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1  2  3  4  5  >>
 1  2  3  4  5  >>
 
작가연재 > 로맨스판타지
아포리아
작가 : 윤소교
작품등록일 : 2017.10.30

(현대/판타지/백발남/신(GOD)여주/신화/미스터리)

가상의 서울에서 펼쳐지는 살아있는 신이 되어야하는 여자와 이름을 잃어버린 남자의 이야기.

전쟁이 사라지고 어느 때보다 긴 평화가 지속되는 현대의 서울. 수수께끼의 남자 번은 오늘도 도시를 떠돌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같은 건물에 있던 대국민적인 신 백아(伯牙)의 33대째 당주 수린과 조우하고, 그녀에게서 잃어버린 과거의 실마리를 찾게 되는데.....

이메일 : yoonsogyo@gmail.com

 
먼 곳에서 들려오는
작성일 : 17-10-30 13:12     조회 : 342     추천 : 0     분량 : 8081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1.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솨아아.

 

 탁한 하늘엔 유독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분명 영결식이 있는 날이었다. 우중충한 하늘 아래, 일렬로 선 어른들 가장 앞에 어린 내가 있었다.

 

 등 뒤로 빼곡히 늘어진 검은 장우산들. 그 위를 가차없이 내리치는 굵은 빗줄기. 마치 검은 물결이 이는 파도 같았다.

 

 사람들은 쏟아지는 장대비 속에서 모두 가지런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검은 방수막을 씌운 커다란 카메라 몇 대가 양옆에서 추모식을 중계했다.

 

 추모사는 영님이 읊었다. 인간의 육체를 지닌 아름다운 신의 죽음. 그리고 새로운 백아의 길. 교과서에서 나올만큼 고리타분 말이었지만 모두 경건하게 그의 말을 경청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 누구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아름다운 인간 신 백아의 죽음은 그런 것이었다. 그녀의 하직은 사실 육체를 초월한 숭고한 것이었으니까. 눈물을 보일 이유는 전혀 없었으니까.

 

 거친 빗속을 뚫고, 죽은 주인의 권속들이 삽으로 축축한 땅을 파냈다.

 

 깨끗한 대리석은 금방 거친 진흙으로 지저분해졌다. 그들은 빗물에 맨질맨질한 검은색 관을 그대로 천천히 땅속으로 내려 보냈다. 등 뒤에서 몇몇 어른들이 어린 백아가 가엾다며 애도의 말을 전해왔다.

 

 그러나 어린 나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관에 내리치는 빗물과, 차가운 땅, 그리고 그들이 엄마를 흙으로 덮는 모습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 때 빗소리를 뚫고 아이의 애달픈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놀랍게도 거세지는 비와 함께 터져 나오는 것은 뜨거운 눈물이었다. 엄마가 죽고 나서 처음 흘리는 눈물이었다.

 

 그녀는 하염없이 울었다. 목이 쉬고 코가 빨개질 정도로 빗속에서 엉엉 울어버렸다. 한번 울기 시작한 어린 소녀를 멈출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는 어린 나이에도 그것이 영결을 의미하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 거친 빗소리에 소음처럼 들리는 자신의 울음소리에 그녀는 오히여 더 아프게 오열했다. 자신을 제외하고는 정말 아무도 울지 않았기에 엄마가 더 가여웠다.

 

 아이는 그동안 사람들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차가운 땅 속에 묻히는 엄마의 모습을 보니 문뜩 깨달아버렸다. 엄마는 이제 이 세상에 없어. 이제 다시는 만나지 못해.

 

 그리고 이제 네가 백아가 되는거야.

 

 하염없이 우는 아이를 추모사를 마치고 내려온 나이 많은 남자가 겨우 꼭 껴안아줬다. 그의 검은색 정장바지 무릎이 빗물에 젖어있던걸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 아이는 그제야 따뜻한 그의 품에 안겼다.

 

 작은 손으로 축축한 와이셔츠를 잡으며 그와 슬픔을 나누었다. 항상 그녀에겐 무서운 할아버지였는데 그날만큼은 그의 얼굴도 너무도 슬퍼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면서도 분명히 말했다. 이제 제발 그만 울라고. 더 이상 네가 울면 네 비로 인해 산사태가 날지도 모른다고.

 

 사람들이 바람이 거세는걸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다.태풍이 불어오는 듯 숲이 물에 젖은 종이처럼 흔들렸다. 그럴수록 아이의 눈은 빗물 속에서 점점 커졌다. 그랬다.

 

 그 날 이미 나는 백아(伯牙)가 되어있었다.

 

 아이는 이제 눈물을 참느라 헐떡였다. 그리고 애써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어느 여름 밤 대청마루에서 엄마와 수박을 나눠 먹었을 때. 처음 비를 내리고 엄마가 칭찬해줬을 때.

 

 그녀와 함께 서늘한 가을밤에 잠들었던 그런 사소한 시간들을 떠올렸다. 추억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하나 잊어버릴 수 없는 그런 기억들이었다.

 

 계속, 계속 행복한 기억만을 떠올려야했다. 안 그러면 비가 그치지 않으니까. 장례식을 엉망으로 만들고 사람들을 걱정 끼치게 만드니까.

 

 이상했다. 하나뿐인 엄마의 장례식인 정작 자신은 울어선 안되니까. 하지만 더 이상 의아함을 느껴서도 안됐다.

 

 검은 옷을 입은 작은 아이는 비를 그쳐야만 했으니까.

 

 

 

 수린은 불현듯 어둠 속에서 반짝 눈을 떴다. 그러나 여전히 귓가에는 쏴아아. 마음을 어지럽히는 빗소리가 미명처럼 울렸다.

 

 곧 희미한 그림자가 시야에 들어오고, 빗소리는 다행히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곧 아무것도 없는 적막은 다시 곁으로 다가왔다. 깜박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녀는 붉어진 눈가를 쓰윽. 무미건조한 손바닥으로 닦아냈다. 손바닥에 축축한 물기가 조금 묻어나왔다. 수린은 심란했다.

 

 왜 이제 와서 장례식의 꿈을 꾼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의 기일은 벌써 몇 달도 더 된 일인데.

 

 수린은 입고 있는 옷에 손바닥을 닦으며 다시 벽을 바라보았다.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었고, 더 이상 이런 일로 깊은 상처를 받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기다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서울의 어느 고층 빌딩.

 

 그녀는 지금 텅 빈 복도에, 왠지 홀로 앉아있었다.

 

 한낮은 먼지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그저 불투명한 하늘이 비치는 창문 사이로 다른 건물의 옥상에 설치된 비행 경고등인 듯 붉은 불빛이 천천히 깜박일 뿐이다. 수린의 창백한 얼굴에도 그 붉은 빛이 드리워졌다가 사라졌다가를 반복했다.

 

 복도에는 탁한 보라색 밤하늘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고, 그 너머로는 화려한 도시의 야경이 펼쳐져 있다. 적막한 복도에는 먼 곳에서 흘러나오는 듯 자동차 주행 소리만이 희미하게 들렸다.

 

 창살이 만든 격자무늬 그림자 안에서 희미한 빛이 비늘같이 일렁였다. 수린은 무릎을 두 손으로 단단히 감싸고, 그 차가운 벽을 표정 없이 바라보는 중이었다.

 

 이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만들어진 것’이 분명한 비현실적인 공기. 평범한 일상이 순식간에 사선을 넘나드는 경계로 바뀌는 것.

 

 언제나 테러는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곤 했다.

 

 핫.

 

 스스로가 생각했을 때도 거창한 단어 선택에 그녀는 결국 어둠속에서 피식 웃었다. 사실 이 상황을 그렇게까지 부르고 싶지는 않다. 그 동안 수행관들이 규정해온 것처럼 그리 해보았지만 말이다. 그보다는 짖꿏은 장난에 더 어울렸다. 그래.

 

 약한 신에 대한 조금 고약한 ‘신고식’...

 

 그 정도면 됐다. 그녀의 기다란 속눈썹은 밤에 그을린 듯, 어둠 속에서 더 깊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작게 웅크린 여자는 순간 저도 모르게 웃음기를 거두며, 두 눈을 어둠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래.

 

 두려움에 떨거나 비명을 지를 필요는 전혀 없어.

 

 미안하지만 지금껏 백아를 노린 ‘테러’는 단 한 번도 성공한 적 없었으니까. 서울의 명망 있는 신, 백아의 존재는 그런 것이니까. 수린은 위로하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되뇌였다.

 

 게다가 백아를 지키는 사람들은 정부에서도 알아주는 엘리트 중 엘리트. 본인인 그녀 역시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실제로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에게 비호의적인 존재와 조우해본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은 자신이 알아채기도 전에 마무리 됐다.

 

 예전에는 ‘내가 몰라야할 것들’에 호기심을 가졌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녀에겐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세상은 벅찼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무릎에 얼굴을 묻으면 됐다. 그녀는 피곤했고, 어서 이 시간이 지나가길 바랬다. 어떤 일도 익숙해지면 일상이 되고 만다.

 

 그녀에겐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이 일상의 한 조각이었다. 하지만 무엇이 됐든 이 ‘악의’는 정도에 차이는 있어도 늘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벌써 수십분째 아무도 오지 않고 있었다.

 

 보통 이런 일이 생기면 수분, 아니 수초면 일이 정리되곤 하는데 말이다. 수린은 결국 자기 어둠 속에서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녀의 말간 얼굴 위로 옆 건물의 비행 경고등이 다시 위험하게 깜박이기 시작했다.

 

 대체 어떻게 된걸까.

 

 물어도 알 수 없는 질문을 해보았다. 확실히 긍정적으로만 생각할 수만 있는 일은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사람들로 가득 차있던 복도가 순식간에 암흑에 휩싸이는 것.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아무도 자신을 찾지 못하는 것. 지금 일어난 모든 일들은 사실 이런 저런 일들을 겪어왔던 수린조차도 쉬이 경험해본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그건 어쩌면 그녀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위험에 가까운 어떤 것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다만 그런 수린조차도 한 가지 알고 있는 건 있었다.

 

 오늘은 무언가 일어날 것만 같은 밤, 이었다.

 

 수린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복도를 들여다보았다. 한치 앞이 안 보이는 어둠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나약한 인간의 육체와 감각이 마주하는 어둠은 실로 두려움과 호기심을 동시에 자극하는 것이었다.

 

 저 코너를 돌아 누군가는 반드시 이곳으로 온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복도는 역광이므로 물체는 윤곽이 흐릿할 것이다.

 

 어디가 경계인지 알 수 없는 시간. 그 시간 속에서 선악의 그림자는 대체로 투명하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오감만으로 ‘선(善)’한 것과 ‘악(惡)’한 것을 구분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이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이 희미한 황혼의 시간에서 나를 따르는 충직한 개와 가축을 잡아먹는 늑대를 구분할 수 있을까.

 

 그 순간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짙은 심연이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홀린 듯이 어둠을 바라보았다.

 

 ‘괴물과 싸우는 자여. 스스로 괴물이 되지않도록 조심하라. 심연을 들여다볼때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쿵쿵.

 

 복도에서 발소리가 난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벽에 부딪혀 공명하는 듯 한 선명한 발소리가 어둠속에서 흘러나왔다.

 

 곧 저 멀리 복도에 가늘고 기다란 그림자가 보였다.

 

 수린은 속눈썹이 무거운 추라도 된 것처럼 두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데리러 온 사람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수린은 살짝 고개를 뺏다. 그러나 사위가 어두워, 형체가 명확히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몸을 기울이다시피 숙였다.

 

 그 순간 또 다시 복도에 발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것으로 몸은 육식동물의 울음소리를 들은 초식동물처럼 움직일 수 없게 됐다. 곧바로 생각마저 띄엄띄엄하게 만들 정도의 찐득한 살기가 엄습했다. 뇌는 일순 기능을 멈췄다. 단어로만 생각을 조합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남자, 같았다.

 

 문제의 인기척이 코너를 돌며 서서히 그 인영을 드러냈다. 그녀는 어느새 자신이 숨을 참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갑작스럽게 신경증이 도진 것처럼 온몸에 피가 들끓었다.

 

 그것은 어둠 속이건만 거리낌 없이 걷고있었다.

 

 그러나 어딘가 뒤틀린 현실감의 연장선인 듯 도망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가슴이 튀어나올 것처럼 쿵쿵거릴 뿐이다. 어쩌면 극렬한 공포에 잠식되어 생각이 멈춘건지도 모른다.

 

 작게 용기를 낸 수린은 마찬가지로 다가오는 낯선 존재를 마주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겨우 고개를 든 순간, 줄곧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던 수린의 눈은 점차 믿을 수 없는 크기로 커지기 시작했다.

 

 형형한 빛.

 

 발광하는 짐승의 눈. 언제부턴가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동그라미가 빛나고 있었다. 태초의 괴물을 닮은 시퍼런 색이었다.

 

 그것은 도시의 인공 빛을 스포트라이트처럼 받으며,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빛났다.

 

 두려움인지, 경외심인지 모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전신을 스치고 지나갔다. 수린은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손으로 옷자락을 꽉 쥐었다.

 

 적막한 복도의 어둠 속에서 잠시 시간이 멈춘 듯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그리고 그녀는 갑자기 어디선가 이 모든 것을 본 적이 있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두려움보다 앞선 감정. 그래. 선악의 그림자는 투명하다.

 

 지금 그녀는 그를 분간해낼 수 없었다. 아니, 영원히 저 낯선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생각이 처절하게 들었다. 그 아득함에 천천히 걸어오는 존재를 바라보며,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커다란 창에서 뿜어져 나오는 달빛같이 환한 인공빛 사이로 남자의 머리가 공중에서 흔들렸다. 놀랍게도 그의 머리카락은 한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색이었다.

 

 은발도 아닌 표백한 것 같이 새하얀 순백색.

 

 정말 의외지만, 그것은 수린으로 하여금 고양잇과 동물의 부드러운 털을 연상시켰다. 순간 수린은 남자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한번만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가장 상반되는 것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묘한 기분이 드는 법이었다.

 

 그는 착각하지 말라는듯이 위험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어느덧 코앞으로 다가온 형형한 눈의 남자.

 

 잠깐만....

 

 종잡을 수 없는 가까운 미래가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둠속에서도 느껴지는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운 눈에 입은 저절로 벌어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어째서 고양이 따위와 이 자를 비교했던 걸까. 오만하게 반쯤 내리 깐 가로로 기다란 눈은 소름끼쳤다. 정체는커녕 어떤 감정도 감지해낼 수 없다.

 

 “…..”

 

 다리는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수린은 차마 남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서 오직 그의 꽉 다물린 입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곧 무표정한 남자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시커먼 남자의 입에서 나올 말은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았다.

 

 급격하게 몰려오는 현실감에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공포. 이건 공포였다. 애석하게도 그제야 자신에게도 참을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수린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예상치 못한 한마디가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바로 그 다음이었다.

 

 “아, 드디어.”

 

 생각지도 못한 가벼운 말투에 수린은 기대고 있던 등받이를 놓쳤다. 척추 위로 땀 한 방울이 흘렀다.

 

 번은 얼빠진 수린을 두고 뭐하고 있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수린은 자신도 모르게 남자의 얼굴을 황망히 올려다보았다. 형형한 눈은 커녕 평범한 인간의 얼굴이 두 눈 가득 찼다.

 

 “안녕.”

 

 평범한 인사. 빙긋 보기 좋게 휘어지는 남자의 눈을 보며 수린은 어색하게 입만 살짝 끌어올렸다.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러자 편한 티셔츠를 입고 있는 남자는 하품을 하며 쭈욱 기지개를 폈다. 아주 일상적인 움직임이었다.

 

 뭐지?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좀 전의 일이 모두 꿈이었던 듯 그녀는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여기까지 얼마나 걸어서 왔는지 몰라. 갑자기 불이 꺼져서 당황스러웠다고. 사람들도 다 사라져버렸고 말이야. 설마, 아포리아 놈들 짓인가?”

 

 그가 탁탁 머리에 흘러내린 땀을 털어내며 말했다. 남자의 손 안에서 흰색 숱많은 머리카락이 잔뜩 삐져나왔다.

 

 역시 그도 이 것이 평범한 상황은 아닌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걸었다는 사실에 더 짜증이 난 것 같았다.

 

 “에어컨도 다 꺼졌나봐. 이 날씨에 너무도 하지.”

 

 남자가 그 이후로 뭐라뭐라 더 불평했다. 그러나 뒷말은 조금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딘가 미묘하게 상식에서 벗어난 것 같은 남자의 행동에 수린은 오히려 꼼짝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완전히 바뀌어버린 분위기에, 수린은 좀 전에 경험한 모든 것들이 자신이 만들어낸 착각이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해야했다.

 

 그녀는 최대한 침착하게 곁눈질로 그를 살폈다. 누구길래 이곳에 있는건지. 아니 그보다 대체 어떻게?

 

 “오호. 꽤 예쁜걸.”

 

 복잡한 수린의 마음과 달리, 남자는 이제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창밖의 야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광경이라는 듯이, 즐거운 듯한 얼굴이다.

 

 “….”

 

 창문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조용한 야경과 그의 모습이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완벽히 겹쳐졌다.

 

 결국 수린은 실소를 터뜨렸다. 이 종잡을 수 없는 남자는 자신의 존재도, 이 상황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해 보였다. 완전히 자기 페이스다.

 

 완벽하게 상황과 동떨어진 듯한 남자의 태도는 이 알 수 없는 분위기를 보기 좋게 상쇄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수린은 더더욱 양손을 꼭 잡으며 그에게 동화되어 안도하고 싶은 기분을 애써 억눌러야했다

 

 “그나저나 넌 언제부터 여기에 있던 거야. 다른 사람들은?”

 

 갑자기 자신에게 향해진 질문에 수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조난객이라도 상대하는 듯한 질문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천천히 가로 저었다.

 

 아무도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그가 어깨를 다시 한 번 으쓱여 보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씨익 웃었다. 묘한 웃음이다.

 

 하지만 불현듯 고개를 들었을때 수린은 다시 몸을 굳혀야했다. 마주친 그의 눈은 좀 전의 ‘그 눈’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긴. 지금 너한테 괜한 것을 물은 건가?”

 

 그가 허망한 얼굴로 주저앉아 있는 수린을 놀리며 재밌는 농담이라도 된듯 빙글거렸다.

 

 번 역시 이 복도의 끝에서 인간을 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한 터였다. 신이나 아포리아라면 모를까.

 

 그래서 그는 그녀의 존재가 퍽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당사자인 수린의 심경 변화는 미처 감지하지 못한 듯 하다.

 

 그가 어째서 이곳에 평범한 인간이 있을 수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고 있는데, 그 순간 그의 귀 뒤로 아프게 바닥을 그러쥐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일이 귀찮아지고 있음에 그는 눈썹 한쪽을 슬쩍 틀어 올렸다.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13 細雨 (5) 2017 / 11 / 9 360 0 5970   
12 細雨 (4) 2017 / 11 / 9 326 0 6775   
11 細雨 (3) 2017 / 11 / 9 321 0 6925   
10 細雨 (2) 2017 / 11 / 9 346 0 7395   
9 細雨 2017 / 11 / 9 327 0 6584   
8 빛으로 (3) 2017 / 11 / 9 375 0 7480   
7 빛으로 (2) 2017 / 10 / 31 338 0 6649   
6 빛으로 2017 / 10 / 31 337 0 6449   
5 먼 곳에서 들려오는 (3) 2017 / 10 / 30 325 0 8542   
4 먼 곳에서 들려오는 (2) 2017 / 10 / 30 338 0 6396   
3 먼 곳에서 들려오는 2017 / 10 / 30 343 0 8081   
2 프롤로그 (2) 2017 / 10 / 30 336 0 6581   
1 프롤로그 2017 / 10 / 30 511 0 6496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등록된 다른 작품이 없습니다.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