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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버닝러브
작가 : 에이슈
작품등록일 : 2017.11.17

사랑에 관한 것. 사랑은 세상 모든 일이다. 어떤 사람이든 어떤 사랑이든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는 것을 잘 모르고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인연은 랜덤이지만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끝까지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삶의 가치를 이야기 한다. 삶이 험하고 각박할수록 사랑을 더 많이 이야기하고 해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여행
작성일 : 17-11-17 13:03     조회 : 257     추천 : 0     분량 : 11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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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그리움은 습관일 뿐

 

  늘 습관처럼 아니, 지금까지 딱 3번, 실연의 아픔을 달래기 위한 혼자 여행을 찌질이처럼 해왔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장기 휴가를 매년 낼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 나의 비겁하고 못난 행동을 그런 식으로 스스로 용납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영태는 이런 내게 늘 말했었다. ‘이기적일 만큼 멍청한 놈’, ‘멍청할 정도로 이기적인 놈’이라고. 여섯 달 전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지방으로 떠나면서 내게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이기적이고 멍청한 놈이었는지 고해(?)하며 미안하다고 했다. 물론 난 그의 사과를 무시했지만.

  곽 사장님처럼, 그리움 따윈 떨쳐 버리려 애썼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른 아침, 출근길에 만났던 그가 더 이상 그곳엔 없었지만 바쁜 하루를 보내는 덕에 잠시 잊을 수는 있었다. ‘버닝 러브’에도 발길을 끊으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어찌어찌 한 해를 보내고 있었다.

  사흘 전, 분당의 한 주택지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한 번에 열여섯 채의 주택을 네 가지 타입으로 나누어 작업을 해야 했기에 양적으로 힘든 일이었다. 역시 잘 시간, 먹을 시간까지 투자해 가며 정신을 쏟았지만 꼼꼼히 포맷되어 있지 못한 내 정신 상태에 빈틈이 없을 리 만무했다. 시간이 부족했던 것일까, 그 작은 틈들로 스며들었던 그리움이, 정신을 놓아 버리자 쓰나미처럼 밀려들어 날 쓰러뜨렸다. 맘 놓고 그리워 할 자격조차 없는 내게 그는 형체 없이도 나를 또 찾아왔다.

  ‘망할....... 날 구속했다가 자유롭게 했다가, 무엇이 맞는 건지 헷갈리게 하는 너. 넌 날 아직 깨닫게 하지 못한 거야. 알게 해 줘. 난, 구속되든 자유로워지든, 어느 쪽이든 선택하고 싶어. 무엇이 좋은 건지 깨우치고 싶어.......’

 

  나만의 일상이 다시 찾아왔다. 온전히 혼자인 것이 처음은 아닐 텐데 혼자서 자신의 일상을 보내는 일이 이렇게 지겨운 일이었던가.

  낮이 짧아져 출근 시간을 조금 늦추었다. 당분간 출장이 있거나 큰 시공 계획도 없었다. 평소 집을 나서던 시각에 기상을 했고 편의점에 잠시 들러 우유와 샌드위치를 사고 나면 아홉시까지 출근이 가능했다.

  편의점에 도착하니 8시 30분이 채 되지 않았다. 우유는 이미 냉장고에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난 그 중 하나를 집어 오늘 날짜를 확인한 후 계산했다. 그곳을 나와 파라솔 아래에 앉았다. 아직 새벽안개가 다 걷히지 않은 상태였다. 파라솔 테이블과 의자에도 안개가 내려앉아 있어서 티슈로 닦고 앉아야 했다. 쌀쌀해진 날씨에 지나가는 사람들은 잔뜩 움츠려 있었다.

  한 가을 아침의 출근길, 차들과 사람들로 거리는 부산했지만 회갈색으로 변해버린 가로수 잎들이 그나마 땅에 떨어져 쌓이고 가지엔 반도 안 남은 상태였다. 사람들의 옷 색깔도 그 낙엽들과 비슷했거나 그 위에 내린 안개와 비슷했다. 입체감도 색채도, 어떠한 생동감도 느껴지지 않는 배경 속에 나는 있었다.

  난 우유를 따서 한 모금 마셨다. 차가워서 온몸이 부들거렸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찬 느낌에 소름이 끼쳤다. 왠지 배가 아플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남기지 않고 모두 마셔버렸다.

 

 35. 첫 여행, 아일랜드

 

  우유회사를 그만두었다. 공연을 비롯해 곡(‘버닝러브’의 곡 외 의뢰 곡 등)을 만드는 일, 간간히 들어오는 방송 섭외까지, 본업에 충실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오랫동안 해온 우유배달을 그만둔 데에 대한 서운함이 컸지만 온전히 음악에 집중할 수 있다는 건 좋았다. 또는 음악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지만 그 때가 그립기도 했다.

  나는 내 자신을 잘 알아도 모른 척 했거나, 잘 모르는데 아닌 척 한 것이었다. 그가 그새 내 안에서 사라질 리 없었다. 만약 그의 마음을 알았다면 지금 난 모른 척, 아닌 척은 안 해도 되었을 텐데, 난 끝내 그의 마음을 확인하지 못했다. 사실은 늘 그랬었는지도 모른다.

 

  말자 누나랑 은수와 싱글 발매시기와 공연 등 공식 일정에 관련된 일들을 상의했다. 뭐, 그렇게 바쁜 건 아니었어도 딱히 쉬는 날도 없이 일해 온 건 사실이었다. 말자 누나는 여러 가지 변화에도 불구하고 늘 같은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난 그것이 포커페이스라고 단정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조금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고, 은수는 그야말로 격변의 캐릭터였다. 가끔 그녀에게서 은복이의 모습이 겹쳐지곤 했다.

 

  “언니, 12월이면 좀 여유를 가져도 되지 않을까요? 건이도, 저도 이미 곡 작업은 후반만 남겨두고 있고....... 언니만 잘 하면 되는데.......”

  말자 누나의 눈치를 슬슬 살피며 은수는 능청스럽게 말을 꺼냈다. 꼭 은복이의 모습이다.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거야?”

  말자 누나가 기타를 튕기며 말했다.

  “우리 거의 일 년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했어요. 뭐, 내가 힘든 건 아닌데....... 건이 좀 봐요. 전보다 더 말라가지고....... 혈색도 없고....... 우리 건이, 딱해 죽겠어.”

  볼수록 신기했다. 은수의 처세랄 수 없는 저 능청이 나를 당황하게 했다.

  “건아! 넌 좀 쉬어. 그나마 날씨 좋을 때 여행이라도 좀 하고, 평소 하고 싶었던 것들도 하고....... 다음 달 중순까진 스케줄 안 잡을게.”

  말자 누나가 내게 말했다.

  “언니....... 은복이가 지난여름 휴가 때 못 쉬었다고....... 이번에 이틀 휴가 냈대요. 같이 놀아달라고 전화 왔었는데....... 저도 그럼 휴가 갑니다!”

  은수가 말했다.

  “걘, 걘 왜....... 너한테 놀아달라니? 미친년....... 아휴, 미친년들!”

  말자 누나가 말했다.

  이렇게 우리는 일 년여 만에 각자의 휴가를 가지기로 했다. 은수는 무척 좋아했다. 하지만 난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음악이 딱히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탓인지 휴가가 내게 어떤 의미가 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이 다시 주어졌다는 것, 난 이 시간을 어떤 생각과 행동들로 채워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눈이 가는대로, 발 길이 닿는 대로 갈까 생각했다.

 

  그 동안 번 돈을 털어 아일랜드 행 티켓을 예약했다. 여행은 처음이나 다름없다. 말자 누나가 허락한 한 달이라는 시간, 난 여전히 연습실을 오가며 가사를 쓰고 편곡하는 일을 하며 며칠을 보냈다. 허나 아무래도 한 달 동안을 이대로 견딜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늘 동경했던 곳, 그곳에 가면 지금과는 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배낭과 간편한 캐리어, 그리고 기타. 말자 누나와 은수에게 문자 메시지로 돌아올 날짜를 알려주고 나서 난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 직원의 도움을 받아 티켓팅을 하고, 오후 12시 40분, 마침내 난 아일랜드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설레기도 하면서 기분이 묘했다. 이륙 전 창밖으로 보이는 공항 대낮 풍경이 평범했지만 벌써 이국적으로 느껴졌다. 사실, 이국적이라기보다는 꿈결 같았다.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리는 꿈, 또는 현실. 비행기는 서서히 이륙을 시도하며 활주로를 향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굉음과 함께 내달리며 떠오르기 시작하는 비행기로부터 내다보는 바깥풍경과 기내에서 들려오는 안내방송, 차분히 앉아 잠을 청하기 시작하거나 신문과 책을 펴는 승객들. 저들은 각자 어떤 목적으로 이곳에 모였을까. 누구를 만나기 위해, 혹은 무슨 일을 하기 위해 이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까. 떠오르는 여러 생각들이 생소하다가도 문득 그의 표정, 그와 함께였던 장면들이 머릿속에 스칠 때면, 마치 실컷 꿈을 꾸다가 발을 헛디뎌 움찔거리며 잠이 깨듯 꿈과 현실을 유리문 하나로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았다. 난 아예 꿈을 꾸기로 마음먹고 잠을 청했다. 깨지 않기를 바라며.

 

  잠이 깨고 나서 생각하니, 꿈속에서도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장시간의 비행이 생각보다 지겹게 느껴지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열 두 시간이 지나 있었고, 곧 영국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다. 처음 밟는 낯선 땅. 낯선 간판들과 냄새, 피부색과 언어가 다른 많은 사람들, 그 낯섦에 난 열 세 시간 전 그곳에 두고 온 나를 회상했다.

  히드로 공항에서 환승을 해, 다시 한 시간여를 날아 마침내 더블린에 도착했다. 그 순간부터, 자동적으로 내가 예전부터 상상해오던 그곳과 지금 이곳을 대조하고 있는 나를 깨닫고 곧 아무 생각하지 않으려 걸음을 멈추고 머리를 흔들었다. 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곳에 왔는가를 상기했다. 용기 내어 뭐든 부딪쳐 보리라 다짐했다.

  공항을 나오니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침의 광경은 분주하면서도 안개 탓인지 공기는 회색을 띠었고 축축했으며, 그 배경 속에 오가는 사람들도 모두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한 쪽엔 캐리어를 한 쪽 어깨엔 기타를 매고 안개비를 맞으며 택시 승강장 앞에 서 있었다. 입구나 출구, 택시 승강장임을 알리는 표지판들과 간혹 들려오는 강한 억양의 영어, 그리고 택시의 모양과 색깔이 나를 조금은 긴장하게 만들었다. 깊은 숨을 뱉었다. 뿌연 입김이 흩어졌다. 하얀 물감이 번지듯 난 그 배경 속에 스며들었다.

  곧 빨간 색 택시 한 대가 내 앞에 멈춰 섰다. 그러자 온갖 무채색의 배경 속에 가로등 조명을 받은 택시는 유일하게 색채감을 띄었고 나는 그 안에 몸을 실었다. 이렇게 난, 꿈 같이 희미한 이 공간을 꿈이 깨듯 벗어났다.

 

 36. 세상에서 가장 편한

 

  은복이가 외곽으로 이사를 간 탓에 자주는 아니어도 이젠 가끔 만날 수는 있었다. ‘버닝 러브’ 공연에 대한 이야기나, 은복이에게 이야기 해주고 싶을 만한 작은 일들까지, 난 그녀에게 전활 걸어 수다를 떨었고 그녀는 들어주는 입장이었다. 가끔 내가 말자 언니의 흉을 볼 때면 은복이는 받아주면서도 은근 말자 언니의 역성을 들기도 했다.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달라도 너무 다른 예전의 은복이가 아닌 지금의 그녀가 어색했다. 예전의 그녀가 그립기도 했지만 마냥 나 혼자서 그리워하기엔 일 년 동안 지내 온 시간의 두께가 너무 두터웠다.

  여백을 남기지 않고 과감히 채워 나가니까 뭔가 실체가 나타나긴 하는구나....... 하는 작은 깨달음도 있었다.

 

  다음 앨범에 대한 기획을 마쳤다. 공연과 예정되어 있던 스케줄도 모두 소화했다. 일 년을 그렇게 보내고 잠시 작은 틈이 생겼다. 그 때, 무언가 공허한 것이 느껴졌던 것 같다. 오히려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고 무얼 해야 할지 모르고 있던 그 순간이 견디기가 더 힘들었다. 난 은복이에게 전화를 해서 휴가를 제안했고 그녀가 받아들였다. 그렇게 은복이를 만난 지 5년 만에 사적인 시간을 둘이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구체적인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난 아무 생각 없이 마음 가는대로 행동했고 다행히 은복이는 내 마음을 따라와 준 것이다.

 

  많은 변화를 겪은 ‘버닝 러브’이지만, 이건이는 오히려 그렇지 못한 것 같았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의 웃음과 눈물을 난 모두 보았다. 변치 않을 것만 같았던 그의 눈빛은 다시 차갑게 식어 있다. 마치 처음 그를 만났을 때처럼. 아무 것도 모르는 듯, 또는 아무 것도 알고 싶지 않은 듯 그의 두 눈은 빛을 잃었고 몸은 더 말라 있었다.

  그의 그런 눈빛은 나를 잠시 다시 흔들기도 했다. 내가 처음 그에게 가슴 뛰었던 그 때처럼. 안아주고 싶었지만 이젠 그럴 수 없다. 그냥 지켜 볼 뿐이었고 난 그가 자신을 괴롭히는 그 어떤 상황을 빨리 벗어나기를, 그리고 내가 그런 그를 벗어나기를 바랐다.

  난 그 날 이후, 매일 집보다 더 오래 머물렀던 연습실을 벗어났고 은복이를 만나러 갔다. 세상 가장 편한 친구를 만나, 스물네 살에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경험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말자 언니는....... 나 따위가 걱정할 필요조차 없는 존재일 것이다. 무얼 하고 다니다 돌아오건 늘 같은 곳에서 마치 어제 만났던 사람처럼 내게 눈길조차 돌리지 않고, 공연 벽보 한 뭉치 던져 줄 테지. 돈을 양껏 벌어도 또 시장 통 백반 집에서 삼천 원짜리 백반을 먹게 하면서.

 

 37. 두 사람

 

  생전 처음인 이곳이 편할 리는 없다. 그래도 난 최선을 다해 오래 있어보려 했다. 첫날은 인터넷에서 온갖 정보를 뒤적거리며, 가 볼 곳과 해볼 만한 일들을 알아보았다.

  호텔에서 나와 무작정 걷다가 낯선 건물들을 안팎에서 구경도 해 보고, 사람들이 적어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 브런치를 먹기도 했다. 비가 오면 맞거나 건물 안에서 잠시 피하다 보면 다시 개이곤 했다. 처음엔 사람들이 두렵게도 느껴졌지만 작은 펍에서 몇 번 맥주로 목을 축이고 나면 다시 마음이 편해지기도 했다.

  두 번째 호스텔이 있던 작은 동네의 펍을 찾았다. 처음 머물렀던 곳에 비해 조용하고 사람들도 친절했다. 대화가 매끄럽진 않았어도 펍의 주인은 내게 관심을 보이며 어디서 왔는지, 무얼 하는지, 왜 이곳에 왔는지 등에 대해 또박또박 천천히 물어봐 주었다. 난 간단히 대답하면서 그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펍 주인은, 우리나라에선 통할 것 같지 않은 시덥잖은 농담도 곧잘 하긴 했는데 친절해 보이는 아저씨였다. 맥주 맛은 씁쓸했다.

 

  반대편 바에서 손님들에게 맥주를 가져다주시던 주인아저씨가 내게 다가왔다. 그는 눈동자를 굴리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내 앞에서 머뭇거리더니 내게 물었다.

  “미안하지만, 저 쪽 손님들이 묻는데....... 친구가 혹시 필요하냐고........ 꼭 대답할 필욘 없어요.”

  나는 당황스러웠다. 일을 마치고 한 잔 하러온 동네 주민들로 보였다. 삼십대 초중반 정도로 보였지만 쉽게 나이를 가늠하기는 어려웠다. 주인아저씨의 물음에 내가 그 쪽을 쳐다보자, 그 두 남자들은 나를 향해 맥주잔을 들어 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난 주인아저씨에게 말했다.

  “제가 영어를 잘 못해요. 괜찮을까요?”

  주인아저씨는 왼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반대편 손님들에게 내 말을 전했다. 그러자 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론.”이라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곧 그들은 내가 있는 쪽으로 자리를 옮겼고 거의 비운 내 잔을 가리키며 주인아저씨에게 한 잔을 더 주문했다.

  “재패니즈?”

  짙은 갈색머리에 턱수염이 조금 나 있는 남자가 내게 물었다. 난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했고, 흰 셔츠에 금발 곱슬머리가 인상적인 또 다른 남자가 말했다.

  “한국인? 오....... 내 아내가 한국인 친구를 가지고 있어. 꽤나 부지런하면서 수다스러운, 다정한 여자야....... 아, 왠지 친근한데?”

  두 남자는 의외로 상냥해 보였다. 내가 잘 알아듣도록 천천히, 쉬운 말들로 이야기해 주었다.

  “나는 잭, 이쪽은 이안. 네 이름은?”

  갈색머리에 턱수염 남자가 물었다.

  “이건.”

  난 대답했다.

  “이건? 이건....... 반가워. 아일랜드에 온 걸 환영해.”

  잭은 내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까부터 보니까, 그냥 네가 이곳에 처음 온 것 같아 보여서....... 궁금하기도 하고 뭔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잭이 내민 손을 잡지 않고 바라보고 있는 내게 이안이 천천히 말했다.

  “나는 가구를 디자인하는 일을 하지. 주로 소파나 의자를........ 이 친구는 식품화하기 위해 식용 식물을 연구하는 일을 하고. 너는?”

  잭이 말했다. 그러자, 곧 이안이 말했다.

  “아! 내가 맞춰 볼까? 왠지 알 것 같은데........ 음악? 노래나 연주. 기타? 드럼? 아니면 바이올린이나.......”

  두 남자는 조용히 내 반응을 살폈다. 난 두 사람의 눈길에 당혹스러웠지만 곧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기타....... 어떻게 알았어?”

  내가 물었다. 두 사람은 하이파이브를 하며 어린아이처럼 내 직업을 맞췄다는 것에 무척 기뻐했다.

  “그럼....... 여행 중?”

  잭의 질문에 난 또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오는 여행객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래. 음악여행이랄까? 이곳 출신의 뮤지션들이 많으니까. 과거나 현재나 그 정취들이 이곳에 남아있어. 하지만 무엇보다 네 얼굴에 쓰여 있어. ‘뮤지션’이라고.”

  이안이 말하자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해맑게 웃었다.

  “그래?”

  나도 그들과 함께 웃었다. 이 펍에 들어오길 잘 했다고 생각했다. 잭과 이안과의 대화가 즐거웠다. 두 사람은 서로 이야기를 하다가도 내게 끊임없이 질문해 주면서 대화를 주도해 나갔다. 처음엔 쓰디썼던 이곳의 맥주도 이젠 향긋하게 넘어갔다.

  “어디에 머무르고 있어?”

  잭이 내게 물었다.

  “바로 옆에 있는 호스텔.”

  난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음....... 혹시, 주말까지 여기 있을 예정이면 우리랑 시내 구경 안 갈래? 거리 뮤지션들이 버스킹을 하는 곳도 있거든.”

  이안이 내게 제안했다.

  “음....... 좋아!”

  난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두 사람은 내 대답을 듣고 나서 서로의 스케줄을 맞추었다. 둘 만의 대화이었기에 말의 속도가 조금 빨라졌지만 쓴 맥주에 취해서인지 그들의 대화가 곧잘 귀에 들려왔다.

  “음....... 토요일 오후부턴 올리버와 베니랑 놀아주기로 했어.”

  이안에 말했다.

  “그럼 토요일 오전은 어때? 이건과 브런치 먹고, 시내 걷고, 버스킹도 보고....... 네 약속 시간에 헤어지는 걸로.”

  잭이 제안하자 이안은 바로 “좋아.” 라고 대답하고 내게 방금 정한 계획을 전해주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토요일 오전?”

  내가 선수를 쳤다.

  “오! 맞아. 토요일 오전. 이 펍 앞에서 만나자. 여기서부터 걸어가면 될 거야.”

  이안이 말했다. 우리는 이렇게 약속을 했다. 그러고 나니 왠지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결혼 했어?”

  내가 질문했다. 좀 전에 이안이 누군가와 놀아줘야 한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서였다. 두 사람은 내 질문에 서로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잭이 말했다.

  “아직. 글쎄....... 지금은 그냥 같이 살고만 있어.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해.”

  잭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보며 말했고 이안은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 때, 난 내가 질문을 잘못했거나 그들이 잘못 알아들은 것임을 깨달았다.

  “아........ 아까 올리버, 베니.......는.......”

  내가 머뭇거렸다.

  “결혼은 했었지. 하지만 지금은 이혼한 상태야. 주중엔 잭과 지내지만, 주말엔 아이들과 보내고 있어. 그들이 성인이 될 때까진 그러는 게 좋으니까.”

  이안이 말했다. 그러자 잭이 그의 손을 꼭 잡았고 두 사람은 곧 손깍지를 끼었다.

  “행복해?”

  예상치 못했던 그들의 관계에 잠시 당황했던 것인지, 아니면 부러웠던 것인지, 난 그들을 향해있던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는 물었다. 내 눈앞에 펼쳐지지는 않았지만 “물론!” 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대답하는 그들의 모습이, 그 목소리와 어투가 몹시 아름답게 느껴졌다.

  펍을 나와, 잭과 이안과 헤어진 후 호스텔로 돌아왔다. 잠이 들기 전까지,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을 때까지 어젯밤 그들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큰 한숨으로 생각을 환기했다. 시계를 보니, 이미 9시가 넘어 있었다. 난 씻고 나와 기타를 튜닝했다.

  10시를 5분정도 남기고 난 기타를 매고 방을 나섰다. 설레었다. 그들을 다시 만난다는 것, 그들과 함께 시내관광을 한다는 것과 거리 공연을 볼 수 있다는 것 모두가 내겐 설레는 일이었다.

  계단을 내려와 호스텔 건물 밖으로 나왔다. 하늘엔 구름이 빈틈없이 끼어 있었지만 공기는 나쁘지 않았다. 펍 앞엔 아무도 없었다. 잠깐 불안감이 느껴졌다. 곧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약 20미터 전방에서 두 남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잭은 검은 테 안경을, 이안은 선글라스를 쓴 모습이 어제와는 달랐다. 왠지 지난밤 보다 젊어 보이고 멋져 보였다. 두 사람은 서로 대화를 나누며 걸어오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손을 흔들며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안녕? 이건. 지난밤엔 잘 잤어?”

  잭이 무척이나 반가워하며 내게 인사했다.

  “물론.”

  난 대답했다.

  “자! 이제 갈까? 오늘은 우리가 너의 여행 가이드야! 하하하, 재밌겠는데?”

  이안이 신이 나서 말했다.

 

  우리 세 사람은 동네를 벗어나 계속 걸었다. 나를 가운데 두고, 두 사람은 걸으면서 내게 이곳저곳을 소개해 주었다.

  그라프톤 스트릿에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로 거리에 활기가 느껴졌다. 날씨도 따라 주었다. 조금씩 파란 하늘이 구름사이에 나타나고 있었다. 잭과 이안은 자신들이 자주 가는 식당이라며 작은 가게에 들어가 내게 브런치를 대접했다.

  식사를 하고 나오자, 아까보다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오가고 있었다. 난전 장사를 하는 사람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악기를 들고 자리를 잡는 버스커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여기서, 이렇게 그림과 난전들을 구경하다 보면 뮤지션들이 버스킹을 하곤 하지. 공연도 관람하고....... 이건, 어때? 너도 한 번 해 보지 않을래?”

  이안이 갑작스럽게 제안을 했다.

  “오, 좋은 생각이야. 넌 기타를 가지고 있잖아. 여기서 네 음악을 한 번 소개해봐!”

  잭이 옆에서 부추겼다.

  “글쎄........ 내가 해도 되나?”

  난 머뭇거렸다.

  “물론이지! 우리가 호응해 줄게!”

  난 그들이 그냥 한 번 제안해 본 거라 생각했다. 정말로 실행에 옮길 줄은 몰랐다. 건너편에서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한 뮤지션에게 두 사람은 다가갔다. 그들은 내겐 잘 들리지 않는 대화를 몇 분간 나눴다. 곧, 잭과 이안이 내게 돌아왔다.

  “좋아! 저 사람은 ‘휴’라는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인데, 우리가 너를 소개했어. 자신이 먼저 한 곡을 부르고 다음 순서를 너한테 넘겨주겠대. 그러면 네가 가서 공연하면 돼.”

  이안이 말했다.

  “정말? 아....... 정말 내가 해도 되는 거야?”

  “물론이지!”

  두 사람은 또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난 조금은 망설여졌지만 못 이기듯 기타를 꺼냈다. 그리고 우리는 ‘휴’의 노래를 감상했다. 인상적인 곡이었다. 반복적이고 단순하면서도 뭔가 암울한 가사를 담고 있는 듯 했다. 강한 아이리시 발음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잠시 긴장했던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휴’의 공연이었다.

  그의 공연이 끝나고 내가 멈칫거리자, ‘휴’는 매고 있던 기타를 정리하며 주변에 모여 있던 관객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다음은 한국에서 온 한 뮤지션이 노래해 주신다고 합니다. 이름이 뭐죠?”

  ‘휴’는 나를 보며 물었다.

  “어....... 이건.......”

  당황한 나는 대답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잭과 이안이 손가락 휘파람을 불고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관객들도 그들을 따라 하나둘 호응해 주었다. 얼핏 봐서 스무 명이 채 안 될 것 같은 관객들이었지만, 암만 둘러봐도 동양인은 나 하나뿐이었다. 그래서인지 무심히 지나가던 행인들도 내게 시선이 향하고 있었다. 난 긴장되었다. 천천히 앞으로 다가가 ‘휴’가 앉아있던 의자에 앉았다. 기타를 잡자 사람들은 내게 집중했다. 난 짧은 전주 뒤, 노래를 시작했다. 거리의 소음에 내 노랫소리가 묻힐 거라 생각했는데 나도 관객들도 이 작은 공연에 집중하자,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크게 울려 퍼졌다. 기분이 묘했다. 난 곧 노래에 빠져들었고 사람들도 그런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신기하고 짜릿했다. ‘11월’의 느낌이 진하게 전해졌다. 그 어느 때보다도.

  난 눈을 감았다가 기타 솔로에서 잠시 눈을 떴다. 꿈을 꾸듯, 낯선 장소와 흰 피부에 파란 눈의 관객들이 슬로우 비디오로 눈앞에 펼쳐졌다. 잭과 이안이 진지한 표정으로 내 노래를 듣고 있었다. 난, 두 사람 사이에 낯익은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검은 머리에 구릿빛 얼굴....... 눈에 띄는 단 한 사람의 동양인이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11월’의 후렴을 이어가며 난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내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느꼈다. 기분이 좋아졌다. 가슴이 뛸 만큼. 다시 눈을 감아도 그의 모습은 그대로 내 앞에 있었다.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나를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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