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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천사의 딸
작가 : 업무용계정
작품등록일 : 2017.6.30

여신 프레이즈의 성스러운 땅 오를레앙 왕국, 평범한 시골마을의 처녀 라벤더와 그 남동생 헨리는 마을을 둘러싼 산에서 기이한 아름다움을 가진 이들을 만나게 된다. 오직 거룩하게 살고 싶었던, 선으로 남고 싶었던 우리들의 소리.
영혼을 먹는 '마녀',마녀를 사냥하는 '수정회', 그리고 '무언가', 세상의 균형을 맞추는 가장 잔인한 방식에 대한 이야기.

 
02.Sliva cerasi
작성일 : 17-08-24 00:59     조회 : 281     추천 : 0     분량 : 1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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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먹구름 아래로 빗줄기가 꽃처럼 떨어져 내렸다. 꽃잎은 빗방울처럼 떨어져 내렸다. 오묘한 조화였다. 비바람이 나뭇가지 사이를 훑었다. 가지가 반응했다. 손길이 거칠다고 앙탈을 부리면서, 매달린 꽃잎들을 흩뿌려댔다. 바람이 웃었다.

  절경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세상에 없을 듯한 풍경도 있고, 그림으로 남기고 싶어지는 풍경이 있으며, 관조적으로 바깥에 서서 바라보고 싶어지는 풍경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그 안에 섞여들고 싶어지는 풍경이 있다.

  라벤더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발바닥이 느릿느릿 떨어졌다. 멍한 눈 안으로 꽃송이가 들어왔다. 이 절경은 어떤 모습인가, 그것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화.

  그저 그 순간에만 존재할 풍경.

  필연적으로 영원하지 못한 것.

  그러나 그렇기에 눈물겹도록 소중한 비경이었다.

  회색의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과, 숲을 뒤덮은 연분홍색의 꽃들은 완벽하게 대조되었다. 그것들은 서로의 정확한 대척점에 서 있으면서도, 그 손을 단단히 마주잡고 있었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 휘둘리지도 않고, 묻히지도 않으며, 의연히 자신들의 색을 드러내며 함께 있었다. 꼭 서로가 같은 색을 띠고 있는 것처럼.

  우렛소리가 울리고, 꽃들은 어두운 하늘 아래서도 맑은 빛깔이었다. 은은한 분홍으로 물든 하얀 꽃송이들이 후루룩 떨어지고, 거세게 내리꽂히는 빗줄기를 피해 팔랑대며 땅 위에 안착했다.

  들고 있던 묘목은 이 나무의 거였나. 라벤더는 문득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같은 색깔 줄기였다. 아직 꽃순이 맺히지는 않았으나, 직감이었다.

  묘목은 여기에서 온 것이었다.

  시선을 사로잡는 풍경들은 으레 사람들의 육체까지 끌어들인다. 라벤더는 유혹에 굴복했다. 거칠게 몸에 꽂히는 빗줄기들은 무시했다. 그럴 가치가 있었다. 꽃비가 내려쌓이는 길의 더 깊은 곳으로, 라벤더는 숲을 지났다.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들은 하나같이 연분홍색 오밀조밀한 꽃망울을 매달고 있었다.

 

  가끔씩 찾아오는 변덕이었다. 마리우스로서는 익숙했다. 몸이야 스물 한 살 청년이래도, 마음은 이미 늙은이였다. 이 정도 살았으면 됐지. 비웃음이 나왔다. 자신을 향해서였다.

  요즈음 들어 블레어가 부러워지고 있었다. 그 애는 어리지. 입가에 뜻 모를 웃음이 피어났다. 그 애는 어리고 또 아직 잘 모르고...마리우스는 무지에서 오는 순수를 동경했다. 차라리 블레어처럼 어리다면, 아는 거라곤 없다면, 날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새로울 것을. 지치지 않고 숲을 돌아다니고, 산 아래 마을을 구경하며 가슴을 두근거리는 일이 가능했을 테다. 집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귀찮아, 이런 변덕이나 생리적인 공복으로만 외출하는 일은 없었을 거고. 숨겨진 장소를 찾아 헤매느라 여념이 없었을 거고. 어디에 어떤 꽃이 피어나는지 구경하러 나다녔을 거고.

  그리고 내일을 기다렸을 것이다.

  내일이 오기를 기다려본 적이 언제였지? 내일에 대한 기대가 언제 끊겼는지 기억이 없었다. 내가 나이를 멈춘 것은 언제였더라? 기억은 이상하게도, 그리고 비참하게도 늘 유년 시절 어딘가쯤에 멈춰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를 배웅할 때까지. 혼자 살아온 기간은 옆에 누군가가 있던 기간보다 길었으나, 그 안에서 태어난 추억은 후자에 비해 현저하게 적었다. 그러니 기억에 없는 거겠지. 고독의 세월 동안에 시간에서 배운 것이라곤 어떻게 생존을 유지하는지에 대한 노하우가 다였다. 떠올린다고 해서 행복해질 리 없는 것들.

  틀림없이 이 몸은 유기체다. 마리우스는 확신했다. 그런데 사는 꼴을 보면 도무지 그래 보이지 않았다. 목숨을 지키고 하루하루를 산 채로 넘기는 것이 다라면, 무기물과 다를 바가 무엇이야. 시간을 지내고 견뎌낸다. 그 뿐이었다. 그렇다면 무생물과 차이가 없다.

  정원에는 비 냄새가 가득했다. 비옷을 입었음에도 상의가 젖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강한 비였다. 정원을 따라 계속 걷자 철제로 된 대문이 나타났다. 대문의 세밀한 세공은 이제 식물 줄기들의 널따란 통로였다. 그러고 보면 블레어가, 문을 드나들 때마다 따갑다고, 덩굴 정리를 해달랬다. 하지만 이렇게 거칠게 쏟아지는 빗줄기가, 대문을 쾅쾅 때려대는데, 어느 누가 문 앞에 찾아오겠니?

  손을 갖다댄 문은 차갑고 미끌미끌했다. 마리우스는 생각했다. 어차피 이 문을 여는 이는 뻔하다. 똑같다. 너희 정도야, 손님이라곤.

  그건 싫어.

  블레어가 투정을 부렸다. 나는 사람들이 만나고 싶어. 블레어를 쓰다듬고 마는 라라와 다르게, 지크프리트는 무심하게 말했다. 그건 곤란해. 블레어는 순수하고 아이답고 실제로 어리고, 왜?, 하고 묻는 것을 보면, 어쩔 수 없이 멍청했다. 어린애니까. 지크프리트가 포기할세라, 마리우스가 그를 거들었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건 우리뿐이야.

  상처받게 될 거야. 우리나 그들이나.

  이해는 그런 것이었다. 아무리 너를 이해한다고 말한들, 같은 처지에 있는 이가 아니면 진정으로 저를 알아줄 리 만무하다. 그러니 오늘도, 내일도, 똑같이 나는 영원할 것이고, 비가 오든 오지 않든 숲은 고요하리라-

  찰캉.

  문에서 쨍한 소리가 났다.

  마리우스는 움찔 손을 떨어뜨렸다. 이내 끼익, 하는 녹슨 소리가 뒤를 이었다.

 

  "누구-"

 

  말이 뚝뚝 끊겼다. 말끝이 불안했다. 입술이 달달 떨리는 바람에 몇 번이고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누구-누구세요-"

 

  마리우스는 뒷걸음질을 쳤다. 이토록 몸이 떨려본 적은 오랜만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문은 부드럽게 열렸고, 문 너머에 서 있던 사람이 한 걸음 더 내딛었다. 때마침 내리친 번개가 번쩍 불을 밝혔다.

 

  "아, 저기.."

 

  문 너머에 서 있다가, 한 발짝 옮겼다가, 차마 주인의 영지에 들어오지는 못하고 엉거주춤 선 그는, 집주인만큼이나 당황한 듯이 보였다.

 

  "죄송..합니다, 폐를 끼쳐서..."

 

  천둥이 우렁찼다. 손님은 집주인과 눈을 맞췄다.

  그제야 마리우스는 그를 바로 보았다.

 

  "길을 잃어서, 그만..."

 

  선명한 보랏빛 눈이 마리우스를 응시했다. 여린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들렸다. 제 목소리는 빗소리에 묻혔겠지, 마리우스는 알았다, 이 사람의 목소리는 다르다. 여리고 작은 듯하면서도, 소란스러운 빗줄기를 제치고 귀에 박힌다.

 

  "마을로 돌아가는 길, 알고 계신가요?"

 

  다시, 천둥이 우르릉 울었다.

 

  빨간 눈은 마을에 드물었다. 도리어 보라색 눈은 흔한 편이었다. 자기 것처럼 섬세한 빛깔을 띠고 있는 눈은 몇 없다지만.

  라벤더는 내내 집주인의 눈을 힐끔거렸다. 저토록 진한 선홍색이라니. 비둘기의 핏빛이 저것일까, 교회의 화가는 말했다, 최고급 루비를 한번 보고 싶군. 그 색은 비둘기의 핏빛이라는 거야. 자연에 존재하는 것들 중에 제일 뚜렷한 붉은색이겠지. 라벤더는 화가가 집주인의 눈을 본다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다.

  아무리 잡다한 생각이라도 일단 사고가 가동되기 시작하면 머리는 잘 돌아가는 법이다. 당황해서 멈췄던 사고가 가까스로 의문에 가 닿았다. 저이는 왜 이런 숲 속에 사는 걸까? 그것도 이런 무시무시한 저택을 가지고. 넓고 호화로운 저택이었다. 가구들은 옛날의 감성을 간직한 채였으나, 유행에 뒤떨어졌다기보다는 고풍스럽다는 느낌을 주었다. 집주인과 잘 어울렸다.

  집주인의 외모는 자기의 저택과 비슷했다. 새빨간 눈과 새까만 머리. 고양이 내지 여우를 닮은 올라간 눈초리. 하지만 커다란 눈동자. 검게 떨어지는 풍성한 곱슬머리에는 윤기가 좌르르 흘렀다. 부잣집 도련님인가, 그러나 그냥 도련님이라고 부르기엔 어딘지 묘한 면이 있었다. 우아하게 어두운 사람이었다. 화려하게 가라앉은 사람이었다. 라벤더는 그가 실로 이 집의 주인으로서 걸맞다고 생각했다. 대단한 부르주아이거나, 아니면 귀족이거나 하겠지. 평범하게 생각하자면 그랬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숲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으며, 마을 뒷산에 으리으리한 집이 있다는 걸 마을의 누구도 몰랐던 것인지, 생각할수록 복잡해지는 가운데 하나만이 명료했다.

  저이는 아름다워. 라벤더는 재차 눈을 보았다. 저 눈 색을 닮았군.

 

  "몸은 말랐어요?"

 

  집주인이 말을 걸었다. 괜히 뜨끔했다.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것 같았다.

 

  "아, 아...네, 네. 감사합니다. 덕분에요..여기, 그, 안 계셨으면 어떻게 됐을지..."

  "아뇨, 아니요..."

 

  대체 어떻게 여기를 찾아낸 겁니까? 질문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마리우스는 참아냈다. 그 속을 까맣게 모르는 채로, 라벤더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친절하게 맞아주시지 않았으면 전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면..."

 

  푸흡, 하고 웃음을 참는 것은, 아무리 빗소리가 크다 해도, 둘 뿐인 실내에서는 자명하게 들렸다. 라벤더는 확 고개를 들었다. 마리우스는 볼을 탁탁 두드리며 라벤더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고, 라벤더는 마리우스가 웃었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저기, 왜 웃으시는...?"

  "예? 아, 아니요, 저, 그..웃지 않았.."

  "아뇨, 웃으셨잖아요, 제가 들었어요..허윽."

 

  거기까지였다. 그리고는 라벤더도 웃음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마리우스가 말을 더듬었다.

 

  "왜, 왜 웃어요?"

  "아, 아니요..아핫핫핫..그으, 저기..얼굴, 얼굴 빨가세요.."

 

  갈 곳을 잃고 헤매던 손이 겨우 소파의 손잡이를 잡았다.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진정이 되자, 마리우스는 공연히 성질이 났다. 결국 퉁명스러운 질문이 튀어나갔다.

 

  "그게 그렇게 우스워요?"

 

  웃느라 여념이 없던 라벤더가 마리우스의 말에 그를 보았다. 그러나 마리우스의 태도를 봐도,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아아니, 죄송합니다..아핫핫, 하, 하하, 그으, 지금도..지금도..아뇨, 죄송해요..."

 

  뭐 이런 여자가 있어. 자기 얼굴은 보이지도 않나? 마리우스는 방금 전 라벤더가 지었던 표정을 기억해냈다. 잔뜩 얼굴을 붉힌 채로, 횡설수설할 때. 미간을 사정없이 구겨대며 마리우스가 내뱉었다.

 

  "그러는 그쪽도 방금 얼굴 볼만했는데요. 본인 얼굴이 더 붉어지시던데?"

  "예?"

 

  뜻밖에도 라벤더는 웃기를 멈췄다. 놀란 눈을 하고선, 서서히 말끝이 흔들렸다.

 

  "그, 그럴 리가요...다들 그런 얘길 한다니까, 어째서..."

  "사실인데요. 잔뜩 얼어서, 얼굴은 빨갛게 하고, 감사합니다 하고.."

  "아니, 아니..에요. 아, 그만두세요! 남의 약점을 건드리시면 안 돼요!"

 

  한껏 당황하여 고개를 젓던 라벤더는 삽시간에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마리우스는 방금까지 성질을 내던 것도 잊고,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지금 우리는 통성명도 안 하지 않았던가? 짖궂게 농담들이나 하고 있다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아, 처음.

  마리우스는 흠칫했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살아왔는데도, 아직도 처음이라는 것이 남아있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꿈인가 생신가 했다. 폭우가 쏟아지는데도 산을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다니. 심지어 우산도, 비옷도 없이 여자 하나가 처량하게. 잠깐 미친 사람인가 고민했는데, 말하는 걸 듣자하니 그렇지도 않았다. 손에는 웬 나무때기가 심겨진 화분을 꼭 쥐고, 한 손으로는 철문을 잡고, 자기가 얼마나 젖었는지도 모르는지, 다짜고짜 길을 알려달라니.

 

  "하하."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사그라든 당황 후에 찾아온 것은 멍함이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마리우스는 차근히 여자를 뜯어보았다. 이제 보니 처연한 눈이 어딘가 이상했다. 뭔가에 홀린 것 같은 몽롱한 눈빛이었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그 뭔가에 홀린 듯한 눈은, 마리우스까지 홀려버린 것인지.

 

  "일단 들어오시죠. 너무 젖으셨어요."

 

  되도 않는 친절을 베풀도록 만들었다.

 

  하필이면 이런 날씨에 묘목을 찾으러 온 게 실수라면 실수였다. 그러나 그건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문제는 목적을 발견하고 만 뒤부터였다. 연분홍 꽃이 비오듯 퍼붓는 회색 숲. 발견하자마자 라벤더는 정신을 놓았다. 모든 본능을 숲에 바쳤다. 숲은 그대로 라벤더의 걸음을 앗아갔다.

  눈은 오롯이 꽃들만을 향해 있었다. 걷는 걸음마다 꽃잎이 하늘거리며 맞았다. 사실 몸은 흠뻑 젖어가고 있었거늘, 눈치채지 못했다. 라벤더는 제가 맞는 것이 꽃잎인 줄로만 알았다. 몸을 두들기는 건 꽃송이였다. 몸을 적시는 물은 느껴지지 않았다.

  한동안을 그렇게 걸었다. 비가 발을 전부 적시고, 천둥 소리가 커져갈 즈음, 라벤더는 문득 눈을 깜빡였다.

  여기 어디지?

  산 지리에는 자신이 있었다. 물이 어디서 넘치는지, 어디가 괜찮은 길인지, 어디서 어떻게 와야 집인지는 잘만 알았다.

  서 있는 곳이 전에 와본 적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정신없이 걷고 걷다 보니, 당도한 곳은 웬 대문 앞이었다. 왜 이런 곳에 저택이 있을까, 들었어야 할 의문은 전혀 들지 않았다. 여기 어디지? 라벤더는 다급해졌다. 다들 걱정할 텐데, 얼른 내려가야 하는데, 이게 웬일.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여기가 어딘지. 그러니 길도 몰랐다. 비는 그칠 기미가 없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까만 대문, 그리고 대문 안의 저택.

  선택지가 달리 없었다. 주인이 있든 없든 들어가봐야 했다.

  얼마나 떨면서 열었는지! 떨면서 말했는지! 흠뻑 젖은 생쥐 꼴로, 길을 알려달라니 미친 여자 아니냐고 문을 닫아걸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때마침 나와있던 주인은 놀랍도록 친절했다.

  집에 들어오고 나서야 라벤더는 자기 꼴을 자각했다. 주인이 타월 위에 하얀 옷을 올려주었다. 아직도 멍한, 정확히는 이제 자기 꼴을 깨달은 탓에 멍한 라벤더에게 주인이 말했다. 좀 씻고 오세요. 안에 욕실 있어요, 저쪽.

 

  "이봐요, 아가씨, 그게 약점이에요?"

  "아니, 아니에요. 그냥 사람들이, 얼굴이 잘 빨개진다고 놀려대는 것 뿐이에요..그렇게 쉽게 얼굴이 빨개지는 건 아니.."

  "그렇게 부정해봤자 소용없어요. 이미 다 봤는데요 뭘. 그만 손 좀 치워요."

 

  찬찬히 보면 꽤 매력적인 아가씨였다. 고전적인 미녀는 아니지만, 순하게 생긴 인상에 연한 금발의 생머리, 라벤더 색의 빛나는 눈동자. 저 순한 얼굴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그렇지, 숲에 피어나는 봄꽃에서. 한들거리는 연보라색 꽃송이들.

  라벤더는 볼을 문지르며 손을 내렸다. 살이 잘 붉어지는 타입은 맞지만, 초면에 그런 걸 지적당할 줄이야. 창피하게시리. 물론 자신에게도 잘못은 있었다. 먼저 시비를 건 것이 자신이었다. 도와준 사람한테 무슨 시비를 건 거지? 라벤더는 갈아입은 치맛자락을 북북 문질렀다. 이 역시도 주인으로부터 받은 옷이었다.

 

  "죄송해요, 제가 먼저 이상한 말을 해서..."

  "네? 아니요, 그건 그냥 제가 이상한 데서 웃은 거니까요."

 

  과연, 친절이라. 마리우스는 자조했을 따름이었다.

  친절하게 맞아줘서 감사하다, 그 말이 참 어색했다. 우스운 말이었다. 언제 그런 말을 들어보고 말았지? 먼 이야기였다. 오늘도 그다지 친절한 사람이 되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비만 아니었어도, 축축하게 젖은 몰골만 아니었어도, 혹은 비를 뚫고 달려드는 목소리만 아니었어도 마리우스는 충분히 불친절했을 것이다. 곧장 길만 알려주고 문을 닫았겠지. 그럴 것도 없이, 그 전에 그림자로 옭아매버렸을지도 모른다. 혹시나 뒤에 수정 칼을 숨기고 있으면 어쩌려고.

  얼마만에 들어보는 얘기야, 친절이.

  마리우스는 피식 웃었다. 친절한 사람이 되려던 건 아니었는데, 고맙기도 하지. 그런데 갑자기 수정 칼을 꺼내들어서 찌르려고 들면 어찌하나. 그림자야 있지만, 이 아가씨에게 그런 걸 쓰고 싶지 않았다. 이 아가씨가 수정 칼을 꺼내들길 바라지 않았다. 평화로운 시간이었으면 했다. 처음 만난 사람과의 관계에서 왜 그런 걸 바라는지, 마리우스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다.

 

  "어디서 왔어요?"

 

  라벤더가 마리우스에게로 눈을 돌렸다.

 

  "이 아래 마을에서요."

  "아, 그..그렇겠죠. 그거 말고."

 

  고개를 갸웃하는 라벤더를 보며, 마리우스는 질문을 수정했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어요?"

 

  아.

  라벤더가 살짝 입을 벌렸다. 마리우스는 몸에 힘을 뺐다. 소파가 착실하게 등을 받춰주었다. 대답이 들리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마리우스는 끈기 있게 기다려 주었다. 라벤더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지각변동 수준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꽃..을 봤어요."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마리우스는 몸을 들었다.

 

  "왜 놀라세요?"

  "무슨 꽃이요?"

 

  자기 눈이 커졌겠거니, 하고 마리우스는 짐작했다. 라벤더는 잠시 말이 없다가, 씻으러 갈 때 탁자에 두었던 묘목을 가리켰다.

  마리우스의 시선이 묘목으로 향했다. 어린 나무다. 마리우스의 눈에 익은 것이었다.

 

  "저거..저 꽃나무가, 잔뜩 있었어요. 전부 저 꽃나무였어요. 모든 나무에 꽃이 피었더라구요. 연분홍색 꽃이, 비를 맞아서 떨어지는데, 그렇게 수많은 꽃잎이 춤추듯이 떨어져 내리는데도 나무에는 그 배의 꽃이 붙어 있었어요."

 

  회색과 연분홍색이 공존하던 숲. 머릿속엔 그 광경이 세세하게 떠올랐다. 라벤더의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갔다. 눈이 조금씩 작아졌다. 마리우스는 표정의 변화를 포착했다.

 

  "그게 너무 아름다워서...그 꽃들이 떨어지던 광경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숲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하늘은 회색인데, 숲은 연분홍색이었어요. 그런데 정말로..이상하게, 정말 잘 어울리는 거예요."

 

  이곳까지 오는 숲이었다. 이 저택을 은신시켜주는 곳. 마리우스는 그곳이 어디인지 알았다. 그렇지, 이때쯤이면 만발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저 묘목을 찾으러 왔다가, 묘목이 어디에서 온 건지 궁금해졌어요. 그런데 찾아냈던 거예요.."

  "벚꽃이라고 불러요."

 

  라벤더가 깜짝 놀랐다.

 

  "벚꽃?"

  "그래요. 이름. 그 꽃나무. 벚나무예요. 그래서 꽃은 벚꽃이고."

  "벚..꽃. 아, 그렇구나.."

 

  그리고 이내, 해사한 웃음이 만면에 가득해졌다. 눈이 한껏 접혔다. 마리우스는 깨달았다. 저토록 빛나는 웃음이라니, 결코 그 뒤에 수정 칼 따위를 감출 수 없다. 그런 것이 숨어들 웃음이 아니었다.

  어디선가 봄꽃의 향기가 났다. 그럴 리가 없는데. 비로 감춰진 성 안까지 봄꽃 향이 들어올 리가 없는데.

  마리우스는 멍하니 라벤더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름다운 꽃이었어요. 고맙습니다. 이름을 알려주셔서."

 

  아, 그렇지. 마리우스는 겨우 할 말을 찾아냈다.

 

  "이런 날씨에 보긴 좀 뭐했을 텐데요. 맑을 때 보는 것이 더 예뻐요."

  "아니요."

 

  여전히 빛나는 웃음을 한가득 지은 채로, 라벤더가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 같은 날 보는 것도 정말 아름다웠어요."

 

  오늘 같은 날.

  마리우스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저 웃음에는 어떤 말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해도 닿지 않겠지. 저렇게나 아름다운 것에는. 비가 우중충하게 쏟아지는 벚꽃 숲이 아름답다니, 웬 취미야. 라벤더는 묘목을 바라보며 웃음짓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을 들여와서, 씻도록 해주고, 비를 피하게 의자를 내어주고,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비가 내려서인지 오늘의 자신은 익숙치 않았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대에 가까웠다.

  불현듯 라벤더가 상념에 빠져있던 마리우스를 불렀다.

 

  "저기요, 죄송한데요..."

  "예?"

 

  라벤더는 어느새 도로 마리우스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성함, 알려주시겠어요?"

 

  침묵이 지나갔다. 빗소리가 시끄럽게 스며들었다. 쏟아지는 비만이 우렁찼다. 비오는 날의 정적은 그런 것이다. 떠드는 것은 오직 비뿐이다. 말하는 것은 세상뿐이다.

  얼마쯤 지나고, 라벤더가 흠칫하며 정적을 깼다.

 

  "아, 죄송해요. 실례였죠."

 

  백 번 절해도 마땅찮을 사람한테 오늘 실수만 몇 번인가. 라벤더는 손사래를 쳤다. 마리우스는 입을 살짝 벌린 채 그런 라벤더를 보고만 있었다.

 

  "제가 먼저 말해야 했는데...라벤더, 라벤더 다르크예요. 오늘은 실례했어요. 언젠가 꼭 사례를, 조금이라도 하고 싶어서..."

  "이름..이요."

 

  라벤더는 말을 멈췄다. 마리우스가 붕 뜬 목소리로 되묻고 있었다. 라벤더는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다. 마리우스가 다시 물었다.

 

  "이름..인가요."

  "당신, 이름."

 

  작고, 여리나, 그러나 정확하게, 힘있게, 라벤더가 대답했다. 마리우스는 말이 없었다. 비는 여전히 멎지 않고 내리고 있었다. 빗소리 사이로 라벤더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퍼졌다.

  문간에서 마리우스에게 말하던, 빗소리마저 뚫고 나아가는 목소리였다.

 

  "제 이름만 기억해주셔도 돼요."

 

  마을에서 자기를 찾으면 될 일이다. 마리우스가 워낙에 머뭇거리는 모습이어서, 마음이 내키지 않는구나 했다. 그런데 의외로 자극이 되었는지 마리우스가 말했다.

 

  "마리우스."

  "아!"

 

  라벤더가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마리우스-어떻게 부르지요? 그, 이 정도면, 귀족이시거나, 부자라고 생각했는데-"

  "마리우스예요. 그냥 마리우스."

  "그냥?"

 

  마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냥, 아무것도 아닌 그냥 마리우스예요. 편하게 불러요,"

 

  다르크 양, 하고 말하려고 했으나, 마리우스는 라벤더가 너무나도,

 

  "..라벤더."

 

  라벤더 같다고 생각했다.

 

  "아아.."

 

  라벤더가 지그시 웃었다.

 

  "응."

 

 

 

  "좋아요, 마리라고 불러도 돼요?"

  "아니, 그건 싫어요. 무슨 여자애에요?"

  "귀여운데."

  "절대 싫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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