아있는 어묵을 보고 한 병을 더 마실까를 잠시 고민했다. 알딸딸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이 느낌을 지속시키고 싶었다. 꼬치 하나를 먹고 나서 소주를 더 주문했다.

  “사장님! 저 소주 한 병만 더.......”

  사장님은 테이블을 정리하시느라 바빴다. 난 다시 냉장고로 가 직접 꺼내왔다.

 

  “아이 참........ 괜찮아요? 정신 차려 봐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가슴이 조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온 몸에 힘이 빠졌다.

  “정신 차려요! 이것 좀....... 이것 좀 마셔 볼래요?”

  간신히 눈을 뜨니, 눈앞에 물병이 보였다. 낯익은 듯 낯 선 여자가 내게 물을 먹이려 하고 있었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지만 이미 내 몸은 내 정신을 따르지 못하고 있었다.

  “집이 근처에요? 근처인 건........ 맞죠? 어디에요? 아이 참........ 경찰을 불러야 하나.........”

  그녀가 내게 묻다가 혼잣말을 하다가 하며 망설이는 모습이 보였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내 몸은 여전히 반응하지 않는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니 문득 생각났다. 그녀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아......... 미안해요........ 그냥 가셔도 되는데......... 아........ 아니....... 저....... 저 좀 도와주세요. 집에 데려다 주세요. 저........ 내일 여행 가야 하는데.........’

  난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것마저 현실이 아닌 내 상상 속 대사임을 깨달았다. 그녀는 나를 알 리 없었다.

 

  눈을 떴다.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은 나지 않고 잠을 잔 것이 아니라 어떤 마법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시계를 보았고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급히 생각해내려 했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어떤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술에 취해 정신을 잃은 내 모습과 날 깨우고 있던 누군가였다. 조금씩 현실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난 마침내 오늘의 날짜와 요일을 생각해냈다.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함께 두통이 느껴졌다.

  몸을 일으켰다. 외투만 벗은 상태였지만 내 방, 재 이부자리가 맞았고 별다른 흔적도 없어 보였다. 한 가지, 아니, 꽤나 안타까운 건 시간이 이미 오후를 향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난 여행 준비를 서두를 수 없다는 것이다. 몸이 무거웠다. 겨우 이불 속을 빠져나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셨지만 속이 쓰렸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만큼 힘이 빠졌다. 난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어젯밤 일을 생각하니 머리는 더욱 아파오고 쓰라린 후회와 자신에 대한 원망이 밀려온다. 난 맹렬히 춥고 쾌청한 이 한 겨울의 주말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다시 구상해야 한다. ‘망할...........’

 

 3. 오! 나의 보디가드

 

  [연희야, 잘 지내고 있지? 미안. 엄마가 정말 미안해. 올 봄엔 꼭 한 번 보러갈게. 약속할게, 딸.]

  내 계좌로 30만원이 입금되었다는 알림 문자가 도착하고 약 십 분쯤 후에 엄마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왔다. 몇 개월만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어라 답 메시지를 보낼까 잠시 고민하고 있었다.

  “연희 씨, 밀당하는 거야? 뭘 그렇게 고민해? 튕기자 말고 받아줘. 남자 애태우지 말고.”

  오전 내내 무얼 하는지 책상에서 꿈쩍 않고 앉아있던 영업소장이 휴대폰을 붙들고 있는 나를 보고 말한다. 그 바람에 조용히 자기 일에 열중하고 있던 두 직원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나를 향한 그들의 시선에 거부감이 느껴졌지만 난 그냥 모른 척했다. 아랑곳 않고 휴대폰을 그대로 들고 있다가 내려놓았다.

 

  자꾸만 웅크리게 하는 추위보다도 하늘 위에 높이 뜬 밝은 해를 보기 힘들다는 게 더욱 싫다. 새벽 기운이 가시지도 않은 저녁 같은 아침에 이슬을 맞아가며 출근한 이후로는 줄곧 창문도 나지 않은 사무실을 지켜야한다. 퇴근시간엔 다시 깜깜한 밤이 찾아와 있었으니까.

  한 달 전, 이사를 한 이후로는 점심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닌다. 영업소장과 직원들과 먹은 식사 시간은, 왠지 겨우 주어지는 자유 시간을 억지로 강탈당하는 기분을 들게 하기 때문이었다. 일을 시작한 후로 처음 난 내 권리를 그들에게 요구했다. 오천 원 이하로 정해져 있는 점심값을 급여에 포함해 받기로 하고 난 사무실에서 혼자 먹는 도시락을 선택한 것이다. 그들은 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도시락이라기엔 마치 전투식량 같은 딱딱하게 식은 밥에 매일 반복적으로 먹는 밑반찬 두어 개가 전부였다. 난 그것을 전자레인지에 데우거나 뜨거운 물에 말아 천천히 음미하며 먹었다. 맛을 음미하는 것이 아니라 드디어 혼자가 된 사무실의 고요함에 드문드문 묻어나는 나만이 내고 있는 달그락 소리를 음미하는 것이었다.

  해가 바뀐 것과 함께 나에겐 약간의 변화들이 있었다. 스물일곱 살이 되었고 다시 혼자가 되었고 사는 곳과 공간이 바뀌었다. 일 년 가까이 연락이 없던 엄마에게서 문자 메시지도 왔다. 그를 볼 수 없게 된 후로, 그로부터의 딱 한 번 연락이 왔었다. [나 용준인데....... 잘 지내지?]. 문자 메시지로 도착한 그의 연락을 난 무시했다. 아니, 문득 느껴지는 반가움과 두근거림을 무시했다. 그리고 외로움에 조금씩 적응되고 있었다. 가슴 한 켠은 그랬다. 그가 있던 자리가 그새 흔적 없이 사라질 리는 없었다.

  그 자리는 비워져 있는 채 그대로 먼지가 쌓이고, 녹이 슬고 곰팡이가 피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평정심 속에도 가끔 쓰라린 무언가가 느껴지는 걸 보면. 하지만 적어도 이런 증상에 대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오직 시간이 약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 엄마가 보고 싶고 그가 그리운 건 사실이지만 그 이유는 모두 지나간 과거에 있었고 난 앞으로만 살 것이 분명하다. 엄마를 믿지 못하는 딸도 아니며 그가 그립다고 괴로워하거나 끊임없이 그의 행방을 궁금해 하는 나약한 나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이 가정했던 상황이 아니듯 피치 못하는 돌발 상황들에 난 부딪치고 있었고, 아직까진 크게 다치지 않고 가고 있다.

 

  “안녕하세요.”

  난 밝게 인사했다. 날씨는 추웠지만 추위 따윈 잊게 해주는 유일한 곳이었다. 사장님은 고개를 끄덕하며 나를 힐끗 보셨다. 나의 웃는 얼굴에 잠깐 멈칫하셨던 것이다. 꽤나 말씀이 없으신 분이지만 이번엔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시는 것 같았다.

  “좋은 일 있으신가 보네요.”

  큰 솥에 끓고 있는 국물을 커다란 국자로 휘저으시며 하신 말씀에 난 대꾸하지 않고 그저 표정을 유지한 채 주문을 했다.

  “저, 해장라면이랑 소주 한 병 주세요.”

  사장님은 또 한 번 고개를 끄덕하셨다. 사장님이 계신 주방 쪽 끝 테이블에 앉았다. 저녁 식사를 하러 왔지만 한밤중 같은 어둠이 이미 깔려 있다. 그리 밝지 않은 은은한 이곳의 조명은 오히려 저녁 식사 분위기에 더 알맞다. 저 큰 솥에서 끓고 있는 국물 덕분에 습도도 알맞고 작은 가게 안에서는 어떤 소리든 생생했다. 사장님의 칼질 소리, 그릇 소리, 보글보글 국물 끓는 소리, 후루룩 손님들이 라면을 먹는 소리들. 다른 식당이나 술집들과는 달리 사람들이 대화하는 소리도 간혹 들릴 뿐이다. 그것이 좋았다. 그다지 외롭지 않고 그냥 아무 시름없이 사는, 너무나 평범해서 이상적인 생활을 느끼게 해 준다.

  “감사합니다.”

  드디어 내 앞에 놓인 해장라면과 소주 한 병은 그 비주얼만으로 내 등을 토닥여 주는 것 같다. 나의 점심 도시락과 ‘골목라면’의 라면 한 그릇은 이렇게 내 친구가 되어 주었다.

 

  싼 집을 구하느라 버스 정류장에서 꽤나 걸어 들어가는 골목이었지만 맘에 드는 동네이어서 괜찮았다. 그럼에도 집에서 이삼십 미터 앞까지는 골목이 외져서 어두워진 후에는 조금 조심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평소보다 퇴근이 조금 늦을 때나 ‘골목라면’에서 식사가 늦어졌을 때에는 나름의 방법을 이용할 수 있었다.

  어디인지는 몰라도 나보다 조금 더 들어가야 하는 곳이 집으로 보이는 한 아이가 있다. 그 아이도 ‘골목라면’ 단골이었다. 퇴근 시간은 나보다 조금 늦는 듯 했다. 버스 정류장에 내려 난 그를 잠깐 기다리기로 했다. 처음엔 골목까지 뒤따라오는 그가 혹시 치한은 아닐까 잔뜩 겁을 먹고 집으로 달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그를 보디가드쯤으로 여기는 걸 그가 눈치 챌까봐 겁나기도 한다. 아무리 그 아이를 마주쳐도 난 끝내 모른 척하고 그냥 도움을 받기로 이기적인 마음을 먹었다.

 

  오늘은 그 아이가 술을 꽤나 마신 듯 했다. 가게를 나오면서부터 비틀거렸다. 골목을 들어서 집을 향해 갈수록 그의 다리가 그리는 갈지자는 점점 커졌다. 난 약 7, 8미터 후방에서 걷고 있었다. 그의 속도를 맞추려니 답답했다. 반 쯤 지나왔을 때, 난 그냥 그를 지나쳐 가기로 결심했다. 걸음을 재촉하고 그를 지나치려는 순간 그 아이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난 놀라 몸을 피하고 잠시 망설였다. 그는 곧 벽을 의지해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난 다시 가던 길을 가려했다. 어차피 집 앞이었고 아직 의식은 있어 보였다. 난 그를 앞질렀다. 골목엔 나와 그 아이 둘 뿐이었고 내 뒤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았다. 벽을 짚은 채 그는 꼼짝 않고 서 있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까만 골목길에서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난 그를 지켜보고 서 있다. 그냥 갈까 다시 망설였다. 밤공기는 너무 차가웠다. 하늘을 향해 입김을 뿜었다. 하늘에 별이 가득한 청명한 공기 속에 그와 나는 있었지만 너무 추웠다.

  기침 소리가 들렸다. 그는 크게 기침을 몇 번 하더니 구토를 하기 시작한다. 난 그를 향해 다가갔다. 여전히 벽을 짚은 채 힘들게 구역질을 해댄다. 벽을 짚은 마른 두 손은 빨갛게 얼어 있다. 억지로 몸을 가누려는 듯 떨고 있었다. 난 등을 천천히 두드려 주었다. 숨을 가쁘게 쉬면서 그 아이는 몸을 낮췄다. 난 오던 길로 급히 달려 내려갔다. 골목 끝에 있는 편의점으로 달려가 물 한 병을 샀다. 다시 그 아이가 있는 곳까지 왔을 때 그는 온 몸을 늘어뜨린 채 벽에 기대어 있었다.

  “아이 참......... 괜찮아요? 정신 차려 봐요..........!”

  그는 꼼짝 않고 있다가 다시 가쁜 숨을 쉰다.

  “정신 차려요! 이것 좀........ 이것 좀 마셔 볼래요?”

  그가 눈을 뜬다.

  “집이 근처에요? 근처인 건.......... 맞죠? 어디에요? 아이 참........ 경찰을 불러야 하나.......”

  난 휴대폰을 꺼내 보았다. 어떡할까 고민했지만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고, 그냥 주저앉아 그의 상태를 살폈다.

  나의 비밀 보디가드, 그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흐린 가로등 빛에 새하얀 얼굴이 더 하얗게 보였다. 골목의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날 만큼. 그의 언 손을 잡았다. 너무 차가워 놓을 수가 없어 두 손을 꼭 움켜쥐었다. 잠시 정신이 든 듯 실눈을 뜨고 있던 그는 커다란 숨을 내쉬며 다시 눈을 감는다. 그의 왼쪽 눈 끝으로부터 흐르는 눈물 한 방울이 어둔 골목을 비추는 별빛에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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