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생, 혹시 다음에 인연이 닿으면 또 봅시다. 고생 많았어요.”
“부산 가서 한 번 봐요. 시인샘, 잘가요.”
시인은 여러 선생님들의 손을 붙잡으며 인사를 했다.
해마다 있는 이별이라 모두들 무감각해질 때도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학교 선생님들은 언제나 눈물바람으로 헤어진다.
이장님댁과 인사를 하고 선착장으로 내려왔다.
딸같았던 시인을 떠나보내며 결국 사모님은 눈물을 보이셨다.
우리 딸이 왔었던 것 같다며..
너무 고마웠다고.. 행복했다고..
시인은 오늘 학교에서도, 이장님 댁에서도 별다른 말도 못하고 그냥 손만 꼭 잡았다.
슬펐다.
하지만 슬프기 시작하면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그냥 애써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아이고, 정선생님 가시는가베요. 여름에 해랑도에 놀러오면 배 공짜로 태워줄테니까 꼭 오이소. 우리 아들 잘 가르쳐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선장님과도 그렇게 손을 꼭 잡았다.
큰 여객선으로 옮겨 타고 나서야 시인은 눈물이 울컥 나올 것 같았다.
처음 왔을 때처럼 날씨가 좋지 않았다.
낮게 낀 먹구름에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아빠..”
아빠 생각이 났다.
시인은 지난주에 부산에서 근무하던 초등학교로 가서 파견이 끝났음을 알리고 간병휴직을 낸 상태였다.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이 돌보고 싶었다.
자신을 키워 준 아빠의 마지막을 꼭 함께 하고 싶었다.
**
“가수형아, 어떻게 된 일이야.. 왜 이렇게 수술이 빨리 끝났는데? 어?”
“아버지, 이미 다른 장기 대부분에 전이 되셨다. 수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모두들 말문이 닫혔다.
선수마저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른다는 듯이 멍하게 가수를 바라보았다.
치수는 어흐흐흑하며 울음을 터뜨렸고 기훈은 눈을 감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슬로우비디오처럼 모든 것이 정지된 듯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시인이 담담히 물었다.
“오빠야.. 아빠 얼마나.. 남으신.. 건데..?”
“얼마 안 남으셨다. 3개월.. 6개월.. 다 희망사항이다. 얼마나 견디실지 모르겠다.”
“아빠한테는 어떻게.. 말씀드리지..?”
“내가 해야지, 내가..”
가수가 눈을 감았다.
잠시 숨을 고르더니 다시 눈을 뜨고 중환자실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선수가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급하게 따라 뛰어가려고 했지만 시인이 그 팔을 붙잡았다.
“선수오빠.. 우리는 여기 있자. 가수 오빠가 해야지.. 우리는 제대로 말 못한다이가.. 우리는.. 그거 감당 못한다..”
“시인아.. 오빠야 어짜노.. 내가 제일 못난 자식이었는데.. 아직 제대로 효도도 못했는데.. 어짜노..”
선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직 울면 안 된다. 오빠야, 참아라. 우리 참고.. 참자..”
시인이 입술을 꽉 물었다.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화가 나고 분노가 치솟았다.
‘두고 봐요. 내가 아빠 붙잡을거야. 계속 붙잡을거야..!’
**
“시인씨..”
시인이 서울역에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고 급하게 달려온 동원이었다.
갑작스런 전화였지만 시인아버지의 상황을 이미 알고 있었던 동원은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시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동원을 보고 웃었다.
“작가님! 호호호. 놀랬죠?”
“밥은.. 먹었어요?”
“아.. 아침 일찍 나온다고 밥을 안 먹었네요. 호호호. 나 맛있는 거 좀 사줘요.”
“일단 내 차를 타고 나갑시다.”
“아니요. 나 두 시간 있다가 다시 부산 가야 해요. 그냥 서울역에서 있어요. 우리..”
시인이 힘없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동원은 근처 카페에 들어가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시켜 들고 왔다.
“우와! 맛있겠다. 잘 먹을게요.”
시인이 샌드위치를 들고 맛있게 먹기 시작.. 아니, 먹으려고 했다.
하지만 한 입 물자마자 떨어지는 눈물 때문에 삼키지도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왜.. 눈물이.. 헤헤.. 흑흑흑.. 안 울어야 하는데..”
“시인씨..”
동원이 얼른 시인의 옆자리로 가서 어깨를 감쌌다.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작가님.. 나 간병휴직 냈어요.”
“네.. 잘했어요. 잘했어.”
“기다려 달라고 말해야 할까.. 헤어지자고 말해야 할까..”
“시인씨! 무슨 그런 말을..!”
“아빠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말하는 건 너무 잔인하잖아요. 그쵸..?”
“시인씨.. 하아..”
동원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시인의 손을 잡았다.
“나 아빠 옆에 있을 거예요. 작가님이랑 연락할 수도 없을 것 같아요. 아빠한테는 받기만 해서.. 아빠가 갑자기 없어지면.. 내가 그 삶을 감당할 수 없을까봐.. 뭐라도 해야 해요. 난. 그래야.. 아빠가 돌아가셔도 내가 살 수 있을 테니까요..”
“얼마든지 그렇게 해요. 내가 옆에 있을 테니 힘내요.”
“똥도에서 뭘 잃어버리면.. 사랑을 이룰 수 없다잖아요.”
“갑자기.. 그건..”
시인이 가방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었다.
동원이 찾아내서 선물했던 시인의 핀이었다.
“이거.. 작가님이 만든 거죠?”
동원은 대답할 수 없었다.
똥도를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시인의 학급 홈페이지에서 그 핀을 하고 찍은 프로필 사진을 찾아내서 그 핀과 똑같이 주문 제작을 했었다.
그런 미신 따위.. 믿고 싶지도 않았고 믿어지지도 않았다.
다만.. 시인이 불안한 마음을 품고 자신을 만나는 걸 막고 싶었을 뿐이다.
“시인씨가 불안해 할까봐 그런 거예요. 그런 미신 따위 믿을 리가 없잖아요.”
“맞아요. 다 사람들이 만든 이야기일텐데.. 그걸 왜 믿겠어요..”
“그런데 이걸 왜 꺼내요? 시인씨 왜 그래요?”
“헤어질 이유를 만드려구요.”
“시인씨!”
“작가님, 우리 여기까지예요. 더 사랑하고 싶었는데 나는 사랑할 여유 없어요. 아빠를 하루라도 더 견뎌내실 수 있게 옆에서 정성을 쏟아야 해요. 그러니.. 우리 그만해요.”
“왜 그래요? 도대체! 알았어요. 시인씨 절대 방해하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걱정 말고 아버님 간병해 드려요. 지금 말은 없던 일이예요. 그렇게 말해요. 얼른!”
시인이 동원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가슴에 안겼다.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1개월이 될지.. 1년이 될지.. 2년이 될지..
그 시간 동안 이 남자를 잡아둘 수 없었다.
다 바보 같다고 욕해도, 이게 시인이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기차가 멈추었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천천히 승차를 시작했다.
시인이 동원의 손을 놓았다.
동원은 절대 헤어질 생각이 없었다.
시인의 말대로 따라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불안했다.
이 여자가 정말 마음을 닫아 버릴까.. 정말 멀리 가 버릴지도 몰라서 너무 불안했다.
시인이 동원과 마주보고 섰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맞췄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끗힐끗 둘을 쳐다보았다.
“왜 진짜 헤어지는 사람처럼.. 시인씨, 이러지 말아요.”
“키스해줘요.”
“시인씨..”
동원은 목이 멨다.
시인은 말없이 동원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그냥 키스해 달라고..
그 마음을 외면할 수 없어서 동원이 시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야..
길고 긴 입맞춤이었다.
시인의 양쪽 눈가로 눈물이 또르르 흘러 내렸다.
동원의 눈에도 눈물이 차올랐다.
입술이 떨어지자 시인은 바로 돌아섰다.
아무렇지도 않게 기차에 올랐다.
시인은 돌아보지 않았고 동원은 차마 부를 수 없었다.
또 이별이었다.
**
“아빠! 무슨 간병인! 내가 휴직 했다니까요!”
“어허! 마지막에 자식 피 빨아먹고 그러고 싶지 않다. 간병인 쓰면 된다. 니는 학교 가라.”
시인이 씩씩 거렸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지만 흘러나오지는 않았다.
“아빠는 왜 아빠 생각만 해요! 왜!”
“무슨.. 시인이 너..”
“아빠는 그냥 돌아가시면 그 뿐이죠? 빨리 가서 엄마 보고 싶어? 그래요? 그럼 우리는! 나는! 내가 옆에 있겠다구요! 나 징그럽게 고생 좀 시켜서 아빠 돌아가시면 후련해야 내가 살지! 아하! 드디어 끝났다! 해야 내가 살지! 나 살자고 하는 거예요. 지금. 아빠 때매 이러는 게 아니라구요!”
시인이 비명을 지르듯 말을 쏟아냈다.
선수와 가수는 묵묵히 뒤에서 그 말을 듣고 있었다.
아버지는 말문이 막힌 듯 시인을 잠시 바라보다가 체념한 듯이 말했다.
“가쓰나.. 말하는 것 좀 봐라. 알았다. 그면 내가 니 힘들게 다 시킬테니 니가 다 해라.”
시인은 방금까지 화를 낸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활짝 웃었다.
“역시! 우리 아버지는 내 말을 제일 잘 들어준다니까요. 호호호. 내가 아빠 특급 간병인이야. 그러니까 돌아가시면서 재산은 날 제일 많이 줘요. 알았죠? 호호호호.”
아버지가 피식 웃으셨다.
늘 여리고 안쓰럽던 딸이다.
혹시 맘껏 응석부리지 못할까봐 계속 신경 썼었던 작은 딸이 언제 이렇게 컸나 싶었다.
“너거는 이제 가라. 시인이 있을끼란다. 이 녀석 고집이야 너희가 더 잘 알지. 아빠는 좀 잘란다. 오줌줄, 똥줄 다 끼고 있으니 화장실도 안 가도 되고 넘 편하네. 편해. 아빠 좀 잔다.”
아버지는 눈을 감았다.
삼남매는 밖으로 나왔다.
“오빠야, 집 공사 잘 진행되고 있제? 아부지 새 집에서 주무셔야 하니까 큰 오빠가 집 신경쓰고요. 선수오빠야는 학교 마치면 음식이랑 잘 배달 해줘요. 중간에서 고생 많겠다. 오빠들.. 힘내!”
가수가 알았다며 돌아섰다.
선수는 시인의 손을 꼭 잡고 힘내라고 눈빛을 보냈다.
시인의 그런 오빠들을 향해 환한 미소를 내보였다.
이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