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완이 다리를 덜덜 떨며 성현의 등 뒤에 섰다. 규완의 표정이 너무나도 심각하고, 비장했기에 성현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후훗, 그러면 뒤를 부탁하겠습니다.”
성현이 얼마 전의 일을 떠올렸다.
헬파이에 의해 함선 바닥에 구멍이 뚫리고, 바다물이 들어올 때, 그곳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계단으로 도망갔다.
서로가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고, 자신의 앞길을 막는 것은 밀치기도 하며, 오직 살아남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들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살고 싶은 인간의 본능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행동하지 않은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바로 규완이었다. 규완은 배에 물이 차기시작하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몸이 마비 돼 움직이지 못하는 선장을 향해 달려갔다. 성현은 그것을 보았다.
“제가 잘못본건 아니었나보군요.”
“네? 네?”
“아닙니다. 규완 씨, 믿겠습니다.”
“네!”
그때, 성현은 규완에게서 강렬한 무언가를 느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을 위해서(선장이 자신을 한 번 구해줬다고는 하지만)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거침없이 뛰어드는 행동, 그것은 지금까지 성현이 경험한 적 없는 것이었다.
물론 성현이 없었다면 그와 선장이 어찌 될지 알 수 없었기에 긍정적인 감정만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한 것은 이성적으로 느껴지는 부분보다는 감성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훨씬 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매우 궁금했다. 규완이 무슨 생각을 하고 그렇게 행동한 건지 그래서 성현은 계단으로 가던 발걸음을 돌려 규완에게로 갔다. 목숨을 걸고.
“자, 여러분, 출발하겠습니다!”
“네!”
성현이 소형선의 선미에 서서 소형선을 통제했다. 규완은 후미에 선 채, 눈을 부릅떴다.
‘으으... 절대 놓치지 않을 거야.’
성현이 규완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규완 역시도 성현을 보며 굳은 다짐을 하고 있었다. 규완은 생각했다.
평생 그의 인생에서 그를 이만큼 믿어준 이가 또 있었을까? 지금까지 그의 인생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보면 무시하거나 이용해먹기 바빴다.
‘친구야, 그것 좀 빌려 줄래? 고마워.’
‘야, 규완이 걔 진짜 착하더라.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그냥 친구라고 하니까 빌려 주던데?’
‘걔가 원래 그래. 완전 바보라니까. 하하, 나도 매일 빌려.’
‘네가 착해서 너무 좋다. 이거 네가 했다고 해주면 안 돼? 난 또 걸리면 큰일 나거든. 고마워. 넌 정말 둘도 없는 친구야!’
규완은 어릴 때부터 누구보다 착하고 순수했다.
그의 꿈이 ‘세상 사람들의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일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그는 어릴 때부터 대가없이 주변 사람들을 도왔고, 그 덕에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그가 사람들을 도와주면 사람들은 언제나 그에게 밝은 미소로 화답해주었고, 그는 그 거짓 없는 미소가 너무도 좋았다. 아니, 행복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규완이 나이를 먹으면서 언제부턴가 주변의 분위기가 변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규완이 사람들을 도와주면 예전에는 ‘거짓 없는 미소’를 보여주던 그들이 언젠가 부터는 ‘마음이 드러나지 않는 미소’를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었다.
‘저 사람이 원래 저렇게 웃었었나? 에이~ 웃으면 됐지 뭐.’
처음에는 대수롭게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시간이 갈수록 점차 사람들의 미소와 행동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찝찝함 같은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규완아, 이거 당연히 해줄 거지? 그래 고맙다.’
그래도 ‘친구’를 위해서 한 거니까 그들의 ‘미소’를 볼 수 있었기에 그는 ‘억지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어떨 때는 싫은 부탁을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거절하지 않았다. 그에게 ‘친구’와 ‘사람들의 미소’는 너무도 달콤한 마약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주변 ‘친구’들의 부탁을 들어주며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규완은 주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 돼 있었다.
‘야, 걔 어디 갔냐? 필친’
‘필친?’
‘그래, 그 다 해주는 애 있잖아.’
‘아아~ 규완이?’
‘어, 그래 걔.’
‘근데 필친은 뭐냐?’
‘몰랐냐? 애들 다 그렇게 부르잖아. 필요하면 부르는 친구.’
‘아, 진짜? 몰랐네. 근데 딱 어울린다. 하하.’
규완도 그가 그렇게 불리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생각했다. 친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어쨌든 좋은 거라고.
‘그래, 나로 인해서 친구들이 행복할 수 있다면 상관없어. 나도 행복해, 힘내자!’
그 이후로도 그의 ‘친구’는 계속해서 늘어났다.
‘이렇게 많은 친구가 있다니. 행복하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분명히 예전보다 친구가 많고, 도움을 많이 주지만 예전만큼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아니야, 난 잘하고 있어. 행복해...’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하나의 사건이 생겼다. 규완이 감기에 걸린 동생을 위해 약을 사러 가는 길이었다. 그는 약국으로 가는 지름길인 골목길로 가는 중이었는데 그곳에서 길을 막고 있는 여러 명의 불량배들과 마주쳤다.
‘야, 너 이리와 봐.’
‘네?’
‘돈 있냐?’
‘없어요.’
‘뒤져서 나오면 죽는다?’
‘정말 없어요.’
그들 중 한 명이 규완의 몸을 뒤졌다.
‘뭐야? 있잖아? 이건 돈 아니냐? 죽을래?’
‘동생 약값이에요.’
‘어쩌라고.’
‘돌려주세요.’
규완이 돈을 든 아이에게 달려들었다.
‘이 새끼가!?’
‘윽! 돌려주세요.’
‘야, 이 자식 조져!’
그렇게 규완은 아이들에게 일방적인 폭행을 당하기 시작했다. 규완은 혼자였고, 그들은 여럿이었기에 규완이 할 수 있는 것은 맞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아 규완의 얼굴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때, 어릴 때부터 규완에게 많은 부탁을 하던 ‘친한 친구’가 지나가다 그 모습을 봤다.
규완 역시 그 ‘친한 친구’를 봤다. 규완과 친구의 눈이 마주쳤다.
‘야, 뭘 보냐? 저리 안 X져?’
규완을 폭행하던 아이들 중 한 명이 그 친구에게 욕을 했다. 그 친구는 잠깐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규완을 못 본 척 하고 가버렸다.
‘아...’
그 모습을 본, 규완은 그때서야 알 수 있었다. 그의 마음이 왜 계속 허전했는지, 친구라고 생각했던 것은 자신뿐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큰 충격을 먹고 그곳을 떠났다.
‘진정한 친구를 찾을 거야.’
하지만 어릴 때부터 쌓아 온 그의 성격이 한 순간에 변할 수는 없었다. 그는 여전히 착하고 오지랖이 넓었다.
다만, 그는 이제 구분할 수 있었다. ‘진짜 미소’와 ‘가짜 미소’를 말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그는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느꼈던 ‘진짜 미소’ 같은 따뜻함을. 바로 여기 있는 성현에게서 말이다.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나를 믿어주다니. 좋아! 눈도 깜빡이지 않겠어! 이딴 번개 따위 하나도 무섭지 않아. 성현 님, 뒤쪽 번개는 제게 맡기세요!’
규완이 결의에 찬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폈다.
“콰르릉!”
“으악!!”
규완이 탄 소형선과 거의 연관이 없는, 한참 떨어진 곳에 번개가 쳤다. 하지만 이미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규완이었다.
‘그래도 역시 무서워!!’
-----------------------------------------------------------------
“쾅!”
“젠장! 뱃머리를 우측으로 돌려!”
“끼이이익!”
“이곳에도 암초가 있다!”
“피해!”
“쾅!!”
“이봐! 우리 좀 도와 줘!”
“오른쪽은 암초다! 우린 왼쪽으로 간다! 오른쪽 놈들! 빨리 저어!”
광호의 목에 핏대가 섰다.
‘젠장! 멀리서 볼 때는 분명히 작아보였는데 실제로는 크고, 커보여서 피해갔더니 실제로는 작고. 아, 짜증나! 앞에 다른 놈들이 없었다면 우리도 진즉에 박았겠어.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이브의 장난인가?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지 말라더니. 젠장! 알고 있던 것보다 더 짜증나는군.’
“쾅!! 으악!”
“시x, 야! 뭐해!? 오른쪽 멈추고, 왼쪽 저어! 저기로 가! 저기!”
----------------------------------------------------------------------
“쿠르릉!”
“뒤!!”
“쾅!”
규완의 외침에 소형선 안의 모든 인원이 재빠르게 바닥에 엎드렸다. 잠시 후, 뒤쪽에서 사방팔방으로 튀려는 붉은 스파크가 생성되더니 순식간에 번개로 변해 소형선의 피뢰침 속으로 매끄럽게 빨려 들어갔다.
“휴~”
“혹시 다친 사람 있습니까?”
성현의 질문에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규완 씨, 그렇게 빨리 알아채다니 대단합니다.”
“헤~ 아니에요. 다른 분이 했다면 더 잘 하셨을 거예요.”
규완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정말 대단하세요.”
‘인자하신 분이야, 나 같은 놈도 칭찬해주시고.’
규완의 눈시울이 또 붉어졌다.
“어? 갑자기 밝아졌다!”
“안개도 옅어졌어.”
선장이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며 말했다.
“이브의 분노 구간을 지났나 보군.”
“이브의 분노요?”
“아, 말 안 했나? 이곳에 와본 사람들은 번개가 치는 구간을 그렇게 부른다네. 이곳 말고도 다른 구간 역시 이브의 눈물, 이브의 장난 등등으로 불리고 있지.”
“그렇군요.”
“하아~ 그럼 이제 번개는 끝난 건가요?”
“그렇지.”
규완이 제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렇긴 하지만 아직 방심할 수는 없네. 이곳에서는 계속해서 새로운 일들이 일어나기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기 때문이지.”
“그럼 호, 혹시 우리가 배운 것 말고, 다른 것들도 있을 수 있나요?”
규완이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선장을 쳐다봤다.
“......”
“선장님?”
선장이 침묵하자. 소형선 안,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지? 있기는 한데, 괜히 솔직하게 말해봐야 이 자들에게는 득보다 실이 될게 뻔하고, 그렇다고 바다 사나이 체면에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은데... 끙...!’
선장이 잠깐 인상을 찌푸렸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가락을 튕겼다.
“하하,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걸세. 오늘은 대체적으로 기후가 안정적이어서 안전한 길로 갈 수 있으니 말이야.”
“아아~ 그렇군요.” “휴, 다행이다.”
“괜히 걱정했네, 하하.”
“힘냅시다. 여러분!”
“넵!”
소형선 안의 분위기가 금세 다시 밝아졌다.
‘계속해서 기후가 안정적이고, 원하는 곳으로 갈 수만 있다면 말이지. 흠! 난 거짓말은 안했어.’
선장은 뒤의 말을 속으로 삼켰다.
“어? 또다시 안개가 짙어지는데요?”
“이제 곧 이브의 장난, 그러니까 환영 구역이다.”
“아, 그 구역이요? 여기는 ‘눈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그것만 기억하면 된다고 배웠는데.”
“맞아. 환영 말고 딱히 위험한건 없다고 했었어.”
“암초를 조심하라고 배웠지.”
“음~ 음.”
선장이 구역의 이름을 말하자마자, 번개 구역에서 조용히 엎드려 있던 우유부단 인원들이 벌떡 일어나 빠르게 아는 척을 했다.
‘이제 내 차례인가? 이 사람들만 계속 멋있는 모습을 보이게 할 순 없지.’
‘나도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겠어.’
‘후훗, 나의 지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좋아! 그러면 공략법도 다 알고, 별거 없는 거잖아? 여러분, 이 구역은 빠르게 지나갑시다!”
“좋죠. 가자~!”
“예아!”
“자, 잠깐! 이렇게 빨리 가면 안...”
“쾅!”
“으악!”
‘이런 썩을...’
선장이 그들을 미처 말리기도 전에 소형선이 암초에 부딪히며 물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선장의 이마에 쌍심지가 돋아났다.
‘망할 놈들! 조금만 괜찮다싶으면 이 모양이라니. 휴~ 그나마 바닥이 따로 나눠져 있어서 다행이야.’
“어, 어라, 어떡하죠?”
“어떡하기는 뭘 어떡해? 구멍 대충 막고 물 퍼내!!”
“뭐, 뭘로 퍼내요?”
“뭐긴 뭐야! 멀뚱멀뚱 서 있지만 말고 손이든, 발이든, 뭐든 이용해서 빨리 퍼내!!”
“네! 네!”
구멍 난 쪽의 인원들이 배로 새어 들어오는 물을 정신없이 퍼내기 시작했다.
“흐악!!”
“또 뭐야!?”
“앞에 어, 엄청 커다란 바위!”
“이, 이쪽이 바위가 작아! 이리로 가요!”
“어디요? 오른쪽? 왼쪽?”
“방향 바꾸지 말고 정면으로 가겠습니다!”
성현이 낮고 강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 하지만 이러면 바위랑 부딪히는데...”
성현이 소형선의 뒤편으로 가 피뢰침을 뽑았다.
“캉! 꽈직!”
“어? 피뢰침은 갑자기 왜?”
“절 믿으십쇼. 방법이 있습니다.”
“그거 들고 계시다가 번개라도 맞으면 어쩌시려고...”
“괜찮을 걸세. 이론상 번개 구간은 끝났으니 말이야.”
“이, 이론상이요?”
성현이 기다란 피뢰침을 뽑아 손에 든 채, 소형선의 선미에 섰다.
“다행히 구멍이 크지 않으니, 여섯 분은 노를 젓고, 두 분은 물을 빼주십쇼. 소형선 진행방향은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럼 나는 노를 젓지. 노 젓는 사람들 모두 내 말에 맞춰서 노를 젓게.”
“네!”
선장이 노가 있는 왼쪽 자리 가장 뒤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뭘 할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법이군. 어지간한 뱃사람들도 이렇게 흔들리는 배 위에서는 균형을 잡기 힘든데. 전혀 흔들림이 없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