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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이제는 지나간 것들에게
작가 : 은호
작품등록일 : 2017.10.28

"엄마의 새 남편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이름과
이제는 식어버린 이름
가까이 있어도 이해하지 못 했던 이름들에게 보내는 이야기

 
1부_11회
작성일 : 17-11-17 11:40     조회 : 241     추천 : 0     분량 : 7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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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이런 걸 꼭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야?”

  “가끔은요.”

  “남자친구한테도 그랬어?”

  슬슬 엄마가 우리를 찾을 타이밍이라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참이었다. 우리 사이에 남자친구가 언급된 것은 내가 성질을 부렸던 그 날 이후 처음이었다. 그때만큼 ‘화’는 나지 않았다. 다만 그 크기만큼의 마음이 돌덩어리처럼 무겁게 가라앉았을 뿐.

  “남자친구는 제가 처음이래요.”

 단지 그렇게 대답했다.

  층계를 다 내려와서 사방을 둘러보니, 엄마는 으레 그렇듯이 나이 많고 고리타분해 보이는 사람들과 모여서 대화하고 있었다. 콧잔등에 주름을 지으며 한껏 미소를 짓는다. 엄마가 이 남자에 대해 다 알면서도 결혼을 했단 걸 알자, 새삼 대단해 보였다. 저 미소에 감춰진 속은 과연 어떨까. 내 엄마지만 모르겠네.

  엄마는 우리를 발견하자 금세 자리를 옮겨 다가왔다. 나보다는 옆에 선 그에게 할 말이 있어서였지만.

  “자기, 최영태 편집장님 알죠? 이번에 문예지 하나를 새로 기획한다고 하더라구요. 방금 만났는데, 오늘 저녁 같이 하면 어떠냐고 했어요. 또 워낙 당신 팬이잖아요 저 양반. 같이 이야기 좀 나눠주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러자 그는 잠시 고민하는 것 같다가 “알겠어요. 그러죠.” 라고 했다. 엄마가 반색하고, 곧 나를 본다.

  “두리는 어떻게 할래? 같이 가도 되고. 근데 너 성격에 불편해할 거 같긴 한데….”

  “나는 먼저 집에 가지 뭐. 거기 있어봐야 할 것도 없고.”

 약간의 아쉬움은 있지만, 엄마 말처럼 불편하게 저녁시간까지 빼앗기느니 이쯤에서 빠지는 게 좋겠다. 조금 걸어 나가면 버스 정류장도 있으니까. 엄마는 편한 대로 하라며 기억을 되짚어 지하철역으로 가는 버스 노선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역까지 차로 데려다주고 오죠. 날씨가 추워서 걸어 나가기도 그럴 텐데.”

  “음, 그럼 되겠네. 지금 갔다가 오면 시간 적당할 것 같아요. 고마워요 부탁할게요.”

 그때 그가 내놓은 제안에 나의 의사는 상관없이 그렇게 결정되었다. 불만은 아니다. 엄마는 ‘집에서 보자, 딸.’ 하고 한껏 미소를 지어주면서 다시 자리를 떴고 그는 나를 내려다보며 나가자고 했다.

 

  그를 따라서 차가운 바람을 뚫고 정원을 가로질러 주차장으로 간다. 역시 따스한 햇볕이란 건 안에서 볼 때에만 유효했다. 밖에선 날카로운 추위 속에 눈만 부실 뿐. 그의 등을 보고 걷는다. 세찬 바람에 그의 머리카락도 조금 흐트러졌다. 바삭바삭하게 마른 억새들이 스러지는 소리가 난다.

  싸늘한 차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옆에 그가 탄다. 아무 향도 나지 않아 이상했다.

  “어차피 지하철역도 여기서 가깝지 않아요?”

  “10분쯤.”

  “가깝네.”

  “아쉬워?”

 맘대로 생각하라지. 그가 늘 그러는 것처럼 나도 웃기만 하고 대답은 안 했다.

 

  역은 금방 나타났다. 금촌 역인가. 시내라서 역사는 번듯하게 유지되고 있었지만 주변은 황량했고. 주말인데도 거리에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감사합니다.”

  “가는데 오래 걸릴 텐데.”

  “드라이브하는 셈 치죠.”

 서울까지 멀면 얼마나 멀다고. 그리고 대부분이 지상 구간이다 보니 심심치 않을 것이다. 대충 대답하고서 벨트를 푸는데 턱 언저리에 그의 손가락이 와 닿았다. 전혀 힘이라곤 들어있지 않은 손길이었지만 그것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그는 부담스러우리만치 빤히 사람을 본다.

  점점 더 나는, 당신에게 그저 지나가는 이름이고 싶지 않다.

  “…다녀오세요.”

  “저녁에 보지.”

  “네?”

 내리다가 멈췄는데, 그냥 있다가 보자-는 식의 인사가 아니라, 제안이나 약속을 하는 투로 들렸던 것이다. 그는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네…뭐, 집에서 봬요.”

 조수석문을 닫자 차는 출발했다. 멀어지는 것을 보다가 한기를 느끼고 서둘러 역사로 향했다.

 

 

 

  “나빴네.”

  내가 나에게 한 말이다. 나 외엔 그 말을 들을 사람도 없었다. 왜냐, 빤히 해가 떠 있을 적에 집에 와 놓고 남자친구에게는 문자 한 통 하지 않았으니까. 핸드폰도 일부러 저만치 치워버렸다.

  우리가 함께한 것도 벌써 3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나를 사랑해서 결혼까지 생각하는 남자를 옆에 놔두고 마음에는 다른 사람이 끼어들 틈을 남겨놨던가. 그러나 이런 생각과는 별개로 심장은 뛴다. 자책하는 머리도 설레는 가슴도 둘 다 나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설레는 쪽이 더 좋다.

  이런 저런 생각이 더 깊어지려던 찰나, 그로부터 간신히 벗어난 것은 아래층에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 덕분이었다. 언니는 어차피 늦게 온다고 했으니까. 아마도 엄마가 돌아왔을 것이다. 내려간다. 다녀오셨어요-늘 하던 대로 인사를 하고. 엄마는 약간 피곤한 톤으로 잘 있었니-? 인사를 받고. 금동이는 어디선가 쪼르르 달려 나와서 주변을 기웃거리고. 전혀 달라진 게 없었지만, 뒤따라 들어오는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에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

 

  밤이 되어도 통 잠이 오지 않아. 억지로 눈을 감으면 온갖 생각이 피어오르고, 눈을 뜨고 핸드폰 화면으로 시간을 확인하길 수차례. 내일은 월요일이고 종강일이긴 하지만 1교시 수업이니까 어떻게든 2시 전에 자보려고 뒤척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핸드폰 진동이 침대를 타고 울려서 깜짝 놀랐다. 자긴 글렀구나, 누구람.

  정말로 자긴 글렀네. 잠은 완전히 달아났다. 인천에 가던 날 번호를 알려주긴 했지만, 그가 내게 문자를 보낸 것은 처음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연락을 한 게 처음이라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자나?’

 목에 쿵쾅거리는 맥박이 느껴졌다. 가슴께가 간지럽다. 잠시 기다렸다가 답을 보냈다.

  ‘아직이요.’

  ‘안 졸려?’

 아니, 자기가 다 깨워놓고. 입 꼬리가 나도 몰래 애매하게 올라간다. 괜찮아요-라고 보냈다. 겨우 벽 두 개를 사이에 두고 이렇게 간접적으로 소통을 해야 하나.

  ‘안 졸리면 잠깐 건너올 수 있나?’

 …잠시 생각했다.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섰다.

 

  조심스럽게 어두운 복도로 나오자 그의 방 문틈 사이로 가느다란 빛줄기가 보였다. 웬일이람. 문을 열기 전에 머뭇거렸다. 그가 어떻게 하고 있을지 몰라서. 그래서 아주 살짝 노크를 하고 문고리에 힘을 실어 소리 나지 않게 열었다.

  그는 책상에 기대어 서서 출력물을 들고 읽고 있었다. 먹색 트레이닝 바지에 흰색 티셔츠, 전에 입었던 남색 가디건 차림이, 곧 잠자리에 들 사람 같진 않았다. 서 있을 때 손은 꼭 윗옷 말고 바지 주머니에 넣고 있다. 코에 걸쳤던 뿔테 안경을 벗는다.

  “아직 안 주무셨어요?”

  “에세이 연재를 하게 돼서. 열일 중.”

 열일이요? 어울리지 않는 표현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문을 꼭 닫고 완전히 들어왔지만 마땅히 뭘 해야 할지 몰라 우물거렸다. “저는 왜….”

  “잠 안 오면, 초고를 한 번 읽어줬으면 해서.”

  “제가요?”

 의아했다. 내가 글을 볼 줄 아는 눈이 있는 건 아닌데.

  “엄마나…담당자가 더 잘 알지 않을까요?”

 그는 한숨처럼 웃으며 내게 다가와 손에 들고 있던 출력물을 내밀었다. 원고였구나. 일단 받아든다.

  “제목은 없네요?”

  “아직 안 정했어.”

  “주제는 뭔데요?”

  “마음대로 해도 되지만 어릴 때 이야기나, 가족 이야기 위주로 써달래.”

 진부하네. 그의 손에 이끌려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나를 마주보며 그는 침대에 걸터앉고, 약간은 쑥스러운 듯 겸연쩍은 미소를 짓고 눈을 돌린다. 야심한 밤에 한 방에 앉아서 원고를 읽는 이 건전한 풍경이 어색하지만. 조심스레 첫 문장을 읽어본다.

 

 

 

  [“일은 잘 돼 가니?”

  어머니가 지나가던 나에게 물었다. 세차게 마당을 적신 장맛비가 그칠 무렵에 어머니는 대청에 앉아 계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5주기가 되는 날의 아침. 마감을 끝내고 전날 자정이 넘어서야 고향집에 도착한 터라 피로가 채 가시지 않은 데다, 작년 오늘 이후 딱 1년 만에 온 집이 편하지만은 않아서 ‘그럭저럭요’라고 짧은 대답만 했다. 방으로 들어가려던 나를 어머니의 목소리가 다시 불러 세웠다.

  “수국이 왕창 피었어.”

 왕창이라니. 어머니는 나를 돌아보곤 당신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미소 띤 얼굴은 힘이 빠져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어머니는 언제나 편안함과 외로움의 틈에 계신 것 같았다. 못이기는 척 옆으로 가 앉았다.

  찬데 이렇게 앉아 계세요?

  “여름이잖아. 시원하고 좋지 뭐.”

 그에 군말 않고 마당 한구석에 무성히 피어난 수국 무리를 가만히 바라봤다. 여린 푸른색의 꽃 덩어리가 이따금씩 떨어지는 빗물에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산성을 띠는 토양에서 자라야 파란색이 된다고 했던가. 그나저나 언제부터 이 집에 수국이 있었던가.

  원래 있었어요?

  “저거? 아버지가 사다 심었잖아. 돌아가시기 반년 전쯤.”

 아버지가? 5년도 더 넘게 수국 나무가 있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아버지가 직접 꽃나무를 사고 심기까지 했다는 사실은 더욱 뜻밖이었다. 건강하실 때조차 그런 일은 하신 적이 없거니와, 애초에 꽃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분이었다. 내가 알기론 어머니에게도 꽃다발 한 번 갖다 준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라면 모르겠지만.

  “저거 심으면서 아버지가 뭐랬는지 알아?”

  뭐라셨는데요?

  “이거 꽃말이 변덕이랑 진심이래.”

 아버지를 흉내 내려는 듯 어머니는 목소리를 한껏 깔았다. 변덕과 진심이라니. 전혀 다르면서도 하나의 맥락인 것 같은 단어가 이상하다. 아버지가 그런 건 또 어떻게 아셨을까. 화원 주인에게서 주워섬겼겠거니 짐작했다.

  “그러더니 이건 나한테 주는 거니까 잘 키워보래. 아니 자기가 샀으면 자기가 키워야지 뭐라는 거야…. 그 이후로 건강이 훨씬 나빠져서 끝내 내 몫이 됐지 뭐. 관리하기도 엄청 까다로워. 물을 안 주면 바로 축축 처지고 계속 주면 또 썩어버리고. 매년 꽃 보기도 어려운 걸 잘 키워보라 하고는 갔어. 정말 끝까지 귀찮은 양반이야.”

 어머니는 불만을 줄줄이 쏟아놓고는 흠흠 웃었다.

  “어떻게 꽃 하나를 사도 자기랑 똑같은 걸 데려오는지.”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았다. 가장의 의무를 소홀히 하진 않았지만 남편으로서의 의무는 저버린 사람이라고 어린 마음에도 그렇게 느꼈다. 그 덕에 어머니는 항상 혼자였고, 어쩌다 아버지가 집에 있는 날 조차 그 수발을 드는 것 외엔 대화 한 번 없었다. 자식이라곤 아들 하나. 그 아들이 딸처럼 살가운 성격이었더라면 그나마 위로가 되었을 텐데, 나에겐 그런 기질이 조금도 없다. 그걸 진작 알아치리신 어머니도 당신이 가진 적막함을 내비치신 적이 없었다. 지금도 선한 풍경은, 내가 학교에서 돌아와 문을 열고 들어서면 텅 빈 집에 앉아 있던 어머니는 외로움 따위 모르는 얼굴로 웃으며 나를 맞이하고, 그 앞에서 나는 무뚝뚝하게 방으로 들어가는, 인이 박힌 풍경.

  스무 살이 되어, 서울에 있는 대학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아버지의 무책임함과 어머니의 외로운 눈동자를 피할 구실이 생긴 나는 곧장 집을 떠났다.

  그런지도 25년이다. 이제는 내가 그때의 어머니와 비슷한 나이가 되었다.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되기에도 충분하지만, 젊다면 또 젊은 나이. 말 섞을 사람 하나 없는 집에 앉아서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곳에서 두 줄을 띄고 다음 문단이 시작되었다.

 

  [다시 옆을 보자 웃음을 멈춘 어머니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 돌아가실 때,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양반이 그러는 거야.”

 어머니는 흐린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었다. 내 고개는 저절로 숙여졌다. 나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 했다. 그때 나는 모 방송사의 여행 프로그램 촬영 차 미국에 가 있었다. 그랜드 캐니언 위에 서 있을 때 아버지는 돌아가신 것이다. 폐암이었다. 위급하시다 한들 중간에 돌아올 수 있는 일정도 아니었지만 장례식이 시작되고 어머니에게 그 소식을 듣자 두 분에게 다시 화가 났다.

  어머니가 축축하게 젖은 시멘트 바닥만 내려다보던 내 등을 두드려 고개를 들었다.

  “내년에 꼭 저게 꽃이 피었으면 좋겠다고 그러더라. 그때 아직 이파리만 있을 때였거든. 이상하지. 사람이 나이가 들면 그저 약해진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그럼요?

  “뭐지, 무장해제?”

  그게 약해진 거 아녜요?

  “그래? 물론 지금까지 겉에 걸치고 있던 것들을 벗어버리면 불안하겠지. 약해진 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잘 느껴보면 진짜 나란 사람은 거기에 있는 거야. 인간이 이 세상에 와서 사는 것도 다 그걸 찾으려고 온 것 아닐까. …저걸 보면 그 양반 생각이 나.”

  저걸로 아버지랑 화해하신 거예요?

  “우린 싸운 적도 없는데?”

  어머니는 눈을 크게 뜨고 소리 내어 웃었다. 다시 마당 한구석으로 고개를 돌리고, 무릎을 탁탁 치며 말했다. “세상에 화해해야 할 사람은 나 자신 뿐이야.”]

 

 

 

  두 페이지 정도 되는 짧은 글을 다 읽고 얼굴 앞에서 종이를 치우자 그가 보였다.

  “언제 이야기예요?”

  “지난여름.”

  “이상해요.”

  “어디가?”

  “글은 안 이상해요. 그런데 어딘지….”

 원고를 다시 가져가서 종이를 넘겨보던 그에게 급히 덧붙였다.

  “작가님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 없는 부분이라. 가정사라고 해야 하나….”

  “이렇게 천천히 알아가는 것도 괜찮지?”

  아, 그렇구나. “감사해요.”

  “뭐가?”

  “알려줘서요.”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누구를 닮은 얼굴일까. 원고를 침대 한쪽에 두고 내 팔을 잡는 그. 손길을 따라 일어서서 그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머니는 지금도 혼자 지내세요?”

  “그 집에 있는 게 편하대. 이 나이 먹고 아들 수발까지 들긴 싫다나.”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헛웃음이 나왔다. 혼자 웃음을 터뜨린 나를 그는 의아하게 쳐다보고. 나는 내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지금 머릿속에 든 생각을 향해서도 고개를 끄덕여본다.

  “이제 한 사람으로 보여요. 신우진 씨랑, 신우진 작가님.”

  “그 말 들으니 생각나는데, 사람은 내가 생각하는 나랑, 타인이 나라고 생각하는 나. 그리고 그냥 나. 세 명으로 되어 있대. 오쇼 라즈니쉬라는 사람의 결혼에 관한 격언에 나오는데.”

  “맞아요.”

  “그러니 두 사람이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실은 여섯 명이 누워 있다고 하더라고.”

 그는 손을 뒤로 짚으며 허리를 폈다. 티셔츠 밑으로 몸의 굴곡이 보였다. 문득 몸의 심지 가운데에 불이 붙는 것 같고. 꽤 한참동안 나를 보고만 있던 그가 손을 뻗어 흐트러진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관자놀이와 귓바퀴를 만지자 뺨과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눈이 마주치자 공기의 농도가 바뀌고 분위기는 정적을 타고 흐른다.

  “이러려고 한 건 아닌데.”

  변명인가 뭔가. 내 귓가와 턱을 오가던 손가락은 곧 입술로 올라와 지긋이 눌러 쓰다듬고 이내 입 안으로 들어왔다. 마음이 가는대로, 그의 팔을 붙잡고서 손가락을 살짝 깨물어 보고 끝을 핥았다.

  “아래층에 엄마랑 언니 자고 있는데. 상관없어?”

  “작가님이야 말로 방금까지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글을 쓰고 있었잖아요.”

 이 남자의 허리춤을 관찰하고 입술을 벌렸다. 그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하지만 여전히 미소 짓는 얼굴이었다.

  “섹스의 좋은 점은, 부모의 얼굴을 기억나지 않게 해준다는 거라고 생각해.”

  곧 함께 침대로 쓰러졌다. 위에 있는 그는 무게가 느껴지지 않도록 팔을 굽혀 상반신을 내게서 떨어뜨린 채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이건 나쁜 짓이죠?”

  “어쩌면.”

 하지만 밤은 충분히 짙었다.

  그가 키스하자마자 다리에 열이 올라, 팔을 뻗어 넓은 등을 끌어안았다. 행여나 문 밖에서 누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온 신경을 집중하면서도 나는 그의 입술을 핥고 혀를 섞었다. 그가 나를 안아 일으켜서 자기 무릎 위에 앉히고는 목에 팔을 두르게 했다. 옷 속으로 손이 들어와 집요하게 내 살과 뼈를 더듬고. 급할 것도 없는데 옷도 다 벗지 않은 채 삽입했다.

  소리 내도 괜찮아. 귓가에 속삭인다. 남자들은 맨날 다 괜찮대, 뭐가 괜찮은지도 모르면서.

  그의 이불 위에서 몸을 내어맡기는 때만큼은 여기 누운 게 두 명이든 여섯 명이든 상관없고. 그와 내가 각자 살아왔던 날의 흔적들도, 서로가 누구인지 조차도 중요하지 않아서 지금 내 몸에 느껴지는 이 사람만 생각할 수 있는 그것이 나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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