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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연재 > 로맨스판타지
아포리아
작가 : 윤소교
작품등록일 : 2017.10.30

(현대/판타지/백발남/신(GOD)여주/신화/미스터리)

가상의 서울에서 펼쳐지는 살아있는 신이 되어야하는 여자와 이름을 잃어버린 남자의 이야기.

전쟁이 사라지고 어느 때보다 긴 평화가 지속되는 현대의 서울. 수수께끼의 남자 번은 오늘도 도시를 떠돌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같은 건물에 있던 대국민적인 신 백아(伯牙)의 33대째 당주 수린과 조우하고, 그녀에게서 잃어버린 과거의 실마리를 찾게 되는데.....

이메일 : yoonsogyo@gmail.com

 
細雨 (2)
작성일 : 17-11-09 13:46     조회 : 338     추천 : 0     분량 : 7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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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산 초입에 도착하니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고도가 꽤 높은 산이라 산등성이에 구름이 끼기 시작하면 날씨가 불안정해진다. 날씨가 궂은 탓인지 국립공원 앞엔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별로 없었다. 등산을 시작하기엔 조금 늦은 시간이기도 하다.

 

 무엇이 됐든 수린에겐 다행인 일이었다. 사람이 많은 것보다는 적은 것이 나았기에. 안개같이 가느다란 빗줄기가 조금씩 어깨를 스치기 시작하자 그녀는 미리 입고 온 레인코트의 모자를 뒤집어썼다. 줄을 당기고 머리에 맞게 맞추니 수린의 머리는 꼭 조그만 콩주머니 같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배낭의 지퍼를 열자 점박이 토끼가 기다렸다는 듯이 머리를 내밀었다. 우수수. 뭉친 털을 터는 것도 잠시, 두 눈 가득 들어선 우비 소녀 같은 그녀의 모습에 순간 용호의 눈이 가로로 휘어졌다.

 

 “우아하지는 않으시네요. 백아님.”

 

 수린은 피식 웃으며 용호를 안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토끼는 기다렸다는 듯이 푸드득 거리며 털을 말렸다. 몸단장을 마친 그는 기지개를 피더니 꽤 진지한 눈으로 지그시 실구름이 걸린 산 너머를 바라보았다.

 

 왼쪽에는 등산객들이 이용하는 비봉이 있었고, 그 아래쪽에 영의 신당이 있다. 산신의 거처는 그보다 안쪽이다.

 

 “영님의 자택에 가려면 여기서 조금 더 걸어가야 해요.”

 

 용호가 수린을 돌아보며 말했다. 수린은 그저 음. 짧게 대답했다. 어렸을 때 이후 본격적인 산행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굳게 먹은 마음이 무색하게도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영은 이미 우리가 도착한걸 알고 있겠지만, ‘대문’ 앞까지 가는 건 오로지 그들 몫이었다.

 

 “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하세요.”

 

 오랜만에 산행에 신난 용호가 먼저 깡총거리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수린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철퍽, 소리와 함께 진흙이 부서진다. 북한산은 대다수의 한국 산들이 그렇듯이 흙산이 아닌 돌산이다. 등산에 적합한 산은 아니었다. 비가 오면 더더욱 그러했다.

 

 미끄러운 돌을 밟으며, 수린은 운동화를 신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살포시 내리는 비 사이로 도도도. 짐승의 발굽 소리가 들리는 것은 그녀가 막 미끄러운 돌을 오르려던 순간이었다. 용호와 수린은 점점 커지는 소리에 동시에 앞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커다란 노루 한마리가 긴 다리를 겅중거리며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산길이 꽤나 익숙한 모양새였다. 곧 수린 일행을 발견한 듯 노루의 까만 눈동자가 빛났다.

 “녹영님.”

 

 수린이 먼저 반가운 마음에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들 역시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어머, 백아님. 오랜만이에요. 그 동안 안녕하셨어요.”

 

 비 속에서 예의 바른 노루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지르르 빛나는 털이 아름다운 그녀는 북한산신 영의 권속, 녹영이었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신걸까.

 

 “영님이 마중을 나가라고 하셔서 급히 왔어요. 백아님은 등산엔 영 취미가 없으시다고.”

 

 의아한 수린의 표정에 녹영이 빙긋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아, 부러 마중 나오시게 만들어 죄송한걸요.”

 

 수린의 말에 빙긋 웃은 녹영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향해 무릎을 굽혔다. 올라타라는 소리였다. 잠시 망설이던 수린은 무거워서 죄송해요. 라고 말하며 머뭇머뭇 노루의 등에 올라탔다.

 

 곧 편안하냐는 녹영의 물음에 창피해진 수린은 네, 짧게 얼버무렸다. 그리고 어색하게나마 그녀의 목덜미를 꼭 끌어안았다. 쌀쌀한 산 공기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짐승의 털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녹영의 목덜미를 꼭 잡고 털에 코를 부볐다.

 

 녹영의 등에 타는 것도 오랜만이네.

 

 포근한 털과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꽤 오랜시간 동안 이곳을 찾지 않았다. 얼마만이지. 그래, 벌써 십년도 훌쩍 넘었구나.

 

 내심 세월의 흐름을 느끼며 수린은 그동안 소홀했던 자신을 조금 자책했다. 북한산 식구들이 지금처럼 그녀를 어린애처럼 대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였다. 그들의 시간은 수린이 그녀의 엄마와 함께 북한산을 찼던 십여년전에 멈추어 있었으니까.

 

 그래서일까. 수린은 그저 말없이 녹영의 등을 더 꼭 붙잡았다.

 

 “용호님은 먼저 가서 말씀을 나누고 계시겠어요?”

 

 곧 수린을 태운 녹영이 가뿐히 일어서며 말했다.

 

 용호는 이미 그들보다도 먼저 저만치 올라간 뒤였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토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정상까지 올라오기엔 아무래도 시간이 제법 걸릴 터였으니, 수린에게 양해를 구하여 영과 단둘이 이야기할 시간을 만들 생각이었던 용호에겐 잘된 일이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럼 먼저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 백아님을 잘 부탁드려요. 위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공주님.”

 

 가볍게 두 사람에게 인사를 전한 용호는 다시 빗속을 깡총깡총 뛰어 올라갔다. 수린이 그것을 바라보며 멍하니 용호도 짐승은 짐승이구나-라고 생각할 때쯤 녹영도 기다란 다리를 옮겼다.

 

 “그럼 저희도 갈까요.”

 

 그들은 용호가 올라간 길이 아닌 반대쪽 길로 향했다. 북한산의 권속들만 이용하는 통로였다. 후문 쪽이라 조금 빙 돌아가게 되지만, 경사가 높지 않아 편리하다. 곧 가끔식 후두둑 떨어지는 비 이외에는 고요한 정적이 숲에 내려앉았다.

 

 가는 비가 멈추지 않고 내리고 있었다.

 

 안개가 자욱한 산등성이에서 한 마리의 짐승과 신은 말을 아꼈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오전의 숲을 만끽하기 위해서였다. 살짝 비가 내려 한층 싱그러워진 나무는 더욱 짙은 초록색을 띄고 있었다.

 

 수린은 작게 숨을 들이마셔 보았다. 사직동의 잡목림과는 차원이 다른 깊은 생명력이 느껴졌다. 영의 저력이 느껴지는 공기였다.

 

 차박, 차박, 노루가 젖은 흙길을 걷는 소리를 들으며, 수린은 겨우겨우 자신의 목적을 떠 올렸다. 어쩌면 저 짙은 나무 숲 속에 숨어, 그도 지금, 자신들처럼 때아닌 산책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곳 어딘가에 번이 있는 상상은 생각보다 즐거웠다.

 

 그래, 녹영.

 

 그 순간 수린은 지금이야말로 기회라는 걸 깨달았다. 영 다음으로 이곳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존재가 녹영이었다. 어쩌면 영에게 알리지 않고 유일하게 탐문이 가능한 상대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한가롭게 유유자적할 때가 아니었다.

 

 한참을 비속에서 고민하던 수린은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 속삭이듯이 녹영의 이름을 불렀다.

 

 “녹영님.”

 

 예의바른 녹영은 곧장 무슨 일이냐는 듯이 고개를 살짝 그녀를 돌아보았다. 우비를 잔뜩 뒤집어쓴 수린이 약간 흔들리는 와중에 고개를 들어 빤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녹영의 눈 안에서 유난히 백아의 검은 두 눈이 더욱 반짝여 보였다.

 

 “...혹시 여기에 ‘번’이라는 이름의 권속이 있나요?”

 

 생각보다도 훨씬 자연스러운 울림이었다. 그러나 그 낯익은 이름의 등장에 순간 깜짝 놀란 녹영이 걸음을 멈췄다. 당황한 짐승의 얼굴이 수린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수린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녹영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 절실한 눈에 녹영은 침착하게 수린과 번의 연관성을 떠올려보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녀로서는 아무것도 집히는 것이 없었다.

 

 “아, 저기. 그건, 갑자기 왜 물으시죠?”

 

 그녀 답지 않게 당황하여 말이 두서없게 나갔다.

 

 “...죄송하지만 지금 이유는 말씀 드릴 수 없어요. 참 먼저 말했어야했는데, 이 이야기는 영님께는 비밀로 해주셨음 해요.”

 

 연달아 죄송한 일에 수린은 입술을 꼭 깨물어야했다. 서툰 수린의 탐문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권속에게 비밀을 만드는 것은 금기 중에 금기 였는데도.

 

 “…..”

 

 모든 것을 떠나서 백아의 입에서 나오는 심상치 않은 단어들에 녹영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뭔가 미심쩍은 일에 휘말렸다는 불행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권속’ 번이 있냐는 질문에. 권속이라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도 할 수 있는 그에 대해 녹영은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확실히 여기에 있는건 분명했지만.

 

 “있는지 없는지만 말씀해주시면 돼요.”

 

 망설이는 녹영에게 수린이 다시 한번 간곡히 부탁했다.

 

 자신의 생각을 읽힌 듯 뜨끔한 녹영은 이제 퍽 난감해지기 시작했다. 절대 물러설 것 같이 보이지 않는 백아의 표정이 그녀를 오도가도 못하게 만들었다. 아니, 대답을 듣지 않고서는 이제 수린은 결코 이 이상 갈 생각이 없어보였다.

 

 아아.

 

 산신의 거처가 이제 코앞인데, 갑작스러운 수린의 명령에 녹영은 발만 동동 굴렀다. 불행히도 그녀는 모양 좋게 거짓말로 넘길 심성이 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때 아닌 진퇴양난이 시작되었다.

 

 

 

 

 “알겠네. 일단 짐은 빼는걸로 하세.”

 

 영이 옅은 한숨을 쉬며 일권에게 그 대신 대답을 전했다. 아포리아에게 무엇보다 엄격한 것은 소속과 거처에 대한 주기적인 보고였다. 그런데 번은 근 한 달 새에 이 두 가지를 모두 어겼으니,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영의 대답에 일권은 오히려 그 자신이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드디어 번이 거처를 옮기게 된 것은 두 팔 벌리고 환영할 일이겠으나, 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될 줄은 절대 몰랐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지, 영 역시 일권의 침묵에 쓰고 있는 검은 뿔테 안경을 올리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이신건지.”

 

 답답함에 일권은 그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죽어도 아포리아 남서울 수용소를 나가지 않겠다던 번은 그 날 감쪽같이 자취를 감춘 이후로 다시는 그의 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그야말로 잠적했다. 이유는 누구도 제대로 아는 이가 없었다. 당황스럽고 당황스러웠다.

 

 다행히도 우연히 길에서 만난 영에게서 소식을 들어 망정이지, 그것조차 없었다면 일권은 지금도 번을 찾고 있었을 거였다.

 

 “역시 오늘도 만날 수 없는 겁니까?”

 

 일권이 지푸라기 같은 희망을 잡고 물었다.

 

 그는 번이 이곳에 잠시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반백머리의 신사는 팔짱을 낀 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힘들 것이라는 뜻이었다.

 

 일권은 결국 기껏 왁스로 고정한 머리를 흐트러트리며 한숨 비슷한 것을 내쉬었다.

 

 차라리 얼굴을 보고 이유라도 들으면 좋으련만.

 

 “예, 알겠습니다. 그건 제가 강제할 수 없는 부분이니까요.”

 

 “하지만 영님. 엿새 안에 거주지를 정하지 못하면 번씨는 정말로 수용소에 강제로 들어가야할지도 모릅니다. 이번에는 ‘강제’라고요.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그는 드물게도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껏 아포리아 전적을 떼어 놓고, 그 꼬리표를 다시 붙여야한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그를 봐주기도 그로서는 힘들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지금 당장은 영님의 권속으로 보고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래도 기한이 촉박하니까요.”

 

 일권은 이제 회유에 나서기 시작했다.

 

 지금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영 밖에는 없었다. 장지문을 사이에 두고 일권은 영에게 지금 상황이 얼마나 촌각을 다투고 있는 일인지 다시 한번 설명했다. 그러나 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거절했다.

 

 “안 될 소리. 그런 동족방뇨(凍足放尿)식 해결이 결국 일을 키운다는 걸 정녕 모르고 하는 말인가?”

 

 일말의 여지도 남기지 않는 언사였다. 결국 일권은 그에게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간단한 해결책을 두고 어쨰서 돌아가고 있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영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정말이지.

 

 요즘 세대는 권속을 들이는 것을 너무나도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곰팡내나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특히 ‘아포리아 할당제’. 그 얼토당토 않는 법안이 발의된 것만 보아도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 이게 다....

 

 그 때 엄지와 검지로 지끈거리던 이마를 문지르다 무언가를 떠올린 영은 문뜩 자신의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계침이 아슬아슬하게 정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슬슬 도착할 시간이었다. 크흠. 목소리를 가다듬은 영은 양손으로 이제 일권의 어깨를 잡았다.

 

 “안그래도 오늘 오는 손님에게 정식으로 이 일을 부탁할 생각이야. 내가 어떻게든 일주일내로는 이 일을 해결하도록 하지. 그러니 자네도 너무 걱정하지 말어.”

 

 그가 양복 입은 남자의 어깨를 툭툭, 토닥이며 이야기를 갈무리했다. 영이 자신이 직접 나서서 해결할거란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북한산신 영은 사실 이 어리숙한 남자를 부분 동정하고 있었다. 번이 종적을 감춰 가장 곤란했을 사람은 바로 일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자, 어서.”

 

 영은 일권에게 곧 손님이 오니 자리를 비켜달라는 말을 덧붙이며 이제 가달라는 말을 전했다. 다행히도 일권은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았다. 그는 영을 어느정도 믿고 있었다. 이름 있는 신이니 허튼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아, 예. 그럼, 영님. 부디 번씨에게도 안부 전해주세요. 새로운 소식이 있으면 저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시고요. 아시겠죠?”

 

 “알겠네.”

 

 영이 짧게 대답하며 그를 바깥으로 안내했다. 일권은 지금 오는 손님이 누구냐고도 묻지 못한 채, 떠밀리듯이 인삿말을 전했다. 영은 이제 두툼한 손으로 그의 양어깨를 잡고 밀기 시작했다.

 

 “아이고. 비가 점점 많이 오네요.”

 

 그 말대로 그들이 바깥으로 나오자 이제 얼마지나지 않아 흠뻑 젖을 정도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팡. 장우산을 피며 일권은 영에게 깜박 잊고있던 선물도 전했다. 에펜세티에서 사온 양과자 세트였다. 워낙 대화가 바뻐 잊고있었다.

 

 그러나 황금색 녹색으로 장식된 봉투를 영의 손으로 전하며, 일권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들어올렸다. 생각해보면 그곳이 모든 일의 근원지였다. 그래, 그날 그와 함께 에펜세티에 가지 않았다면 일이 좀 달라졌을까.

 

 “선물 고맙네.”

 

 생각지도 못한 물건에 영이 처음으로 만면에 미소를 가득 띠며 말했다. 일권이 보기에는 누구와 똑같이 얼빠진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런 불평을 해보아도 소용 없는걸 알기에 그는 이제 문을 나서야했다.

 

 대문에서 딸랑이는 풍경소리를 들으며 영은 그를 배웅했다. 겨우 그를 쫓아내고 나서야 영은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빙그르르. 그대로 몸을 돌린 멋스러운 차림의 노인은 잘 닦여진 마룻바닥을 지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바깥 쪽으로 활짝 열린 창호문 너머 북한산의 고즈넉한 산세(山勢)가 지나갔다. 모든 산신이 그렇듯 북한산신의 저택은 그 산의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유명한 신이기도했고, 몇 년 전부터는 대중들에게까지 얼굴이 알려져, 결국 프라이버시를 위해 집 주위에 잡목림을 조성했다. 일종의 방어선이다. 그래서인지 지금 그의 거처는 꼭 커다란 초록색 바다위의 무인도와도 같다.

 

 날씨가 좋은 날엔 저 멀리 남산타워와 도시의 빌딩들이 보였지만, 오늘처럼 날씨가 궂은 날에는 보이는 건 실구름이 떠다니며 흘러가는 모습과 울창한 숲뿐이었다. 그것 나름대로 신비하여 아름다웠다. 하지만,

 

 쾅! 마지막 장지문을 활짝 열어젖힌 그는 눈쌀을 잔뜩 찌푸렸다.

 

 그 고즈넉한 풍경을 가로막는 유일한 방해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품위라고는 요만치도 없는 놈은 이 부슬비가 내리는 풍경을 두고, 머리를 괸 채 등허리나 긁적이고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누구 때문에 곤혹을 치렀는데 말이다.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넌 대체 뭐하는 놈이냐?”

 

 영은 기가막히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툇마루에 제 집 마냥 널브러진 남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톡톡. 떨어지는 빗물을 피해 얄밉게 누워있는 그의 모습에 깊은 한숨 소리가 절로 영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습기 때문에 오늘따라 더 곱슬거리는 허연 머리카락마저 그의 신경을 거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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