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예, 잠시 다녀올 곳이 있어서요.”
절대 쓰지 않으려고 했던 휴가인데, 그가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비올레타는 뭐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한다면야 다녀와야지, 그녀는 집사의 휴가를 막을 정도로 나쁜 주인은 아니었다.
비올레타가 전혀 주저하는 기색 없이 허락의 말을 뱉자 노엘의 미간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정말 상관없으십니까?”
“가야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마땅히 다녀와야지.”
호로록- 연하게 익힌 굴이 그녀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입술을 동그랗게 말고 왜 그러냐며 그를 올려다보는 얼굴이 지금 만큼은 너무나 야속했다. 그동안 그렇게나 노력했는데 비올레타는 아직 노엘이 없어도 되는 모양이었다.
그는 짐짓 슬퍼하는 척, 눈을 내리깔았다.
“제가 없어도 상관없으시군요.”
노엘의 행동을 재미있는 농담으로 받아들인 비올레타가 웃어 재꼈다. 가끔 무섭게 일그러지는 얼굴을 본 사람이라면 괴리감을 느낄 정도로, 지금 그의 얼굴은 순했다. 실망한 강아지처럼 귀와 꼬리가 축 처진 느낌이었다.
굴을 하나 더 입속으로 넣은 비올레타가 그것을 오물거리며 답했다.
“없으면 적적하기는 하겠구나, 헌신적인 집사가 없을 테니.”
“최대한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주인님께 음식을 해드리는 건 제 몫이니까요.”
다시 본 노엘의 얼굴은 노을로 물들인 듯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비올레타는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분명 그가 바보 같은 건 아닌데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잠시 뒤, 노엘의 행동을 정의할 말을 찾은 그녀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호구…… 아니냐.’
그것도 심각하게 헌신적인 호구. 비올레타는 갑자기 자신의 집사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겨우 주인에게 이렇게 호구스럽게 군다면 연인에게는 어찌 굴겠나. 그가 살면서 사기나 당하지 말길 바라며, 비올레타는 입 안 가득 감칠맛 나는 굴을 씹었다.
* * *
어렵게 휴가 이야기를 꺼냈던 것과는 다르게 노엘은 그 다음날 이른 아침, 아무 말 없이 휴가를 떠나버렸다. 비올레타는 주방장이 내온 아침식사를 반 이상 남기고 방에 틀어박혀 수틀에 집중했다. 하루 정도 수틀을 만지고 있으니 어색했던 손놀림이 점점 익숙해졌다.
금실과 은실로 수놓은 늑대가 점차 모양을 갖추어 가자 덩달아 그녀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까지 직접 수놓은 것들 중 가장 잘 된 것이었다. 딱 한 방울 떨어져있는 핏자국만 아니라면 숙련된 자수 장인의 솜씨로 보였다.
해야 할 업무를 미뤄놓고 하루 종일 손수건을 붙잡고 있던 것이 효과적이기는 했는지 비올레타는 그 날 자수를 모두 끝마쳤다. 저려오는 몸을 피고 창밖을 보았을 때 저녁이 다 되었다는 점에서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아카데미에 잘 다니고 있어야 할 터인데…….’
문득 저녁 하늘을 보고 있자니 자주 아카데미를 빠지고 비올레타의 곁에서 낮잠을 자곤 하던 베르안이 잘 하고 있을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녀는 시녀를 불러 손수건을 빨아오라 맡기고 후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베르안을 떠나 이곳으로 왔을 때는 그나마 노엘이 있어 별장이 시끄러웠는데 노엘마저도 없으니 적적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무작정 후원 안을 떠돌던 비올레타는 홀린 듯 노엘이 정성껏 가꾼 장미정원으로 향했다.
전에 보았을 때는 조금 어수선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한 달이 지난 지금은 어떨지 궁금했다. 정원의 모퉁이를 돌아 분수가 있는 곳을 눈에 담은 비올레타가 무의식적으로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무슨 요정이라도 다녀갔나.”
장미는 더욱이 빛나며 탐스러웠고 색색이 이룬 문양은 가히 조화로웠다. 노엘이 흙을 다루는 마법사인가 의심해야 할 정도로 정원은 완벽했다.
마치 이곳이 셰잔이라도 되는 듯 커다랗게 자란 흑장미들을 돌아보던 비올레타는 장미로 감싸인 듯한 느낌이 드는 길을 걸어 분수로 다가갔다. 그 위로도 장미 덩굴이 휘감겨 자연적인 그늘이 생기고 있었다.
“꽃집을 했어도 어울렸겠군.”
못하는 게 뭔지, 노엘은 ‘가정적인’ 일이라면 못 하는 게 없었다. 비올레타는 정말 이 남자가 집사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닌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분수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그녀는 손을 뻗어 시원하게 솟아오르는 물에 가져다 대었다. 거센 물줄기는 비올레타가 메이블 가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챘는지 약하게 잦아들었다. 왼손을 아예 분수에 담근 비올레타는 조심스럽게 상체를 뉘였다.
시원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분수대는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장미 덩굴이 하늘로 향하는 시야를 가렸기에 비올레타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진한 장미 향기가 코끝을 간질이며 맴돌았으며 물 떨어지는 소리가 귀를 즐겁게 했다. 진정 지상낙원이 따로 없었다. 다시 집무실로 돌아가면 일을 붙잡아야 한다는 것만 빼면.
‘한숨 푹 자고 싶다…….’
“각하-! 여기 계세요?”
정말 잠에 들려고 생각 중이던 비올레타가 느리게 일어나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노엘이 정원을 가꿀 때마다 그 곁에서 알짱거리며 도움을 주는 꼬마시종 시얀이었다. 일어나 앉은 그녀를 발견한 소년은 빠르게 뛰어와 카시멜라의 말을 전했다.
“시녀장님께서 저녁이 준비되었다고 했어요. 어서 모셔오라고도…….”
“……그래, 지금 가마.”
비올레타는 조금 아쉬운 마음으로 분수에서 멀어졌다.
그녀가 막 모퉁이를 돌아 후원 밖으로 나섰을 때, 가슴 한 쪽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별 것 아닌 통증이었다. 그저 살짝 쑤시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별장으로 들어가는 문을 내딛기 직전, 비올레타는 생살을 찢고 짓이기는 격통에 확 주저앉고 말았다.
“아, 악…….”
“가, 각하? 각하! 괜찮으세요?!”
비올레타는 쥐어짜듯 아파오는 심장을 움켜쥐었다. 시얀에게 손짓해 문을 닫으라 시킨 그녀는 벽에 등을 대고 아래로 아래로 미끄러지듯 쓰러졌다. 그런 와중에도 자신의 심장질환에 대해 들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리에 가득했다.
“의, 의사를 부를게요.”
“괜찮다, 그저 지병일 뿐이야.”
심장이 평소보다 느리게 뛰며 한 번 뛸 때마다 강한 고통을 주었다. 시얀에게 심장질환을 들킬 수는 없었기에 비올레타가 고통을 누르고 천천히 일어섰다. 희고 반듯한 이마에 송글송글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에 비올레타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시얀은 그런 비올레타가 걱정스럽기는 했으나 주인이 아무 것도 아니라 말한 바. 그가 더 이상 상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비올레타는 휘청이며 계단을 올랐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통증이 그녀를 엄습했지만 애써 멀쩡한 척하며 발을 내딛는 비올레타는 평소와 아주 조금 달라 보일 뿐이었다.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 알아챌 수 없는 그런 미세한 정도.
“저녁은 거르겠다고 주방장에게 일러라. 아무래도 급하게 할 일이 남아있어서……”
“정말 괜찮으신 거죠……?”
이 고통을 멈추기 위해서라면 칼로 심장을 찔러 멈추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 그러니 이만 가봐.”
사정을 봐주지 않는 아픔 때문에 시얀에게 말하는 비올레타의 말투가 짜증스러웠다. 감히 대거리를 해 주인을 화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 건지 시얀이 급하게 꾸벅 고개를 숙이며 주방으로 달려갔다. 난간을 붙잡고 힘들여 침실로 올라온 비올레타는 그대로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할 일이 있는데. 어제 온 헤이바 자작의 편지도 오늘 내로 읽은 후 답을 해야 하고, 황제가 보낸 일거리도 처리해야 하고. 오른손으로는 셔츠를 움켜쥐며 비올레타가 왼팔로 눈을 가렸다. 다시금 미칠 것 같은 고통이 다가왔다.
“악- 아…… 흐. 제발, 제발.”
그녀의 입에서 흐느끼듯 비명이 터져 나왔다. 무의식적으로 힘을 주어 충혈 된 두 눈에서 눈물이 고여 뺨에 골을 만들었다. 비올레타는 이로 짓씹은 닷에 부어오르는 입술을 허덕이며 심장을 뜯어낼 기세로 셔츠를 잡아 뜯었다.
아팠다. 죽을 듯이 아팠다. 지금까지 겪어본 모든 고통들, 심지어 난산이었던 베르안을 낳을 적의 산고보다도 훨씬 아팠다. 자제력이 약한 사람이라면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원할 정도로, 고통의 강도는 이로 말할 수 없었다.
“……오늘은 안 돼.”
비올레타는 흐려져 오는 시야를 밝게 하려 애쓰며 두 손으로 침대보를 움켜쥐었다.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직감적 느낌이 들었다. 적어도 오늘이 아니더라도 이 고통을 한 번 더 겪게 된다면 죽음, 최소한 혼수상태에 빠질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눈꺼풀이 힘없이 팔락였다. 길고 숱 많은 속눈썹에 눈물방울이 맺혀 애처로워 보였다.
침대보를 죽어라 움켜쥔 손가락에 서서히 힘이 빠졌다. 불규칙적으로 펄떡이던 흉부가 점점 내려앉았다.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그녀의 온몸의 근육이 완화되며 거친 숨소리 역시 완만하게 잦아들었다. 비올레타는 천근만근 무겁기만 한 눈꺼풀을 감았다.
미세한 떨림은 남았지만 더 이상 커다란 아픔은 없었다.
“내일 아침에는 그대가 해 준 음식을 먹고 싶다.”
노엘, 주인이 이렇게 아픈데 어딜 간 게냐. 조금 괜찮아졌는지 비올레타가 입 꼬리를 올려 웃으며 보이지 않는 노엘을 타박했다. 하지만 잘 다녀오라고 말할 틈도 없이 새벽에 사라져버린 집사를 그 이상 욕하기에는 비올레타의 상태가 좋지 못했다.
그녀는 잠자듯 기절해갔다. 마침내 수면 상태와 비슷하게 변한 비올레타의 숨소리가 부드러웠다. 완전히 기절한 것이었다.
* * *
비올레타는 제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내는 물수건에 습관처럼 고개를 비틀었다. 물수건이 얼음장처럼 차가울 줄 알았지만 다시금 이마에 와 닿은 감각은 미지근히 딱 좋은 온도였다. 그녀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잠시 떨어져나갔던 물수건은 조금 더 따스한 감촉을 가지고 비올레타의 이마 위를 덮었다. 그래도 그녀는 아이처럼 앓는 소리만 낼 뿐,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비올레타는 귓가에 감미롭게 속삭이는 자장가 같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낮은 편에 속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간질여대고 있었다.
“일어나셔야죠, 벌써 해가 중천입니다.”
그 낮은 음의 속삭임이 묘하게 걱정과 슬픔을 담고 있다는 느낌은 그저 비올레타 만의 착각인걸까. 그래도 못 들은 척, 눈을 감고만 있던 비올레타는 눈가를 지분거리는 손길에 힘겨이 눈꺼풀을 때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