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1  2  3  4  5  6  7  8  9  10  >  >>
 1  2  3  4  5  6  7  8  9  10  >  >>
 
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퓨리어스 (FURIOUS)
작가 : HANNAH
작품등록일 : 2017.7.31

아무런 연고도 없이 모이게 된 우리들.
아무 것도 모른 채로 마지막까지 살아남기 위해 서바이벌 게임에 임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들 중 한 명은 이 게임에 대해 뭔갈 알고 있는 듯 하다.

서바이벌 로맨스.

 
퓨리어스(FURIOUS) 10
작성일 : 17-07-31 23:44     조회 : 301     추천 : 0     분량 : 15158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10. / 도진이의 시점〕

 

  오랜만에 맞이하는 즐거운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기분이 들떠 있다. 뭐랄까. 이렇게 안정적이면서도 훈훈한 기분을 너무도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었다. 다른 이들이 즐거워하는 건, 병동에 줄곧 기운 없이 축 쳐져 있던 늑대 새끼 루돌프가 눈을 떴기 때문이다. 환이는 이미 지하 1층부터 3층까지 전부 돌아다니며 영어와 한국어 섞인 이상한 소리를 내지르며 이 소식을 전하였고 마샤는 이 늑대가 하루 만에 깨어날 수 있었던 까닭은 자신의 눈부신 의학 솜씨 덕이라고 하며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 듯하였다. 사실 늑대가 입었던 상처는 그다지 생명에 위협적이거나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었다. 적어도 내 시력 1.5의 눈에 보기에는 그래보였다.

  드디어 에리얼은 환이의 그 요란스러운 호들갑에 대략 반나절 동안 있었던 서재에서 나왔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의 손에서는 두꺼운 책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아마 여기 책 읽으러 왔다고 할 만큼 서재에 틀어 박혀 나오지 않고 있다. 이따금 서재에 쳐 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아 답답하기도 하지만 그녀는 다른 이들과 다르기에, 조금 더 믿고 기다려 보기로 하였다.

  좁은 병실에 여섯 명의 아이들이 또다시 한 자리에 모였다. 팔뚝만한 늑대가 회색 털을 곤두세우며 간신히 일어서 있었다. 루돌프의 노랗고 야생적인 눈동자가 번뜩였고 조그마한 삼각형 귀는 꼿꼿이 위를 향해 치켜들고 있었으며 얼굴 부위는 눈처럼 하얀색을 띄고 있었다. 시베리아 허스키 같다고 해야 하나? 루돌프는 우리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비틀 거리며 침대 위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으르렁거리기도 하였으나 기운이 없었는지 이내 누워버리고 말았다. 환이는 걱정스러운 듯이 마침 뒤에 있던 보르에게 물어보았다.

 “아직 많이 아픈 건가? 마샤가 자기의 방어의 손으로 치료했으니 괜찮을 거라고 했는데.”

 “신의 손이겠지. 그나저나 얘 좀 뭘 먹여야겠는데?”

  보르가 신기하듯 쳐다보다가 에반을 향해 돌아보며 말했다. 에반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 보니 늑대는 육식동물이니, 고기류를 먹을 텐데. 우리 먹을 것도 없다.”

 “우유라도 가지고 올까? 그리고 마샤야. 이제 위니 좀 그만 괴롭혀.”

  한 편 마샤는 통신기 마이크에 대고 뭐라 떠들어댔다.

 “나의 천제적인 의학으로 곧 죽을 것 같은 늑대가 살아났다니까! 나 의학에 소질이 있나봐. 진로를 그 방면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겠어. 너도 행여나 다치고 돌아오면 내가 친절하게 간호해 줄 테니.........”

 “제발- 미치겠네. 그 전에- 내가- 돌아버리고- 말거야.”

  위니의 목소리도 얼핏 들려왔다.

 “정신과 의사? 그것도 괜찮겠다!”

  위니는 그가 기지에서 떠난 후 약 2-3시간 삼십 분 간격으로 상황 보고를 하고 있었다. 그는 현재 끝없이 이어지는 정글 숲 속을 똑바로 걷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만약 그의 눈이 잘 못 된 것이 아니라면 서쪽으로 보이는 높은 산꼭대기를 향해 등산이라도 한다고 말하였다. 그는 약 40분전에 발견한 길게 뻗어 있는 강가에서 목을 축인 후 (다행히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굳이 끓여 마시지 않아도 깨끗하다 하였다) 일어나 정상에 오를 예정이라고 이야기 한 후였다.

 “마샤. 내가 이렇게 사정 할 테니, 정상적인 사고 회고를 가진 아무에게나 마이크를 넘겼으면 해. 몇 안 되는 내 평생소원 중 하나야. 그래. 도진. 그에게 넘겨.”

 “그럼 넌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거야?”

 “제발!”

  거칠고 투박하게만 들렸던 위니의 목소리에서 급기야 애원하는 듯 한 어조가 내 이어폰에서도 들려왔다. 얼마나 절박했으면.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에리얼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내 그 미소는 사라져버렸지만 말이다.

  나는 상냥한 가면 아래 속을 감추는 그녀가 때로는 대단하다싶었지만 가끔 너무 얽매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나도 아무렇지 않게 생활하고 있는데. 그녀는 아직도 숨을 들이 쉬고 내 쉴 때마다 과거란 바늘에 찔리는가. 에리얼은 여자 아이고 하니 감성적일 수 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와 같은 처지인 에리얼이었기에. 동정어린 마음이긴 하지만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 주고 싶다.

 “주면 될 거 아니야, 쳇.”

  마샤가 이내 못 마땅해 하며 끝내 그녀의 무전기 전원을 내렸다. 그리고 토라졌는지 거의 던지다 시피 자신의 무전기를 병동 책상에 두었다. 마샤가 불만스럽게 내게 위니를 순순히 넘겨주었다. 나는 함께 얘기 중이었던 에반에게 미안하다고 한 후 -사실 미안하게도 딴 생각에 잠겨 있었지만- 위니와의 대화를 시도해보았다.

 “그래, 대략 몇 킬로미터 정도 걸은 것 같아?”

  내가 마이크에 대고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통신기의 성능은 아주 좋아서 보통의 성량에도 귀가 얼얼하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즈음 되면 위니의 귀도 거의 성능을 잃어가고 있겠지. 누구들 덕분에.

 “지금, 산 비탈길을 오르고 있어. 기지에서 약 15 킬로미터 쯤 걸은 것 같아. 미리 말해 두겠는데, 난 방향 감각은 있어도 거리 감각은 없다는 걸 알아 줘. 좌우간 내 계획은 정상에 올라 게임 필드를 한 눈에 파악한 후 눈길을 가는 곳부터 조사할 예정이야. 아, 강의 시작부분을 알 것 같아! 그리고 만약의 상태를 위해 체력을 많이 소모하지 않게 천천히 살피다 갈 테니, 어쩌면 그리 멀리까지는 가지 못 할 거야. 빌어먹을! 처음엔 몰랐는데, 가방이 생각보다 무겁더라고.”

  위니의 불평불만 가득하게 말하자 나는 아직 아무런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 것에 대해 안심하였다. 생각보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을 데려다가 일을 진행하느니 차라리 나 혼자 하는 것이 편하지. 나는 팔자 편한 에리얼과는 달리 아직 실전에 경험이 없는 그들을 내내 걱정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래서 인지 매번 거울을 볼 때마다 얼굴에서는 항상 귀찮은 것 같은 짜증어린 표정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이들과 확연히 다르게 살아왔다는 것을 뼈저리게 겪어 보아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가까운 과거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렇게 유쾌한 일들은 아닐뿐더러 아직 CI의 실체에 대해 모르고 있는, 아직은 편하게 지내온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니까. 그것이 에리얼이 제일 처음으로 말했던 제안이기도 했다. 매번 갑작스럽게 누군가의 비명 소리를 들어야만 하는 그런 가슴 뜯겨 내리는 듯 한 절망스런 순간을 분명 그 누구도 알고 싶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나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다혈질인 내 성격도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닌 것 같았다. 그곳은 아주 신비한 곳이었다. 본래 인간의 성향이 선한 것이라면 그것을 파괴해버리는 능력.

 “가령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단 한사람이라도 존재한다면 있다면, 지상 위에 있는 사람은 너 뿐만이 아닐 거야. 그리고 그 사람들도 너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사람이란 원래 생각하는 방식이 다 거기서 거기거든. 그리고 자세한 사항은 말하지 않는 것이 네 신상에 이로울 거야. 누군가가 도청하고 있다면 제일 먼저 죽는 것은 너일 테니까.”

  에리얼의 무덤덤하고 변화 없는 목소리가 위니의 귀에 영 거슬렸나보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 하나하나가 거만하고도 지적이여서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는 위니의 얼굴이 너무 자연스럽게도 떠올랐다.

 “그런 것쯤은 나도 알고 있으니까 명령하지 마. 이 하늘에 맹세코 난 절대 너보다 먼저 탈락되는 일은 없을 거다.”

  위니가 신경질 적이게 몰아붙였지만 이미 그녀는 듣지 않고 있는 듯 했다. 위니 쪽에서 전원을 꺼버렸다. 옆에서 듣고 있었던 에반은 한숨을 내쉬는 내 등을 가볍게 토닥거려주었지만 나는 앞길이 태산처럼 아득하게 막막해 짜증났다.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이 팀을 꾸려 나가야 하는지 안담했다. 특히, 나는 ‘죽는다.’란 단어에 민감했다. 현재 유일하게 밖으로 정찰 나간 그가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가운데, 그의 기분을 상할 게 할 것을 뻔히 아는데, 그녀의 덕으로 미처 자세한 상황을 설명 받지 못하고 끊겨버렸다. 이제껏 그녀를 두둔했지만 계속 이런 관계를 유지한 들 누구에게 이롭겠는가? 상황이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아 마침내 폭발해 버렸다. 안 그래도 환이와의 문제로 고민할 것이 많았기 때문에 짧은 인내심에 한계가 왔다.

 “아니, 저런 식으로 나오는데 어떻게 게임을 진행 할 수 있지?”

  내가 에반에게 잡아먹을 듯이 따졌다. 물론 그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나에게는 하소연을 들어줄 화풀이 할 상대가 필요했다. 머리를 짓누르는 것 같은 여러 가지 문제들. 내가 만약 병에 걸린다면 그 병은 화병과 고혈압일 것이다.

 “녀석들은 벌써 움직이고 있을지 모르는데 제가 아무리 우리 모두를 책임 질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췄다 한들, 현재는 그 잘난 개인플레이가 아니라고!”

 “자, 자 도진아. 에리얼도 무슨 생각이 있으니까 그러는 것일 거야.”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왔어. 하지만 이건 아니잖아, 안 그래?”

  내가 분에 못 이겨 소리를 질렀다. 계속해서 내가 말을 이어했다.

 “서재에만 쳐 박혀 있으면 금이 나와 은이 나와? 좀 나와서 이것저것 실질적인 작전이라도 짜야 뭐라도 어떻게 할 거 아냐! 언제까지나 위태로운 관계를 지속해야 하는 건데. 이건 목숨이 달린 문제라고! 아직 낯을 가려서 그러는지 아님 원해 성격이 이 모양이라서 그러는 건지 그건 전혀 문제가 될 게 아니잖아?”

 “소리가 시끄러우니 이만 전원 좀 꺼줄래?”

  내가 나도 모르게 자국어로 뭐라고 소리를 질러대자 여전히 평온하고 딱딱한 영어가 나의 말을 잘라먹었다. 그제 서야 나는 아직까지도 통신기 전원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길.

 “책을 읽는데 방해 되잖아.”

 “이봐, 에리얼.” 내가 다시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 책을 모두 불살라 버리기 전에 당장 나와. 넌 비난할 줄만 알았지, 적절하게 대응 할 줄은 몰랐어. 네가 얼마나 잘났는지는 몰라도 우리는 여기 땅 굴속에만 틀어박혀 있기만 하면 안 된단 거 너도 잘 알잖아? 설마, 무서워서 이러는 것은 아닐 테고.”

  그 때였다. 쾅 하는 문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무슨 일인가 놀랜 환이가 병동에서 고개를 삐쭉 내밀었다. 서재에서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에리얼이 또박 또박 걸어오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에리얼이 천천히 걸어오더니 내리 깔보는 듯 한 교만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난 이 열대성 기후에 관한 근방의 정보를 조사하고 있었어.” 그녀가 또박또박, 언성이 높아지는 것을 애써 제어하는 듯 말했다. 한창 탄환도 장착되어 있지 않는 권총으로 사격 연습 중이었던-애들 장난 놀음에 불과하지만- 올리버와 보르가 비 오듯이 쏟아 내리는 땀을 닦으며 밖으로 나왔고 마샤도 무슨 일인가 싶어 환이 옆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네가 그렇게 밖을 나가고 싶어 미치겠다면, 좋아. 다 같이 나가자고. 다 같이 나가서, 다 같이 죽는 거야! 왜, 그것이 네가 원하는 거 아니야?”

 “넌 그저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변명을 하고 있는 것뿐이야.”

  내가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지하 3층으로 내려 가버렸다. 에리얼은 무기 창고에서 진짜 실탄이-진짜 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장착 되어 있는 권총 한 자루를 주머니에 넣고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는 얇은 몇 십 미터짜리인 철사 손목에 걸은 채 연막탄 대여섯 개를 쥐고 다시 올라왔다.

 “내가 그저 책만 읽고 있었을 거라 여겼다면 내게 미안해야 할 거야. 잘 들어 한 도진. 책임자는 네가 아니라 바로 나야. 그리고 나의 결정에 네가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어.”

 “나는 네가 그렇게까지 매뉴얼에 얽매여 있는지 몰랐는데?”

  에리얼이 나에게 눈길 하나 건네지 않고 오만스럽게 턱을 살짝 치켜들며 지하 1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따라 올라가야 하는지 망설여 주춤거렸지만 에반이 그녀의 뒤를 따라 가자 나머지도 따라갔다. 그러다 에리얼이 뒤를 돌아 ‘바보 같이 각자의 권총과 호신용 실탄을 두고 오지 않았겠지. 기억해. 사람에게 쏘든 말든 상관은 안 하겠는데, 밖은 밀림이라고.’ 라고 흘려 말하자 몇 명은 머리를 긁적이며 보르는 트레이닝실로 되돌아 갔다. 마샤와 환이는 아직 지하 3층 무기 창고에서 꺼내보지도 않았다. 에리얼이 제일 먼저 지상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고 당당했다. 그녀의 표정은 사막과 같이 삭막했으며 황량하기 그지없었고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움직이는 마치 선인장처럼.

 “에리얼. 그거, 내 기억이 옳다면 섬광탄 맞지? 무엇에 사용하려고 가져가는 거야? 그건 아직 쓸 필요가 없을 것 같은 데?”

  올리버가 흘러내리는 안경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입술은 밀랍으로 붙어버렸는지, 아니면 그녀만 시간의 흐름이 달리어 소리를 듣지 못하는 지, 그저 그녀는 묵묵히 숲 속으로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에리얼이 지금 어디 간대, 올리버?”

  아래에서 마샤가 그녀의 탄창에 탄환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며 올리버에게 물었다. 올리버는 그녀에게 고개를 살짝 까닥이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그에 이어 마샤와 에반, 보르가 나왔다. 곧이어 환이도 나오려고 했으나 나는 혹시 모를 상황에 기지를 지켜야 한다며 환이를 기지에 있으라고 당부하였다. 사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를 위험할 지도 모르는 저 지상 위로 함께 데리고 가고 싶지 않았다.

 “왜? 도진아, 나도 함께 갈 거야.”

  그가 모국어로 말했다. 그러나 나는 설레설레 고개를 가로 지으며 ‘N2'로서 부탁한다고 타이르자 환이는 순순히 그 자리에 얌전히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그러나 곁에는 아무도 없었고 이미 저 건너편으로 사라진 에리얼을 따라 뛰어 가고 있는 그들이 보였다. 서둘러 현관 뚜껑을 소리가 나지 않게 닫고 나뭇잎 조금 쓸어 모아 문이 보이지 않도록 뿌려놓았다.

 “도진아, 생각보다 에리얼의 발걸음은 빠르니까 서두르는 것이 좋을 거야!”

  마샤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크게 손을 흔들고 소리쳤다. 나는 재빨리 조용히 하라는 사인을 그녀에게 보내고 부스럭대는 소리가 가급적 덜 나도록 쫓아갔다.

 “에리얼, 우리 한 8-10 미터정도 온 것 같아. 이 참에 위니를 만나러 갈 셈이야?”

  에반이 빠르게 걸어가고 있는 얼굴에 달라붙는 나무덩굴을 베어가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의 말에 에리얼이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우리의 키에 서너 배나 되는 파란 나무들이 하늘을 덮을 것처럼 무성하게 자라 있었고 어지럽게 얽혀 있는 덩굴 더미에 앞으로 나아갈 때조차 겨우 칼로 베어가며 간신히 나가고 있는 처지였다.

 “여기라면 적당해.”

  에리얼이 들릴 듯 말 듯 한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 뭐가 말이야? 우리도 뭔가를 알아야 따라가는가 말든가 하지.”

  보르가 얼굴에 기분 나쁘게 자꾸 휘감기는 덩굴들을 제치며 물었다. 에리얼은 가지고 있던 철사 약 60 미터를 또 언제 챙겼을지 모를 사무용 가위로 적당한 간격으로 잘라 그 긴 철사를 대략 적당히 10미터씩 5등분으로 나누어 섬광탄 하나씩을 옆에 두었다. 그녀가 뒤를 돌았다. 어느새 뒤쳐져 있는 마샤가 마지막으로 그녀의 시야에 잡히자 늘 허공을 바라보는 것 같이 멍한, 그리고 항상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에반과 정식, 보르, 올리버를 지나 마샤에 머무르자 그녀가 여기에 온 목적, 할 일을 설명을 하기 시작하였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기습에 대비하자는 거야. 일단 첫 번째 단계, 기본적인 트랙 설치로 올리버와 마샤는 기지 중심으로 동쪽. 에반과 보르는 서. 도진이는 북쪽으로 약 5미터 간격으로 떨어져 이 것들을 설치해줘. 복잡한 트랩 없이 원시적인 방법으로 발에 걸려 넘어지면 이 섬광탄아 터지도록 만들어. 어떤 식으로 만들어도 좋아. 하지만 설치한 트랩 위치는 파악해 둬야 자신의 쳐 놓은 함정에 자신이 걸리는 바보 같은 일은 발생하지 않겠지? 아는지 모르겠지만 섬광탄은 그 빛뿐만이 아니라 굉음의 위력이 세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 과연 이건 얼마나 셀 진 모르겠지만. 설치를 다 한다면 두 번째 단계로 들어갈 거야.”

  그녀가 자신의 몫의 철사와 섬광탄을 들었다.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은 분명 끝났음에도 멀뚱멀뚱하게 서 있자 에리얼은 언성을 높여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였다. 내키진 않지만 어쩔 수 없다며 올리버가 그것들을 챙겨 갔다. 마샤는 볼멘소리로 중얼거리며 그의 뒤를 쪼르르 다람쥐처럼 따라갔다.

 “뭐야. 괜히 여기까지 올 필요는 없었잖아.”

  그녀의 파란색 머리핀이 거칠게 뻗어 있는 나뭇가지들 사이로 비추는 햇볕에 반짝였다.

 “도진이 덕분에 귀찮은 일이라도 건졌네.”

  에반이 섬광탄을 손에 쥐어 보며 혼잣말을 하였다. 나에게 말을 거는 듯 내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또렷하게 들렸지만 뭐라 할 말도 없고 해서 그저 묵묵히 서 있는 장소와 정 반대인 북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리얼은 혼자 괜찮겠어?”

  에반이 물었다. 그녀는 그저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소형 단도를 들고 줄기가 굵직하고 튼튼한 나무들을 골라 커다랗게 칼집내고 있었다.

 “아, 표시 하는 거야?”

  그래도 그녀는 대꾸가 없었다. 보르는 에반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치고 자기들도 가자며 엄지손가락을 동쪽으로 치켜세웠다.

 “그래, 우리도 가자 보르야. 햇볕이 잘 드는 남쪽에 비해 동쪽은 숲이 우거지지 않을 테니, 보다 쉽게 갈 수 있을 거야.” 에반이 보르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보르야, 너무 에리얼을 나무라지 마. 그녀 역시 그녀 나름대로 우리를 챙겨 주고 있는 것 이니까. 그 방식이 조금 남다를 뿐이야.”

 “그건 나도 알고는 있어.”

  보르는 순진하게도 그의 말에 넘어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에리얼은 각각 자신의 방향으로 흩어져 가는 것을 바라보다가 (나는 어떻게 하는지 몰랐으므로 가는 척 적당한 나무 뒤에 숨어 에리얼이 하는 것을 지켜보기로 하였다.) 이윽고 긴 철사를 집었다. 철사라기보다는 조금 두꺼운 낚시 줄에 가까웠는데 뭐라 알파벳이 새겨져 있는 섬광탄 본체를 쥐어 떨어지지 않도록 꼼꼼히 묶었다. 또 다른 철사로는 핀 고리에 연결하였는데 이렇게 긴 두 철사가 섬광탄을 가운데를 두고 하나로 이어졌다. 섬광탄 본체는 조금 높은 나뭇가지 사이에 두고 나뭇잎으로 가렸다.

  에리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너무 얇거나 너무 두껍지 않은 적당한 나무 몇 그루를 찾아 커다란 원의 호가 되도록 손가락으로 이어보았다. 그리곤 지면으로부터 15 센티미터 간격으로 나무에 이어지도록 묶었다. 제 아무리 큰 짐승이라도 이 정도의 높이에서는 철사를 쉽게 발견해 피해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숙일 줄 몰라 하늘을 향해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니는 인간의 걸음만큼은 잡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기지에서 8-10 미터 쯤 되는 거리에서 우리 팀이 아닌 다른 이가 주변을 수색하다 줄에 발이 걸린다면 자연스럽게 철사가 당겨져 섬광탄이 터지도록 설치된 간단한 트랩이었다. 대략 그 사정거리가 8 미터 정도인데, 그녀는 아직 부족 하다는 듯이 주변 덩굴과 철사를 눈에 띄지 않도록 연결하여 그 거리를 넓혔다. 사실, 제발 이 섬광탄이 터질 날이 오지 않기를 간절히 빌 뿐이었다. 에리얼은 마지막으로 나무 기둥에 ‘ / ’ 모양으로 칼집을 하얗게 내어 마무리를 지었다. 그녀가 내심 뿌듯해 하는 표정으로 기지로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에리얼....... 이걸 어떻게 하라고?”

  아니나 다를까, 보르와 에반 네에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그들의 목소리는 슬쩍 에리얼이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나에게도 들렸다. 그녀는 땅이 꺼져 들어갈 것 같은 한숨을 내쉬며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수고를 해주어야 했다. 솔직히 나도 뜨끔했다.

 “번거롭지 않으려면 이제부터라도 사전에 다 설명해 주어야겠다.”

  그녀가 살짝 미소를 띠며 한숨 아닌 한숨을 내쉬었다. 에리얼의 간단하고도 명료한 설명이 끝나자 보르가 알겠다며 힘찬 목소리로 고맙다고 하였다. 정말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녀는 보르보다는 에반을 믿어보도록 하였나 보다.

 “에리얼, 우리도 다 했어! 에, 그러니까 네가 설명해준 것처럼 똑같지는 않지만 분명 잘 터질 거야! 난 그렇게 굳게 믿고 있어. 지금 마지막으로 그 쪽으로 가서 마무리만 하면 돼.”

  마샤의 애교 넘치는 목소리가 모두의 이어폰에서 쟁쟁하게 울려 퍼졌다. 분명 마샤는 올리버를 부려 먹겠지. 내가 마지막으로 에리얼이 맨 처음으로 철사를 묶었던 장소 근처에 마무리를 하면 전부 모여서 하나의 커다란 원이 만들어 지는 것이다. 나름 완벽하지는 않지만 괜찮은 생각을 고안해 놓은 것이다. 나는 시작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서 나의 자리를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일상을 쉽게 받아들이는 마샤의 말투에 폭발음만큼이나 고막이 찢어 질 것 같은 에리얼의 목소리가 화살처럼 박혀 들었다.

 “우린 이것을 잘 터지라고 설치해 놓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 그러다가 만약 상대편이 아닌 동물이나 새가 걸려 핀이 뽑히면 오히려 기지의 위치가 노출되어 위험 할 수 있어. 언제까지나 만약을 위한 안전트랙이지 스릴을 즐기며 마음 졸이게 하려고 이렇게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고! 올리버. 그녀의 책임 없는 발언에 네게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에리얼, 적어도 동물들이 어슬렁거리다가 터질 일은 없을 거야. 봐봐. 너무 조용하지 않아? 그리고 분명 출연자들을 위해 맹수들은 모두 치워뒀겠지!”

 “말이나 못하면.”

  차라리 화를 내면 덜 무서울 것을. 또박또박 끊어지는 딱딱한 발음에 담긴 비난은 가슴을 후벼 파는 듯했다. 하지만 에리얼의 말이 수백 번 옳았다.

 “아니, 에리얼 그냥 하는 소리였어. 그렇게 까지 정색할 필요는.......”

  그 때였다. 시계 세시 방향으로 커다란 섬광과 굉음이 숲 속에 울려 퍼졌다. 꽤 가까운 거리인 것 같았다. 번쩍하는 섬광과 땅을 울리는 지진에 당혹스러워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깜깜했다. 뭔가 인공적으로 땅을 진동시키는 것 같았다. 그들이....... 이 섬광탄에 무슨 짓이라도 했나? 분명 마샤와 올리버가 있는 방향이었다. 에리얼은 침착한 목소리로 통신기 마이크에 대고 다급히 소리쳤다. 당연히 놀란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에리얼과 동쪽의 에반과 보르의 외침도 뒤엉켜 이어폰에 시끄럽게 들려왔다. 환이의 울먹임도 얼핏 들렸다.

 “무슨 일이야?”

  내가 먼지에 목이 켕겨 쉰 목소리로 말했다.

 “몸을 낮추고 신속히 기지로 이동해. 자신이 설치해둔 트랙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고 누가 따라오는 지 사방을 잘 살펴야 돼. 내 말 알아듣겠지?”

  에리얼이 명령했다.

 “하지만, 마샤와 올리버는?”

 “내가 가 볼 테니 너희들은 먼저 가 있어. 그리고 살아있다면 알아서 오겠지.”

  걱정스러워 하는 에반을 뒤로 한 채 서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좌우 주위를 세심하게 살폈다. 굉음은 몰라도 이 정도의 빛은 비록 장애물이 많은 정글이라 한들 널리 퍼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게 되었다. 올리버만의 특유한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미안. 대형 사고를 쳐버렸네. 다행히도 황급히 귀를 막아버리고 엎드렸더니 직접적인 상해는 없어. 생각보다 효력이 강한 것은 아닌 것 같아. 마샤도 나도 이상 없다. 지시대로 우리도 기지로 이동할게. 눈앞이 핑 돌긴 하다. 시력이 조금 이상해 진 것 같아.”

  그의 보고를 받자 일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수선한 상황에 그의 말을 똑똑히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핵심 단어인 ‘이상 없다.’만큼은 똑똑히 알아들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뒤늦게 같은 주파수를 사용하고 있는 다른 일원, 위니에게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는 폭소라도 하는 듯 비웃고 있었다. 어쩐지 내가 더 기분이 나빴다.

 “대화를 들어보고 하니, 내 언젠가 사고 칠 줄 알았다. 아무렴 누가 선도인데.”

  에리얼은 위니가 그녀 자신을 비꼬고 있다는 것을 모를 정도는 바보는 아니었지만 전원도 끄지 않고 가만히 들었다. 어리석게도. 위니의 비웃음으로 끝날 만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비정상적으로 울리는 진동과 하늘 위 태양보다도 강렬한 빛. 피에 굶주린 상대의 이정표가 되어 줄 터. 어쩌면 기지를 떠난 위니가 더 안전할 수 있었다.

  나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누군가 하나 목숨을 잃어야 그제 서야 정신을 차릴까. 장난 같은 단순한 문제가 아님에도 조심성이 없을까. 겨우 밖을 나올 기회가 생겼는데 이번 일로 또 몇 일간 지하 속에서 쳐 박혀야만 했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그들에게 모든 잘못이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녀는, 그리고 나는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담보로 도박을 할 만큼 무모하진 않았다. 실수라는 그럴 듯한 포장 아래 과실을 덮어두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봤자 넌 내 아래일 뿐이야. 한번만 더 나의 권위에 도전하는 말투가 거슬릴 때엔 그냥 처단해 버리겠어. 너 뿐만이 아니라 지금 내 말을 듣고 있는 이 전부.”

 “쳇. 네가 정말 몰라서 그러는데, 실력 면에서의 최강은 나야.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 네가 죽어버린다면, 그 잘난 네 자리는 내 것이 될 것이다.”

  자만에 찬 위니는 말이 끝나자마자 전원을 꺼버렸다. 늘 있는 일이었다.‘글쎄, 그런 같잖은 자만심으로는 오래 버티지 못 할 거야. 지휘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니. 네 말이 옳아. 네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전략 면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질 테지.’ 나는 다시 기지로 돌아가며 중얼 거렸다. 기지 근처에 도달하자 직경 2미터에 가까운 커다란 나무의 두꺼운 밑동 근처를 잘 살폈다. 척박하기 그지없는 맨땅을 손으로 더듬자 숨겨져 있던 현관문 뚜껑이 손에 잡혔다. 원숭이가 재주를 넘듯 눈 깜짝할 새 기지 안으로 뛰어 들어가 현관문을 닫았다. 나는 딱딱한 현무암으로 된 바닥에 마른 흙이 지저분하게 흩뿌려 있는 것이 보였다. 이미 도착한 사람이 있나 짐작하였다.

  나는 지하 2층으로 내려갔다. 나선형 계단을 돌아 내려가자 반대편 병동에서 불빛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나보다 먼저 와 있던 에리얼이 병동의 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올리버가 마샤의 무릎에 난 가벼운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 곁에는 늑대 루돌프 (보르, 에반 그리고 마샤는 그냥 돌프라고 부른다)를 앉고 있던 환이도 함께 있었다. 에리얼은 다른 이들에게 눈길 하나 비추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마냥 사람 좋게 받아 줄 수는 없으니까. 나는 벽에 기대어 그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그들의 모습이 보였다.

 “제정신인거야?”

  얼어붙은 시선의 끝이 마샤의 얼굴을 날카롭게 도려내듯이 쳐다보았다. 화가 나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아 보이는. 안면 근육이 마비된 사람처럼 무심한 눈길로 마샤에게 따지자 그녀도 우물쭈물하며 뭐라 대꾸하였다.

 “내가 일부로 실수하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잖아? 그만 하면 나도 알아들으니까 안 그래도 울적한 기분, 더 상하게 하지 말아줘, 에리얼. 무릎에 흉터라도 남기면 정말 기분 나쁠 거야. 고작 게임 가지고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마. 사람이 실수 할 수도 있지.”

  사실, 그녀가 도리어 에리얼에게 군소리할 처지는 되지 않지만 에리얼의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팔짱을 끼었다. ‘예민하게 군다.’라....... 현실이 눈앞에 닥친다면 그 때도 실수 타령이나 할까. 현실이야 말로 가장 잔혹한 환상. 결코 부술 수 없음과 도망칠 수 없는 절망이 눈 앞에 펼쳐 진 것. 그러는 상황에서 흉터 타령이나 하다니.

 “너희는 단지 ‘실수’라는 편리한 틀을 사용하는 구나. 그리고 경험이란 그럴 듯한 단어로 겉포장 하겠지만 이 곳에서는 통하지 않아. 내게는 허락되지 않아. 그리고 내가 지시하기 전까지 너희 둘은 절대 기지 밖으로 나오지 마.”

  항상 그랬듯 늘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이 할 말만 하고 나오는 에리얼이었다. 갑자기 나오는 바람에 벌컥 문을 밀고 나오는 에리얼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잠깐 나와 얘기 좀 할래?” 그녀가 마침 잘 되었다는 듯이 나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리벤지를 제외하고 약 스물네 명 중 적어도 몇은 이 사고의 굉음을 들었을 거야. 꽤 멀리 떨어 져 있을 위니도 어렴풋 진동을 느꼈다면, 그리 간단하게 넘어갈 일이 아니야. 대책을 세워야 돼. 환이와 올리버, 마샤는 병동에 있었지만 아직 다른 이들의 위치 파악이 되지 않았어. 기지에 돌아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아직도 찾지 못해 해매이고 있는 걸까.” 그녀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처음부터 끝까지 도움이 안 되는 아이들이야.”

  그녀는 제멋대로 자란 흑발을 제 분에 못 이겨 사정없이 헝클어뜨렸다. 그리고 에리얼은 다시 들어오든지 말든지 신경도 꺼버릴 거라며 투덜거리고는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 식사 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위에 가서 말하자. 갈증이 나서 에반이 발견한 라벤더 향 허브차라도 한 잔 마시고 싶은 기분이야. 내가 얼마나 기분이 역겨운지 알겠지?”

  그녀가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찡그리며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역시, 설마 한 식사 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전등불을 키기 위해 텀블러스위치 전원을 올렸다. 깔끔하게 정리된 부엌과 식탁. 거치적거리게 저번에 올리버가 옮겨놓은 밀가루 포대 킬로그램짜리가 버젓이 문 앞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밀가루는 사용 빈도가 생각보다 높지 않으니, 시간이 날 때 쿠키라도 만들어 요기 거리를 해결하겠다나? 그녀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정수기 위의 조그마한 바구니에 담긴 라벤더 차 봉지를 발견했다. 손바닥 크기의 파란 파스텔 톤 머그컵을 접시 진열대에서 꺼내 뜨거운 물을 받았다. 목이 많이 건조한지 그녀는 여유 부리지 않고 차를 우려내었다. 하얀 김이 모락모락 기분 좋게 피어올라 코를 간질였다. 아, 피곤하다. 쉬고 싶어.

 “뭔가가 재밌는 게 없을까?”

  그녀가 다시 밀가루 포대 쪽으로 눈을 돌렸다. 무언가 아주 기발한 아이디어가 뇌리에 스쳐지나가기라도 했나 보다. 그녀의 한쪽 입 꼬리가 득의양양하게 올라갔다.

 “왜 그러는데, 에리얼? 다른 애들 찾으러 가지 않을 거야?”

  내가 하품을 하며 탁자 위로 엎드렸다. 여기 와서 제대로 자 본 적이 있던가? 보르와 에반이 뒤늦게 들어왔다. 꼼꼼해 보이는 에반도 생각보다 덜렁대는 구석이 있었나 보다. 그들은 꼬르륵거리는 배를 움켜쥐고 식사 실로 뛰어 들어오다시피 들어왔다.

 “어라, 에리얼? 여기서 뭐해? 친절하게 쿠키라도 만들어 주려고 그러는 거야?”

  에반이 장난기가 쏟아질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보이지 않나.

 “어, 도우진도 있었네?”

  저 녀석은 항상 내 이름을 이상하게 발음한다.

  내리 쬐는 뜨거운 열기에 땀으로 범벅이 된 에반의 재킷 지퍼는 이미 다 열려 있었고 하얀 와이셔츠의 단추도 반쯤 풀어 제치고 있었다. 저 자식, 지금 뭐 하는 거야?

 “땀 냄새가 진동하니까 이만 비켜줄래?”

  그녀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말했다. 에리얼은 그저 밀가루가 한 가득 담겨 있는 접시가 무슨 신기한 게임이라도 되는 듯 이리 저리 살펴보았다. 그녀의 손가락도 분칠 한 듯 하얗게 가루가 묻었다.

 “에게? 너는 하얀 색이 어울리지 않아, 에리얼.”

  그 자식이 끈적끈적하게 면상을 그녀 어깨 위에서 올려놓았다. 이봐, 너희 너무 가깝다는 생각 들지 않아? 떨어지라고.

 “그래, 나는 더럽고 추잡한 까만색이 어울리지.”

 “나는 그런 너의 색깔마저도 사랑해.”

  나는 에반에게 나란 존재를 상기시켜 주려 헛기침 몇 번 하였지만 소용없었다. 기분이 나빠진 나는 그냥 나와 버렸다.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13 퓨리어스(FURIOUS) 12 2017 / 7 / 31 269 0 9054   
12 퓨리어스(FURIOUS) 11 2017 / 7 / 31 292 0 4599   
11 퓨리어스(FURIOUS) 10 2017 / 7 / 31 302 0 15158   
10 퓨리어스(FURIOUS) 9 2017 / 7 / 31 284 0 6083   
9 퓨리어스(FURIOUS) 8 2017 / 7 / 31 283 0 7420   
8 퓨리어스(FURIOUS) 7 2017 / 7 / 31 284 0 3194   
7 퓨리어스(FURIOUS) 6 2017 / 7 / 31 290 0 1605   
6 퓨리어스(FURIOUS) 5 2017 / 7 / 31 295 0 5505   
5 퓨리어스(FURIOUS) 4 2017 / 7 / 31 298 0 14725   
4 퓨리어스(FURIOUS) 3 2017 / 7 / 31 312 0 9509   
3 퓨리어스(FURIOUS) 2 2017 / 7 / 31 303 0 14878   
2 퓨리어스(FURIOUS) 1 2017 / 7 / 31 287 0 21186   
1 퓨리어스(FURIOUS) 0 2017 / 7 / 31 472 0 7282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네메시스 (NEMESIS)
HANNAH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