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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연재 > 로맨스판타지
아포리아
작가 : 윤소교
작품등록일 : 2017.10.30

(현대/판타지/백발남/신(GOD)여주/신화/미스터리)

가상의 서울에서 펼쳐지는 살아있는 신이 되어야하는 여자와 이름을 잃어버린 남자의 이야기.

전쟁이 사라지고 어느 때보다 긴 평화가 지속되는 현대의 서울. 수수께끼의 남자 번은 오늘도 도시를 떠돌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같은 건물에 있던 대국민적인 신 백아(伯牙)의 33대째 당주 수린과 조우하고, 그녀에게서 잃어버린 과거의 실마리를 찾게 되는데.....

이메일 : yoonsogyo@gmail.com

 
먼 곳에서 들려오는 (3)
작성일 : 17-10-30 13:13     조회 : 319     추천 : 0     분량 : 8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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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마침내 헛기침과 함께 그가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넌 백아를 모시는 신녀, 뭐 그런 거야. 그렇지?”

 

 충동적이고 아무렇게나 지껄인 말이었다. 신녀든 뭐든 그가 알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에겐 그렇지 않은 듯했다. 거의 단정하다시피한 번의 말투에 얼굴이 환해진 수린은 동의하며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곤란해진 번은 저도 모르게 끙. 신음소리를 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정말 백아는 정체를 숨기고 싶은 모양이었다. 어째서 신이면서도 이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냐고 묻고 싶은 것이 굴뚝같았지만 그는 입을 다물었다. 애초에 변덕스러운 신의 머릿속은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가 정말 백아인 이상 그는 더 이상 이곳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괜한 의심을 사기 전에 자리를 떠야했다. 뭐, 나에게 호의를 베풀려고 했던 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는 침착하게 수린에게 인사를 전했다. 길가다 만난 행인에게 할 법한 그런 짧은 인사였다. 무미건조한 인사를 끝으로 번은 가던 길을 가려했다.

 

 그녀가 백아인걸 안 순간 번의 섣부른 호기심은 이제 사그라들어 재만 남았다. 귀에 못이 박히들어온 그 이름을 이런 자리에서 마주할 줄은 몰랐지만.

 

 그런데 그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커다란 소리가 그의 등 뒤로 들렸다. 불행히도 번의 평화와 기대는 그것으로 무참히 깨져버렸다.

 

 “이 앞은 위험해.”

 

 좀 전과 달리 상당히 분명한 어조로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번은 주박(注泊)에 걸린듯 어둠속에서 멈칫 섰다. 그는 천천히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발치를 노려보았다. 그 순간 그는 목소리가 나무줄기가 되어 자신에 발에 엉키는 환상을 보았다. 아주 싱그럽고 생생한 족쇄. 그래, 또다.

 

 저 사람을 ‘붙잡는’ 목소리.

 

 결국 그는 고개만 돌린 채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우두커니 여자가 서있었다. 그것도 상당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가 의아함과 당혹스러움에 가만히 있을 때 수린이 더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영님의 권속이라면, 위험에 빠지는걸 두고 볼 수는 없어.”

 

 그 말에 번은 어둠 속에서 눈을 반쯤 내리깔았다. 책임감이란 도의적인 단어가 그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런 건가.

 

 그거라면 이해가됐다. 이 상황에서도 남의 자식을 챙기다니 참으로 훌륭하다. 그런데 말이지, 유감스럽게도 백아는 가장 위험한걸 모르고 있었다.

 

 “어디가 어떻게 위험한데?”

 

 기분이 가라앉은 번이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순간 수린이 흠칫했다. 저도 모르게 당황한 그녀가 겨우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일단 앉으면 이야기해줄게. 이렇게 서서 이야기할건 아니라서.”

 

 갑자기 바뀐 분위기를 애써 의식하지 않으며 수린이 말했다. 아직 그녀는 온전히 번을 믿을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신’인 그녀에겐 누군가의 권속인 그를 잡아둘 의무가 있었다. 그건 무엇보다도 그녀의 가장 큰 의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해도 사실, 정말 이대로 번이 어둠속으로 사라져버린다면 수린은 그를 막을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초조했다. 게다가 죽을 뻔했다는 것을 안 이후로 그녀는 조금씩 이 어둠이 정말 위험할 수도 있다는걸 깨닫는 중이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혼자 있고 싶지 않았고 그건 그에게도 바라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수린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번을 바라보았다.

 

 책임감을 가장한 순수한 걱정, 배려, 호기심. 번 역시 어둠을 타고 흘러드는 감정들을 빠짐없이 느꼈다. 그런데도 그는 수린의 시선을 피하며 자신의 발치만을 노려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팽팽한 대치 상황이 이어졌다. 그때 어둠속에서 그가 또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오랜 고민 끝의 한숨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갔던 길을 터덜터덜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아무 불만 없이 돌아오는 남자의 행동에 수린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분명 미련 없이 가버릴거라고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복도에서 돌아온 번은 털썩. 커다란 소리를 내며 정말 자연스럽게 그대로 수린의 옆에 앉았다. 수린은 얼른 그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갑작스럽게 옆자리를 내주자 작은 고동소리가 심장 속에서 흘러나왔다. 침착해야했다.

 

 부끄럽게도 또래의 낯선 남자와 이렇게 가까이, 옆에 있는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러자 어이없게도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그에 비해 옆에 앉은 남자는 무뚝뚝하기 그지 없다. 그 알 수 없는 태도에 가지말라고 말한 것은 자신이면서 수린은 되려 안절부절 못하기 시작했다.

 

 두근거리는 수린에 비해, 번은 뭐가 불만스러운지 눈썹을 찡그리며 벽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그는 수린이 책임감을 의식하고 있는 거였다면 주저하지 않고 갈 길을 가려고했다.

 

 그는 귀찮은 일을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여자의 그 절실한 눈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이 책임감에 움직이는 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도 분명 있었지만 그것 역시 완벽한 정답이 아니었다. 여자는 소프라노의 고음에 깨져버릴 유리만큼 예민했고, 그래서인지 더더욱 그녀의 심상이 손에 잡힐듯 그려졌다.

 

 뭐랄까. 그래, 마치 따돌림을 받던 아이가 유일하게 말을 걸어준 아이를 만난 것처럼. 놀랍게도 타인과 대화를 하고 싶어 하는 눈이었다.

 

 어째서 눈빛만으로도 그걸 알 수 있었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모르는 사이에 독심술이라도 생겨버린 것인지 모르겠지. 어찌됐든 그것은 충분히 그의 흥미를 이끌었고, 그의 발목마저 붙들어버렸다. 그래.

 

 인간 신.

 

 많은 이들이 궁금증을 가지는 대상이지 않은가. 마침 아직까지는 여유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는 잠시 백아의 상대를 해주는 거라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여차하면 도망가도 된다. 하지만 번은 동시에 이것이 얼마나 그 자신의 신념에서 벗어나는 일인지는 깨닫지 못했다.

 

 지금까지 그의 인생 최대 목표는 ‘안전 제일주의’ 였으니까. 그는 스스로가 벌인 충동적인 상황에 저도 모르게 살짝 조소를 머금을 뿐,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헌데 백아는 신이지만 육체는 인간과 똑같더랬다.

 

 그리고 아무리 신분을 밝혔어도 이곳은 어둡고, 자신은 여전히 낯선 사람에 건장한 남자였다. 그러니 번이 생각할 때, 이 상황은 도저히 그녀에게 올바른 선택이 아니었다. 유감스럽게도 백아는 멍청하거나 순진하거나 둘 중 하나인 듯 하다.

 

 “넌 정말 조심성 하나 없는 여자야.”

 

 격의 없이 접근한 것은 그 자신이면서도 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고는 다시 반곱슬처럼 숱많은 자신의 흰 머리카락를 훑어올렸다. 겁 없는 이상한 신. 하지만 한 가지. 한가지는 분명히 알겠다.

 

 분명 자신이 아니더라도 백아는 쉽게 함께 있자고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왠지 번은 기분이 별로였다. 천성이 외로움을 타는 여자면 귀찮으니까.

 

 그럼에도 두고 갈 수 없는 걸 보면, 어쩌면 이런 타입이야말로 자신에게 쥐약인지도 모르겠다고, 번은 자조스럽게 생각했다.

 

 “고마워, 번.”

 

 그 때 수린이 자신의 어깨를 감싸며 인사를 전했다. 잠시 멈칫한 번이 가볍게 응수했다.

 

 “별 말씀을.”

 

 "이대로 있으면 곧 구하러 오니까."

 

 그가 불안해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수린은 얼른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번은 대꾸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번이 가버리지 않아서 기뻤다.

 

 이상하게 처음 보는 남자인데, 오랜 시간 알았던 것만큼 친밀한 기분이 들었다. 더 이상 테러라는 상황도 신경 쓰이지 않게 될 정도로. 안도한 수린은 오금 아래로 팔을 밀어 넣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번이랬지? 넌 어쩌다 이곳에 있는 거야?”

 

 정말 궁금하다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사실 수수께끼였다. 엘리트라 불리는 수행원들도 다 튕겨져버렸는데, 번은 어째서 남을 수 있었던걸까.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고 있는데 자신의 질문을 듣고 잠시 뜸을 들이던 번이 자진하여 입을 열었다.

 

 “말했잖아. 일 때문에 온거라고.”

 

 조금 조급하게 거짓말과 진실을 적절히 섞어서 그가 대답했다.

 

 “어느 순간부터 건물에 불이란 불은 다 꺼지고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고.”

 

 그래서 이 귀찮고 빌어먹을 일에 휘말리게 됐지. 라며 빈정거리는 말을 그는 마음속으로 삼켰다. 순간 번 역시 어째서 백아가 이런 일에 말려든 것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생각했을 때 백아를 노리는 적은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워낙... ‘안티’가 없는 신이니까.

 

 “그래서? 네가 말하는 ‘위험’은 뭐지?”

 

 그녀의 얼굴이 잠시 고민하는듯 보였다. 머릿속으로 말을 고르고 또 고르고 있었다. 신중한 여자였다.

 

 “...여긴 네가 있던 빌딩이 아니야. 이건 함정이야.”

 

 이건 또 재밌는 얘기.

 

 “함정?”

 

 함정이라는 말에 그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갑자기 코앞에 나타난 번의 얼굴에 수린은 애써 동요를 감추며 고개만 작게 주억거렸다.

 

 갑자기 번의 눈은 어둠 속에서 생생하게 빛났다. 뭐가 그렇게 그의 흥미를 끈지 모르겠다. 게다가 너무 두려워하면 어떡하지 싶었는데 오히려 즐거워보이기 까지 한다.

 

 “...으응. 백아를 노린 테러야. 불행히도 우린 거기에 휘말린 거고. 이곳은 타인이 만든 공간이라고 해야 할까. 여기까지 오면서 이상한 점 눈치 못 챘어?”

 

 아, 그런 거였어?

 

 “..전혀.”

 

 이내 그는 재미없다는 듯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흥미로워하던 질문과 달리 시큰둥한 대꾸였다. 한편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는 감상에 수린은 실망해야했다.

 

 그런데 그 순간 어둠속에서, 의외로 진지한 대꾸가 흘러나왔다.

 

 “어째서 백아가 노려지는 거지?”

 

 정말 예상 외의 질문에 수린은 말없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통 그럼 언제 구출되냐, 출구는 어디냐가 먼저 나오지 않나. 수린은 그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

 

 잘 생각해보면 그의 의아함도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뉴스에 백아를 노린 테러가 공표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 사실을 깨달으며 수린은 잠시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까 고민했다. 스스로가 표적이 되는 이유를 밝히려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대답 못할 이유도 없었다.

 

 “그거야,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래, 백아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신이긴 해. 하지만 일단은 인간이잖아? 분명 다른 신들처럼 권능이 없으니까, 어떤 사람들이나 신수들에 따라선 마음에 안드는 거겠지. 그리고...”

 

 이상하게 변명하듯이 말이 많아지던 수린은 결국 말을 끝마치치 못했다. 묘한 적막이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그리고?”

 

 말이 뚝 끊긴 수린에 결국 고개를 돌린 번이 알 수 없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가 너무 빤히 쳐다보자 수린은 순간 도망치는 것처럼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뭔데.”

 

 싱겁게 왜 이야기를 끝내냐는 그의 핀잔에도 수린은 이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번 덕분에 그녀는 그제야 지금도 그 무능함 때문에 누군가 구하러 오길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바보였다. 무능.

 

 이름을 빼면 아무것도 아닌 신.

 

 그건 모두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었는데.

 

 “권능이라...”

 

 하지만 이윽고 겨우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그저 어둠 속에서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는 어째서 대답을 못하는지도, 세세한 것까지도 알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도 더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자기만의 생각에 잠겨있을 뿐. 그래서 수린은 자신도 모르게 물끄러미 번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순간 그의 눈이 다른 곳을 보는 듯 깊어졌다.

 

 “쓸데 없는 소리. 신이란 건 원래 인간의 필요에 태어나고 존재하는 거야.”

 

 그가 갑자기 어둠 속에서 수린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연이어 강조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

 

 어쩐지 그가 화난 것처럼 보였기에, 수린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의 시릴 정도로 투명한 눈동자에서는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목소리. 확고한 진심이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어둠 속에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권능하던 아니던,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건 아무 상관 없는 거라고. 알겠어?”

 

 마치 백아에게 직접 해주는 것 같은 그 말에 어둠 속에서 수린의 눈이 조금 커졌다. 수린의 눈이 커지자 그는 너무 갔나싶어 아차싶은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정체를 알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으니까.

 

 곧 번은 자신이 따분한 소리라도 했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젓더니 손바닥에 얼굴을 굈다.

 

 그러나, 믿어주는 사람이 있으므로 존재하는 신.

 

 지금까지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놀랍게도 낯선 남자가 신을 정의하는 그 단순한 말은 진짜 신인 수린에겐 조금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심지어 지금까지 평생을 걸쳐오며 했던 고민이 아무것도 아닌것처럼 느껴지기까지 시작했다.

 

 “뭐, 그건 이제 알겠고. 그보다 정말 전기도 다 꺼져버린 모양인데? 언제까지 기다려야하는지.”

 

 어둠속에서 그가 화제를 전환하고 싶은지 입고 있는 티셔츠를 펄럭이며 쓸데 없는 소리를 했다. 좀 전의 진지했던 말투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것이 마냥 싫지만은 않아 결국 수린은 빙그레 웃어버렸다. 그는 아마 우울한 분위기는 싫어하는 남자였다. 수린은 잠시나마 기꺼이 그와 어울려주기로 마음 먹었다.

 

 “넌 무섭지 않아? 이렇게 어둡고 뭐가 나올지 모르는데.”

 

 회심의 농담이었다. 웃기려는 것이 명백한 어조. 그 직설적이고 어이없는 소리에 번은 어둠 속에서 피식 웃어버렸다.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이 때다 싶어 검지로 그녀를 가리키며 설득하는 것처럼 몸을 기울였다.

 

 “그건 내가 할 소리야. 그러는 너는....”

 

 번은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얼마나 아무 생각 없는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충고했다. 수린은 마치 잔소리하는 것 같은 그의 말투에 작게 웃었다. 그녀의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그렇게 그들은 어둠 속에서 시답지 않은 몇 마디를 더 주고받았다. 위험의 한복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대화였다.

 

 그리고 그녀가 원했던 아주, 아주 평범한 대화들이었다.

 

 모든 것이 안 좋은 상황이고 낯선 이인데도 불구하고, 수린은 정말 오랜만에 해보는 이 대화에 이상하리만큼 애착을 느꼈다. 그랬다.

 

 수린은 그제야 왜 자신이 그를 섣불리 보낼 수 없었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분명 그를 걱정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한없이 이기적인 마음.

 

 백아가 아닌 수린으로서.

 

 ‘인간’으로서 친구가 있다면, 평범한 생활을 보내게 된다면 분명 이렇게 대화를 나눴겠지. 그래서 그를 보내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을 모르고 있으니까.

 

 정말 보기 드물게도 자신을 격의 없이 대해주고 있으니까.그런 생각이 들자 수린은 지금 이 상황이 더더욱 소중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어둠이 두려워 잔뜩 긴장하고 있던 수린에게도 번 특유의 여유로움은 서서히 전염되어 가고 있었다. 수린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잠시 모든 걸 잊어버릴 수 있었다.

 

 아니, 잠시라도 모든걸 잊어버리고 싶었다.

 

 번의 말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던 그녀는 점차 어둠에 몸을 맡기며, 천천히 무거운 눈꺼풀을 감았다 떴다. 마침 그녀는 오랜 기다림에 피곤하던 차였다. 이내 수린의 고개가 어둠속에서 초승달처럼 기울어졌다.

 

 “금방일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 오면...”

 

 그 순간 갑자기 백아의 얼굴이 자신의 어깨에 기대지자, 번은 순간 몸을 들썩이며 놀랐다. 그러나 피곤했던 수린은 곧 미동도 하지 않고 잠에 빠져든 뒤였다. 며칠 째 잠을 자지 못한 결과였다.

 

 색색 거리는 작은 숨소리가 번의 귓가로 스쳤다. 그는 결국 못마땅한 눈으로 그녀의 정수리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잔뜩 제 앞머리를 흐트리던 그는 곧 그녀에게 자신의 어깨를 빌려주었다.

 

 사실 처음 봤을 때부터 백아는 상당히 피곤해보였다. 그러나 자신 옆에서 잠까지 청하다니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었다. 그렇게나 내가 편했나?

 

 그러나 그 뿐이었다. 그런 미묘한 생각과 함께 그는 더 이상 수린을 깨우지 않았다. 잠시나마 어깨를 빌려주는 것을 허용했다.

 

 어느새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이 텅 빈 복도에 흘렀다. 규칙적인 백아의 숨소리를 새며, 번은 문득 찾아온 적막과 아무것도 없는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래. 이런 조용함을 느꼈던 것이 얼마만이더라.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낯선 타인이고 그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신인데. 그는 지금 이 순간 도시에서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조용함을 만끽할 수 있었다. 게다가 하릴 없이 낭비되는 이 시간들이 꽤 나쁘지 않다고까지 느꼈다.

 

 그래. 오늘은 분명 이상한 하루다.

 

 분명 아이스크림에서 시작된 외출이었던 것 같은데 말이지. 그것에서부터 돌고 돌아 제 곳을 찾아온 듯한 기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어쩌면 오늘 백아를 만난 건, 앞으로의 나날들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식으로든간에.

 

 얼굴이 희미하게 보일 정도로 깜깜한 어둠.

 

 아무도 없는 텅 빈 빌딩.

 

 언제 올지 모르는 사람들.

 

 세상은 그에 비해 고요하고 또 고요했다. 그리고 이 때아닌 여유로운 밤이 주는 감각은 그에게 아주 오래 전 어떤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해가 지면 별들이 새까만 밤하늘에 떠 있고, 오직 그 별빛에 의지해 걸을 수밖에 없던 오래 전 그 때.

 

 번은 왠지 오늘 이 밤에서 그 때와 같은 편안함을 떠올렸다. 그 당시의 청명했던 하늘과는 분명히 다른 인공적인 밤하늘 아래였지만 놀랍게도 유사함이 느껴졌다.

 

 번은 그 때로 돌아가는 것처럼 한번 눈을 감아보았다. 아주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어둠이 시야를 가리자 그가 있는 곳은 더 이상 도시의 빌딩 안이 아니었다. 그의 의식은 점차 깊은 바다와 같은 심해로 나아갔다.

 

 백아가 꾸고 있는 꿈처럼 아득하고 깊은 바다로...

 

 하늘에는 도시의 불빛에도 불구하고 꽤 커다란 달이 떠있었다. 조용한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커다란 창문에는 부연 도시의 야경이 흘러갔다.

 

 어디선가 자동차의 경적 소리가 들렸지만, 아주 먼 곳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처럼 들렸다.

 

 아주, 아주 먼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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