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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연재 > 로맨스판타지
아포리아
작가 : 윤소교
작품등록일 : 2017.10.30

(현대/판타지/백발남/신(GOD)여주/신화/미스터리)

가상의 서울에서 펼쳐지는 살아있는 신이 되어야하는 여자와 이름을 잃어버린 남자의 이야기.

전쟁이 사라지고 어느 때보다 긴 평화가 지속되는 현대의 서울. 수수께끼의 남자 번은 오늘도 도시를 떠돌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같은 건물에 있던 대국민적인 신 백아(伯牙)의 33대째 당주 수린과 조우하고, 그녀에게서 잃어버린 과거의 실마리를 찾게 되는데.....

이메일 : yoonsogyo@gmail.com

 
細雨 (3)
작성일 : 17-11-09 13:46     조회 : 314     추천 : 0     분량 : 6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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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권이 다녀갔다. 네 짐을 뺀다고.”

 

 침묵.

 

 “언제까지 버틴다고 될 문제가 아닐 텐데?”

 

 역시 묵묵부답. 며칠 째 쭈욱 저 상태였다. 물어도 대답도 하지 않고 게으른 나무늘보 마냥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지금 자신이 아포리아 수용소로 끌려갈 위기에 처해있는 상황을 알고 있는 건지조차도 모르겠다. 결국 평정을 잃은 영은 허리춤에 손을 얹고는 본격적인 잔소리에 나섰다.

 

 “내가 이 집은 안 된다고 누누이 말했을 게다.”

 

 그가 삿대질을 하며 엄한 목소리로 일렀다. 그가 혹시 착각하고 있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간 콧방귀와 비슷한 것이 영의 귓가를 스쳤다.

 

 “하. 쓸데 없는 소리. 절대 네 밑으로는 안 들어가니까.”

 

 일말의 고민도 없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태도에 영은 더욱 부아가 치밀기 시작했다. 아니,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다면 그는 더더욱 여기서 나가야했다. 눌러있을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그럼 나가야지 왜 아직까지도..”

 

 그의 잔소리가 몇 번이고 더 이어지자 결국 번이 귀찮다는 듯이 혀를 찼다.

 

 시끄러워.

 

 짧은 한마디로 일갈. 불행히도 그 순간 영은 엄청난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흐트러진 호흡으로 영은 말없이 탁상에 올려져 있는 재떨이를 들었다. 그리고 돌연 그것을 번에게 집어 던졌다.

 

 단단한 유리재질의 재떨이가 정통으로 머리를 가격하자 그의 입에서 악. 소리가 들렸다. 영은 그제야 만족스럽게 웃었다. 영의 웃음소리에 화가 난 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 환자라니까!”

 

 그가 무시무시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비에 젖은 나뭇잎이 찔끔 떨어질 정도의 고함이었다.

 

 “또 어디서 술이나 처먹었겠지!”

 

 하지만 지지 않는 영은 이번에는 그에게 바닥에서 놀고 있던 빗자루를 집어 던졌다. 당연히 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번은 그것을 피하지 못했다. 정통으로 빗자루를 맞은 그는 머리에 우수수 내려앉는 짚더미와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지푸라기를 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옷깃을 쥐며 가쁜 숨을 들이마셨다.

 

 “아, 젠장....”

 

 영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불행히도 번은 잠깐 화낸 걸로 현기증마저 느끼고 있었다.

 

 정말로 그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머리가 짜증날 정도로 어지러웠다. 며칠째, 아니 몇 주째 주욱 이 상태였다. 더 나빠지지도 좋아지지도 않았으나 온몸이 마비라도 걸린 듯 지끈거렸다.

 

 게다가 가슴엔 멍과 비슷한 흉터가 자라나고 있었다.

 

 그는 옷깃을 대충 여미며 그것을 숨겼다. 사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어느정도 짐작이 갔다. 하지만 그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모두 자신이 멍청했기에 벌어진 일 뿐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일이 잠잠하게 가라앉을 때쯤 추적을 피해 돌아온 건데. 저놈의 영감탱이는 자신의 속도 모르고 저런다. 정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너 정말 어디가 아픈 게냐?”

 

 그 때 물끄러미 바라보던 영이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의심반 걱정 반의 목소리였다. 그 역시 잘 생각해보니 며칠 만에 죽은 듯이 자다가 일어난 번이었다. 그는 여전히 첫날 입으라고 가져다준 회색 창의(氅衣)를 입고 있었다. 매일 옷만 겨우 새것으로 갈아입고 두문불출했던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벌어진 옷깃 사이로 살짝 보이는 번의 맨가슴엔 정말로 식은땀 비슷한 것이 흐르고 있었다. 몰랐는데 어쩐지 얼굴도 조금 상기된 거 같다. 하지만 영으로서는 도저히 번이 아픈걸 상상할 수 없었다. 그가 알기로는 번은 지금까지 감기 한번 걸린 적 없었고 유일한 자랑거리가 건강하다는 점뿐인 남자였다.

 

 “너, 정 힘들면 병원이라도 가는 게 좋겠는데.”

 

 그 순간 짹짹. 새소리와 함께 인터폰이 울렸다. 영은 이제 ‘아픈 것으로 추측되는’ 번과 손님을 사이에 두고 퍽 난감해지기 시작했다. 영이 힐끔 번과 초인종을 번갈아 보자, 번이 가보라며 눈짓했다. 영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달린 화면에 다가갔다.

 

 -영님. 저 용호입니다.

 

 조그마한 화면에 하얗고 커다란 토끼의 얼굴이 가득 들어섰다.

 

 “오냐, 일찍 왔구나.”

 

 영은 그에게 인사말을 전하고 잠시 음소거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다시 번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가 힘겹게 일어나려고 하자 영은 잠자코 두 손을 들며 막았다. 역시 아무리 독불장군인 영이어도 지금 상태의 번에게 손님의 접대를 시키는 건 무리였다. 영은 다시 음소거 버튼을 눌러 소리를 켰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먼저 올라왔습니다.

 

 “알겠다. 지금 문을 열러 갈 것이니 거기서 기다리도록 해라.”

 

 직접 문을 열러 온다는 영의 말에 용호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알겠다며 수긍했다. 그는 그것을 끝으로 통화를 끊었다. 휴. 작게 한고비를 넘긴 영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번은 마루에서 비틀거리며 일어서 있었다.

 

 “내가 안가도 괜찮겠어?”

 

 그가 한 손을 허리에 짚은 채,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더니 내키지 않다는 듯이 제 목을 긁적였다. 일단 그는 형식상 영의 권속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신은 반듯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보니 꽤나 그의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니야. 넌 그냥 오늘 푹 쉬는 게 좋겠다. 술병이 아니라면 네 몸은 네가 더 잘알겠지.”

 

 그 말과 함께 영은 번의 등을 밀었다.

 

 어떻게 해보기도 전에 어느새 안채로 떠밀린 번은 거의 갇히다시피 방에 들어섰다. 그가 뭐라고 변명의 말을 해보려는 것도 잠시, 영은 심해지면 반드시 병원에 가보라는 것과 손님이 있을 동안은 잠자코 있어달라는 말과 함께 문을 닫고 나갔다. 아주 빠른 행동력이었다.

 

 쾅!

 

 문은 일말의 이의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듯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닫혀버렸다. 번은 한참을 주저앉은 채 닫힌 문을 바라보다 허탈하게 웃어버렸다.

 

 털썩 자리에 앉은 그는 잠시 미간을 검지로 꾹 누르며 홧홧한 머리를 이완시켰다. 갑자기 약골에 짐 취급을 받으니 그 자신도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

 

 곧 영이 완전히 가버렸는지 넓은 방엔 적막이 감돌았다. 번은 하아. 한숨을 쉬며 그대로 바닥에 대자로 누웠다.천장 을 바라보니 기름칠을 해놓은 석가래가 보였다.

 

 참으로, 참으로 따분한 곳이었다.

 

 공기만 좋지 아무것도 즐거운 것이 없다. 포기한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셔 보았다. 그러자 나무와 함께 약한 비 냄새가 코끝에 흘렀다. 그 날 이후 비가 내리는 날이면 그는 가끔씩 어떤 얼굴을 떠올리곤했다. 하지만 그 얼굴은 흐릿한 머릿속을 떠다니다가 이내 연기처럼 사라졌다.

 

 번은 부질없는 생각을 지우며 몸을 돌렸다. 따분한 방에, 따분한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잠에 들기 위해 질끈 눈을 감았다. 참 그런데 영은 손님을 맞이하러 나갔더랬지. 문득 번은 일요일인데도 들이닥친 손님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꽤나 그 고집불통 영감과 막역한 사이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생각 역시 아주 잠깐 동안 뿐이었다. 온몸이 쑤실 듯이 아픈데 다 무슨 대수겠는가. 번은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렸다. 며칠째 잠을 못자 스트레스가 극에 달아 있었다. 몸을 새우처럼 옆으로 말고, 끈질기게 두 눈을 감았다. 이 지긋지긋한 고통을 잊기 위해선 어서 잠에 들어야했다. 그는 깜박이는 눈으로 어두운 실내를 응시했다.

 

 영감의 말대로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았다.

 

 이건 인간들이나 가는 병원 따위를 가서 나을 게 아니었다. 며칠 동안은 곧 나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생각과 달리 몸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가장 빠르게 해결할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 방법을 기대하지도 실행에 옮길 생각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래.

 

 이건 백아에서 날린 살(煞)이다.

 

 번은 어둑한 방에서 결국 반쯤 눈을 떴다. 멍이 진해질수록 그는 그 사실을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로서는 살을 맞은 것이 참으로 대노할만한 일이었지만 부분 이해가 가기도 했다.

 

 아포리아란, 본래 그런 존재들이었으니까. 이 몸에 피어오르는 흔적은 그에 대한 댓가이고, 독이고, 술사가 오지 않는 이상 멎지 않는다. 그래. 어쩌면 드디어 이것이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지도 모른다.

 

 죽음 혹은 소멸.

 

 흐느적거리며 몸을 바로 세운 번은 물끄러미 자신의 텅 빈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그것을 바라보며 이대로 죽는 것인가. 그는 담담히 생각해보았다. 땀에 젖어 축축했지만 아직 병든자의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쉽게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속되면 혹시 모른다.

 

 번은 아픈 것은 지독히도 싫었다. 그러나 그 만큼 항상 그 끝에 있는 죽음을 궁금해왔다. 죽음은 항상 그에게 미스터리였으니까. 그는 어째서 자신이 소멸하지 않고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올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애초에 나는 잊혀진지 오래였는데.

 

 혹자는 이것을 축복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 있다가, 언제 갑자기 소멸할지도 모르는 공포를 말이다. 그것 때문에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도 모르겠지. 번은 펼친 손바닥을 사납게 구겼다. 그리고 바깥에서 들려오는 빗소리를 의식하며 몸을 완전히 옆으로 돌려 누웠다. 이제 그가 보이는 것은 비가 내리고 있는 툇마루였다.

 

 그는 처연한 기분으로 하염없이 마당을 적시는 가랑비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이러고 있으니 번은 자신이 정말로 병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병자 특유의 그 무기력하며, 회색빛이 감도는 그런 기운들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러다 반무의식의 세계로 접어들 때 쯤. 톡. 톡. 귓가를 울리는 빗소리는 또 다시 그를 그 날의 복도로 이끌었다.

 

 ‘난 널 알지도 몰라.’

 

 어둠속에서 두 눈을 선명히 빛내던 여자의 얼굴을 기억했다. 그게 그냥 해본 소리가 아닌 것쯤은 그도 알 수 있었다. 수린이라는 여자는 ‘뭔가’를 알고 있었다. 그건 여자가 백아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근원적인 뭔가가 있었다. 그래서 백아가 자신을 알고 있는 것 같다고 했을 때 번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여야만했다.

 

 물론 가끔씩 내 과거를 기억하는 이들이 있어왔다. 그러나 그녀는 그들과는 다른, ‘아무도 모르는 내 얼굴’을 알고 있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번은 그 순간 일상에 균열이 이는 걸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부질없는 희망이 보이고, 쓸데없는 집착이 손에 잡힐 듯 그려졌다. 그러나 그건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신기루와 같은 빛이다. 전혀 근거가 없는 허상이다.

 

 그렇기에 그날 끄집어내듯이 겨우 말했던 ‘다시는 보지 말자.’의 진정한 의미는 더 이상 자신의 평화를 방해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였다. 드디어 손에 넣은 평화를 제 손으로 일그러트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추억. 그래 백아에게는 이제 완전히 추억이 되어버렸겠지.

 

 그 날의 기억은 그녀나 나나 한때의 추억으로 가져가는 것이 나았다. 백아의 수행관들이 그들을 찾아내기 전까지는 그에게도 나름 좋은 기억이었다. 어둠 속의 낭만이라니. 얼마나 아름답지 않은가.

 

 멀리있는 건 대부분 아름다워보인다.

 

 백아와 나는 그런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필요로 했다. 이 세상엔 모르는 것이 약인 것들이 오만가지가 있었고, 그러니 서로의 삶을 소중히 해야 했다.

 

 마치 맑은 물 아래에 보석처럼 빛나는 조약돌을 밖으로 건져올리면, 그곳에 있는 건 파삭 마른 채 볼품없는 돌멩이뿐인 것 같이.

 

 마지막엔 실망감만이 남을 뿐이다.

 

 번은 점점 더 머릿속을 헤집는 상념에 결국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잠이 오기는커녕 정신은 더욱 맑아져가기만했다. 그에 비해 몸은 이제 이래도 되는가 싶을 정도로 욱신거린다.

 

 방안에만 있는 건 좋지 않은 선택인 것 같았다. 오늘따라 쓸데없는 생각들이 더더욱 그를 방해했다.

 

 산책. 산책을 해야겠다.

 

 번은 겨우 한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방구석에 있는 바람막이를 손에 들었다.

 

 밖에는 부슬비가 내리고 있으나 산책하기에 나쁜 날은 아니었다. 그는 가볍게 검은색 비닐 소재의 바람막이를 걸치고 밖에 나섰다. 일단 젖는 건 싫으니 모자는 썼다. 그리고 얇은 쪼리에 발에 끼워 넣었다. 툇마루에서 내려오니 축축한 땅이 질퍽였다.

 

 어디로 가야하나...

 

 그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단 정문 쪽으로 가는 건 좋지 않은듯했다. 영의 손님인지 뭔지가 오기 때문이다. 머릿속이 어지러운 그는 지금 혼자 있고 싶었다. 그래서 발걸음을 후문 쪽으로 틀었다. 영의 권속들만이 다니는 비밀 통로였다.

 

 평지이고 잡목림이 우거져 산책을 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번은 짧아서 거의 반바지처럼 보이는 바지의 주머니에 손을 끼워 넣고, 걷기 시작했다. 이따금씩 가는 비가 눈을 때렸지만 기분 나쁜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비가 와서 그런 지 시원한 바람이 불어서 기분이 좋았다. 아픔도 부분 사그러드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몇 걸음 걷지 않아서 묘한 광경을 눈에 담아야했다.

 

 비탈길 바로 아래에 노루인지 사슴인지 모를 것 위에 타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노란색 우비가 눈에 띄었으나, 어지간히 꼭 쓰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번은 눈을 가늘게 떴다. 대체 이런 시간에 누구지?

 

 두 사람은 비 한가운데에서 옥신각신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보니 사슴은 자신이 알고 있던 녹영이었다. 그 순간 그는 뭔가 귀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감지했다. 녹영이 쩔쩔맬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번은 말려들고 싶지 않아 우두커니 서서 한동안 고민했다.

 

 모처럼 찾은 평화인데 말이다. 그러나 그는 이내 고개를 크게 저었다. 진짜 싫었지만 아무래도 한번 가봐야할 것 같았다. 일단 노는 만큼 밥값은 해야 했기 때문이다. 번은 결국 주머니에 손을 꼽은 채 비탈길을 미끄러지듯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이!”

 

 내려오며 그가 큰 소리로 녹영을 불렀다. 곧 그들의 시야에도 빗속에서 검은 모자를 쓴 커다란 남자가 들어섰다. 여자도 녹영도 생각지 못한 사람의 등장인지 깜짝 놀라며 자신을 돌아보았다. 번은 혀를 차며 그대로 순식간에 비탈길을 내려왔다.

 

 “너희들, 여기서 뭐하는 거지?”

 

 그러나 녹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노란 우비를 쓴 여자와 자신을 번갈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눈치였다.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반응에 번은 눈썹 한쪽을 틀어 올렸다.

 

 “번.”

 

 그 순간 빗속에서 익숙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에 그의 눈이 커다래졌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여자는 망설이지 않고 녹영의 등에서 내려왔다.

 

 반듯이 자리에 선 그녀는 곧 줄곧 쓰고 있던 노란색 우비의 줄을 풀렀다. 양반집 규수가 장옷을 벗을때같이 우아한 몸짓이었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이 그를 마주했다. 이건 말도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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