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화장을 잠깐 멈췄다. 여전히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뭔가 후끈거리는 열기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교실에는 그와 둘 뿐인데 혹시나 그가 딴 마음을 먹진 않을까 염려가 좀 되기도 했다. 그녀는 괜히 오늘 술을 사주겠다고 했나 싶기도 했다. 그녀의 손길이 끊기자 그가 살며시 실눈을 떴다. 팔짱을 낀 채그녀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왜..."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에요?"
"네, 네?"
그는 자신의 상상을 들킨 것 같아 깜짝 놀랐다.
"아무 생각도 안 했는데요?"
"그런데 왜 그렇게 놀라는데요? 그리고 앓는 소리는 왜 내는데요?"
"아, 앓는 소리요?"
민망함에 그는 허둥댔다. 하지만 얼굴에 티가 나면 정말 자신을 이상하게 볼까봐 최대한 침착을 유지했다.
"제, 제가 언제요? 전 그런 적 없어요."
"아니, 그럼 내가 그랬겠어요? 여기 우리 둘밖에 없는데 난 아니고,그럼 귀신이 소리냈겠냐구요."
"난 몰라요. 샘이 잘 못 들었나보죠, 뭐."
이렇게 된 이상 파랑은 뻔뻔해지기로 했다.
"참나...아, 아무튼 눈 감아요. 부담스러우니까. 립도 칠해야하니까. 좀 더 해야해요."
그리고는 그녀가 그에게 강렬한 레드립을 발라주었다.
"자, 이렇게가 완성이에요. 그대로 반쪽에 해보세요."
그리고 그녀가 새침하게 돌아섰다. 거울에 비친 사람은 그가 아닌...류크였다.
"으잉? 이건 데스 노트 류크?"
어떻게 보면 비주얼 락 밴드 보컬 같아 보이기도 했다. 여자 같기도 남자 같기도 한 그 화장이 썩 마음에 들어 그가 씨익 한 쪽 입꼬리를 올려 웃어보았다. 아수라백작스러운 기괴한 웃음이었다. 그렇게 혼자 거울을 보며 감상 중인데 그런 모습을 로사가 보았다.
'혼자 왜 저러는 거지?'
거울 속 그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등을 휙 돌리며 생각했다. 그녀의 표정을 눈치 챈 그가 다시 표정을 풀고는 메이크업에 돌입했다. 정말 미친 놈이라고 생각해서 도망갈 지도 모르므로. 데모에 따라 그가 화장을 마치고 검사를 받았다.
"뭐, 그런대로 비슷하게 잘 했네요. 눈썹이 좀 비뚤어졌지만 이 정도면 잘 했어요."
그녀의 칭찬에 그는 기분이 좋아졌다.
"이렇게 하고 한번 나가볼까요?"
"네에?"
"사람들이 날 모를 것 아니에요."
"아니, 뭐 파랑씨가 연예인도 아니고 누가 알아봐요? 그렇게 하고 다니면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다 쳐다볼 걸요?"
"재밌잖아요."
"지금 이 근처 센터에서 코스프레 행사 중인 거 알죠? 아마 거기 지나가면 사람들이 덜 주목하긴 하겠네요. 거기 가면 아마 게중 제일 약한 분장일 테니까."
"그런 것도 있어요? 무슨 무슨 코스프레가 있는데요?"
"뭐, 일본 만화 캐릭터는 다 있을 걸요? 세일러문부터 포켓몬도 있을 지도..."
"우와, 가볼까요?"
"네에? 저더러 같이 가자고요?"
"만화하니까 예전부터 떠오른 게 있었는데 샘, 엘프 닮았어요."
"네에? 아니, 뭐...그런 얘기 좀 듣긴 했는데..."
좀 뜬금 없긴 했지만 막상 엘프 같다고 하니 그녀는 기분이 좋아지긴 했다.
"어차피 내가 예약해둔 술집으로 가려면 거기 지나가야 하니까 우리도 좀 해볼까요?"
"아니, 무슨 애도 아니고..."
"더 나이 들면 더 못 해요. 어차피 가는 길 구경이라도 해보자구요."
로사가 줏대가 있는 성격도 아닌데다 귀가 얇기 때문에 뭐든 설득에 잘 넘어가긴 했다. 그렇게 그를 따라 그녀도 나섰다. 그렇게 얼마를 걸어가니 센터가 나왔고 온갖 잡캐릭터가 그 근방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이곳은 정상인을 오히려 이상하게 보는 곳이었다. 가장무도회 같은 그곳에 서니 로사도 기분이 들떴다.
"아, 저기 코스프레 코스튬 대여장소도 있네요. 자, 이제 '나'를 지워볼까요? "
그렇게 그가 그녀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온갖 공주 의상에 야한 옷까지 없는 게 없었다. 둘은 처음 생각보다 고르는 게 재밌어졌다. 그는 진짜 류크가 되기 위해 시커먼 날개를 대여해 올 블랙으로 입었다. 그리고 아까보다 더 진하게 분장하고는 노란 렌즈까지 꼈다. 목소리만 파랑일 뿐이었다. 그렇게 그가 그녀 옆에 등장했다.
"로사샘, 다 골랐어요?"
"아니요, 뭘 입어야할지...으악!"
그녀는 정말 악마라도 본 듯한 얼굴로 그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저, 저에요. 파랑. 우핫, 놀라다니 뿌듯하다."
"놀랐잖아요. 이렇게 제대로 하기 있기에요?"
"아, 샘 아직도 못 한 거에요? 내가 골라줄게요. 샘, 엘프는 이런 날개옷을...아, 넘 작은데?"
"뭐가 작아요? 나 입을 수 있어요."
"에? 이거 티셔츠가 아니라 원피스라고요. 다 합쳐봐야 세 뼘도 안 되는..."
"쳇, 날 뭘로 보고...기다려봐요. 넉넉히 입어줄테니."
"그거 입고 걷지도 못 할 걸요?"
그의 말은 듣지도 않고 그녀가 옷과 부츠를 가지고 탈의실로 가버렸다. 한참이 지나도 그녀가 보이지 않자 그가 직접 찾아나섰다. 탈의실 앞으로 가 그녀를 불렀다.
"로사샘, 로사..."
그때 문이 짠 하고 열리더니 잠자리 날개를 파르르 떨며 그녀가 등장했다. 그는 심장이 쿵쾅거렸다.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가슴 풍만한 천사가 눈 앞에 서있는 것 같았다. 초록 머리에 초록 눈에 옷도 초록이었다. 팅커벨처럼 어깨 위로 폴짝 내려 앉을 것 같은 비주얼이었다.
"우와..."
그녀가 웃었다. 세상이 환해지는 미소였다.
"안 데려왔으면 어쩔?"
그 역시 그녀의 웃음에 따라 웃었다. 단점이라면 류크는 웃을 수록 더 기괴한 얼굴이 된다는 것이었지만.
"그럼 이제 퍼레이드 함 해볼까요?"
그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신의 거대한 검정색 까마귀 날개가 몹시 거추장스러웠지만 어쨌거나 기분은 묘했다. 파랑도 로사도 아닌 지금은 류크와 엘프의 만남이었으니까. 그런데...
"걷질...못 하겠어요."
"네?"
"걷을 수가 없다고요. 도무지."
그랬다. 그녀는 옷이 터질까봐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마네킹이었다. 그는 그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푸핫, 거봐요. 내가 그랬잖아요. 그건 작..."
그녀의 노려봄에 그는 자체 음소거했다.
"역시 화장은 예술이네요. 누가 메이크업 아티스트 아니랄까봐. 엄지 척! 그런데 그렇게 계속 서있을 건 아니죠?"
"그럼 어떡해요?"
"아, 이거 나한테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닌가? 이 정도면 난 오해할 수 밖에 없지. 아 그래요, 내가 속아준다 속아줘."
"네에?"
그러더니 그가 그녀를 번쩍 들어 안았다.
"우아악!"
"뭐, 이렇게라도 행사를 즐기고 가야죠. 안 그래요?"
그렇게 그녀는 넓은 류크의 품에 안긴 채 코스프레 행사에 발에 흙도 묻히지 않은 채 아기처럼 돌아다닐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