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분을 대치 상황에 놓여있는데 저 멀리서 구세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 아직까지 뭐하냐? 어서 식당으로 내려와라."
조수로 보이는 남자가 문을 가볍게 툭 치며 말했다. 아무렴. 빨리 식당으로 가야지.
"그럼."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나가려 하는데 로즐리가 나를 불러 세웠다.
"나 여기 식당 위치를 몰라. 그러니까 네가 같이 가줘야겠어."
뭐 이런 애가 다 있나 싶었지만 불쌍한 마음에 수락했다.
"하. 알아서 따라오십쇼."
몇 발자국 걷지 않고 어떤 방에 도달하자 언제나 밝은 얼굴인 바트가 나를 맞이했다. 뭐가 그리 좋다고 저리 싱글벙글인지.
"왔구나? 언제오나 기다렸다고! 빨리 가자. 그런데 로즐리는 왜 데려온 거야?"
그는 마지막 말이 내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식당 위치를 모른대."
"그렇다고 데려온 거야? 아스 진짜 대단하네."
놀란 듯 바트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이내 낭소했다.
"그건 이제 됐고. 얼른 가자. 이러다가 밥 못 먹겠네."
발걸음을 옮겨 식당에 들어서니 단번에 시선이 집중됐다. 대부분이 경멸과 공포가 섞인 시선이었다. 로즐리는 가볍게 혀를 찼다.
"직접 대련을 신청할 배짱도 없는 주제에 저런 눈초리라니. 차라리 네 쪽이 훨씬 낫겠어."
갑자기 웬 후려치기람. 어이가 없었지만 그런 말을 하는 까닭을 알 것도 같았다.
로즐리는 무려 5살 때부터 마법학을 공부한 탓에 천재를 넘어서 괴물이라 불렸다. - 물론 이 정보는 바트가 제공했다 - 그런 그가 받았을 시선은 나도 대충 상상이 갔다.
사람이란 자신과 다른 걸 배척하기 마련이었으니. 내가 처음 검을 들었을 때 받았던 시선이 그랬다.
"아스? 뭐 먹을 거냐니까?"
명랑한 바트의 목소리가 한참이나 늪에서 허우적대던 나를 끌어올렸다.
"어? 아, 나는 클럽 샌드위치로."
고작해야 세가지 밖에 없는 메뉴판에서 그나마 먹을만한 건 샌드위치 뿐이었다. 나머지는 정어리 오렌지 파이와 녹인 초콜릿을 끼얹은 스테이크 뿐이었다. 대체 무슨 맛이람.
"초콜릿 스테이크로 주세요."
로즐리는 영업용 미소를 지어보이며 주문했다. 길거리의 집시들도 그보다는 덜 가식적일 듯 했다.
"엑. 그걸 무슨 맛으로 먹어?"
저도 모르게 말이 흘러 나왔는지 바트는 얼굴이 파리해져선 제 입을 텁 막았다.
"네가 이런 고급스러운 맛을 알 리가 없지. 그냥 얌전히 클럽 샌드위치나 먹지 그래?"
미간을 일순 찌푸렸다가 이내 가면같은 웃음을 지어보인 로즐리가 비소섞인 조롱을 내뱉었다.
바트는 여전히 늑대 앞의 양처럼 벌벌 떨고있는 채였다. 불쌍해라. 조금 도와줄까.
"왜 이렇게 열을 내시는지 모르겠네요. 마치 본인이 무시 당하기라도 한 것마냥. 아, 혹시 로즐리 가의 영식은 초콜릿 스테이크였던 건가요? 그렇다면 죄송합니다."
"...평민. 아니, 아스. 그런 무례한 말의 뒷감당은 준비됐겠지?"
평소와 다른 위압적인 아우라에 조금 움찔했다. 하지만 엘리제다가 있는 한 나는 절대 지지 않는다.
"얼마든지. 하지만 설마 당신같이 똑똑한 사람이 발현자에게 덤비는 무모한 짓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까와 같은 대치 상황이었다. 그 때보다 더욱 심각한 분위기였다. 기본적으로 제레니오 아카데미는 학생들 간의 대련을 지양하기는 커녕 오히려 장려하는 편이었다.
상대가 손수건을 내 앞에서 찢는다면 그건 대련을 신청한다는 의미였다. 로즐리는 백합 자수가 예쁘게 놓여있는 하얀 실크 수건을 찢었다. 식당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케인 로즐리와 평민 발현자의 대련이라니. 엄청나잖아?"
"누가 아니래. 이런 건 다신 못볼 진귀한 장면이라고."
기분이 나빠졌다. 저들은 내 이름조차 알지 못하면서 우리의 대련을 서커스로 삼으려 한다. 어느 누가 좋아하겠는가.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구경하는 것도 저들의 권리 중 하나였다.
"계산이 빠른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군요."
"너도 그다지 영악하진 않아."
분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내가 정말 영악했다면 로즐리를, 그의 가문을 조롱하는 멍청한 행위는 하지 않았겠지.
내가 이렇게 멍청하고 용감한 이유는 딱 두가지였다. 첫째는 나의 엘리제다였고 둘째는 검술 실력이었다. 아무리 가문에서 막아도 언제나 빠져나갈 구멍은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듯이.
"빛은 유한하다. 유한함은 그대를 속박할 것이다."
로즐리의 손에서 빛의 고리가 나와서는 내 발목을 묶었다. 제대로 중심을 잡지 않았다면 넘어질 뻔했다. 인사도 않고 시작하다니. 역시 저 치는 무뢰배다.
"이렇게 나온다는 거죠?"
미간을 눈에 띄게 찌푸린 나는 바로 엘리제다를 불러냈다. 그는 한 번 더 속박 마법을 할 셈인듯 주문을 외고 있었다.
아니 잠깐. 그럼 역시 저 자식은 손수건을 찢을 때부터 주문을 외고 있었던 거잖아? 정말이지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난 저런 간사한 사람을 혐오했다.
"야! 왜 불러놓고 말이 없어!"
앙칼진 엘리제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맞다. 엘리제다가 있었지.
"...깜빡한 거야."
엘리제다가 무어라 말하려는 듯 했지만 나는 바로 그를 휘둘렀다. 가장 신경쓴 것은 힘조절이었다. 엘리제다는 레이피어였고, 레이피어는 살상용 무기였다. 그것도 강력한.
아주 다행스럽게도 로즐리와 나의 거리는 딱 좋았다. 이건 내 승리였다. 복수를 위한 첫 걸음이었다. 여기서 그를 이긴다면 분명 내 평판은 올라갈 것이고 그렇다면 졸업을 할 때 교수들의 추천장쯤은 받을 수 있겠지.
"죄송하지만 제가 이긴 것 같네요."
대련은 클럽 샌드위치가 나오는 타이밍에 맞춰 끝났다. 하마터면 못 먹을 뻔했다.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과연 발현자가 아니었어도 날 이길 수 있었을까?"
다시 식당으로 발을 옮기는데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이지 귀여운 구석이 없네.
"정신 차리시죠. 제가 발현자든 말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중요한 건 제가 당신을 이겼다는 것. 그 뿐입니다."
로즐리는 아름다운 얼굴로 불쾌한 듯 미간을 좁혔다. 대체 왜 별명이 기분 나쁜 검은 뱀인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그냥 받아들이라고. 귀한 자식답게."
최대한 예쁘게 눈을 접어 웃어보인 뒤 자리를 떴다.
"역시 아스는 대단하네! 친해지길 잘 한 것 같아."
"네가 그렇게 속물적인 애였던가."
"그, 그런 건 아니야!"
손사레까지 쳐가며 부정하는 모습은 꽤나 귀여웠다.
"농담이야."
푸스스 웃자 바트는 그제야 안심된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귀엽다면 얼마나 좋은가. 제국평화는 식은 죽 먹기일테다.
그에반해 로즐리에겐 귀여운 점이 정말정말 단 하나도 없다. ...아니. 이제 그 자식 생각은 그만하자. 지금은 지친 나에게 휴식을 줄 때다.
휴식에 단 것이 있으면 금상첨화다. 방에 가서 후식으로 나온 딸기 쿠키를 먹기로 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에 가 문을 열었다.
"아."
"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분 나쁜 소리를 흘렸다.
"저 자식이랑 같은 방인 걸 까먹었잖아..."
나름 작게 말한 거였는데 로즐리는 용케도 내 말을 들은 듯 침대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아무리 내가 그보다 월등히 뛰어나다 해도 내 머리 세 개는 더 있는 거대한 크기의 그에게 겁을 먹는 건 생리적인 것이었다.
또 나른한 저 눈을 보고 있자니 나까지 녹아버리는 기분이었다.
"죄송하지만 조금 비켜주시겠습니까."
지금 우리의 자세는 실로 묘했다. 간단히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꽤 위험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도 있을 법한 자세였다.
"싫은데?"
얘,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