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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연재 > 로맨스판타지
아포리아
작가 : 윤소교
작품등록일 : 2017.10.30

(현대/판타지/백발남/신(GOD)여주/신화/미스터리)

가상의 서울에서 펼쳐지는 살아있는 신이 되어야하는 여자와 이름을 잃어버린 남자의 이야기.

전쟁이 사라지고 어느 때보다 긴 평화가 지속되는 현대의 서울. 수수께끼의 남자 번은 오늘도 도시를 떠돌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같은 건물에 있던 대국민적인 신 백아(伯牙)의 33대째 당주 수린과 조우하고, 그녀에게서 잃어버린 과거의 실마리를 찾게 되는데.....

이메일 : yoonsogyo@gmail.com

 
빛으로 (3)
작성일 : 17-11-09 13:44     조회 : 374     추천 : 0     분량 : 7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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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거, 이거... 놔!”

 

 완전히 공포에 잠식된 수린이 히스테리컬하게 소리쳤다.그녀 자신조차 들어보지 못한 새된 음성이었다. 하지만 수린이 명령조로 말하자 번의 얼굴이 순간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번은 이제 미친듯이 벗어나려는 수린을 잡아두기 위해 손아귀에 힘을 주어야했다. 그는 새어나오는 욕설에 잇새를 물었다.

 

 지금, 백아의 무리가 금방이라도 위치가 들킬 정도로 근접해 있었다.

 

 더 이상 빈틈을 보이면 들킨다.

 

 번의 머릿속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 미친듯이 소리지는 입을 특어막아야했다. 불행히도 수린은 진정할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팔에 있는대로 힘을 주며 번은 날카롭게 눈빛을 세웠다. 곧 그의 머릿속으로 이대로 그녀를 조용히 시킬 가장 좋은 방법이 단번에 떠올랐다.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손가락은 이미 준비가 되었는지 까닥거렸다. 그러나 그는 필사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이런 일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절대.

 

 “놓으라니까!”

 

 여전히 악다구니를 쓰는 수린을 두고, 겨우 한걸음 물러난 번은 한번 심호흡을 크게 했다. 그러더니 번은 말없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그는 곧장 수린을 향해 자신의 무릎을 굽혔다. 흡사 중세시대의 기사가 맹세의 서를 읊조릴 때처럼 진지한 모양새였다.

 

 생각지도 못한 돌발적인 행동에 수린은 잠시 격렬한 반항을 멈추었다. 결국 어깨를 잡힌 그녀는 꼼짝없이 번의 눈을 마주봐야했다. 번은 마치 더 이상 그녀에게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으려는 듯이 똑바로 수린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의도대로 수린은 잠시나마 진정할 수 있었다.

 

 "대체, 대체 왜 그러는거야.“

 

 어째서 일이 이렇게 흘러가게 된거냐고. 혹시 아는 척 한 나 때문인거냐고. 넌 대체 언제부터 바뀌어버린거냐고. 모든 의문을 뒤로하고 수린은 겨우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 입으로 말했잖아. 함정이라고.”

 

 말없이 마주보는 그의 두 눈이 한 순간 너무나도 진지해 수린은 말문이 막혔다.

 

 타일르는 듯한 목소리였다. 어느새 팔에 힘을 풀은 번에 의해 수린은 자유의 몸이 된 상태였다. 그러나 팔다리가 떨려 도망칠 수 없었다. 겨우 뭐라고 다시 입을 떼려는데 그가 다시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저들이 네가 알던 사람이라고 확신할 수 있어?”

 

 이번에는 두 사람만 들릴 정도로 아주 작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는 동시에 뒤에 따라오는 것이라도 있는 건지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그가 말하는 저들이 수행원들을 지칭하는 건 누가봐도 타당했다. 말도 안돼.

 

 수린은 곧바로 그의 말을 부정하려했다. 그러나 좀 전의 확신은 물을 끼얹은 듯 급격하게 사그라들었다. 머릿속으로 바로 좀 전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벌써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졌다. 쿵쿵. 어두운 복도에서 들려오던 발소리.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던 얼음보다도 차가운 푸른 눈.

 

 사물의 본질이 불분명해지는 시간이 왔을 때 나는 윤곽만으로 ‘선(善)’한 것과 ‘악(惡)’한 것을 구분할 수 있는가.

 

 그래. 그때 분명, 나는 지금의 번을 악한 존재라고 오해했었다. 하지만 아니었잖아.

 

 “그래. 이 세상은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그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어.”

 

 머뭇거리는 수린의 마음을 읽은 듯 번이 더 낮은 목소리로 설득했다. 혼란스러웠다. 누구를 믿어야하는지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두고, 눈앞에 보이는 오늘 처음만난 이 남자를 믿는건 옳지 않았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래야했다.

 

 “넌 날 믿어?”

 

 그 순간 그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렇게 물었다. 수린은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았다. 오늘 처음 보는 이에게 물을 수 있는 말도, 대답을 할 수 있는 말도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 말을 하는 그의 눈이 몹시도 슬퍼보였기 때문이다. 믿는다는 말도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믿고 싶었다. 내 판단이 틀리지 않기를 바랬으니까. 널 알고 있다는 내 확신을 믿고 싶었으니까. 그런 수린의 대답에 번은 만족한 듯 처음으로 올곧게 웃어보였다. 그러나 그 미소에도 물론 수린의 마음은 전혀 편하지 않았다. 엉겁결에 대답했지만 그는 점점 더 모르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사실은 오히려 이게 본모습인지도 모르지.

 

 이게 진짜 모습이고, 내가 어둠이 내려앉은 복도에서 만난 남자는 모두 신기루의 허상이었던 것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우리들은 애초에 처음 만나는 사이였으니까. 이상한 밤에 이끌려 서로 다른 착각에 빠진 것 이다. 동상이몽처럼 같은 곳을 보며 다른 생각을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날카로운 진실에 그녀는 결국 그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시선을 돌려버린 수린에 자신의 잇사이를 물던 번은 바닥을 쳐다보았다. 그는 무엇을 고민하는지 한동안 망설였다. 이윽고 다시 정적이 찾아오려고 했을 때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얌전히 있으면 내가 널 ‘출구’로 데려다줄게. 약속해.”

 

 그가 순간 콱 막힌 목소리로,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켜줄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불행히도 남자의 그 말은 그녀가 애써 붙잡은 희망을 빼앗아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에 밀어 넣었다. 그저 몇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일 뿐인데, 수린은 순간 머리를 크게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출구...라고?”

 

 그녀가 거의 흔들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목구멍 가득 수분이 스며든 목소리였다. 믿을 수 없다는 커다란 눈이 자신을 바라보자 번은 거리끼다는 듯이 시선을 피했다.

 

 “거짓말.....”

 

 그의 반응에 수린은 충격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출구를 안다는 그 말이 거짓말인 것 같지 않았다.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모두 알고 있었다.

 

 이 자는 평범한 수행원도, 아포리아도 아니다.

 

 “혼란스럽겠지. 하지만, 나도 이런저런 사정이 있으니까. 제발, 수린. 지금 중요한건 지금 시간이 별로 없다는거야.”

 

 번이 빠르게 말했다. 점점 일이 꼬이고 있는 상황에 그도 냉정을 잃어가려 있었다. 모든 일은 자신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렇게나 빨리 그들이 백아를 찾아낼 줄은 몰랐으니까.

 

 번은 지금 이 순간 수린을 그냥 그대로 두고갈걸 후회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곧바로 부정했다. 무엇이 됐든 그때 그 자리에 있었다면 ‘성치 못한 일’이 일어날 것은 분명했다. 그래. 나는 이 여자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그러니 조금도 미안해할 필요가 없었다. 번은 스스로에게 그 사실을 되뇌이고 또 되뇌였다. 하지만 배신이라도 당한 것 같은 여자의 표정이 그의 신경을 자꾸만 긁었다. 실은 도려내고 싶을 정도로 짜증이 일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에라도 분명히 말하기로 했다. 게다가 정말로. 이제는 시간이 없었다.

 

 “알겠어. 만약 네가 정말로 소리가 들린 쪽으로 가고 싶다면 그래도 돼. 하지만 그때는 난 네 목숨을 책임져주지 않을 거야.”

 

 목숨이란 절망적인 단어에 수린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에서 참을 수 없는 초조함을 읽었다.

 

 “길은 여러 개지만 내가 갈 수 있는 단 하나거든.”

 

 모든 것을 밝힐 수 없는 그는 오직 그렇게만 자신의 상황을 전했다. 갈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번은 그대로 수린의 두 눈을 똑똑히 바라보았다.

 

 “어떡할래?”

 

 번은 그 말을 끝으로 수린에게 선택의 여지를 넘겨주었다. 그가 원하는 것도, 익숙한 일도 아니었지만 그는 그렇게 했다.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넘어온 선택에 수린은 피가 나올정도로 입을 깨물었다. 도대체 갑자기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단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있잖아, 번.

 

 나는 나중에 이 일을 두고 두고 후회하게 될까?

 

 수린은 대답 대신 다시 번의 손을 잡았다. 일순 그의 표정이 일렁거리듯이 바뀌었다. 그러나 그 보다도 수린의 표정이 훨씬 더 많이 흔들렸다. 그보다는 그녀가 잃을 것도, 지켜야할 것도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지금 눈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손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이야?”

 

 믿지 못하는 그의 음성에 대답 대신 분명히 고개를 끄덕였다. 번은 착잡함을 숨기지 않은 채 다시 수린을 이끌기 시작했다. 그것이 그들의 대화의 끝이었다. 안정을 되찾은 번은 이제는 거의 식별이 가능할 정도로 밝아진 복도를 조심스럽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길은 밝아졌지만 그들의 표정은 훨씬, 어두웠다.

 

 ‘조용히.’

 

 그 때 번이 수린을 돌아보며 조용히 하라는듯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댔다. 수린은 그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들은 도둑이라도 된것처럼 복도를 지나갔다. 수린은 자꾸만 등 뒤를 돌아보고 싶은 것을 참아야했다. 그가 보여줬던 ID카드가 거짓이라면, 번이 누구인지는 더 이상 알길이 없었다. 그러니 그가 지금까지 한 모든 말도 모두 거짓말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어쩌면 이름마저 거짓인지도 모르고, 자신은 목숨마저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따라가는 이유는 단 하나 때문이었다.

 

 점점 환한 빛 속으로 들어가며 아스라이 밝아지는 이 길이.

 

 마치 끝으로 달려가는 연극처럼 아쉬웠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믿느냐는 말을 했을 때의 그의 얼굴이 눈이 시릴 정도로 쓸쓸했기 때문이다.

 

 이 어리석은 어둠이 모두 끝나고.

 

 완전히 사물의 본모습이 드러나는 순간이 오면 다시는 그를 못 볼 것을 마음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수린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물어야만했다. 왜 자신이 모르는 이에게 이런 술렁이는 마음을 느껴야하는건지.

 

 그가 자신처럼 아무도 모르는 얼굴을 가지고 있는걸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무시하지 못했던 건지도 모른다. 또 다시 쫓기듯이 그를 따라 나서며, 수린은 마지막으로 사라지는 뒤를 돌아보았다.

 

 점점 멀어지는 텅 빈 복도.

 

 그에 비해 밤은 빠르게 지고 있었다.

 

 ‘공주님, 제발.....들리시면 대답을.’

 

 그 순간 또 다시 수행원들의 목소리가 울렸다.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목소리의 근원지가 복도가 아니었다. 아주 또렷이 그녀의 마음 속에만 들리는 수행관들의 목소리였다. 그 순간 무언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그녀의 발목을 잡아 내리 눌렀다. 곧 수린의 양 손은 주먹 쥔채 움직일 수 없게됐다. 자의든 타의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 순간 수린은 ‘여기 있어.’ 라며 저도 모르게 목소리에 응답해버렸다.

 

 그 순간 달칵, 거리는 소리와 함께 기다렸다는 듯이 복도의 형광등이 모두 켜지기 시작했다.

 

 복도는 순식간에 눈부신 빛 속에 놓였다. 손안에 드리워진 빛을 바라보며 시간이 멈춘 수린은 생각했다.

 

 왜, 잊어버리려고 했던걸까?

 

 아주 작은 자극으로 불현듯 그녀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이들을 선명하게 떠올려 버렸다. 밤에 가려져 있던 모든 것들을. 반대로 그 광경을 바라보는 번의 표정은 믿지 못할 정도로 일그러러지기 시작했다. 불과 그를 따라가겠다고 말한지 몇분도 채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수린은 그저 천천히 반대 방향으로 걸어나갔다. 밝은 빛이 발밑에서 광선처럼 쏟아져 나오는 것을 반기며. 그를 보지 않는 수린의 눈동자는 환한 빛에 아름다운 갈색으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너, 너.....”

 

 번이 충격에 금치 못하여 외마디로 중얼거렸다. 자신을 향한 분명한 분노와 배신감도 느꼈다.

 

 하지만 이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눈부신 빛을 내려다보는 수린의 눈동자는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아무것도, 그녀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게 비로소 그녀와 어울리는 익숙하고 따뜻한 빛이었으니까.

 

 ‘지금 바로 길을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백아님.’

 

 빛은 단 한 순간에 어둠에 감춰져있던 수린의 존재를 일깨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늘 그녀가 살아왔고, 보여줬고, 또 앞으로도 해내가야할, 밝은 태양 아래에서 신으로서 존재하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그건 그녀가 져버릴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설령 그것이 지금처럼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와 대비될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수린은 망설이지 않고 몸을 틀었다. 가야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이들을 향해.

 

 그녀는 가야했다. 지금 당장 자신에게 기다리고 있는 모두에게 가야했다. 잠시 어리석게도 그 우선 순위를 잊고 었었다. 그것이 ‘그녀’가 살아왔던 인생의 전부였는데 말이다.

 

 이미 감춰져있던 시간을 드러내는 밤은 사라지고 없었다.

 

 한 여름 밤의 묘한 밤 속에서, 잠시마나 아무도 모르는 얼굴을 보여주었던 수린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다. 그녀는 신이지 인간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그것은 처음 보는 남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하게도.

 

 “성격 한번 급하네. 백아.”

 

 얼마나 급하게 뛴 건지 발을 헛디딘 수린을 다시 한번 번이 붙잡아 일으켰다. 그제야 번의 존재를 떠올린 수린은 그를 돌아보았다. 역광 때문에 그가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볼 수 없었다.

 

 백아라고 불렀다.

 

 그 순간 수린은 그가 이미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잡힌 팔을 풀며, 수린은 불현듯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낯선 남자가 눈부신 빛속에 서있었다.

 

 아주, 낯설고 낯선 남자였다.

 

 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었느냐는 옳은 질문이 아니었다.

 

 이제 그건 아무래도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자신을 수린이 아닌 백아로 부르자 수린은 순간 처음으로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조금만 참지 그랬어? 그러면 둘 다 '해피엔딩'이었을 텐데.”

 

 이기적이게도. 라며 그가 조금 헐떡이는 목소리로 입꼬리를 비틀었다. 수린은 커다래진 눈으로 흔들리는 그의 팔뚝을 보았다. 피는 흐르지 않았지만 빛이 살깣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그걸 바라보는 수린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역시 ‘너’와 얽히면 좋은 일이 단 하나도 없다니까.”

 

 수린의 시선에 번이 조소가 가득 깃든 냉소로 대꾸했다. 그녀가 불현듯 팔을 뻗자 그는 훌쩍 한걸음 물러섰다.

 

 수린은 충격에 빠진 채 고개를 들어 그의 두 눈을 들여다 보았다. 그는 여전히 웃고있었다. 하지만 진심으로 웃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이제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이럴줄 알았으니까. 그러니까 다시는 보지 말자.”

 

 간신히 그 말을 하며 번은 툭. 아주 손쉽게 수린을 빛 사이로 밀어 넣었다. 힘 하나 없는 하탈한 목소리였다.

 

 수린은 어떻게 하기도 전에 바닥으로 가볍게 밀어졌다. 따스한 빛이 먼저 그녀를 받아냈지만 그녀는 마음이 찢어질 정도로 아픈걸 느꼈다.

 

 찰나의 선택이 만든 허무한 결말이었다. 밤이 만든 짧은 환상은 이처럼 순식간에, 예고 없이 끝이 나는 것이었다.

 

 수린은 그제야 빛속으로 천천히 떨어지며 어둠속에 홀로 남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내심 그가 자신과 함께 나갈 것이라 기대했던 것도 같다. 그러나 남자는 결코 그러지 않았다.

 

 그는 그곳에 멈춰있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는 여전히 그 자리, 그 곳에 남아있었다.

 

 어느새 복도가 일그러지며 그가 찾은 단 하나의 출구는 닫히고 있었다. 수린은 알 수 없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배웅하는 것처럼 구덩이 위에 멈춰있었다.

 

 끝까지 믿어주지 못한 낯선 이에게 그녀는 동정을 느꼈다. 그러나 그건 애초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의 일이 아니었다.그래서 후회하지는 않았다.

 

 날 찾을 생각은 하지 마. 그때는 정말로 널 원망할지도 모르니까.

 

 그 순간 마지막 그의 말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수린은 이것을 끝으로 다시는 자신이 먼저 그를 찾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점점 희미해지는 의식을 다 잡아야했다.

 

 그가 마지막에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보고 싶었다. 그러나 어느새 사방이 모두 눈부신 빛으로 바뀌자 더 이상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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